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103위 한국 순교 성인에 관하여 ~(#51-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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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남 [obbji] 쪽지 캡슐

2005-09-21 ㅣ No.4181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37은 남편)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이 막달레나는 혼기에 이르러 권 진사라는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 (아가타)를 두었고 남편이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에 따라 딸과 함께 입교했다.
그후 신앙생활을 위해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다가 1839년 7월 17일 딸과 딸의 친구인 이경이(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67은 딸, 65, 67과 함께 체포됨)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은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이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관련되어 순교한 후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崔昌顯)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친정 식구들의 생계를 도왔다. 항상 규칙적인 독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생활을 했고 뛰어난 교리지식과 열정적인 신앙으로 여회장직을 맡아보며 무지한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며 외교인 자녀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교회 일에 적극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경련은 잠시 피신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동생 현석문(玄錫文)과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주뢰 2차, 300여 대의 장(77)을 맞는 혹형을 당했고, 형조에서도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냈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信望愛)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많은 교우들을 감동시켰다. 12월 29일 현경련은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는 동생)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딸로, 4세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오빠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후 마재의 삼촌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길쌀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7월 11일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도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정정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49는 어머니, 2는 오빠, 2, 49, 57과 함께 체포됨)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18세 때 교우인 박종원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고,가정을 잘 돌보아 교우들로부터 모범 가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가정 뿐만 아니라 회장인 남편을 도와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 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고 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아우구스티노) 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로 순교했다. (62는 남편)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어머니 조 바르바라,동생 이인덕(마리아)과 함께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간 틈을 타서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수정을 결심한 후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아버지에게 써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영덕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던 조 막달레나와 이 가타리나 모녀 등과 서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헌 할 겨를도 없이 6월 어느 날 이영덕은 습격한 포졸들에게 집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66은 동생, 46, 47, 66과 함께 체포됨)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 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의 당고모, 2, 49, 54와 함께 체포됨)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26의 딸, 9, 20, 21, 26과 함께 체포됨)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 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허협 바오로는 1839년 기해 박해로 체포될 때 도감(都監)의 병정이었다. 1839년 8월경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처음엔 잘 참았으나 하루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의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곧 배교를 취소했다.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 없이 인분 한 사발을 다 마심으로써 자신의 배교 취소를 증명해 보였다. 그후 허협 바오로는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도 이상을 맞는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1840년 1월 30일 45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옥사, 순교했다.
‘이선’으로도 불리던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서울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입국 후,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피신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냈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55는 아내)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병주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할아버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瑞山)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 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9월 말 홍병주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판서는 인정상 직접 신문하지 않고 하관(7출)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홍병주, 홍영주 형제를 배교시키라고 명하여 홍병주는 가장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홍병주는 끝까지 버터냈고, 결국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동생보다 하루 먼저 순교했다. (68은 동생)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 막달레나는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 베드로와 결혼하면서 냉담했던 생활을 떠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와 성체성사를 받고부터는 더욱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6월 손소벽은 가족과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주뢰 3차,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39세로 순교했다. (50은 남편, 70은 딸, 40은 사위, 50, 70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경이 아가타는 시골에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그후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 (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 모녀의 집에서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포졸 하나가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을 탈출했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고 마침내 1840년 1일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27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2, 67과 함께 체포됨)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6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56은 언니, 46. 47. 56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 아가타는 어려서 아버지 권 진사가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따라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와 함께 입교했다.
13세 경 결혼했으나 남편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다.
그후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가, 한 집에 살게 된 이경이 아가타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의 간교로 어머니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권진이는 이경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권진이는 이경이와 함께 사관청을 탈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권진이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 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교했다. (52는 어머니, 52, 65와 함께 체포됨)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 바오로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형 홍병주 베드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후 9월말에 이르러 홍영주는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 의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마침내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63은 형)
일명 ‘경천’으로도 불리는 이문우 요한은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 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독신생활을 원하였으나 양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했고, 몇 년 후 아내와 두 어린 자녀가 사망하자 주위에서의 재혼 권유를 거절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는 한편 주교를 보좌하며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체포된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자신도 체포되었다.
이때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가?"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당황해 하는 포졸들을 재촉해서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0은 남편, 50은 아버지, 64는 어머니, 50, 64와 함께 체포됨)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 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가타리나), 이간난 (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3은 누님, 77,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 베드로는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바라와 결혼했는데 이때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그 즉시로 수계하기 시작했다. 그후 서양 신부들이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하여 첩까지 거느리고 8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과거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로 생활하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자주 하곤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로 남경문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의 신분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陽智)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 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난 우술임 수산나는 15세 때 인천의 한 교우와 결혼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2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풀려나왔는데,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육체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후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상경하여 교우들의 집에서 몸붙여 살다가 역시 과부인 이간난(아가타)과 함께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김 신부의 집에 있던 여교우들은 이 간난의 집을 거쳐 새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이 간난도 여교우들을 따라 새 집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우술임만이 남아 혼자서 이간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몸으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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