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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4일(3월6일)비테르보의 성녀 로사♬LA PAIX OUI LA PA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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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3-05 ㅣ No.1647

 

축일:9월4일(3월6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Saint Rose of Viterbo
Memorial: 6 March
Born : 1234 at Viterbo, Italy
Died : 6 March 1252 of natural causes
Canonized : 1457 by Pope Callistus III
Beata Rosa da Viterbo Vergine

Viterbo, 1233/34 - Viterbo, 6 marzo 1251/52
Third Order Franciscan

 

 

로사(1234 - 1252)는 문자 그대로 영신 생활에서 천재성을 지닌 어린이였다.

이미 9 살 때 성모님의 인도로 3 회(재속프란치스코회) 착복을 원하여 허락받았다.

그녀는 자기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관상생활과 극기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주 거리에 나가 참회할 것을 비테르보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프레데릭 2 세의 반 교황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 당국은 그녀와 부모를 비테르보에서 추방하였다.

로사의 설교. 특히 마니교 이단을 거스려 하는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비테르보로 돌아와 글라라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1252 년 18 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하늘의 정배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썩지 않는 유해는 알렉산델 4 세에 의하여

글라라회 수녀원으로 이장되었으며 갈리스토 3 세에 의하여 1457 년 시성되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지금도 계속하여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작은형제회홈에서)

 

 

비떼르보에서 태어난 성녀 로사는 병을 앓던 8세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이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케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후 12세기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이때문에 그녀가 집에 감금되었고, 이리하여 로사와 그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그녀는 여기서 그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비떼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녀의 주임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운명하니,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기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본다.

그 중에서도 더욱 현저히 나타난 기적은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의 일생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1235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으나, 자식으로는 로사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될 수 있는 데까지 주의를 다해 교육 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교육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부모의 힘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아직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어린 로사가

근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가서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본 부모나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로사는 강론때에 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신부의 강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돌아와,

부모에게나 혹 다른 아이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2,3 년 후부터 로사는 이미 고신 극기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 조그마한 제단을 꾸며놓고 대부분을 그 앞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잘 때에는 한 장의 판자를 요로 삼았고 하루에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

너무 엄한 단식(斷食)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였으나

그래도 항상 그녀의 얼굴은 기쁜 빛이 감돌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거지들을 반가이 대하며 자기 몫인 음식을 나누어 먹이기도 했다.

 

그 당시 로사에 대한 몇 가지 기적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떤 가난한 집 아이가 하루는 꽃병을 깨뜨렸다.

로사는 불쌍한 생각으로 그 꽃병 조각을 모아 그 위에다 십자가를 그렸다.

그랬더니 즉시 그 병은 전과 같이 되어 금이 난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로사는 열 살 때 중병에 걸렸었다.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될때 그녀는 묵시를 보았다. 즉 천당, 연옥, 지옥의 모양이었다.

그러자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예쁜관을 씌워 주시며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갈 것을 권고하시고,

앞으로의 생활 방식과 그녀가 해야 할 일들, 또 그녀가 받을 박해와 고통에 대해서도 친절히 깨우쳐 주셨다.

이리하여 그녀는 완쾌한 후 거치른 옷에다 끈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둘렀다.

 

그녀는 탈혼 중에 어린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게서는 이미 가시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것을 본 로사는 애처로운 생각에 잠겨 자기 몸을 피가 나도록 매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황제 프리데리코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 군대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여 많은 학살을 감행했다.

비테르보와 그 부근의 촌락도 그 마수를 피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때 로사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세상의 불신, 부도덕, 호화와 사치며

기타 부정을 책하는 일 장 연설을 했는데,

그 웅변 태도며 그 말의 구절 마다가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로사는 네거리와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하여

누구에게도 보일 수 있는 높은 돌이나 기둥에 서서 연설을 햇다.

불과 12세인 이 소녀의 열변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에 감탄하여 회개하고 죄의 보속을 했다.

 

프리데리코의 부하들은 이 소녀를 대단히 불쾌히 생각하여

비테르보 시장으로 하여금 로사의 가족을 즉각 추방하도록 했다.

그 부친은 "지금은 겨울이요, 돈도 없고 정처도 막연하니 잠깐만 여유를 주십시오.

지금 우리를 추방한다면 우리는 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하며 애원했으나 시장은 조금도 동정함이 없이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 어서 빨리 나가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이에 부친은 하는 수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정든 곳을 떠나 사방을 헤매다가 솔리아노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 사람들은 불쌍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로사는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 반향은 역시 대단했다.

1250년 12월 5일, 로사는 사람들에게 곧 행복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자 그달 13일에 프리데리코 황제가 사망하고, 국내에는 평화가 깃들이게 되었다.

로사의 가족들은 그리운 비테르보 시에 귀환하는 도중 어떤 마을을 통과했는데

그곳은 배교한 어떤 여자의 악한 표양으로 인해 배교자가 많았다.

로사는 그저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비행을 질책했으나

상대방도 상대인지라 여러 가지 항변으로써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로사는 "말로써 시비가 결정되지 않으니 기적으로 결정합시다"하고 소경 하나를 데려다 놓고 고치라 하였다.

그런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그 여자는 실패했고 로사는 훌륭히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둘이 다 같이 이글이글 타는 불속을 건너가자고 청하였다.

상대는 두려워 승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로사는 장작에 불을 지펴놓고 그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녀는 의복 하나 그을리지 않았고 몸에도 조그마한 화상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그 여자도 얼굴빛이 변하며 놀랐고

마침내 회개하고 그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왔다.

 

 

성녀의 서거 750주년 기념. 이탈리아. 2001.5.6.

 

로사의 가족이 비테르보에 들어섰을때 시민의 환영은 대단했다.

15세가 된 로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자기 작은 방에서 전과 같이 홀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계속했다.

2년 후 그녀는 17세의 꽃 같은 몸으로 그의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겼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 비테르보 교회에 매장했다가 뒤에 다른 교회로 이장했다.

그때는 이미 5년이 경과한 해였지만 아직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백년이 지났을 무렵 그 교회는 대 화재로 전소되어

성녀 로사의 영구(靈柩)와 의복은 다 소실되었으나 유해만은 무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LA PAIX OUI LA PAIX(Francais)성요한 수도회

 

 

 

 

 

 

 

 

 

 

 

 

 

 

 

 

 

 

 

 

 

 

 

 

 

 

 

 

 

 

 

 

 

 

 

 

Saint Rose of Viterbo
Also known as
Rosa of Viterbo
Rosa of Vieterbo
 

Memorial
6 March

Profile
Franciscan tertiary. At age three she brought a person back from death. Preached in the streets from age ten. Prophetess. Had the friendship of birds. Was repeatedly refused entrance to the Poor Clares. After her death, Pope Alexander IV ordered her body laid to rest in the convent that had refused her.
 

Born
1234 at Viterbo, Italy
Died
6 March 1252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457 by Pope Callistus III

 

Patronage
exiles
people rejected by religious orders
tertiaries
Viterbo, Italy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Encyclopedia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Pictorial Lives of the Saints
Wikipedia
MLA Citation

“Saint Rose of Viterbo”. Saints.SQPN.com. 6 March 2012. Web. {today’s date}.



Beata Rosa da Viterbo Vergine
6 marzo 
Viterbo, 1233/34 - Viterbo, 6 marzo 1251/52


Nata da famiglia di modeste condizioni, a 17 anni entrò nell’ordine delle terziarie dopo aver avuto una visione. In questo periodo fece diversi pellegrinaggi e soprattutto una dura penitenza. Mentre si faceva intensa la guerra tra Guelfi e Ghibellini insieme alla famiglia fu esiliata: tornò in patria dopo la morte di Federico II, ma la sua vita fu assai breve. Sulla sua morte non si sa praticamente nulla solo che alcuni anni più tardi il suo corpo è stato ritrovato intatto.

Patronato: Viterbo
Etimologia: Rosa = dal nome del fiore
Emblema: Giglio


Martirologio Romano: A Viterbo, beata Rosa, vergine, del Terz’Ordine di San Francesco, che fu assidua nelle opere di carità e a soli diciotto anni concluse anzitempo la sua breve esistenza.


Ascolta da RadioVaticana:
   Ascolta da RadioMaria:

Nel 1252 papa Innocenzo IV pensa di farla santa, e ordina un processo canonico, che forse non comincia mai. La sua fama di santità cresce ugualmente, e nel 1457 Callisto III ordina un nuovo processo, regolarmente svolto: ma nel frattempo muore, e Rosa non verrà mai canonizzata col solito rito solenne. Ma il suo nome è già elencato tra i santi nell’edizione 1583 del Martirologio romano. Via via si dedicano a lei chiese, cappelle e scuole in tutta Italia, e anche in America Latina.
Vita breve, la sua. Nasce dai coniugi Giovanni e Caterina, forse agricoltori nella contrada di Santa Maria in Poggio. Sui 16-17 anni, gravemente malata, ottiene di entrare subito fra le terziarie di san Francesco, che ne seguono la regola vivendo in famiglia. Guarita, si mette a percorrere Viterbo portando una piccola croce o un’immagine sacra: prega ad alta voce ed esorta tutti all’amore per Gesù e Maria, alla fedeltà verso la Chiesa. Nessuno le ha dato questo incarico. Viterbo intanto è coinvolta in una crisi fra la Santa Sede e Federico II imperatore. Occupata da quest’ultimo nel 1240, nel 1247 si è “data” accettandolo come sovrano.
Rosa inizia la campagna per rafforzare la fede cattolica, contro l’opera di vivaci gruppi del dissenso religioso, nella città dove comandano i ghibellini, ligi all’imperatore e nemici del papa. Un’iniziativa spirituale, ma collegata alla situazione politica. Per questo, il podestà manda Rosa e famiglia in domicilio coatto a Soriano del Cimino. Un breve esilio, perché nel 1250 muore Federico II e Viterbo passa nuovamente alla Chiesa. Ma non sentirà più la voce di Rosa nelle strade. La giovane muore il 6 giugno probabilmente del 1251 (altri pongono gli estremi della sua vita tra il 1234 e il 1252). Viene sepolta senza cassa, nella nuda terra, presso la chiesa di Santa Maria in Poggio. Nel novembre 1252 papa Innocenzo IV promuove il primo processo canonico (quello mai visto) e fa inumare la salma dentro la chiesa. Nel 1257 papa Alessandro IV ne ordina la traslazione nel monastero delle Clarisse. E forse vi assiste di persona, perché trasferitosi a Viterbo dall’insicura Roma (a Viterbo risiederanno i suoi successori fino al 1281).
La morte di Rosa si commemora il 6 marzo. Ma le feste più note in suo onore sono quelle di settembre, che ricordano la traslazione del corpo nell’attuale santuario a lei dedicato. Notissimo è il trasporto della “macchina” per le vie cittadine: è una sorta di torre in legno e tela, rinnovata ogni anno, col simulacro della santa, portata a spalle da 62 uomini. Si ricorda nel 1868 anche l’iniziativa del conte Mario Fani che col circolo Santa Rosa, a Viterbo, anticipava la Società della Gioventù Cattolica, promossa poi dai cattolici bolognesi con Giovanni Acquaderni. Nel 1922 Benedetto XV ha proclamato Rosa patrona della Gioventù Femminile di Azione Cattolica.
A Viterbo, di cui è patrona della città e compatrona della diocesi, è ricordata il 4 settembre, giorno della traslazione.


Autore: Domenico Agasso
Fonte: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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