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대림 제1주간 토요일 ’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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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11-28 ㅣ No.4859

대림 제1주간 [다해] 토요일 ’21/12/04

- 등촌3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10시 성모신심미사

 

 

말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님

 

구요비 욥 주교

 

 

서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말(言語)은 그 사람의 생각과 속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인간 정신의 반영(反映)입니다. 이루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한 생각과 의도와 계획이 있을 때 이에 대한 표현이 먼저 언어화되기에, 말은 보이지 않는 일의 결과를 현실화시키는 가능태입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통적인 동의와 합의를 이루는 약속의 기초를 이루기에, 늘 서로간의 신뢰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인격의 표현이며, 한 인간이 인격자로 인정받는 일차적인 기준은 자기가 한 말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성실성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유교의 경전인 중용(中庸)에서는 우주를 지탱하는 근본 원리를 성()이라고 합니다. ()은 만물의 마침과 시작입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고로 군자는 성실한 것을 귀중하게 여깁니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是 故君子誠之焉貴). 이 성()은 다른 말로 천명(天命)과 같은데 인간의 본성(本性) 안에 깃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요한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는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중용의 이 성()과 연결시켜 왔는데 왜냐하면 성()은 말씀()이 이루어짐()과 서로 상통하기 때문입니다.

 

괴테는 그의 책 파우스트에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볼 때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과 계약에 늘 충실한 분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늘 이루어지는 현실(現實)이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살이 되신(肉化) 하느님이시니, 즉 하느님의 모든 언약이 이 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를 계약이라고 할 때 이 계약의 기초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건네시는 약속의 말씀과 그 충실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언약(言約)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는 나와 너의 대화적인 관계가 되며, 상호 인격적인 친밀성이 가능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약혼, 결혼 관계(호세아 예언자),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신랑-신부라는 표상(表象)이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매력적인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는 인류의 스승으로서 백성을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존엄하고 고귀한 품위입니다. 이분은 백성에게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1, 27; 루카 4, 32).

 

산상설교 (마태 5-7)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토라(Torah)인 복음을 가르치십니다.

 

 

1.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 (요한1,1~18)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찬미가를 다루어 봅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 1-3)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알도록 초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은 창조보다 앞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친교(Communio), 소통(Communication)이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통교, 이 두 분 사이의 사랑인 성령이 이루는 친교이며 이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다.”(1요한 4,16)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2.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

이 말씀은 창조하시는 말씀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위력이 있습니다. 창세기(1,12,4)의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3.6-7.9.11.14-15.). 하느님이 말씀하시자 그대로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3)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상기하며 창조하시는 하느님 아버지(聖父) 안에서 말씀(λόγος)”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聖父) 안에 계신 말씀(λόγος, 理性)이라면 하느님의 생각, 계획, 그분의 지혜(Sophia)라고 하겠습니다.

 

유비적(analogia)으로 건축가가 건축물을 지으려면 먼저 자기가 지으려는 건축물에 대하여 생각하고 계획하고 설계하는 과정이 선행(先行)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현상이나 보이는 형태는 그것을 빌어 만드시는 분의 정신 활동이 있을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말씀은 구약의 지혜문학이 전하는 인격화된 지혜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지혜문학에서 지혜는 의인화된 모습으로, 가령 천지 창조의 관조자요 동참자(잠언 8,27-30; 지혜 9,9), 조언자(지혜 8,4), 예술가로(지혜 8,6), 창조자(지혜 7,12; 잠언 3,19; 집회 24,3)로 묘사됩니다.

 

요한 13절은 콜로사이서 115-20절의 그리스도 찬미가와 상통합니다.

 

 

3. 말씀과 현실주의(Realisme)

요한 13절의 말씀을 콜로 1,15-20 절에 비추어 볼 때 창조와 보존(保存)이 함께 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은 말씀의 현실 감각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또한 모든 피조물의 의미도 온전히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현실 감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전환시키게 합니다. 현실주의자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기초임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이 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또한 하느님의 현실(reality)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이 세상에 살아 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realitas) 말입니다. (No.10)

 

구상(具常)시인의 말씀의 실상(實相)’ 시를 음미해 봅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 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 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 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4. 생명의 하느님

요한 14-5: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1서의 서론은 이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합니다.

 

 

하느님 안에 인간의 생명의 기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갈망하고 찾는 것은 이 생명, 충만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이제 빛처럼 온 누리에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4)

 

사실 빛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자라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의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성(善性)에서 나옵니다. 은 그것에서부터 만물이 자립하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은 자기 존재의 확산성을 갖습니다(bonum est diffusivum sui esse).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9)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이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3)

: 이 우주 삼라만상이 살아가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이 빛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풍요로움(생명의 충만함)이 외부로 흘러넘치고 확산되어 구원의 샘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과 인류의 역사 안에서 로고스(말씀)가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고 역사에 들어오십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쯤에 와서 말씀 앞에선 인간의 실존, 인간의 근본 처지와 조건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성서의 인간관인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은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는 청종(聽從)능력을 지닌 말씀의 청자(聽者)입니다!

 

- 하느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실 때 살아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뵙는데 있습니다”(리옹의 성 이레네오 교부)

 

-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음미해 봅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수 없은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여기서 시편 42(41),63(62),84(83)를 묵상하고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5. 강생(Incarnatio)하신 하느님

 

1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습니다.

 

- 이 육화(肉化)의 신비는 하느님이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과 똑같은 처지로 내려오신 하느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인성(人性) 안에서 하느님의 신성(神性)을 보게 되었습니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영원하신 말씀이 진정 인간의 말들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분(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이제 그 말씀은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지니실 뿐만 아니라 얼굴을 지니게 되셨고 우리는 그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얼굴이 나자렛 예수님이십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히브 1,3)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9)

-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이시다.

 

아름다움()이란 선()이 외부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얼굴이십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이 불란서 철학자 장 귀통(Jean Guiton,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활약한 평신도 철학자)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다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다.”(Verbum caro factum est)사람이 말씀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Caro Verbum facta est)라고 바뀐다면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의 절정이 아니겠는가?” 라고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6. 결론

이제 미흡하나마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1)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대화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이 늘 먼저 하느님을 찾고 말씀을 건네기 전에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당신 대화의 파트너로, ‘너와 나의 인격적인 관계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2)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정신 안에 깃들여 있습니다(말씀의 청자(聽者).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 앞에 서는 순간은 바로 내 존재 안에서 태초(太初)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 앞에 머무르는 그 순간에서부터 내 안에 새로운 창조, 새로운 삶, 새로운 존재가 시작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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