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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Jesus Joy of Mans Desi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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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1-30 ㅣ No.1595

 

축일 : 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San Giovanni Bosco Sacerdote
Castelnuovo d’Asti, 16 agosto 1815 – Torino, 31 gennaio 1888
Patronato: Educatori, Scolari, Giovani, Studenti, Editori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Saint John Bosco  , Priest Founder (RM)
Also known as : Don Bosco, Giovanni Bosco, Giovanni Melchior Bosco, John Melchoir Bosco
Born : 16 August 1815 at Becchi, Castelnuovo d’Asti, Piedmont, Italy as Giovanni Melchior Bosco
Died : 31 January 1888 at Turin, Italy of natural causes
Venerated : 24 July 1907 by Pope Pius X
Beatified : 2 June 1929 by Pope Pius XI
Canonized : 1 April 1934 by Pope Pius XI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 John)

Founder: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Societa’di san Francisco Salesio)
 

 

   1815년 8월 15일, 베키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일찌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가난한 홀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요한 보스코가 아홉살 때 한 꿈을 꾸게되는데 그 꿈은 그의 일생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꿈을 계기로 요한 보스코는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나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을 길을 찾는다.

 

   자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천부적인 명석함을 지닌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 ‘돈보스코’라 부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한 많은 혼란들이 있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면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간파한다. 그리하여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또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보스코 신부는 마음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했다.

 

   초창기 오라또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스코 신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인하여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참여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1854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탄생되어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는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살레시오수도회홈에서)

 

 

Don Bosco의 예방교육
   돈보스코는 청소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고 청소년들도 돈보스코를 사랑하였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는 열망으로 평범함 속에서 비범하게 이루어진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교육자에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이다. "예방교육"이란 청소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질과 역량을 모든 차원에서 일깨워 적극 장려함으로써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시켜 진실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예방교육"은 온전하게 성숙한 인간,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이 '삶의 주역'이 되어 '삶을 축제'로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을 양성해내는 교육여정이다. 이것은 선량함과 친근감, 기쁨과 신뢰, 사랑과 합리성이 깃든 교육 스타일이다. 그러므로 예방교육은 어떤 형태로든 강요와 억압,겉꾸밈,권위적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방교육"은 돈보스코의 교육사상 전체와 연관되며, 전인교육의 근본 요청이다.  돈보스코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요청을 흡족하게 채워주고 존중해 주는 그의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청소년들을 내부로부터 재생시키는 길을 찾아 내었다.


   그는 예리한 직관력과 독창적인 재능으로 청소년들의 깊은 염원을 복음적 가치 및 올바른 삶의 원칙들과 결부시킬 줄 알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교육의 천재, 교육학 방법론의 성인이라 부른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라고 자주 말한 돈보스코 예방교육법의 최고 원리이자 기본 패러다임은 '감응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방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내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 조성과 성숙한 '교육자의 현존'이라 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홈에서)

 

 

   요한 보스코의 교육 이론은 오늘날에도 학교에서 잘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은 신체적 처벌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잘못될 수 있는 상황을 배제함으로써 학생들의 행동을 선도하는 예방 조치이다. 그는 고해 성사를 자주 받고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한다. 그는 학생들의 일과 공부 그리고 놀이에 영적 생활을 연결시키려 애쓰면서 교리 교육과 어버이의 훈육을 결합시켰다.

 

   젊은 시절에 청소년과 어울려 일할 수 있는 사제가 되라는 권고를 받은 요한은 1841년에 토리노에서 서품을 받았다.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봉사활동은 그가 가난한 고아 소년을 만나 첫영성체 준비를 시킬 때 시작되었다. 그때 그는 젊은 견습공들을 모아서 교리를 가르쳤다.

 

   여직공들의 기숙사에서 지도 신부로 일하면서 그는 소년들을 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도원을 개설했다. 몇몇 부유하고 권세 있는 후원자들이 물질적 도움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소년들을 위한 두 개의 작업장을 마련하여 구두 만드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었다. 1856년 이르러 이 단체는 인원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고,

종교 관계 팜플렛과 교리 교육 팜플렛을 찍어 내는 인쇄소까지 차렸다.

 

   직업 교육과 출판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젊은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며, 가톨릭 출판업자들의 수호자로서 잘 맞는 것이다. 요한의 가르침에 대한 명성은 널리 퍼졌고 1850년에는 젊은 신부들을 보조자로 두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협력자들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1854년에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하에 서로 결속했다. 교황 비오9세의 격려를 받고 요한은 1859년에 17명으로 살레시오회를 창설했다. 그들의 활동은 교육과 선교 활동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나중에는 소녀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도 조직했다. 그는 1888년 1월 31일에 세상을 떠났고 1934년 비오11세께서 시성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인간성 그 전체를 교육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일, 공부, 놀이 등 모든 것에 가득히 스며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정도로서가 아니라 전적인 노력을 경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온전히 밑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요한 보스코는 재능과 능력을 살리는 직업 훈련과 자신감 그리고 긍지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는 장사하는 기술에 관해서도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모든 교육은 하나의 철학을 가르친다.  그것이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제안이나 암시 또는 분위기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의 각 분야는 다른 모든 분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어떤 인생관을 갖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교육이 아니다.(G,K 체스터턴)

-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861

 

   1841년 사제로 서품된 뒤 가난한 젊은이들의 직업 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전문적인 능력과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그들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 가난한 젊은이들의 모임이 전 세계적으로 퍼진 [살레시오회] 의 모체가 되었으며 1874년에는 마리아 동정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요한 보스코는 자신의 구제 사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수도원을 창설하여 [살레시오 성 프란치 스꼬의 신심회] 라 이름지었습니다. 따라서 돈 보스코를 근대 사제의 이상형으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손꼽습니다.  그는 정치적 문제에 까지 탁월한 조언을 했으며 교육 부문에 1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오라토리오의 소년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돈보스코 (1861년)

 

   1815년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사제가 되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고 젊은 이들에게 기술 교육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가르치는 살레시오회를 창립했다. 신앙을 옹호하는 몇 개의 소품들을 남겼다. 1888년 세상을 떠났다.

 

 

오라토리오의 소년들과 어울려 있는 돈보스코 (1861)

 

성 요한 보스꼬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 바울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올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울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한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 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재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무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가톨릭홈에서)

 

1865-68.

 

   이탈리아의 피에드몬트, 베치에서 가난한 부모 사이에 태어난 요한은 2살 때 부친을 잃고, 16세 때 치에티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또리노에서 학업을 계속한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요셉 카파쏘 신부의 격려로 토리노에서 고아들과 함께 일을 시작하다가, 1844년 그곳에 세워진 소녀들을 위한 성녀 필로메나 고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자, 그 부지 내에 소년들을 위한 집도 마련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그들이 너무나 규율을 어기고 불량배들처럼 되어가자, 한 때 그는 원장직으로부터 사임을 권고받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는 그 직책을 사임하고, 어머니와 함게 버림받은 소년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는 그 소년들을 위한 집과 학교를 세웠고, 교육을 실시하다가, 1856년에는 150명으로 불어나자,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500명이 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다른 보금자리를 꾸미기도 하였다.그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각자의 발전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여 대응하였고, 그들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내었다.

 

1865-68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녔으며, 유명한 저서를 저술하였다. 수많은 도움을 베풀기 위하여 그는 살레시오회를 세워야 하였다. 이 회는 1859년, 비오 9세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나, 1884년까지는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활동하였다.

 

   그의 임종시에는 64개의 살레시오 수도회가 있었고, 유럽과 아메리카로 확대되었으며, 약 800명의 살레시안 사제들이 활동하였다. 1872년, 그는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성모 수녀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삶들과 버림받은 소녀들을 돌보게 하였고, 살레시안 협력자들이라 부르는 3회가 뒤따랐다. 그는 1888년 1월 31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편집과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부산교구홈에서) 

 

1867

 

   이탈리아의 토리노에는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한 무덤이 있다. 비명(碑銘)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 밑에 묻혀 계시는 분이야말로 무수한 고아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 성 요한 보스코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는 이는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교회의 내외에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성인을 보내셔서 그 위험을 선처하시고 아무리 반대자가 주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해도 결국 실현케 하시는 것이 상례이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북 이탈리아의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의 작은 마을 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루이지라는 분으로 근면하고 조심성 있는 독실한 신자였고, 어머니는 마르가리타로서 역시 모든 선덕을 구비한 신심 깊은 부인이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물질적 면으로는 겨우 그날의 생활을 이어나갈 정도였지만, 정신적 면으로는 극히 혜택을 받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뜻밖에 감기로 급성폐렴에 걸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임종시에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이라는 말을 언제든지 잊지 않고 요한을 훌륭한 인물로 양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했다.

 

1870

 

   그녀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마르가리타만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어머니들의 모범이다."하며 늘 칭찬하는 정도였다. 몇 해 후에 요한 보스코가 아동 교육에 성공을 한 것도 본래는 훌륭한 어머니의 감화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를 잘 선도한 힘은 물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그는 후에 하느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탁받으리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기이한 일로 예측되어 있었다.

 

   예컨데 9세 때 그는 처음으로 주 예수의 발현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지도자로 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는데,

실제로 후일 예상한 것 이상으로 대성공을 하고,또 그가 창립한 살레시오회의 경탄할 만한 신속한 발전을 생각할때에 성모의 도움이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고 요한 보스코 자신이 고백하고 있다.

 

   요한 보스코는 성모께 무한한 신뢰를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은총의 인도로 몸을 수련하고 덕행의 길로 매진했다.그는 극기 금욕의 생활을 즐겁게 하면서도 항상 쾌활하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끔 아이들을 위하여 스스로 줄넘기나 장난을 해 주는 때도 있으나 사람들의 영혼을 점점 더 귀중히 생각하며 소년 시대부터 사제가 되려고 굳게 결심한 바가 있었다.

 

 

오라토리오의 악대. 돈보스코는

"음악없는 오라토리오는 영혼 없는 육신이다." 라고 말했다(1870)

 

 

   가정이 구차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할 수가 없어서 어느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게 되었으나 이것조차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종종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12세부터 14세까지의 2년간을 숙부의 집안에서 일을 도우며 지낸 것도 그 한 예이다. 숙부는 요한의 경건한 마음과 그의 뜻을 깨닫고 돈 가로소라는 성인같은 한 사제에게 위탁하고 그를 공부시키게 했다. 그러나 가로소 신부는 오래지 않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그때 돌연한 그의 죽음에 아무 유언을 들을 사이도 없이 다만 스승한테 받게 된 것은 한 개의 손금고(手金庫)와 그의 열쇠 뿐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주려는 의사였을 것인가?  적어도 가로소 신부의 조카되는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 보스코는 ’나에게는 현세의 보배는 필요없습니다. 천국만을 잃지 않으며 그것으로 만족합니다"하며 끝끝내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부터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서야 그는 천부적 재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뛰어난 좋은 성적을 올리고, 1835년에 신학교에 입학해 전부터 절실히 원하던 것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신학교에서 6년간 철학과 신학을 연마하는 동안 그는 얼마나 덕행의 길에 힘썼는지! 그러나 겸손한 그는 될수 있는대로 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힘썼다.

 

   요한이 바야흐로 사제 서품을 받게 된 것은 1841년 4월 5일이었다. 세라핌적 사랑으로 첫 미사를 봉헌한 그는 점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높아질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그의 미사에 참여하려고 먼길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첫 미사때,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즐거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훈계했다. "너도 오늘부터 하느님의 것이 되었지만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오늘 부터는 내 일은 염려하지 말고 너는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해라. 나는 네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만족이다..."

 

   이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이 후에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된 것도 생각하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에게는 토리노에 성 요셉 카파소,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그의 사명을 재빨리 알아채고 박애 사업에 일생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요한은 그 충고에 순응해 즉시 가련한 고아들을 모아 아버지가 되어 교리를 가르쳐주고, 혹은 기술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아직 고아원도 없어서 그들은 요한과 그의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토리노의 사람들에게 "요한 보스코의 왈패자식들"이라고 불렸지만 덕망이 많은 성인의 감화를 받고서 모두 온순한 아이들이 되었다. 요한 보스코는 또한 토리노에 있는 양로원이나 자혜병원, 형무소까지도 방문하고 거기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1864년에 고아원이 건설된 후부터 수용한 아이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아이들에게 대하여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신기한 힘을 가진 것처럼 아무리 왈패인 아이라도 자유롭게 통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과 같이 사제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정직한 그는 악인의 원한을 사게 되어 전후 일곱 번이나 살해될 뻔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어디선가 사나운 개가 나타나서 악인에게 달려드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나서 환난을 면할 수가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 사업의 계속되는 발전을 위한 한 수도원을 창설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코의 신심회’하고 이름지어 1859년 12월 18일 제자 몇명을 데리고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하고 그 인가를 청했다. 다시 1875년 8월 5일에는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베풀어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고 또 직업을 줌으로써 현세의 행복까지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수도원이 얼마나 사회에 유익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교황 레오 13세가 요한 보스코를 향해 ’전 세계 교회는 당신을, 당신의 사업을, 당신의 수도원을 우러러보며 다만 탄복할 따름입니다"하고 말한 것도 결코 과분한 칭찬이 아니다. 성인은 1888년 1월 31일 아침 삼종소리가 날 때 교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많은 공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고, 오늘날도 그 위대한 사업은 그의 애제자인 살레시오 회원의 손으로 훌륭히 계속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수도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꿈]

 

   예언적인 꿈은 우리가 보통 꾸는 꿈과는 달리 미래의 방향을 알려 주고 우리의 희망과 열정과 목표를 보여 준다. 요한 보스코는 예언적인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그는 9살 때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가난한 소년들을 도와 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꿈을 꾸었다. 꿈은 줄곧 그의 일생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는 꿈을 통해서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소년들의 영혼 상태를 식별하기도 하고 새로운 계획과 선교에 관한 전망을 얻기도 하였다. 요한 보스코에게는 언제나 자금이 충분치 않았지만 하느님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하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재원이 마련되곤 했다.

 

   하느님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셨다. 요한 보스코의 꿈처럼 예언적이지는 않더라도 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 관심을 갖고 꿈을 잘 살펴보면 잠재되어 있는 깊은 열망이나 포부를 알아낼 수도 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암시해 주기도 하며, 숨은 잠재력을 깨워 주기도 하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예언적인 꿈을 꾸어 본 적이 있는가?

꿈은 때로 잠재 의식을 반영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이) Societa’ di san Francisco Salesio

(영) 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축일:1월24일,게시판158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왕국 피에몬테(Piemonte)의 베키(Becch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프란치스코(Francisco Bosco)와 마르게리타(Margherita Occhiena)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두 살도 안 되었을 때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여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과 근면한 노동 정신 그리고 순종의 덕을 배웠다.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성 요한 보스코는 9세 때 농한기를 이용하여 카프릴리오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만을 배웠다. 15세 되던 해인 1830년에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 읍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이수한 후, 키에리(Chieri) 시의 인문학교에 진학하여 5년 과정을 마치고 1835년에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41년 6월 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성 요한 보스코는 그의 은인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 6월 23일) 신부의 도움으로 토리노(Torino)에 있는 사제 연수원에서 신학 연구와 현대 사목에 관한 연구 기회를 얻게 되었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로 정치와 산업화의 중심지인 토리노에 체류하는 동안, 토리노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12-20세의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소년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844년 연수원을 졸업한 후 바롤라(Barola) 후작 부인이 경영하는 '소녀들 고아원'의 지도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소년들의 사목에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독립한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00여 명이 넘는 소년들과 함께 거처도 없이 이동하다가 1846년 4월 토리노 시의 서북쪽 도라 리파리아 강변의 발도코(Valdocco)에 정착하였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한편으로는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견습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851-1853년에는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성 요셉 카파소 신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발도코에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일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기숙사의 소년들을 외부 학교에 보냈으며, 1856년에는 불어나는 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숙사 구내에 학교를 세우는 등 그의 청소년 교육 사업은 점점 커져갔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여 대응하였고, 각자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냈다.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니는 한편 유명한 “예방 교육법”이란 저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사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교황 비오 9세(Pius IX)의 권고에 따라 1859년 18명의 제자들에게 수도 서원을 하게 하였고, 그들은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서약하였다. 수도 서원으로 기초를 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3월 1일 정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으며, 1871년 4월 13일에는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하였다.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888년 1월 31일 침대 주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회원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가톨릭홈에서)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성 요한 보스코(1815~1888)는 「예방 교육」이라는 청소년 교육방법을 개발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 사목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개선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그의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성, 종교, 사랑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교육의 기반으로 삼았다.

요한 보스코는 당시보다 더욱 혼란스런 상황에 살고있는 오늘의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과 사목에 여전히 많은 것을 제시하고 시사하는 길잡이이며 언제나 그 정신과 자세에 있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1. 생애

요한 보스코(흔히 돈 보스코라 불란다. 「돈」은 사제에게 붙이는 존칭이므로 보스코 신부님이라는 뜻이다)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처의 작은 마을베티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한 보스코는 아버지를 겨우 두 살 때 여의었고 훌륭한 신앙심과 고결한 정신을 지닌 어머니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요한은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고 있엇지만 언제나 공부하고 싶은 소망을 버릴 수 없었다. 9살 되던 해 그는 일생동안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미래의 사명을 예시한 중요한 꿈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 남자와 그의 모친인 고귀한 부인이 나타나 요한이 장차 수행해야 할 과제를 알려주는 꿈이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 꿈을 꾼 이후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1830년 15세의 요한은 마을 본당에 새로 부임한 칼로쏘 신부한테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얼마 안되어 그 신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요한은 집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카스텔 누오보 학교에 다녔다. 다름해 그는 키에리에 있는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명석한 두뇌와 열성적 노력으로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 그는 또한 라틴어, 이탈리아어 문학서적들을 즐겨 탐독했고 놀이와 오락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는 가수, 배우, 즉흥시인, 마술사 등으로 불렸을 정도로 다재다능했고, 학생들의 대장 역할을 할 만큼 지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강론이나 교리시간에 들은 얘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어 재담꾼으로 통하며 인기가 좋았다. 그는 장터에서 곡예사나 광대들의 공연을 예리한 눈썰미로 보고 흉내내며 익힌 재치있는 곡예, 줄타기, 마술 등으로 마을 사람들을 매우 즐겁게 해 주었다. 그가 공연 전에 관중에게 대가(代價)로 요구한 것은 묵주기도와 함께 성가를 부르고 때론 본당신부한테서 들었던 강론 한 토막을 상기시키며 듣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등학교 4년 동안 공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해야했다. 그는 가정교사, 대장장이, 제화공 그리고 목수로도 일을 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훗날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유망한 기술을 습득시켜 급속히 산업화되어 가는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데 소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가지 직업들을 두루 경험한 덕분에 그는 청소년들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들을 대하고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1836년에 요한 보스코는 키에리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사제직을 준비하면서 5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 뿐 아니라 외국어들을 습득했고 고전작품들을 읽으면서 폭넓은 교양을 쌓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강론, 교리 강의 등을 위한 사목 자료들을 수집했고 틈틈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노래와 놀이 등으로 오락시간을 마련해 주었으며 학교공부를 도왔고 교리를 가르쳐 첫 영성체를 준비시켰다.

그는 얼마동안 몬탈도 예수회 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며 희랍어를 가르치면서 예수회의 교육방법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실습중 그는 자신이 상류층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부름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한 소명을 절실히 느꼈다.

1841년 6월 5일 요한 보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영적 지도자 카파소 신부의 조언에 따라 3년 동안 콘비토 신학교에서 사제학교를 수료하였다. 거기서 그는 정규과목 이수 외에 병원과 감옥 방문, 주변 본당의 사목지원 및 청소년들의 교리교육 등 부지런히 사도적 활동을 수행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사제 성품을 받던 해 12월에 한 성당의 제의방에서 고아 소년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를 만나게 되는게 그것이 그의 교육 사업의 하나인 오라토리오(젊은이들의 교육의 집)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1848년 이탈리아에서 1차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토리노 시에서는 집도 일자리도 없는 청소년들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메게 된다. 보스코 신부는 그들을 위해 두 번째 오라토리오 그리고 곧 이어 세 번째 오라토리오를 세우게 된다. 보스코는 작업장을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구두 제작, 양재, 목공기술을 가르쳤으며 교회 관련 팜플렛과 교리교육 자료들을 찍어내는 인쇄소까지 차려 인쇄 및 제본의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것들이 몇 년 후엔 공업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육사업이 번창해 가던 1845년 7월에 콜레라가 리구리아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토리노까지 번져오자 보스코는 44명의 젊은 봉사원들과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것은 많은 환자들을 살려내는 업적과 함께 그를 도와 일하는 사제와 수사들의 숫자를 늘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한 보스코는 그가 교육시키고 있던 젊은이들 중에서 그의 사업의 협력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척 구성원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했고 점차 광범위한 선교 및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나아갔다. 1860년 7월 30일에는 루아 미카엘이 사제성품을 받음으로써 보스코가 교육한 젊은이들 중에서 최초의 사제가 태어났다. 1863년 살레시오회의 사업이 처음으로 토리노 밖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미라벨라 몽훼라토의 소신학교였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지역에 오라토리오들이 세워졌다. 요한 보스코 생존시 이미 6개국에 64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회원은 770여명이나 되었다. 1872년엔 살레시오 여자 수도회인 「도움의 마리아의 딸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875년 11월 11일엔 남미로 떠나는 10명의 살레시오회원들에게 십자가를 수여함으로써 해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보스코의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은 젋게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 보스코는 같은 해에 그가 「살레시오회 외부 회원들」이라 부르던 「협력자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청소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요한 보스코의 사업의 협력자들로서 기도와 함께 경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요한 보스코는 미소를 지은 채 평온히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임종 직전 침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레시오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라디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요한 보스코는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4일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29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2)


2. 영성사 안에서의 기여

1) 요한 보스코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영성가들은 프란치스코 드 살, 로욜라의 이냐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필립보 네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알퐁소 드 리구리 등이었다. 보스코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사도직에서 온유함과 인내가 요구되었기에 온유와 애덕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로욜라의 이냐시오로부터는 악에 대항하는 열정적 싸움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그의 교육 영성을 형성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 성 필립보 네리의 기쁨의 정신과 교육 방침을 많이 참고하였으며 성 알퐁소 드 리구리의 윤리적 가르침을 적용하였다. 그는 또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한결같은 평온함을 본받고자 하면서 청소년들을 교육 하였다.
 

2)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사목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인식했고 그 소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투신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17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발전했던 관상적, 학문적 영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보다는 활동적, 실천적 영성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에 응답하는 길임을 깨닫고 그것을 택했다. 그의 시대는 사회 상황의 변화와 산업 혁명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 통일 국가에 대한 열망, 유럽 식민지 팽창 등으로 인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이 급속히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들을 교육하고 선도해야 할 사명감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준비하였으며 그에 온힘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성령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데 요청되는 적절한 카리스마를 풍성히 받았었 기에 그의 사도직은 더욱 성공적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근본적으로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현실생활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도록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하였다.
 

3)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방법' (preventive system)을 도입하여 젊은이들 교육과 지도에 힘썼는데 이 교육방법은 교육사에 획기적 으로 공헌했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독특한 교육 영성의 장을 이룩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교육의 원리와 방법은 이성(理性), 종교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 표현될 수 있다.
 

4)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의 체계는 여러 교육 사상을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의 교육 체계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교육, 영성 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하나의 영향은 당시 피에몬테에서 성행하던 얀센주의적 교육 사상이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금욕적이던 얀센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개념과 교육방법 중 일부를 수용하였다.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제시키는 데 도움되는 방법과 규율, 교육자의 임무에 대한 규정으로서 늘 깨어있는 자세, 청소년들이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기 위한 적극적 대책 등 긍정적 요소들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 방법과는 달리 보스코는 청소년들이 즐겁게 지내고 스스로 여러 방법으로 표현하기를 바랬으며 필요시에만 그들을 통제했다. 그는 얀센주의자들이 거부했던 애정, 관심, 경쟁, 창의력 같은 인간적 수단을 교육에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루소의 교육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얀센주의자들과 달리 루소는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사회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자연상태에서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 교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를 닮아갔다. 그는 수많은 창의적 가르침을 활용했고 가능한 한 교육에 많은 즐거움의 요소를 도입하며 산책이나 소풍, 인생경험, 독서를 통해서 필요한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발성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며 저절로 진리와 선을 지향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교육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착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교육자가 통제할 수 없는 악한 성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요한 보스코에게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당시 교육 사상과 활동의 중심지였던 토리노 대학에 만연되어 있던 자유정신이었다. 특히 그의 친구이며 교육 사업을 도와 준 철학자 안토니오 로스미니에게서 교육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실로 보스코의 주요 교육 방법들이 로스 미니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요한 보스코는 로스미니 교육철학의 원칙 들을 그의 예방 교육의 근본 요소인 이성, 종교, 사랑으로 새롭게 발전 시켜 정리했다. 그의 교육활동의 핵심은 전인적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5) 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청소년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인 성 요한 보스코는 또한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다.

그는 농촌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우며 일을 배우고 몸에 익혔다. 그는 또한 기술자들이 많이 살던 카스텔 누오보 에서 자라면서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장인(匠人)들의 일솜씨를 지켜 보았고 어깨 너머로 그것들을 배웠다. 두뇌가 명석했고 눈썰미가 좋았 으며 재주가 비상했던 그는 기술자들의 솜씨를 암기했다가 곧잘 모방 하였다. 그러한 눈썰미와 일솜씨는 그가 중등학교 시절 학비를 마련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은 뒷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되었고 직업 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 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일을 줄이거나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한 교서(1958. 1.17)를 통해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노동 및 사회 보장부 루이지 구이 장관은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 노동자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해 줄 것을 겸허하게 청원하였습니다. 성인은 출중한 인물이며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공적을 끼친 분으로서 진보의 최전선에 스스로 나서서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각종 직업 교육을 시켰으며 정직 하고 경건한 생활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를 하느님 앞에서 이탈리아 청소년 견습공들을 위하여 천상 수호자로 택하고 선언하며 영구히 선언하고 확정합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5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3)


3. 예방 교육

요한 보스코가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도직은 젊은이들의 참된 인간적.영적 양성을 위한 종교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의 이론 가라기보다는 교육실천가로서 참신하고 획기적인 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젊은이들의 교육과 지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방 교육 방법' (preventive system)이었다.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또한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선으로 이끌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요한 보스코가 교육에 도입하고 적용한 혁신 방법이었다.
 

1) 예방 교육의 기본적 원리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강압적인 것으로 여긴 기존 교육에 대응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악을 사전에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약보다 위생을, 치료보다 예방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의학의 발전적 경향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강압적 방법은 학생들이 규칙을 위반하거나 잘못 처신 했을 때 그들을 처벌하거나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고, 예방적 방법은 친절로 그들이 규칙을 잘 지키도록 돕고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고 효율적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교육의 첫 원칙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학생들의 마음에 넣어주는 것이고 교리 교육과 윤리 교육을 통해 선에 대한 애착과 악에 대한 혐오감을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에 의해 그리고 실천적 신앙생활을 통해 성성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학업, 노동 그리고 그들의 놀이에서 도 언제나 친절한 도움을 준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 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나쁜 습성, 악의 유혹을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방은 엄한 벌 이나 책망보다 친절한 사랑과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 신심을 실천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확신하며 사랑, 이성, 종교를 예방 교육 방법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육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즉 인간적.영적으로 성숙하는 전인(全人)양성이었으며, 그 교육의 영성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의 많은 결실 중 손꼽을 수 있는 하나는 소년 성인 도메니코 사비오를 배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성(대화와 합리적 설득)

요한 보스코에 의하면 이성은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순응하도록 이끌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용하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방법 중의 하나였다. 교육자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올바른 분별력을 통해 학업 뿐 아니라 규율 준수나 부과된 벌, 나쁜 습성의 교정 또는 전례와 성사 생활의 의미, 실천의 당위성 등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합리적 방법으로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규율 준수 뿐 아니라 부과된 모든 과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된다.
 

나) 종교(복음적 신앙 교육)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에서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고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교육 사목 체험에서 젊은이들이 고해 성사와 성체 성사를 합당하게 자주 받으면 그들의 인간적.영적 형성에 효과적 결실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러한 생활에서 교육자의 솔선 수범이 참으로 중요하다.
 

다) 사랑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교육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1고린 13, 4~7 참조)에 대한 바오로 가르침에 토대를 둔다. 예방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애정 어린 협력 관계이므로 사랑을 그의 교육의 최고 원리로 여겼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젊은이들을 사랑해야 할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스코는 그들 가운데 좥현존하는 것좦과 그들을 위해 '항구하게 일하는 것' 을 사랑 교육의 두 원리로 채택하였다.
 

2) 특성

요한 보스코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 졌으며 평화롭고 신뢰에 찬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루어졌다.
 

가) 가족 정신

가족 정신은 복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교육의 근본 이상 이며 지도 이념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는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고 평화로운 기쁨이 그 공동체를 감싸 도록 하였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바른 행위에 어울리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러한 가족 정신 안에서 기쁨이 체험되었으며 마음의 개방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 만남과 대화

가족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는 젊은이들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다. 요한 보스코는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의 시간들을 영성지도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했으며 흔히 고해성사로 끝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밤 인사(Buona notte) 시간을 교육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짧게 사랑의 인사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도움되는 교훈이나 명언 혹은 감명을 주는 일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율동으로 구성된 오락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항상 즐겁게 그들과 어울렸으며 그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조언해 주기도 했다.
 

다) 효율적 처벌과 훈계

그는 가능하면 처벌보다는 칭찬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행동을 계속 실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벌해야할 경우엔 그 벌이 감정적 화풀이가 아니라 오직 학생 자신이 나쁘게 행동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훈계나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의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마음을 열고 산보를 청하거나 일이나 놀이에 초대하여 대화하면서 진상을 규명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이성과 신앙으로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내와 신중함 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꾸중은 개인적으로 해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코는 '귓속말' 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효율적인 권고와 훈계를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19일]



 



 

 

 

 

♬Jesus Joy of Mans Desiring-The St Philips Boy’s Choir

 

 

 

 

 

 

 

 

 

 

 

 

 

 

 

 

 

 

 

 

 

 

 

 

 

 

 

 

 

 San Giovanni Bosco Sacerdote
31 gennaio 
Castelnuovo d’Asti, 16 agosto 1815 – Torino, 31 gennaio 1888


Grande apostolo dei giovani, fu loro padre e guida alla salvezza con il metodo della persuasione, della religiosità autentica, dell’amore teso sempre a prevenire anziché a reprimere. Sul modello di san Francesco di Sales il suo metodo educativo e apostolico si ispira ad un umanesimo cristiano che attinge motivazioni ed energie alle fonti della sapienza evangelica. Fondò i Salesiani, la Pia Unione dei cooperatori salesiani e, insieme a santa Maria Mazzarello, le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Tra i più bei frutti della sua pedagogia, san Domenico Savio, quindicenne, che aveva capito la sua lezione: “Noi, qui, alla scuola di Don Bosco, facciamo consistere la santità nello stare molto allegri e nell’adempimento perfetto dei nostri doveri”. Giovanni Bosco fu proclamato Santo alla chiusura dell’anno della Redenzione, il giorno di Pasqua del 1934. Il 31 gennaio 1988 Giovanni Paolo II lo dichiarò Padre e Maestro della gioventù, “stabilendo che con tale titolo egli sia onorato e invocato, specialmente da quanti si riconoscono suoi figli spirituali”.

Patronato: Educatori, Scolari, Giovani, Studenti, Editori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Memoria di san Giovanni Bosco, sacerdote: dopo una dura fanciullezza, ordinato sacerdote, dedicò tutte le sue forze all’educazione degli adolescenti, fondando la Società Salesiana e, con la collaborazione di santa Maria Domenica Mazzarello, l’Istituto delle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per la formazione della gioventù al lavoro e alla vita cristiana. In questo giorno a Torino, dopo aver compiuto molte opere, passò piamente al banchetto ete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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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Giovanni Bosco è indubbiamente il più celebre santo piemontese di tutti i tempi, nonché su scala mondiale il più famoso tra i santi dell’epoca contemporanea: la sua popolarità è infatti ormai giunta in tutti i continenti, ove si è diffusa la fiorente Famiglia Salesiana da lui fondata, portatrice del suo carisma e della sua operosità, che ad oggi è la congregazione religiosa più diffusa tra quelle di recente fondazione.
Don Bosco fu l’allievo che diede maggior lustro al suo grande maestro di vita sacerdotale, nonché suo compaesano, San Giuseppe Cafasso: queste due perle di santità sbocciarono nel Convitto Ecclesiastico di San Francesco d’Assisi in Torino.
Giovanni Bosco nacque presso Castelnuovo d’Asti (oggi Castelnuovo Don Bosco) in regione Becchi, il 16 agosto 1815, frutto del matrimonio tra Francesco e la Serva di Dio Margherita Occhiena. Cresciuto nella sua modesta famiglia, dalla santa madre fu educato alla fede ed alla pratica coerente del messaggio evangelico. A soli nove anni un sogno gli rivelò la sua futura missione volta all’educazione della gioventù. Ragazzo dinamico e concreto, fondò fra i coetanei la “società dell’allegria”, basata sulla “guerra al peccato”.
Entrò poi nel seminario teologico di Chieri e ricevette l’ordinazione presbiterale nel 1841. Iniziò dunque il triennio di teologia morale pratica presso il suddetto convitto, alla scuola del teologo Luigi Guala e del santo Cafasso. Questo periodo si rivelò occasione propizia per porre solide basi alla sua futura opera educativa tra i giovani, grazie a tre provvidenziali fattori: l’incontro con un eccezionale educatore che capì le sue doti e stimolo le sue potenzialità, l’impatto con la situazione sociale torinese e la sua straordinaria genialità, volta a trovare risposte sempre nuove ai numerosi problemi sociali ed educativi sempre emergenti.
Come succede abitualmente per ogni congregazione, anche la grande opera salesiana ebbe inizi alquanto modesti: l’8 dicembre 1841, dopo l’incontro con il giovane Bartolomeo Garelli, il giovane Don Bosco iniziò a radunare ragazzi e giovani presso il Convitto di San Francesco per il catechismo. Torino era a quel tempo una città in forte espansione su vari aspetti, a causa della forte immigrazione dalle campagne piemontesi, ed il mondo giovanile era in preda a gravi problematiche: analfabetismo, disoccupazione, degrado morale e mancata assistenza religiosa. Fu infatti un grande merito donboschiano l’intuizione del disagio sociale e spirituale insito negli adolescenti, che subivano il passaggio dal mondo agricolo a quello preindustriale, in cui si rivelava solitamente inadeguata la pastorale tradizionale.
Strada facendo, Don Bosco capì con altri giovani sacerdoti che l’oratorio potesse costituire un’adeguata risposta a tale critica situazione. Il primo tentativo in tal senso fu compiuto dal vulcanico Don Giovanni Cocchi, che nel 1840 aveva aperto in zona Vanchiglia l’oratorio dell’Angelo Custode. Don Bosco intitolò invece il suo primo oratorio a San Francesco di Sales, ospite dell’Ospedaletto e del Rifugio della Serva di Dio Giulia Colbert, marchesa di Barolo, ove dal 1841 collaborò con il teologo Giovanni Battista Borel. Quattro anni dopo trasferì l’oratorio nella vicina Casa Pinardi, dalla quale si sviluppò poi la grandiosa struttura odierna di Valdocco, nome indelebilmente legato all’opera salesiana.
Pietro Stella, suo miglior biografo, così descrisse il giovane sacerdote: “Prete simpatico e fattivo, bonario e popolano, all’occorrenza atleta e giocoliere, ma già allora noto come prete straordinario che ardiva fare profezie di morti che poi si avveravano, che aveva già un discreto alone di venerazione perché aveva in sé qualcosa di singolare da parte del Signore, che sapeva i segreti delle coscienze, alternava facezie e confidenze sconvolgenti e portava a sentire i problemi dell’anima e della salvezza eterna”.
Spinto dal suo innato zelo pastorale, nel 1847 Don Bosco avviò l’oratorio di San Luigi presso la stazione ferroviaria di Porta Nuova. Nel frattempo il cosiddetto Risorgimento italiano, con le sue articolate vicende politiche, provocò anche un chiarimento nell’esperienza degli oratori torinesi, evidenziando due differenti linee seguite dai preti loro responsabili: quella apertamente politicizzata di cui era fautore Don Cocchi, che nel 1849 aveva tentato di coinvolgere i suoi giovani nella battaglia di Novara, e quella più religiosa invece sostenuta da Don Bosco, che prevalse quando nel 1852 l’arcivescovo mons. Luigi Fransoni lo nominò responsabile dell’Opera degli Oratori, affidando così alle sue cure anche quello dell’Angelo Custode.
La principale preoccupazione di Don Bosco, concependo l’oratorio come luogo di formazione cristiana, era infatti sostanzialmente di tipo religioso-morale, volta a salvare le anime della gioventù. Il santo sacerdote però non si accontentò mai di accogliere quei ragazzi che spontaneamente si presentavano da lui, ma si organizzò al fine di raggiungerli ed incontrarli ove vivevano.
Se la salvezza dell’anima era l’obiettivo finale, la formazione di “buoni cristiani ed onesti cittadini” era invece quello immediato, come Don Bosco soleva ripetere. In tale ottica concepì gli oratori quali luoghi di aggregazione, di ricreazione, di evangelizzazione, di catechesi e di promozione sociale, con l’istituzione di scuole professionali.
L’amorevolezza costituì il supremo principio pedagogico adottato da Don Bosco, che faceva notare come non bastasse però amare i giovani, ma occorreva che essi percepissero di essere amati. Ma della sua pedagogia un grande frutto fu il cosiddetto “metodo preventivo”, nonché l’invito alla vera felicità insito nel detto: “State allegri, ma non fate peccati”.
Don Bosco, sempre attento ai segni dei tempi, individuò nei collegi un valido strumento educativo, in particolare dopo che nel 1849 furono regolamentati da un’opportuna legislazione: fu così che nel 1863 fu aperto un piccolo seminario presso Mirabello, nella diocesi di Casale Monferrato.
Altra svolta decisiva nell’opera salesiana avvenne quando Don Bosco si sentì coinvolto dalla nuova sensibilità missionaria propugnata da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 e, sostenuto dal pontefice Beato Pio IX e da vari vescovi, nel 1875 inviò i suoi primi salesiani in America Latina, capeggiati dal Cardinale Giovanni Cagliero, con il principale compito di apostolato tra gli emigrati italiani. Ben presto però i missionari estesero la loro attività dedicandosi all’evangelizzazione delle popolazioni indigene, culminata con il battesimo conferito da Padre Domenico Milanesio al Venerabile Zeffirino Namuncurà, figlio dell’ultimo grande cacico delle tribù indios araucane.
Uomo versatile e dotato di un’intelligenza eccezionale, con il suo fiuto imprenditoriale Don Bosco considerò la stampa un fondamentale strumento di divulgazione culturale, pedagogica e cristiana. Scrittore ed editore, tra le principali sue opere si annoverano la “Storia d’Italia”, “Il sistema metrico decimale” e la collana “Letture Cattoliche”. Non mancarono alcune biografie,tra le quali spicca quella del più bel frutto della sua pedagogia, il quindicenne San Domenico Savio, che aveva ben compreso la sua lezione: “Noi, qui, alla scuola di Don Bosco, facciamo consistere la santità nello stare molto allegri e nell’adempimento perfetto dei nostri doveri”. Scrisse inoltre le vite di altri due ragazzi del suo oratorio, Francesco Besucco e Michele Magone, nonché quella di un suo indimenticabile compagno di scuola, Luigi Comollo.
Pur essendo straordinariamente attivo, Don Bosco non avrebbe comunque potuto realizzare personalmente dal nulla tutta questa immane opera ed infatti sin dall’inizio godette del prezioso ausilio di numerosi sacerdoti e laici, uomini e donne. Al fine di garantire però una certa continuità e stabilità a ciò che aveva iniziato, fondò a Torino la Società di San Francesco di Sales (detti “Salesiani”), congregazione composta di sacerdoti, e nel 1872 a Mornese con Santa Maria Domenica Mazzarello le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L’opinione pubblica contemporanea apprezzò molto la preziosa opera di promozione sociale da lui svolta, anche se la stampa laica gli fu sempre avversa, tanto che alla sua morte la Gazzetta del Popolo si limitò a citarne cognome, nome ed età nell’elenco dei defunti, mentre la Gazzetta Piemontese (l’odierna “La Stampa”) gli riservò l’articolo redazionale dosando accuratamente meriti e demeriti del celebre sacerdote: “Il nome di Don Bosco è quello di un uomo superiore che lascia e suscita dietro di sé un vivo contrasto di apprezzamenti e opposti giudizi e quasi due opposte fame: quello di benefattore insigne, geniale, e quello di prete avveduto e procacciate”.
Personalità forte ed intraprendente, bisognosa di particolare autonomia nella sua azione a tutto campo, non lasciava affatto indifferenti coloro che gli erano per svariati motivi a contatto. Ciò costituisce inoltre una spiegazione ai ripetuti scontri che ebbe con ben due arcivescovi torinesi: Ottaviano Riccardi di Netro e soprattutto Lorenzo Gastaldi. Lo apprezzò e lo appoggiò invece costantemente e senza riserve papa Pio IX, che con la sua potente intercessione permise all’opera salesiana di espandersi non solo a livello locale, sorte invece subita da numerosissime altre minute congregazioni.
Giovanni Bosco morì in Torino il 31 gennaio 1888, giorno in cui è ricordato dal Martyrologium Romanum e la Chiesa latina ne celebra la Memoria liturgica. Alla guida della congregazione gli succedette il Beato Michele Rua, uno dei suoi primi fedeli discepoli. La sua salma fu in un primo tempo sepolta nella chiesa dell’istituto salesiano di Valsalice, per poi essere trasferita nella basilica di Maria Ausiliatrice, da lui fatta edificare. Il pontefice Pio XI, suo grande ammiratore, beatificò Don Bosco il 2 giugno 1929 e lo canonizzò il 1° aprile 1934. La città di Torino ha dedicato alla memoria del santo una strada, una scuola ed un grande ospedale. Nel centenario della morte, nel 1988 Giovanni Paolo II, recatosi in visita ai luoghi donboschiani, lo dichiarò Padre e Maestro della gioventù, “stabilendo che con tale titolo egli sia onorato e invocato, specialmente da quanti si riconoscono suoi figli spirituali”.
La venerazione che Don Bosco ebbe, in vita ed in morte, per sua madre fu trasmessa alla congregazione, che negli anni ’90 del XX secolo ha pensato di introdurre finalmente la causa di beatificazione di Mamma Margherita. Merita infine ricordare la prolifica stirpe di santità generata da Don Bosco, tanto che allo stato attuale delle cause, la Famiglia Salesiana può contare ben 5 santi, 51 beati, 8 venerabili ed 88 servi di Dio.

DALLE “LETTERE” DI SAN GIOVANNI BOSCO
Se vogliamo farci vedere amici del vero bene dei nostri allievi, e obbligarli a fare il loro dovere, bisogna che voi non dimentichiate mai che rappresentate i genitori di questa cara gioventù, che fu sempre tenero oggetto delle mie occupazioni, dei miei studi, del mio ministero sacerdotale, e della nostra Congregazione salesiana. Se perciò sarete veri padri dei vostri allievi, bisogna che voi ne abbiate anche il cuore; e non veniate mai alla repressione o punizione senza ragione e senza giustizia, e solo alla maniera di chi vi si adatta per forza e per compiere un dovere.
Quante volte, miei cari figliuoli, nella mia lunga carriera ho dovuto persuadermi di questa grande verità! E’ certo più facile irritarsi che pazientare: minacciare un fanciullo che persuaderlo: direi ancora che è più comodo alla nostra impazienza e alla nostra superbia castigare quelli che resistono, che correggerli col sopportarli con fermezza e con benignità. La carità che vi raccomando è quella che adoperava san Paolo verso i fedeli di fresco convertiti alla religione del Signore, e che sovente lo facevano piangere e supplicare quando se li vedeva meno docili e corrispondenti al suo zelo.
Difficilmente quando si castiga si conserva quella calma, che è necessaria per allontanare ogni dubbio che si opera per far sentire la propria autorità, o sfogare la propria passione.
Riguardiamo come nostri figli quelli sui quali abbiamo da esercitare qualche potere. Mettiamoci quasi al loro servizio, come Gesù che venne a ubbidire e non a comandare, vergognandoci di ciò che potesse aver l’aria in noi di dominatori; e non dominiamoli che per servirli con maggior piacere. Così faceva Gesù con i suoi apostoli, tollerandoli nella loro ignoranza e rozzezza, nella loro poca fedeltà, e col trattare i peccatori con una dimestichezza e familiarità da produrre in alcuni lo stupore, in altri quasi scandalo, e in molti la Santa speranza di ottenere il perdono da Dio. Egli ci disse perciò di imparare da lui ad essere mansueti e umili di cuore (4r.Mt 11,29).
Dal momento che sono i nostri figli, allontaniamo ogni collera quando dobbiamo reprimere i loro falli, o almeno moderiamola in maniera che sembri soffocata del tutto. Non agitazione dell’animo, non disprezzo negli occhi, non ingiuria sul labbro; ma sentiamo la compassione per il momento, la speranza per l’avvenire, e allora voi sarete i veri padri e farete una vera correzione.
In certi momenti molto gravi, giova più una raccomandazione a Dio, un atto di umiltà a lui, che una tempesta di parole, le quali, se da una parte non producono che male in chi le sente, dall’altra parte non arrecano vantaggio a chi le merita.
Ricordatevi che l’educazione è cosa del cuore, e che Dio solo ne è il padrone, e noi non potremo riuscire a cosa alcuna, se Dio non ce ne insegna l’arte, e non ce ne mette in mano le chiavi.
Studiamoci di farci amare, di insinuare il sentimento del dovere, del santo timore di Dio, e vedremo con mirabile facilità aprirsi le porte di tanti cuori e unirsi a noi per cantare le lodi e le benedizioni di colui, che volle farsi nostro modello, nostra via, nostro esempio in tutto, ma particolarmente nell’educazione della gioventù.

NOVENA A SAN GIOVANNI BOSCO
1°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per l'amore ardente che portasti a Gesù nel Santissimo Sacramento e per lo zelo con cui ne propagasti il culto, soprattutto con l'assistenza alla Santa Messa, con la Comunione frequente e con la visita quotidiana, ottienici di crescere sempre più nell'amore, nella pratica di queste sante devozioni e di terminare i nostri giorni rinvigoriti e confortati dal cibo celeste della Santa Eucaristia. Gloria al Padre...
2°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per l'amore tenerissimo che portasti alla Vergine Ausiliatrice che fu sempre tua Madre e Maestra, ottienici una vera e costante devozione alla nostra dolcissima Mamma, affinché possiamo meritare la sua potentissima protezione durante la nostra vita e specialmente nell'ora della morte. Gloria al Padre...
3°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per l'amore filiale che portasti alla Chiesa e al Papa, di cui prendesti costantemente le difese, ottienici di essere sempre degni figli della Chiesa Cattolica e di amare e venerare nel Sommo Pontefice l'infallibile vicario di Nostro Signore Gesù Cristo. Gloria al Padre...
4°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per il grande amore con cui amasti la gioventù, della quale fosti Padre e Maestro e per gli eroici sacrifici che sostenesti per la sua salvezza, fa' che anche noi amiamo con amore santo e generoso questa parte eletta dei Cuore di Gesù e che in ogni giovane sappiamo vedere la persona adorabile del nostro Salvatore Divino. Gloria al Padre...
5°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che per continuare ad estendere sempre più il tuo santo apostolato fondasti la Società Salesiana e l'istituto delle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ottieni che i membri delle due Famiglie Religiose siano sempre pieni del tuo spirito e fedeli imitatori delle tue eroiche virtù. Gloria al Padre...
6°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che per ottenere nel mondo più abbondanti frutti di fede operosa e di tenerissima carità istituisti l'Unione dei Cooperatori Salesiani, ottieni che questi siano sempre modelli di virtù cristiane e sostenitori provvidenziali delle tue Opere. Gloria al Padre...
7°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che amasti con amore ineffabile tutte le anime e per salvarle mandasti i tuoi figli fino agli estremi confini della terra, fa' che anche noi pensiamo continuamente alla salvezza della nostra anima e cooperiamo per la salvezza di tanti nostri poveri fratelli. Gloria al Padre...
8°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che prediligesti con amore particolare la bella virtù della purezza e la inculcasti con l'esempio, la parola e gli scritti, fa' che anche noi, innamorati di così indispensabile virtù, la pratichiamo costantemente e la diffondiamo con tutte le nostre forze. Gloria al Padre...
9° giorno - O gloriosissimo San Giovanni Bosco che fosti sempre tanto compassionevole verso le sventure umane, guarda a noi tanto bisognosi dei tuo aiuto. Fa' scendere su di noi e sulle nostre famiglie le materne benedizioni di Maria Ausiliatrice; ottienici tutte le grazie spirituali e temporali che ci sono necessarie; intercedi per noi durante la nostra vita e nell'ora della morte, affinché possiamo giungere tutti in Paradiso e inneggiare in eterno alla Misericordia divina. Gloria al Padre...

PREGHIERA A SAN GIOVANNI BOSCO
O San Giovanni Bosco, padre e maestro della gioventù,
che tanto lavorasti per la salvezza delle anime,
sii nostra guida nel cercare il bene delle anime nostre e la salvezza dei prossimo;
aiutaci a vincere le passioni e il rispetto umano;
insegnaci ad amare Gesù Sacramentato, Maria Ausiliatrice e il Papa;
e implora da Dio per noi una buona morte,
affinché possiamo raggiungerti in Paradiso. Amen.

ORAZIONE DAL MESSALE
O Dio, che in san Giovanni Bosco
hai dato alla tua Chiesa un padre e un maestro dei giovani,
suscita anche in noi la stessa fiamma di carità
a servizio della tua gloria per la salvezza dei fratelli.
Per il nostro Signore Gesù Cristo, tuo Figlio, che è Dio,
e vive e regna con Te, nell’unità dello Spirito Santo,
per tutti i secoli dei secoli. Amen.

Autore: Fabio Arduino

 

Spunti bibliografici su San Giovanni Bosco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Isoardi Giancarlo, Don Bosco si racconta, Elledici, 2012 - pagine
Portale Giuseppe, Il soprannaturale in San Giovanni Bosco, Edizioni Segno, 2011 - pagine
Bosco Giovanni (san), Memorie dell'oratorio, LAS Editrice, 2011 - 240 pagine
Wirth Morand, La bibbia con Don Bosco, LAS Editrice, 2011 - 756 pagine
Corona Irene, Le profezie di Don Bosco, Edizioni Segno, 2011 - pagine
Bosco Giovanni (san), Memorie dell'Oratorio, Elledici, 2011 - pagine
Bianco Enzo, Don Bosco la vita per i ragazzi, Elledici, 2011 - 96 pagine
Davico Riccardo, Gioca e colora con Giovanni Bosco, Elledici, 2011 - 32 pagine
Ferrero Bruno, Bertelle Nicoletta, Storia di don Bosco, Edizioni Messaggero, 2011 - pagine
Dlapka Vit, Don Bosco. Il santo dei ragazzi, Elledici, 2010 - pagine
Asti Gianni, Don Bosco e le vocazioni, Elledici, 2010 - 184 pagine
Perrenchio Fausto, La Bibbia negli scritti di don Bosco, LAS Editrice, 2010 - 624 pagine
Beltrami Sac. Andrea, Massime del Santo Don Bosco, Edizioni Segno, 2010 - pagine
Arthur J. Lenti, Don Bosco: History and Spirit. 7, LAS Editrice, 2010 - 496 pagine
Russo Claudio, Don Bosco, pensieri per una buonanotte, Elledici, 2010 - 112 pagine
Altri suggeriment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6-01-28

 

 

 

 

 

Saint John Bosco 
Also known as
Don Bosco
Giovanni Bosco
Giovanni Melchior Bosco
John Melchoir Bosco

Memorial
31 January


Profile

Son of Venerable Margaret Bosco. John’s father died when the boy was two years old; and as soon as he was old enough to do odd jobs, John did so to helps support his family. Bosco would go to circuses, fairs and carnivals, practice the tricks that he saw magicians perform, and then put on one-boy shows. After his performance, while he still had an audience of boys, he would repeat the homily he had heard earlier that day in church.

He worked as a tailor, baker, shoemaker, and carpenter while attending college and seminary. Ordained in 1841. A teacher, he worked constantly with young people, finding places where they could meet, play and pray, teaching catechism to orphans and apprentices. Chaplain in a hospice for girls. Wrote short treatises aimed at explaining the faith to children, and then taught children how to print them. Friend of Saint Joseph Cafasso, whose biography he wrote, and confessor to Blessed Joseph Allamano. Founded the Salesians of Don Bosco (SDB) in 1859, priests who work with and educate boys, under the protection of Our Lady, Help of Chistians, and Saint Francis de Sales. Founded the Daughters of Mary, Help of Christians in 1872, and Union of Cooperator Salesians in 1875.

Born
16 August 1815 at Becchi, Castelnuovo d’Asti, Piedmont, Italy as Giovanni Melchior Bosco
Died
31 January 1888 at Turin, Italy of natural causes
Venerated
24 July 1907 by Pope Pius X
Beatified
2 June 1929 by Pope Pius XI
Canonized
1 April 1934 by Pope Pius XI


Patronage
apprentices
boys
editors
Mexican young people
laborers
schoolchildren
stu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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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s

Prayer to Saint John Bosco
Prayer re Saint John Bo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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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e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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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Community Forum
Catholic Encyclopedia, by E F Saxton
Catholic Online, by Terry Metz
Domestic-Church, by Catherine Fournier
Don Bosco UK
Father W G Austen S.D.B.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New Catholic Dictionary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The Secret of Saint John Bosco, by Henri Gheon
Wikipedia


Readings

Fly from bad companions as from the bite of a poisonous snake. If you keep good companions, I can assure you that you will one day rejoice with the blessed in Heaven; whereas if you keep with those who are bad, you will become bad yourself, and you will be in danger of losing your soul. - Saint John Bosco

Enjoy yourself as much as you like – if only you keep from sin. - Saint John Bosco

Do you want our Lord to give you many graces? Visit him often. Do you want him to give you few graces? Visit him seldom. Visits to the Blessed Sacrament are powerful and indispensable means of overcoming the attacks of the devil. Make frequent visits to Jesus in the Blessed Sacrament and the devil will be powerless against you. - Saint John Bosco

My sons, in my long experience very often I had to be convinced of this great truth. It is easier to become angry than to restrain oneself, and to threaten a boy than to persuade him. Yes, indeed, it is more fitting to be persistent in punishing our own impatience and pride than to correct the boys. We must be firm but kind, and be patient with them. See that no one finds you motivated by impetuosity or willfulness. It is difficult to keep calm when administering punishment, but this must be done if we are to keep ourselves from showing off our authority or spilling out our anger. Let us regard those boys over whom we have some authority as our own sons. Let us place ourselves in their service. Let us be ashamed to assume an attitude of superiority. Let us not rule over them except for the purpose of serving them better. This was the method that Jesus used with the apostles. He put up with their ignorance and roughness and even their infidelity. He treated sinners with a kindness and affection that caused some to be shocked, others to be scandalized and still others to hope for God’s mercy. And so he bade us to be gentle and humble of heart. - from a letter by Saint John Bosco

MLA Citation

“Saint John Bosco”. Saints.SQPN.com. 12 August 2010. Web. {today’s date}.
 

 

 

 


January 31
St. John Bosco
1815-1888
St. John Bosco, one of the greatest saints of modern times, was born in a Piedmontese village in 1815. When he was 2 years old, he lost his father, a humble peasant farmer; and he was brought up by his saintly Tertiary mother, Margaret. It was no doubt due to her example and influence that John too joined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Even as a youngster, John recognized that it was his vocation in life to help poor boys; and he began to teach catechism to the boys of his own village and bring them to church. Acrobatic stunts and conjuring tricks were the means he used to get them together.

At 16 he entered the seminary at Chieri. He was so poor at the time, that the mayor contributed a hat, the parish priest a cloak, one parishioner a cassock, and another a pair of shoes. After he was ordained a deacon he passed on to the seminary in Turin; and there, with the approbation of his superiors, he began to gather together on Sundays poor apprentices and waifs of the city.

 
Not long after his ordination to the priesthood in June, 1841, he established what he called a Festive Oratory, a kind of Sunday school and recreation centre for boys, in Turin. His mother came to be his housekeeper and mother of the Oratory. Two more Oratories in the same city followed. When Father John Bosco’s mother did in 1856, the Oratories housed 150 resident boys; and there were four Latin classes and four workshops, one of them a printing press. Ten young priests assisted Father John in his work. Father John was also much in demand as a preacher; and he spent half of his nights in writing popular books in order to provide good reading.

Father John’s confessor and spiritual director was the saintly Tertiary priest Joseph Cafasso; and Father John too gained the reputation of being a saint. Miracles, mostly of healing, were attributed to him. By his kindness and sympathy and his marvellous power of reading the thoughts of his boys, he exercised a profound influence upon his charges. He was able to rule them with apparent indulgence and absence of punishment, something the educationists of the day could not understand. In 1854 Father John founded the religious order of Salesians, so called in honour of St. Francis de Sales. Its members devote themselves to the education of poor boys. The new society grew rapidly. Father John lived to see 38 houses established in the Old World and 26 in the New World. Today it is one of the largest orders of men in the Church.

Father John also founded a sisterhood called Daughters of St. Mary Auxiliatrix; and he organized many outside helpers into the Salesian Co-operators, who are pledged to assist in some way the educational labours of the Salesians. In 1930 they totalled 800,000.

Father John’s last great work was the building of Sacred Heart Church in Rome, a task which was entrusted to him by Pope Pius IX after it has seemed to be a hopeless project. The holy priest, who was everywhere acclaimed as a saint and wonderworker, gathered funds for the church in Italy and France; and somehow he succeeded where others had failed. But in doing so he wore himself out. and on January 31, 1888, he was called to his reward. Forty thousand persons came to pay their respects as his body lay in state in the church at Turin; and his funeral resembled a triumphal procession. St. John was canonized in 1934.

ON THINKING KINDLY OF OTHERS
What was the secret of St. John Bosco’s wholesome influence on the boys who came under his care? Was it not the spirit of St. Francis of Assisi and of St. Francis de Sales, with which he was deeply imbued? A spirit, which made him think kindly of these boys in the first place, and then caused him to do all he could for their temporal and spiritual welfare? Thinking kindly of others, we will have understanding for them, judge them charitably, and show them our esteem. To understand another means to put ourselves in his place and to take into consideration everything which has made and makes him what he is: his character and disposition, his background and environment, his interests and strivings, his problems and needs. To understand another means to go beyond the narrowness of human judgement and to acquire something of the depth and breadth of the vision of God, who has the deepest understanding for every human being. It means to become similar to our divine Saviour, in whom the goodness and love of God became visible, and who during His sojourn on earth showed such deep and loving understanding for His Apostles and all who came to Him with their problems or listened to His word. When there is perfect harmony between two persons, we say that they understand each other; when there is disharmony, it is often due to misunderstandings.
He who has understanding for others, will also judge them with charity and mercy, even when their faults are evident and undeniable. He will not be inflexible and harsh in his judgement, for he will discover mitigating circumstances and recognize many good qualities. The all-holy God does not cast off and despise the sinner, even when his sins are grievous ands inexcusable. His love and grace pursues every human soul in order to bring the good in it to victory and perfection. Thinking kindly of others and judging them charitably makes us like God; it is a sign that we are united with God in love. It is an indication of greatness of soul and spiritual maturity. Like St. Francis de Sales, St. John Bosco was criticized for being too kind and indulgent; but he understood his boys and judged them charitably because of his nobility of soul and his constant union with God.
He who thinks kindly of others will also show them esteem; and sincere esteem is a source of great pleasure and encouragement to the recipient. It makes him feel that we believe in the good that is in him, or at least that we believe in his final victory. By showing esteem to another we appeal to his sense of honour, and this is a powerful moral force which the Creator Himself has implanted in all men. On the other hand, a culprit who receives only contempt from his fellowmen often loses the last particle of his self-respect and self-confidence and with it all moral support and incentive. St. John Bosco believed in the good that was in his boys; he encouraged them to keep on trying; he had compassion with them in their difficulties; he was solicitous about their temporal and spiritual progress. Always to think kindly of our fellowman, and to prove it by seeking to understand him, to judge him charitably, and to show him our esteem -- that is the Franciscan way of dealing with our neighbour and loving him sincerely.

PRAYER OF THE CHURCH
O God, who hath raised up in Thy confessor St. John Bosco a father and teacher of youth, and didst will that through him with the help of the Virgin Mary new religious families should flourish in the Church, grant, we beseech Thee, that enkindled by the same fire of charity we may be able to labour in finding souls and serve only Thee. Through Christ our Lor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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