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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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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린 [dlchang] 쪽지 캡슐

2008-04-10 ㅣ No.6440

 
 
그대와함께 춤을.....
 
 
학교 생활 중에 정규수업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동아리 활동이라 말할 수 있겠다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러한 활동을 HR 이라 이야기 했었다.

호기심 많던 사춘기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이러한 과외활동의 시간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심게

하는 교육의 한 장으로 평가되기도 할 것이다. 세상의 모습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바라보며

자신을 개발 시키는 일은, 인생의 시발점에 서있었던 감수성 예민하고 순수했던 우리들에게

중요한 일이었으리라.

미흡하긴 하였어도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에도 이러한 동아리 활동들이 있었다.

거의 비슷한 실력으로 학교에 입학하여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수업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던 우리들이었기에 거의 40여전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나도 예전

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만남이 단순했던 어린 시절에 이루어졌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이러한 동아리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배워보려고 시도하였던 적

이 있었다.



우리 고등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행진곡과 축하곡을 연주하는

모습들이 음악적 감성을 자극하여 너무 좋게 느껴졌었다. 음악을 전공하셨던 누이가 트롬본

을 배우면 나중에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원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힘을 얻어 밴드부원이 되고자

밴드부 연습실에 찾아갔었다.

그 당시 밴드부 단장이었던  2학년 선배가 트롬펫을 내어 주며 불어 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받아 쥔 트럼펫 나팔에 입술을 대고 얼굴이 붉어지도록 입김을 불어댔으나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선배가 내게 너는 폐활량이 부족하여 밴드부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 하였다.

입단 시험에 낙방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나는 정말 내가 폐활량이 부족하여 밴드부가 될 수

없는 줄 알고 입단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중학교 특기생으로 이루어졌던 밴드부 단원들 속에 음악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신입

단원을 받아 합주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찾아 간곳이 YMCA 종교 반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안은 개신교 집안 이었던

영향으로 종교 반을 찾게 되었던 것 같다.

일명 HI-Y (Heighteen Youngmen) 라고 불리었던 동아리는 학교 활동이외에 서울 시내의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종로1가에 있는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본관에 모여 학교별로 대학교 학생을 지도교사로 동아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학교는 그곳에서 “골고다” 라는 동아리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로비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남녀학생들이 함께하는 특별한 행사 이었었던 것으

로 기억된다. 그날은 Folk Dance 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만난 여학생과 춤을 추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용감하고 씩씩하게 파트너를 잘 찾아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고 있었던 반면에

나는 새로운 환경에 주눅이 들어 적응하지 못하고 쭈빗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안스럽게

여겼던 대학생 교사가 다른 한편에 있던 한 여학생과 짝을 맞추어 준 것이었다.

서울 S여고 학생이었다.

키가 크고 늘씬하였던 얼굴도 예쁜 여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처음 추어보는 댄스를 추었다.

음악에 맞추어 두 손을 마주잡고 좌측으로 두발....

우측으로 두 발 옮긴 후에 팔짱을 끼고 돌고,

내가 여학생의 손을 들어 터널을 만들어주면.

파트너가 몸을 회전하여 한 바퀴도는 그야말로 건전한 율동에 가까운 Folk Dance 이었다,

처음 접해보는 이성과의 만남이 부자연스러워 한마디 말도 못하고 빨리 그 시간이 종료

되기 만을 기다렸던것 같다.



어색해 하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마음으로는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었던 것 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이성과 격리되어 교육받았던 학교생활로 인해

발생된 자연스러운 결과이었고, 그 당시만하더라도 남녀 간의 교제는 학생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 하나였었다.

댄스가 끝난 후에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헤어졌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속에 그 여학생의 모습이 어렴

풋하게 기억나는 것은 적어도 그때에는 풋풋한 사춘기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순수했던 마음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추억을 갖고 있는 나는 부루스는 못 추어도 그때 배운 서툰  스탭으로 Folk Dance는

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럴일일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 생애에 특별한 이벤트가 생겨 대사관 같은 파티에서
 
품위있는 여인과 Folk Dance를 다시추게 된다면,  빛바랜 추억 속에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곤색 제복의 단발머리 그 여학생과 손잡고 춤을 추었던 빛바랜 검정교복의 어설펏던 내 모습도
 
함께 생각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쭈빗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된 와인잔을 들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기회가 주어진다면  
 
“예전에 Folk Dance 를 추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하며
 
자연스럽게 사십여년전 고등학교 시절의 댄스의 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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