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조중동을 욕하는 인간들 필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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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979aaa] 쪽지 캡슐

2008-08-20 ㅣ No.7702

친일신문 본격 대해부 ②...조선일보의 변절 당시 간부회의록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골화된 조중동 탄압작전 세력들이 시민단체의 이름으로 거듭난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았다. 조아세 같은 전위부대(일명 완장부대)출신들이 기고자를 찾아다니며 조중동에 협조하지 마라는 협박을 일삼아 견디다 못한 일부 필진들이 사임하거나 인터뷰를 고사했던 사례들도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조선일보 윤전기를 강제로 철거한 무법 시위대가 그토록 활개를 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에는 조선, 동아의 친일전력이 원죄처럼 들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친일 마녀사냥 앞에서는 사회의 다원성과 언론의 자유같은 근본적인 헌법적 가치들이 무색해진다.

총독부 기관지 노릇을 했던 매일신보가 제호를 바꿔 아직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이를 문제삼는 이들이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적이 애초에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 기생언론들보다 수구꼴통짓을 일관되게 하는 보수신문들이 더 밉보야할 특별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친일 떡밥에 놀아난 좀비들의 뇌경색 증세는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방어에 나서야 할 당사자들 조차도 입을 다물고 있는 무기력증에 더 짜증이 난다.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 중앙이 친일신문인가 하는 것은 1940년 조선총독부 언문신문통제에 관련된 정책자료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4대절 천황일가 찬양기사를 내보내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아, 일제의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나 폐간 직전까지 압수와 행정처분을 밥먹듯이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단순히 일왕 찬양기사가 나갔거나, 총독부 담화성 기사가 1면 탑에 배치된 것을 비난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편견일 뿐이다. 일제의 경성지방법원 편철문서 京鍾警高秘 제4466호의 1『조선일보사의 非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를 보면 당시 총독부의 명령에 의거해 황국신민의 서사(聖旨)를 신문에 전문(全文) 게재토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총독부의 명령에 순응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조선일보 社內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 바, 상기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국은 우경화의 비협조자들을 검거, 규탄토록 하고 있다. 당시 서춘의 편집방침에 반발한 조선일보 사내 분위기와 갈등, 그리고 당시 신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용이 무척 길어 일부 소략하였다.

일제의 방침과 대세에 순응하려는 서춘의 입장, 이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입장, 사장 방응모의 입장 등에 대해 기존의 선입관이나 편견을 버리고 사심없이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제 경성지방법원 편철문서

문서제목  조선일보사의 非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
문서번호  京鍾警高秘 제4466호의 1
발송일자  1938-05-24
수신일자  1938-05-26
발 송 자  京城 鍾路警察署長
수 신 자  京畿道 警察部長

요약

"서춘은 1936년 9월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의 조선일보기사 공격사건으로 크게 위협을 받아 같은 해 7월 11일 北支사변 발발 당시부터 종래의 민족주의적 태도를 버리고(放棄),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기사를 게재하기에 이르렀지만,조선일보 社內에 남아 있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었다.

그는 동아일보사의 송진우, 매일신보의 이상협, 잡지 조광의 이은상 등으로부터도 상당한 공격을 받았고, 한글(諺文) 신문계 우경(右傾=친일화)의 총책임을 한 몸에 지게 되어 사직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와 당시의 상황은 왼쪽에 기록(左記)한 것과 같다. 조선일보 사원들을 비롯해서 그러한 불량분자를 검거 규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서춘과 김형원의 감정이 멀어진(疎隔) 원인

...(중략)...

" 1936년 9월 26일경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3인은 남부지방 수해에 대해 천황폐하로부터 하사금을 받은 것을 빼버리고, 기사를 게재한 일 외에도, 여러가지 건으로 인해 친일단체 대동민우회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검사국에 고발당하는 등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서춘은 이것이 단지 대동민우회의 행위에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시대의 흐름이라 깊이 느낀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7월 11일(중일전쟁 발발 3일 후) 동맹통신(同盟通信)이 "近衛 수상은 재벌 유력자 등 朝野의 명사를 모아 거국일치(擧國一致) 시국에 매진(邁進) 등등"의 기사를 내자. 서춘은 이것을 호외로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서춘 본인은 이 사건이 중대해서 전쟁으로 전개될 것이므로, 국민의 협력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차제에 한글신문(諺文紙)은 태도를 일변(一變)해야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용어를 개정하고, 논설은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해야 한다며, 이를 사장 방응모에게 제안했다. 

방응모는 즉각 회사에서 긴급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이상 4명이 회합했다.

 서춘이 중일전쟁(北支事變)의 중대성을 설명하는 한편, 편집방침 개혁의 필요성을 논하고, 종래의 외국인의 신문과 같이 "일본군", "중국", "장개석씨" 등의 용어를 사용하던 것을 "아군", "황군", "支那", " 장개석" 등으로 개정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 따라 게재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김형원, 김광수 양인(兩人)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1) 주필 서춘의 주장과 같이 개혁하면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같은 모양(同樣)으로 되는 것이며,
(2) 조선혼(朝鮮魂)에 반(反)해,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됨으로써 부수(部數)가 감소(될 것이고),
(3) 개혁의 필요성이 있다 해도 당국의 명령을 받아 불가피해졌을 경우 개혁을 해야하는 것이지, 자발적으로는 불가하다는 등의 이유로써 반대했다.



서춘은 이에 대해

(1) 용어의 개정으로, 매일신보와 똑같이 되지는 않는다. 기사는 용어보다는 내용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용어 및 논설의 개혁에 따라 민중의 지지를 잃는다고 해도, 만일 당국으로부터 발행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면 그 어느 쪽이 더 손해가 크겠는가?
(3) 당국의 조치를 뒤늦게 받던 "신문경고(新聞警告) 시대"는 이미 과거의 일이다. 지금에 있어서는 예고 혹은 경고없이 (신문논조가) 맞지 않을 경우 직접 발행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또 교양시대(=1920년대 문화통치기)를 지난 지금에 있어서는 그러한 조치들이 당연해졌다. 특히 민중지도의 임무가 있는 신문이 1919년의 독립소요 당시와 같은 방향으로 민중을 지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4) 친일단체 대동민우회로부터 본지(本紙)의 기사에 대한 고발과 함께 비방을 당해 비상한 위험과 곤란을 느껴보지 않았는가? 앞으로는 (이러한 공격이) 대동민우회와 같은 국수단체에 국한되지 않고, (또) 어떠한 박해를 가할지 가늠하기 어렵다(圖難).

이상과 같이 답변한 서춘 vs 김형원 등의 논쟁을 청취한 방응모는 일동(一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 때문에 수십만원의 손해를 입었고(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1933년 당시 자본금은 30만원이라 함), 또 민중을 1919년 당시와 같이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음으로써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방응모에 복종하고, 같은 날 두번째로 발행된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서 편집하게 된다.

기사 우경화에 대한 반발세력

(1) 1937년 7월 14일 편집국장 김형원은 편집국장 자리에서 그의 부하로부터 편집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김형원은) 이미 "황실", "아군"이라고 써야하는 요즈음 왜 이렇게 자세한 것을 무슨 이유때문에 질문하느냐?"며 분개한 안색으로 변했고, 그 (부하)의 원고를 집어던져 버렸다. 그 장소에 와 있던 서춘이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행동을 일반사원 앞에서 보인 것은 기사의 우경화가 김형원의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암암리에 선전하는 것이었다.

(2) 김달진(金達鎭) 같은 자는 당시 서춘에 대하여 "중국을 支那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약 2시간에 걸쳐 (서춘을) 비방하였는데 그 내용은, "총독부에서는 '지나는 중국으로', '장개석을 장개석씨'로 (표기한 기사를) 게재해도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도 당신은 왜 이처럼 하느냐" 등등.

...중략...

(6)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1937년 7월 25, 26일경 총독부의 (언론검열을 맡고 있던) 도서과에 호출되어 "조선일보는 이처럼 국민적 태도로 기사를 편집하였는데, 동아일보는 어째서 태도를 바꾸지 않느냐고 질책을 당했다"고 전해지며, (송진우는) 조선일보 기사의 우경화에 대해 불평을 드러내었다.

(7) 그 후 동아일보의 사장인 송진우는 동경유학생들에 대하여 "조선일보가 우경화함으로써 동아일보는 불가피하게 우경(右傾) 기사를 게재하지만, 동아일보의 정신은 지난 날(昔日)과 하등(何等) 달라지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송진우는) 이같은 내용을 동아일보사의 사보(新聞內報)에 발표하라고 말했다. 

이러한 책동은 이상협과 송진우가 결속해서 서춘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부터 서춘은 사방으로부터 적(敵)이 되어서 무기명 협박문 등 50~60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그 중 하나는 헌병대가 입수했다.

(8) 조선일보 영업국장 김광수의 태도: 1937년 7월 중순이나 하순경 전후 2차례에 걸쳐 서춘에 대해, "당신은 총독부에 매수되었거나, 혹은 군부의 앞잡이가 되고 싶어 한다는 악평이 있으니, 반성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으나, 서춘은 완강했고, 응수하지 않았다.

서춘에 대한 규탄(糾彈)

앞서의 기록(前記)과 같이 서춘은 "스파이(spy)"라는 식으로 (서춘은) 사내외(社內外)로부터 모멸을 당했다. 그러나 방응모의 지지가 있었기에 신문의 발행에는 하등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신문부수의 감소가 악화 일로로 치닫자 1937년 10월 5일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이상 4인 (참석하에) 간부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방응모부터 

(1) 신문부수의 감소가 전쟁에 따른 불경기때문인가?
(2) (신문) 대금독촉이 엄중하기 때문에 지국들이 수금이 확실한 부수만 계상(計上)한 때문인가?
(3) 신문기사의 우경화 때문인가? 등을 제안했다.
 
서춘을 제외한 위의 3인은 "기사의 우경화에 원인었다고 하면서 (서춘을) 공격했고, 방응모는 서춘에 대하여, "모든 사람의 의견은 이상과 같은데, 서춘 주필은 의견이 어떠하십니까?" 라고 질문하자, 서춘은 "그 때문이 아니라, 왼쪽(左樣)에 있는 것과 같은 이유때문(이 비밀문서의 왼쪽면에 표시된 내용을 - 총 46면임)에 판매부수가 감소했고, 제 의견은 (이미) 말씀드린 것 외에 없습니다"라고 일축했다.

(이에) 방응모는 "오늘은 공기(空氣)가 나쁘다(惡)"라는 험담(惡口)을 남기고 폐회하였다. 이렇게 서춘은 1937년 7월 11일 이래 (조선일보) 전사원의 반대를 억누르고 오늘(今日)까지 신문의 사명을 단행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방응모가 이처럼 표변한 이상,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일종의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1937년 10월 8일 간부회의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이상 3인이 회합하여 방응모가 주필 서춘에게 "의견이 있으십니까?"라고 (지난번 회의 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서춘은 "지난 (1937년) 10월 5일 말씀하신 것은 경의(敬意)로써 들었지만, (판매)부수의 감소가 전쟁으로 인한 불경기, 혹은 대금독촉 때문이 아니라, (신문기사의) 우경화 때문"이라고 했다. "

기사의 우경화에 관해서는 간부회의를 거쳐 실행했는데. 금일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판매부수 감소가) 본인 한사람의 책임이라고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것들이 재음미(再吟味)되게끔 발언(코자) 합니다." 라고 서춘은 말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은 말하기를,
"재음미는 자기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크게 환영한다. (일본군을) 크게 환영하는 기사 등 우경화 함으로써 일반사회로부터 악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937년 10월 1일자 조간에 당신은 폭탄에 눈이 없다고 덧붙여 말하는 등 일본군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신문기사를 보자마자 찢어버리고(引裂) 싶었다."라고 (말하며) 서춘을 모욕했다.

서춘은 이에 대해,
"폭탄에 눈이 없다는 등의 자구를 넣은 이유는 신문편집의 기술상 특이한 자구를 사용, 신문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러한 단어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기술의 초월을 입증하고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라고 반박하였고, 갑론을박 끝에 회합의 목적은 상실되었다.

1937년 10월 9일 오후 5시부터 자정 12시까지의 간부회의

정치부, 경제부, 학예부, 지방부, 사회부, 교정부, 조사부의 각 부장 (7인)
서무부, 경리부, 판매부, 광고부의 각 부장 (4인)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4인)
지방 순회사원 (8인) 등 합계 23인이 조선일보사의 회의실에서 회의를 개최.
 
사장 방응모는 1937년 10월 5일의 회의 때와 똑같이 (신문판매) 부수 감소문제를 제안했는데 편집국장 김형원과 사장 방응모가 발언한 내용을 요약하면, 신문의 부수감소가

(1) 사원 일반의 성의부족 때문인가?
(2) 기술의 부족 때문인가?
(3) 신문에 흥미가 없기 때문인가? 즉, 우경화로 인해 독자들이 흥미를 잃었기 때문인가?
(4) (당국의) 통제 때문인가? (조선일보 사사에 따르면 일제는 전국의 面 사무소에까지 조선일보 구독을 정지토록 조치)
(5) 위의 1,2,4항에 대한 설명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3)항 신문의 흥미 문제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즉, 흥미있는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서 기자들은 지금까지 받는 부족한 월급에도 불구하고, 일을 함으로써 민중을 지도해 왔다. 그러나 요즈음 편집태도를 바꾸어 일본을 위한 기사를 냄으로써 독자들이 흥미를 잃게된 것은 당연하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라는 물음에 서춘을 제외한 전원일치로 우경화으로 인한 흥미부족을 강조하고 지방순회 기자들은 입을 모아 지방독자들은 신문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 때 방응모는 서춘에 대해 "전원의 의견은 이와 같은데 주필은 이에 대해 의견이 있으신지요?"라고 질문했다. 서춘은 "없다"고 대답, 폐회됐다. 폐회될 찰나에 “오늘은 (회의가) 재미있었다. 또 한번 하자" 등의 험담을 남겼다.

1937년 10월12일 오후5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간부회의 개최

방응모 이하 23명 전원이 지난 번과 똑같이 오후 12시까지 논쟁한 뒤 서춘에 대해 의견의 유무를 물었다. 이 때 서춘은 10월5일 이후의 회합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응답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러한 공격이) 한정없이 반복될 것이라고 보고, 진퇴를 결정한다는 각오로써 발언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도 발언하겠는데, 한종훈(韓鍾勳)은 “주필과 편집국장의 의견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편집상 지장이 있고, 이를 통일하기를 바란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김형원(金炯元)은 "나로서는 하등 말할 것이 없고 사장 방응모와 동감이며, 이 자리에 호출된 것에 피고가 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라며 독설을 토했다.

계속해서 서춘은 일동에 대해 "이번 지나사변 발발 초인 7월11일부터 오늘날까지 기사의 편집등에 관해 자신이 한 일이 (옳다고 믿는 바이지만), 그 편집 방침과 관해서는 금년 7월11일 긴급간부회에서 결의된 것이 오늘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으나, 본인 한사람이 두가지 책임을 지게 되는 입장이 되었다.

내가 이와 같이 편집방침을 지키고 있는 것은, (더욱 폭압쪽으로 기울고 있는) 총독정치를 반영한 것이며, (1910년부터) 일본이 통치한 이래 27년간을 보면, 25년간, 즉 4반세 동안은 '위(爲)하여' 주의(主義)로 치안유지법, 보안법, 制令 등을 표준으로 삼아 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지장이 없었는데, 始政 26년째(1936년)부터는 "위(爲)해도" 주의로 바뀌어(一變), 3년전부터는 기독교도의 신사 불참배를 문제삼는 등 불실행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신문에 국민적 기사를 쓰고, 황실의 기사를 게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본인) 서춘 개인의 행위가 아니다. 오직 시류에 순응하는 것일 뿐이다. 일본국민의 입장에 따라 기사를 게재하는 것은 결국 교장이 일본천황의 칙어를 봉독하는 것과 동일하다. 당신들은 축제일에 칙어를 봉독한다는 이유때문에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인가?

현실이 그러한대, 오직 신문만이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또 당신들은 일본의 축제일에 집에서 국기를 게양하는가? (즉, 게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인 듯)  또, 신문 기사중에는 국기 등을 등재할 것인가? -(즉, 등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 듯)

혹은 본인에 대해 "당신이 하는 일은 이완용의 그것보다도 더 지독(酷)하니, 이완용은 나라를 팔려고 조선왕실의 도장을 눌렀다면 당신은 도장을 누르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이면서도, 영구적으로 남는 문자로 기사를 써서 일본을 예찬한다"는 등의 말로 (본인을) 공격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그런 자들이 지금 여기 한자리에 있으니 감히 말한다.
 
청현도(靑縣島)의 삼전도 부근에 있는 돌비석은 300년전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할 때 청나라의 명령에 따라 건설한 것인데, 그 비문에는 "至誠至仁을 위해 용서해준 청나라의 그 은혜 감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 사람들도 역시 사람이어서 그러한 비문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나라로부터 정정을 명령받은 뒤에 일곱차례 수정된 끝에 그 비문은 작성되었으며, (그 비문의) 작자는 鄭씨, 필자는 呂씨이다.

당신들은 감히 정씨와 여씨를 원망하지만, 만약 그 때 (정씨와 여씨가 그런) 비문을 쓰지 않았다면 조선민족은 전멸했을 것이다. 또 이완용은 나라를 팔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자유의사에 따라서 한 것인가?

또 이완용은 (나라를 팔기 위해 조선왕조의) 인장 하나를 눌렀다고 불리워지고 (있기는 해도), 덕수궁내의 돌비석에는 이완용이 쓴 한 조약문이 있다. 나에게 부정하게 기사가 친일쪽으로 기울었다고(右傾)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을 그렇게 하는 그 자가 바로 부정한 자이다. 고로 자기의 정신에 비추어 타인을 똑같이 판단하는 것밖에 안된다. 자기가 정당하다면 타인도 정당하다고 판단 해야한다.

이러한 일을 놓고 3일간에 걸쳐 논쟁을 하는 것은 공포전율스러운 일이다. 만일 외부에 폭로됐을 때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신문의 부수 감소는 우경화의 불충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본인도 지방에 가서 보았지만, 결과는 당신들이 말한 것과는 반대이다. 점차 매일신보 때문에 독자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신보가 1원이고 조선일보가 1원20전이어서 독자 흡수상 다대한 지장이 있다. 또 매일신보에는 시민의 의사와 기타 민중이 요구하는 기사가 많아서, 경제 생활을 위해서는 (그리 읽고 싶지 않더라도) 매일신보를 읽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일반 민중으로부터 '조선일보 우경화' 등등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이에 반박하지 않으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상처럼 서춘은 연설하듯이 1시간 반에 걸쳐 의견을 발표했다. 그후 서춘은 곧바로 퇴직했다.
 
함상훈의 非국민적, 망은적(忘恩的) 행동

서춘, 함상훈 두사람은 동아일보사에 함께 근무했었다. 서춘은 1933년 8월 하순 방응모로부터 평생 생활보장을 하겠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조선일보로 전직했다. 함상훈은 서춘의 소개로 같은 해 9월 조선일보로 전직했다. 함상훈이 오늘날의 지위를 얻은 것은 서춘의 덕분이었지만, 만주사변 발발 때 서춘으로부터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기사를 게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거절한 이래 절교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는 위에 보고된대로 서춘에 대해 “당신은 이완용보다 더 지독하고, 이완용은 도장 하나를 눌러 나라를 팔았지만 당신은 ~~" 등의 말로써 공격했다. 또 "동아일보는 자발적으로 우경화한 것이 아니고, 조선일보가 우경 기사를 게재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따라오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사에서는 그런 취지를 상세하게 사원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킨 뒤에 우경화 기사를 게재하게 됐다. 하지만 당신은 편집차장(조선일보 폐간당시에는 편집국장임)인 본인한테 단 한마디 상담도 없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공격했다.

질책을 받은 서춘은 분개해서 "오른쪽으로 갈 것인지 왼쪽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에(만) 상담을 하는 것이며, 우경화 해야 할 필요가 명료한 오늘날엔 하등의 상담이 필요없다. 회사 방침에 반대한다면 친절히 충고하면 될 것이다. 왜 친한 사이인데도 적대행동으로 나오는가. 당신이 오늘날 편집차장 지위를 얻게된 것은 본인 덕분인데, 은혜를 모르고 본인을 비난하는가?"라며 질책했다.

그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총독부의 명령에 의거해 황국신민의 서사(聖旨)를 신문에 전문(全文) 게재(케)되는데, 함상훈은 서춘에게 "동아일보가 (황국신민 서사의) 1을 첫날에, 그 2를 둘째날에 게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또한 총독부가 황국신민의 서사를 일본어(國語) 그대로 게재하라고 명령하자 (조선일보 편집차장) 함상훈은 분개해 원고를 던져버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글(諺文)신문으로 발행 허가를 받았는데 왜 일본어(國語)기사를 요구하는가" 운운하며 불평불만을 터뜨렸다. 서춘은 그에 대해 조선일보는 전에도 영문(英文) 사설을 게재했을 당시 당신은 이를 인정(默認)하지 않는가. 총독부는 자신이 허가한 신문에 대해 무엇을 명령하든 자유이다.  또 함상훈은 그 당연한 일에 명령대로 (일본어로) 게재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날 한글(諺文)로 게재하는 등 非국민적 태도를 취했다.
 
조선일보 계열잡지 조광(朝光) 기자 이은상의 非국민적 태도

1937년 여름경 방응모가 만주사변에 대한 강연을 위해 원고를 서춘에게 의뢰, 그가 그 원고를 작성했는데, 이은상은 그 원고를 읽고 "나는 죽어도 당신이 쓴 것과 같은 원고는 쓰지 못한다"라고 공격했다.

같은 해 10월 총독부부터) 잡지 조광에 시국기사(=친일기사)를 게재하라는 명령을 받자, 사장실에 가서 사장 이하 여러 명 앞에서 "시국기사를 작성토록 명령받았으나 그 기사를 쓸 자가 없으니, 서춘 주필에게 일임하라"며 비웃는(嘲笑的) 태도를 보였다.

서춘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잡지는 당신 일이 아닌가? 또 당신이 말하는 것에는 모순이 있다. 자신이 쓰지 못하는 것은 타인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 달 잡지에 (시국기사를)게재하지 않았다. 비국민적 태도 때문이었다.
 
以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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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眞明行 | 2008/06/25 03:26 | 언.론.외.전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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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탐슨가젤 at 2008/06/25 03:42
좋은 자료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캐안습 at 2008/06/25 09:48
순수한 의도가 아닌 반대진영 까는 용도로 친일파 척결을 써먹고 있으니 당연하달까요.

오른쪽에서는 빨갱이, 왼쪽에서는 친일파...

전 열우당 김희선이 독립군손녀라고 개소리하면서 방방 뛰다가 친일파 딸인 거 알고 급버로우한 거 보면 ... 큰 웃음 주려고 일부러 그런 건가 생각도.
Commented by Mr술탄-샤™ at 2008/06/25 23:18

2003년 디시 정사겔이 한창 진보진영의 인터넷 전진기지이자 <행동하는 네티즌>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저 또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친일인명록과 친일파재산몰수에 대해

1.의도가 순수하지 못하고
2.반대당과 반대당의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기득권에 대한 복수의 의도가 짙으며
3.이미 당사자들이 사망한 입장에서 후손에 대한 단죄는 연좌제
4.조선식민36년의 경우는 프랑스 5년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5.정히 필요하다면 을사오적과 합방의 주류들에 대해서만 함이 옳으며
6.이와같은 국민지지를 등에 업은 정치적공세는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특별법령>과 다를 바가 없다

는 논지로 맞선 적이 있었지요. 당시 진보측하고 친하게 지냈고 그때 사람들 양식있는 사람들이라서 수구꼴통으로 몰리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뭐 결국 나중에 친일기준이 고무줄을 타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들어간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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