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어느 신부님 자랑 - 굿뉴스 계시판에서 펌

인쇄

이병학 [pascal1016] 쪽지 캡슐

2005-10-14 ㅣ No.6531

+ 주님의 평화

 

제가 굿 뉴스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는 처음이라서.....

 

글쎄요.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할까를 망설이게 되는군요.

 

신부님 자랑을 하고 싶은데... 혹 그 신부님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그냥 복합적 요인으로 망설여지기도 하구요.

 

그런데 말이예요, 자꾸 자랑하고 싶어지네요.

 

저도 내일 모래면 신자생활 20년, 그것도 최 일선에서 신자생활 20년 중 많은 부분을

 

본당에서, 교구에서 신부님들을 뵈오면서 신앙생활을 하여 왔지만 얼마 전 저희 원당 본당에

 

주임 신부님으로 부임하신 양 신부님에 대한 미담을 전해들으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저 뿐만이 아니라 저희 본당 모든 신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저는 최근 몇년 동안은 경제적 활동에 치중하는라 본당의 제반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는 편은 못 되지만, 그리고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서 게시판에 글을 올릴만한 

 

정신적, 물리적 시간을 별로 가질수가 없지만 우리 주임 신부님에대한 얘기만큼은 하고

 

싶어졌답니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시간을 할애하여 굿 뉴스 게시판에 글을 올려 봅니다.

 

 

서울 교구에서 의정부 교구가 분리되면서 신부님은 의정부 교구로 지원하셨고, 그것도

 

시골(적성 부근)의 작은 본당을 지원하셨지만 저희 원당 본당으로 오시게 되었답니다. 

 

저희 본당은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시골의 작은 본당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편이죠.

 

작은 본당을 즐겨찾는 신부님의 행동양식은 작은 본당으로 발령 받으면 좌천이라도 된듯이

 

섭섭해하시고 억울해하시는 이상한 신부님들에게는 경고와 자성의 메시지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신부님이 부임해 오실 때 이삿짐이라고는 책을 제외하고는 사목위원의 승용차 트렁크에 있는 가방 2개,

 

그야말로 양손에 간편하게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신부님 생활 10년 이상에 이 정도면

 

더 이상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신부님은 아직도 그 흔한 중고 자동차 한 대도

 

없답니다.  걷기를 좋아하시고 자전거를 즐겨 탄답니다.

 

추석 날 떡 값 명목으로 사목회에서 봉투를 내밀었더니 정색을 하시며 옆에 계시던 수녀님에게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추궁(?)을 하셨답니다.  그동안도 이렇게 해 오셨느냐고..... 

 

이러니 평신도들이 신부님들을 세속적으로 변하게 만든다고.....

 

앞으로는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충고하시는 통에 수녀님이나 사목위원들이

 

당황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고요.

 

식복사도 없이 10년 이상 동안을 생활해 오셨는데.... 

 

저희 본당에서는 부주임 신부님 배려 차원에서 식복사를 두긴 두셨는데....... 

 

신부님은 식복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어 하신데요.

 

신부님은 본인이 손수 시장을 보시고 음식 만드시는 것이 몸에 베신가봐요. 

 

저희 본당 2-3분 거리에는 재래시장이 있는데 저도 신부님이 재래시장에서 비닐 주머니에

 

시장을 보아 오시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답니다.  제가 신부님을 먼 발치에서 뵙고 아는 척은

 

하지 않았지만 참 가슴이 쁘듯 했답니다.  답답한 가슴이 후련해지는 그 무엇을 느꼈답니다. 

 

신부님 손에 쥐어진 장바구니를 보는 것 만으로도 희망을 보게되는 것이죠.

 

청빈의 정도는 청빈을 서원한 수녀님들이 혀를 내 두를 정도라니....

 

수녀님이 임기가 되셔서 가시는 송별사에서 신부님과 6개월 정도만 더 생활했으면 거룩해지겠다는

 

덕담을 하셨으니 .....

 

사목회에서는 평신도가 주인이니 평신도 대표들인 사목위원들의 의견을 100% 존중해주시고

 

독단적 결정은 없다고 사목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으고 있으니.....

 

부임하셔서 사제관에 있던 사치스러운 물건들은 모두 정리를 시키셨다고들 하던데.......

 

구역 방문을 하시는데 총구역장이 동행할려고 하면 남자들이 대낮에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동행을 사양하신 신부님은 과연 "찾아가는 사목"을 펼치는 의정부 교구의

 

상징적 신부님이자 먹고 살기 힘든 요즈음, 고개숙인 남자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벗이기도 합니다.

 

저희 본당이 큰 관계로 연료비가 많이 나온 답니다. 매월 항목별로 연료비를 점검하고 계시는데

 

본당 전체의 연료비는 줄어드는데 사제관, 수녀원의 연료비가 증가했다는 보고를 받고,

 

민망스럽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스공사에 연락해서 연료비가 적게 나오도록 기계를 조정하라고

 

사목위원에게 강력히 지시를 했다고 하니....  

 

신부님은 자신은 부족하게 살아도 신자들에게는 넉넉하게 해주고 싶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시다는데....

 

신부님의 부임미사 때 그 흔한 꽃다발들이 보이지를 않더군요. 사연인즉, 신자들이 너무 사제들을

 

왕대접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목회 차원의 단 한개의 꽃다발을 제외한 모든 꽃다발을

 

사양했다고 합니다.  신부님, 신부님 하고 자신을 너무 떠 받들지 말라는 것이 신부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신부님을 왕대접 하는 평신도들의 잘못된 습성때문에 신부님들이 신부님 답지 않게 변할까봐 염려가 되어서

 

그러는 것이겠죠.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신부님들이 세속적으로 변하는 데는 우매한 평신도들이

 

톡톡히 한 몫을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세속적으로 변하는 모든 책임이

 

신부님 자신에게만 있다고 신자들이 얘기한다면 신부님들 편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신부님들로 부터 책임 추궁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평신도들도 분발해야 되지 않을까요. 

 

저희 본당 신자들은 한 동안 신부님의 한국적 신부님 답지 않은 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디

 

달나라에 온 느낌을 받았답니다. 이제서야 이것이 꿈이 아니고 생시이구나 하는 것을 보고 있답니다.

 

참 좋은 신부님 한 분이 이렇게 신자들을 신명나게 하다니....

 

참 좋은 신부님 한 분이 흐트러진 본당 분위기를 일 순간에 바꿀 수가 있다니....

 

글쎄요.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기는 합니다.  왜냐구요.  다음 번엔 어떤 신부님이 오실지 모르지만

 

한번 좋은 음식에 맛들여진 신자들이 그 입맛의 수준을 어떻게 낮추어 나갈 수 있을지가.....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좋은 음식을 맛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는 않으니까......

 

아주 오래간만에 찾아 온 이 기회에 영양 실조에 걸린 우리 신자들은 그 음식 맛에 흠뻑 취해

 

허기라도 채워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알고 보았더니 신부님들중에는 '플라도(plado)'라는 모임이 있는 가봐요. 15명 정도의 신부님이

 

이 모임 소속이래요. 이 소속 모임 신부님들은 모두 이런 지향을 갖고 생활한답니다.  누가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분 있으면 답글 좀 써주세요.  이런 신부님들이 많이 계셔야 우리 한국

 

천주교회가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요즈음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보노라면 미래가 보이질 않아요.

 

거창하게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걱정할 것 까지야 있을지 모르지만 좋은 지향의 신부님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좋은 지향의 신부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분들을 알리는 것이 작게나마 한국 교회를 발전시키고 

 

우리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 길이며, 그 신앙에 대해 위안과 기쁨, 그리고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찾아내고, 그 분들의 삶을 본 받으며 우리 자신을 가다듬듯이 말입니다.

 

신부님 같은 분이 많은 것에 대해 이상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 되어야 하거늘,

 

신부님 같은 한 분이 우리 본당에 오신 것에 이렇게 놀라와 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제는 예수님의 대리자" 라는 굴곡된 교리교육을 주입해 오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언젠가 교황님께서는

 

로마를 방문한 한국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사제들에게

 

맹종하는 평신도들" 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제들이나 평신도들 모두를 비판한 것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대리자" 라고 정의하는 것은 현대의 신학적 사고로 생각할

 

때는 매우 굴곡된 것으로서, 교권의 유지를 위해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에게

 

주입시켜 온 측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한국에서는 신부님에게 입바른(?) 말 한번 하게

 

되면 무슨 큰 불경죄라도 지은 것처럼 매도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되곤 하는 서글픈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지한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잘못을 모르는 데 사용하는 상징적 언어로서 어리석음을

 

뜻하기도 함) 신자들의 무리가 신부님을 둘러싸고 있는 한, 그리고 그 무지한 신자들의 무리에

 

장단 맞추어 함께 춤추는 신부님들이 벼랑 끝 낭떠러지기에서 전격적 회심의 일보를 내 딪지 않는 한

 

침체되어 가는 한국 교회의 발걸음을 멈추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무지하고도 우매한 저 평신도들의

 

어서오라고 외쳐대는 아우성 소리에 안되는 줄 알면서 못 이기는 척 끌려 가기 보다는 단호히 " NO " 소리와

 

함께 U-턴 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를 실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 방송국 드라마

 

"볼날" 의 여주인공처럼 말해야 될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그러한 어눌한 상황를 역전시켜 우리 교회의 봄날을

 

맞이하고자 하는 꿈을 꾼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꿈에 지나지 않을까요.

 

교회의 건물과 제도만 있는 교회, 사람이 없는 그러한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물려주게 될 날도 멀지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우리 성당의 주임 신부님 같은 분들의 예수님 따라가기의 고군 분투의 투혼은 

 

한가닥 희망의 불빛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숭고한 발걸음입니까.  

 

생각만해도 가슴뛰는 일이 아닙니까. 

 

생각만해도 신명나는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신부님들의 장엄한 발걸음에 우리 함께 두 손 높이 모아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자신의 구원은 한국 교회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본당의 양 신부님 같이 훌륭한 신부님이 해 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해 줄수 있는 것도 아닐 듯 싶습니다.  또한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동료 신자들이나 이웃들이

 

해 줄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갈고 닦으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는 우리들의 지식이 해 줄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우리가 그토록 갖기를 염원하는 경제적 부와 명예와 권력도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구원의 협조자들일 뿐 절대적 존재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은 결국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끈질기고도 지루하며, 외로운  

 

포괄적 대화에서만 찾아 낼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위대한 확신을 다시금 해봅니다.                  

 

 

 

 

신자들이여,  참으로 좋으신 신부님들을 물들게 하지 말기를.......

 

신자들의 무의식적 잘못된 습성들이

 

신부님들의 천국 여정에 걸림돌이 되는구려.

 

 

사소한 일에 삐치지 않는 신부님들은 과연 없을까요.

 

신부님들의 사소한 삐침에 신자들은 안절부절,

 

신자들의 가슴속은 멍들어만 갑니다.

 

 

신부님들이 신자들을 달래셔야지

 

신자들이 신부님을 달랜다는 것이

 

격식에 어울리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신부님들의 투정에 신자들의 한숨이

 

그칠 날이 없군요. 

 

 

가시는 발걸음이 제 아무리 서럽다 하시더라도

 

그것은 신부님들 스스로가 짊어지셔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요.

 

아니,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가시밭길인데....

 

 

신자들로부터 받으실 수 있는 모든 서러움을

 

혼자서 삭이실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신자들로부터 받으실 수 있는 모든 서러움을

 

마음속의 거름으로 만드실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무지한 신자들의 이전투구식의 갈등에

 

모르는척 비켜서 있는 비겁함보다는

 

온 몸을 던져서 그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없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사제의 직분은 무엇일까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형수도 용서하는 곳이 교회이자 예수님의 정신이거늘.....

 

흡혈귀 같은 자케오도 용서받았던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거늘......

 

하물며 사제의 권위와 직분으로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이나 하는 정신나간 그 엉터리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과연 사제로서의 길일까요.

 

사제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신자들이 과연 타도의 대상인가요.

 

 

" 사제가 신자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

 

그런 말도 있습니까. 그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입니까.

 

이해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을 좀 해주시죠.

 

우리가 알아 듣지도 못하는 그런 말을 하는

 

사제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죠.

 

혹 말세의 언어가 아닌가요.

 

 

선량한 신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통합 조정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으시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선량한 신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통합 조정되지 않은 채로 그냥 내버려졌기에

 

교회가 네편 내편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신부님들의 통합 조정능력 부족의 그 흔적은

 

남아있는 선량한 신자들이 고스란히 떠 안게 되고,

 

그 흔적을 지우느라 많은 시간들의 가슴앓이를 해야겠죠.

 

신부님들은 무책임하게도 미련없이

 

그냥 훌쩍 떠나버리시면 그만이겠지만....    

 

 

때가 되고 철이 되면 훌쩍 떠나버리는

 

철새와 같은 그이가 주인일까요.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그대들이 주인일까요.

 

 

주인이 객이 되고, 객이 주인이 되는

 

거꾸로 가는 교회의 이 모습이

 

과연 정상적인가요.  

 

 

세상 모든 것이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아 가도

 

오직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의 뒤틀려진 그 모습이랍니다.

 

 

세상 많은 신자들이 발 빠르게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감에도 불구하고

 

오직 신부님들만이 당신 멋에 도취되어

 

구시대의 구렁속을 헤메시는군요.  

 

 

교회가 당신의 멋을 위해 존재하는 곳은 아니지요.

 

교회의 많고도 많은 선량한 신자들이 당신께서 부리시는 그 멋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는 아시는지요.

 

 

신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 보다는  

 

흩어진 신자들을 하나라도 더 불러 모으려는 강렬한 열정과 행동이

 

오히려 사제가 가야할 거룩한 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음으로써 흩어진 신자들을 불러 모았듯이 말입니다. 

 

 

신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세상을 위한 당신의 길이 아니라 당신의 영욕만을 위한 이기적인 길이 아닐까요.

 

그것은 떼묻은 당신의 영욕을 위해 순수한 세상의 영혼들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굳이 이러한 길을 가기 위해서

 

지금 걷고 계시는 그 길을 계속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이네요. 

 

 

왜냐구요.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순수한 다른 영혼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걸어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은 무수히 많거든요.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고자 하신다면

 

당신의  그 마음과 행동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 너희는 너희들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테니까 " 라는 것처럼 들리는

 

당신의 막나가시는 듯한 그 마음과 행동으로 교회의 한쪽 기둥이

 

뿌리채 흔들리는 진동이 귓가를 때리는군요. 

 

이 분노의 진동소리가 들리기는 들리십니까.

 

그런데도 당신의 그 멋이 나오십니까.

 

 

지금 우리는 한가롭게 당신의 멋을 감상할 시간이 없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선량한 대다수의 신자들은 세속과의 격렬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랍니다.

 

선량한 신자들을 어서오라 유혹하는 세속과의 피할 수 없는 그 전쟁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신앙의 열정 만큼은 

 

그 싹을 키우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한답니다. 

 

 

세상속에 사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제의 사목이 되어야 하거늘....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있는 당신께서

 

이러한 전쟁을 이해하시기는 한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피하고 있는 당신께서

 

이 전쟁의 강도가 피부에 와 닿기는 한지요. 

 

당신은 세상 사람을 만날 뿐

 

세상을 알지는 못하지요.

 

 

세상을 아신다고요.

 

그렇게 항변할 수도 있으시겠죠.

 

그러나 당신께서 아시는 그 세상은

 

눈이 있으니 눈으로 보고 아는 그런 세상이요,

 

귀가 있으니 귀로 들어서 아는 그런 세상이랍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마음으로 온몸으로 피와 땀과 눈물로 아는

 

그런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아닐까요.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철없는 당신 때문에..... 

 

세상속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당신때문에.....

 

세상속에서 처절한 투쟁을 하면서 영광의 그 상처를 입은 선량한 신자들이

 

목자이신 당신으로부터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를 받지는 못할망정

 

이중 삼중의 상처는 받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치이고, 교회에 치이는

 

선량한 신자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당장 거룩한 그 검은 옷깃을 감추시기라도 하면 될것을..... 

 

아, 땅이 울고 하늘이 우는 이 슬픈 현실이여....

 

너는 언제 떠나겠느냐.

 

당장 떠나거라.

 

 

세상속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기 위해 가야 하는 곳이 교회이거늘......

 

교회에 가는 것이 또다른 상처를 얻기 위해 가야하는 곳이라면.....

  

그러기에 교회에 가는 것이 주저되는 신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큰 슬픔이겠지요.

 

더욱이 이런 슬픈 일들의 주역이 사제라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호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 사제가 가야할 길일텐데...

 

때에 따라서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아주 직접적인 상처를 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의 건전한 신앙생활에 사제가 방해꾼의 역할을 할때도 있으니.....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있어서는 안될 이러한 슬픈 현실들은

 

교회의 여러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반복되곤 하는데.....

 

과연 어디에서 그 근본적 원인을 찾아야 할까요. 

 

훌륭한 지도자가 흔치 않는 교회의 현실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군요.

 

 

교회가 목표를 향해 가야 하나요.

 

그럼 그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 목표의 내용이 '일'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일'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요,

 

사람은 '일'이라는 수단을 통해 얻어야만 하는

 

가장 소중한 결과물이 아닐까요.

 

 

'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

 

사람이 '일'을 위해 있다보니

 

교회가 힘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의 지도자인 신부님들은

 

왜 '일'을 위해 사람을 다치게 하는

 

헛된 '일'들을 되풀이 해야만 하시나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일'들을 말이예요.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 그 '일'들을 말이예요.

 

그러니 교회가 힘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요. 

 

 

일은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답니다.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습니까.

 

먼 훗 날 돌이켜 보면 잘하고 못함의 차이는 단지 백지 한장인것을.....

 

그 백지 한장 조차도 빛이 바래 다 없어지고 말것인데.....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옳은 일일 수도 있고

 

잘못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옳은 일이지만 먼 훗날

 

잘못된 일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고,

 

지금은 잘못된 일이지만 먼 훗날

 

옳은 일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죠.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속에 숨어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분명한 그 한가지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사제들이 일구워 가는 그 일들은 

 

상당수가 사람의 소중함을 해치면서 까지, 사람을 다치게 하면서 까지 일구어 가는 

 

일 자체에 목표를 두는 세상의 그런 일들과 같아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일들은 대개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가거나 없어지게 되며

 

때에 따라서는 한줌의 재로 변하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일들이 들어서게 되는

 

그런 일들인데 말이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일들을 일구워 가면서 만나게 된 많고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고스란히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관계가 좋았으면 좋은대로

 

그 인간관계가 나빴으면 나쁜대로

 

고스란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더군다나 일을 통해서 만나게 된

 

그 사람의 그리스도의  향기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다해도

 

잊혀지지 않은채 우리의 가슴속을 헤집으며

 

멀리 멀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 사람이 일구워 놓은 모든 일들은 비록 사라져가고 있지만......

 

 

사람이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일'이 목표가 아니라

 

'일'속에 숨어있는 사람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이 외침이 들리십니까. 

 

이 외침을 이해하시기는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 외침을 뼛속 깊숙히

 

몸서리쳐지도록 이해를 할 수 없으시다면

 

사제의 사목은 핵심을 비켜나 걷돌다 말것입니다.

 

언제까지 더 시간 낭비를 하시려 합니까.

 

얼마나 더 시행착오를 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가시는 그 걸음을 인간적으로 이해받기를 원하신다면

 

차라리 신자들에게 인간으로 다가서면 될것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이기에

 

교회의 한숨은 절로 나오고, 

 

그 주름살은 깊어만 가는군요.

 

 

가시는 그 걸음은 아무리 뜯어봐도

 

예수님과 같지 않은 보통 인간인데....

 

예수님처럼 추앙받기를 원하시는 터라....

 

예수님의 대리자라고 스스로를 자리매김 하시는 터라....

 

이러한 모순들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군요.

 

 

시노드의 핵심에 있었던 신부님의 그 말씀....

 

백번 천번 시도드하는 것보다는

 

백번 천번 사제들이 겸손해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피를 토하시는 그 충고가

 

왜 이렇게 가슴을 때릴까요.

 

 

아 !  슬픈 이 현실이여,

 

아 ! 가련한 내 님이시여,

 

자, 이제 무덤에나 던저져야 할 그 아집을 버리시지요.

 

님의 그 발목을 묶고있는 어둠의 쇠사슬을 끊어버리시지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그 십자가를 내 던져버리십시오.

 

그 대신 하느님을 향해 고이 간직한 그 날개를 활짝 펴십시오.

 

그리고 훨훨 하늘 높이 멀리 멀리 날아 올라 보십시오. 

 

희망이 속삭이는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를 않습니까.

 

사람들이 달라진 님을 기다리는 그 세상이.

 

 

정말로 말도 안되는, 엉터리 같은

 

신부님들이  진을 치고 있는 아눌한 교회의 현실에서

 

신자 여러분은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런(?) 님(?)들에게

 

순수한 여러분의 영혼을 맡겨서 지치고 상처 받고 여러분의 인내심을 시험받기 보다는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살아있는 여러분의 영혼만이라도 스스로가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신자 여러분은 벽돌 한장 한장 정성스럽게 포개어 쌓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거리를 헤메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내공을 쌓으십시요.

 

어떤 주위 환경에서도 초연해 질 수 있는 잘 다져진

 

내적 신심을 쌓으십시요.

 

 

그리고 기다립시요.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올 것입니다.

 

먼길을 떠나시면서 혼자 내버려진 어린 자식을

 

안스러워 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시는 아버지가

 

여러분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멀리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계실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요.

 

희망을 잃지 마십시요.

 

 

아버지가 저기서 두 팔 벌리고 걸어오고 계시지를 않습니까. 

    

어서 달려 가십시요.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십시요.

 

그리고 소리내어 엉엉 울으십시요.

 

아버지 없는 그동안의 서러움을 다 토해내십시요.

 

울고있는 여러분이 가여워서

 

아버지는 더 이상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사제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신자 여러분 각 개인의

 

피치 못할 내외적인 사정이 있더라도  교회내에서의 성사와 전례 생활 만큼은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충실한 성사와 전례 생활은 신자 생활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이것 없이 하느님께 대한 내공과 내적 신심을

 

쌓는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 만큼은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의정부 교구 원당성당   이창관 빠라끌리또  올림

 



64 1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