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공현 대축일(가해) 마태 2,1-12; ’2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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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12-17 ㅣ No.5259

주님 공현 대축일(가해) 마태 2,1-12; ’23/01/08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목동과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의미로 기념하고 되새기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 교부에 이어 8세기경 동방박사들의 이름을 발타살, 멜키올, 카스팔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밤하늘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경배하러 온 것을 기념하며, 우리도 주 예수님과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복음 말씀과 희생적인 사랑으로 영적 여정을 시작하고자 다짐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라고 묻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1.3)라고 예언하고 있고,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가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시편 72[71],11)라고 노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등장합니다.

그러자 헤로데 임금과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지만, 전혀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고 다른 분야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가 봅니다. 헤로데는 다급하게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를 묻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5-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8)라는 거짓말로 정보를 알아내고자 합니다. 헤로데는 이어지는 복음 구절에 나타나듯이 박사들이 알려준 때를 전후하여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다시 나타난 별을 따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서는 보물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10-11절 참조). 그렇지만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는, 헤로데의 음모를 피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갑니다(12절 참조).

 

오늘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기억하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동방박사들은 평소에 무엇을 찾아 헤매었을까?’

동방박사들이 평소에 어떤 분야에 관심을 두고 몰두했기에 예수 아기의 별을 발견했을까?’

그 나라에도 뭔가 중요하고 신비롭고 새로운 출현에 대한 전설과 전통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나름 그 시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몰두하던 뭔가가 있었을 텐데. 그런 것들을 다 뒤로하고, 예수 아기의 별을 발견하고 그 별에서 구세주의 빛임을 확인하고, 자기가 살던 곳과 추구하던 것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미지의 분야로 자신들이 발견한 인류를 구원하실 주인공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향하여 길마저 떠날 수 있었을까?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런 행동에까지 이르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라면, 어떤 표징을 바라보고는 우리의 현재를 버리고 투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도 잠기게 해 줍니다.

 

이와의 연장선 안에서 고려해 볼 때, 성당 공동체 활동은 기도를 바탕으로 한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당 공동체 활동은 세상살이처럼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꿈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도 되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의 구분없이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인간의 노력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성인 동화를 보면, 세상살이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회현상에서, 탐욕의 무한경쟁과 권력과 욕망의 피라미드같은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마치 거기에 생명과 희망과 행복이 있기라도 하는 듯이 여기고, 죽을지도 모르면서 기를 쓰고 쫓아 오르는 인간 군상들의 아이러니한 현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동화를 기반으로 한 노래 가사의 후렴을 보면, “네가 추구하던 세상의 허황된 것. 허공에 쌓아진 시기와 질투의 탑일뿐. 오욕과 싸우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사랑 이루워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내가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네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지금 당장 획득하기 위해서라면 너를 밟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회의 처세술과는 동떨어지게, 현실적으로 실패하고 손해보며 낙오되는 듯한 인생에 대해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 비록 추한 몰골에 자그만 애벌레이나 너 죽어 사라질때 그 위에서 떠날으는 한마리 나비되어 들판에서 피어있는 이 꽃들에게 희망을

 

그런 세상사에 반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의 꿈과 목표를 끊임없이 주님의 뜻 안에서 기획하고 재조정하면서 그 꿈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의 노력과 결과를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 의탁하고 맡기는 믿음 속에서 겸손하게 주님의 뜻에 순명하며, 우리의 노력을 채워주시기를 믿고 청하는 신앙생활에 기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또 하루하루 시작하고 반복되는 세상사에 휩쓸려서, 또 매일같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 사고와 상황과 각 환경에 맞추느라 주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말씀 연구와 적용에 대해 제대로 신경을 못 쓰고 매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 동방박사의 출현은 새롭게 주 예수님께 집중하고 복음 말씀을 되새기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기준이자 이정표인 복음 말씀이 우리의 빛이며, 그 복음 말씀이 우리를 동방박사처럼 찾아오라고, 따라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비춰주십니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고, 그 길을 찾아 나설 때 참 생명의 생생한 삶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복음 말씀을 교회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나누며 실현해 나가는 여정을 밟습니다. 그 여정이 우리가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복음을 나누는 길이며, 우리 신앙의 본질이며 공동체 생활과 활동의 기반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 주님께서 불러 주시고 비춰주시는 복음의 길을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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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5&id=189498&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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