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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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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범 [bagdudegan] 쪽지 캡슐

2010-01-12 ㅣ No.10989


당신 하루하루 열너덧시간 택시몰고 새벽에 들어오면서

몇만원씩 벌어오는 돈이 내게는 천금보다 소중하고 귀하답니다.

아침에 애들 학교보내면서 필요한 용돈 주는것 말고는

푼푼히 통장에 전부다 넣어버리지요..


어느땐 통장에 넣을 새도 없이 다 나가버리기도 하지만

만원이든 이만원이든 꼬박꼬박 넣어서 모아지면

필요한 공과금 내고 애들 학비에 보험에 전화요금에....

어느새 통장은 늘 바닥이 나있지요..


우린 늘 필요한 그만큼만 누리고 살아요.

요즘은 손님도 더 없고 경기도 안좋은데

당신은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고

손님없는 새벽시간에도 이리저리 쉴새없이 차를 몰지요..


어느새 내년이면 대학생인 큰딸, 고등학생인 큰아들..

그리고 중학생 셋째, 초등생 막내..

우린 그렇게 여섯식구가 그리 풍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함도 그리 느끼지않으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지요.

좀전에 당신한테 난 그랬지요

세째녀석이 소풍비 가져가야 한다고 만팔천원..

손님없으면 만팔천원만 벌고 와요~

내일은 만 팔천원만 필요해요 라고

기가막힌지 껄껄 웃던 당신 목소리..

당신이 힘들지 않았음 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가족모두가 힘들다고 느끼지않고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만족하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너무 멀리들 보느라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 학비걱정에 먼저 한숨이고

다가오지 않은 노후자금 걱정에 잠시도 마음놓고 살지 못하는 이 현실에서

우린 그냥 바보스러울 만큼

묵묵히 하루만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사랑하기로해요..


욕심부리다가 제 욕심에 제가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가장 소중한 것은 정말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인것을 잊지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감사하고 그렇게 살아가기로해요..

난 참으로 많이 감사합니다..


여러번의 고비끝에서도 다시금 최선을 다해주는 당신에게..

풍족하게 챙겨주지 못하지만 늘 씩씩하고 명랑하고 착한 울 애들에게..

참으로 많은것을 내가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 만팔천원만 벌고 와요..

남들에겐 작아보이는 그 만팔천원이겠지만

그 돈이면 우리 하루는 또 아무런 근심없이 행복하게 지날겁니다..








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더딘 열차에서 노곤한 다리 두드리는 남루한 사람들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도에도 없는 간이역 풍경들과 눈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급행열차는 먼저 보내도 좋겠습니다.

종착역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운영이 피고 진 넓은 들을 만날 수 있다면.

들이 끝나기 전, 맨발로 흙을 밟아 보겠습니다.

신발을 벗어들고 천천히 흙내음에 한참을 젖겠습니다.

쉬엄쉬엄 걷는 길 그 끝 어디쯤에 주저앉아

혼자 피어있는 동백이며 눈꽃이며

키 작은 민들레의 겨울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봄이 깊기를 기다리라고 이르기도 하겠습니다.

기차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열고

해지는 들에서 노을 한 개비를 말아 피우겠습니다.

이제껏 놓지 못한 시간을 방생하겠습니다.

봄이 오기 전, 완행열차를 타고 남으로 가겠습니다.

남녘 어디라도 적당합니다.


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 김두일








 


♬ 물고기 자리 / 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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