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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군종교구 국군중앙 주교좌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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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05-06 ㅣ No.839

 

[주교좌 성당을 찾아서] 군종교구 국군중앙 주교좌 본당

성인 묻혔던 땅에 '시온의 별' 우뚝... 60만 군 복음화 꿈 담아 '별' 모양으로 설계

 

 

(사진설명)

노을이 잔잔하게 비껴드는 해거름의 군종교구 국군중앙주교좌성당. 시온의 별을 상징하는 별 모양의 평면 지붕에 박해를 의미하는 로마 군인의 투구 형태로 꼭지점을 만들고 그 위에 예수성심상을 배치, 군 복음화의 의지를 담고 있다.

 

 

'60만 군 복음화, 꿈★은 이루어진다.'

 

건축은 시대정신과 풍토, 공동체의 기질 등이 깃들기 마련. 별(★) 모양으로 지어진 군종교구 국군중앙 주교좌 성당은 '시온의 별'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거기에 모든 군인의 꿈 '장성(스타)'이라는 의미가 중첩으로 내재돼 군종교구 주교좌 본당으로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군 선교'의 꿈이 함축된 서울 용산동 3가 국군중앙 성당은 그만큼 '군(軍)'이라는 공동체 정신이 짙게 반영돼 있는 셈.

 

국군중앙 성당이 군종교구의 주교좌 본당이 된 것은 현 부산 교구장 정명조 주교가 89년 11월 11일 초대 군종교구장에 임명되면서다. 이에 앞서 육군본부가 그해 5월 계룡대로 이전함에 따라 육군중앙 성당에서 국군중앙 성당으로 개칭됐고, 7개월 만에 '주교좌 본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국군중앙 성당의 전신 육군중앙 성당이 설립된 것은 51년 4월9일의 일. 전시 중 군종실무책임자로 사목한 조인원 신부는 본부 앞 건물을 빌려 제대와 장궤틀을 설치하고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다. 이 성당이 육군중앙 성당의 효시다. 이어 55년 2월 육군본부의 서울 환도 직후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가 함께 사용한 '육본교회' 시대, 69년 군종센터(현 국군중앙교회 기도온성전) 시대를 거쳐 81년 11월7일 드디어 천주교만의 교회인 육군중앙 성당이 준공돼 축성식을 갖게 된다.

 

80년 당시 성당을 설계한 정무웅(59, 루비노, 서울 삼성동 본당) 단국대 교수의 말. "당시 국방부 군종실에서 근무하시던 김계춘 신부님의 부탁으로 설계했는데, 첫 성당 설계여서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정사각형 두개 중 하나를 45도로 돌리고 이 둘을 중첩시켜 별 모양으로 평면을 설계했다. 현실적으로는 군인의 별(장성)이었고, 교회적으로는 시온의 별이었다. 또 부지가 경사지였기 때문에 지나치게 성당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물로 설계했고, 군성당이기 때문에 군인들의 기상을 높이는 데 중점을 뒀다. 그러면서 박해를 상징하는 로마 군인들의 투구를 별 형상의 지붕 꼭지점에 놓고 그 위에 예수성심상을 배치, 군의 복음화를 지향했다."

 

군 신자들의 정성과 군 예산 2억5000여만원을 들여 육군본부사령부 시설대가 공사를 맡아 완공한 국군중앙 성당은 특히 군이라는 특성이 짙게 배어 있다. 직격탄이 떨어지지 않는 한 폭탄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건축물'이라는 게 중론.

 

겉만 보면 안팎으로 붉은 벽돌 건물로 아주 평범해 보이는 교회지만, 지붕만 해도 16개의 아이빔(I-beam)으로 골격을 세우고 야전 비행장용 강철 PSP(Pre-Stressed Plane)로 덮고 콘크리트로 마감 처리를 하는 등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 때문에 성전 내부 또한 기둥을 없앨 수 있었고 제대를 향해 시선이 차단되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지게 됐다. 이후 89년 성가대석의 증축으로 기둥이 2개가 새로 설치되긴 했지만 미사 봉헌엔 전혀 지장이 없다. 그야말로 "군대에서 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당"이라는 게 예비역 중령 김한배(67, 베르나르도) 국군중앙 본당 사무장의 전언이다.

 

그러나 국군중앙 성당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기와와 벽돌을 제작해 공급하던 선공감 소속의 관청 와서(瓦署)가 위치해 있어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 '왜고개'로 불리던 이 땅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와 1866년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우세영, 남종삼, 최형 등 성인 7위와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 등의 유해가 가매장됐던 유서깊은 교회 사적지이기 때문.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뒤 그 해 가을 왜고개에 묻혔다가 박해가 진정된 다음 미리내로 이장됐으며 남종삼과 최형은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 뒤 박순집 등에 의해 왜고개에 합장됐다. 그리고 그해 3월 7일과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나머지 7위도 박순집 등이 5월 12일 시신을 찾아내 새남터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5월 27일 왜고개로 이장됐다.

 

물론 김대건 신부 등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는 현재 서울대교구 대신학교와 미리내 경당, 절두산 성당, 명동 성당 지하성당 등에 모셔져 있고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유해는 1911년 9월 프랑스 디종으로 이장됐지만 성인과 순교자의 피가 배어 있는 이 땅의 의미는 결코 퇴색될 수 없을 것이다.

 

89년 이후 정동렬, 이종남, 조상래, 최봉원, 이경훈, 이유수, 홍성학, 주묵성, 한재상 신부에 이어 현재 임석환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국군중앙 본당. 비록 주일미사 참례자는 200여명에 불과하지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국군중앙 주교좌 본당은 군종 교구청과 함께 군종교구의 별로 군신자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되어 2000년대 군복음화의 전진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믿음의 용사들, 선교를 향한 군인들의 열정은 국군중앙 주교좌 본당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

 

<평화신문, 제710호(2003년 2월 9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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