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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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21 ㅣ No.944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팔월이 시작하는 첫날 아침 철민은 야구부에 들어 갔다. 처음 입어 보는 야구 선

수복이 어색했다. 자신을 쳐다 보는 선배들의 모습도 낯설었다. 감독이 앞으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말하며 선수들에게 철민을 잘 돌봐 주라고 당

부했다. 철민은 모든 선수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잘해 보자, 잘해 봐라

고 말하는 선배들과 상견례도 했다. 낯선 곳에 선 기분이 설레게 하기도 했지만

막막함도 던져 주고 있었다. 철민은 투수 코치에게로 보내졌다. 다른 투수들이

철민의 글러브를 보며 웃었다. 투수 코치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너는 글러브를 낄수 있을 때까지는 한 참 남았지. 그게 선수 글러브냐?

너 글러브 종류에 대해서는 아냐?"

"모르는데요. 하지만 포수 글러브랑 일루수 글러브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아는데

요."

"흠, 글러브는 포지션 별로 다 달라. 외야수 글러브는 창이 길며 구멍이 나 있

지. 내야수 글러브 중에서도 공을 많이 잡는 유격수 글러브는 또 좀 달라. 투수

글러브도 당연히 다르지. 글러브는 나중에 내가 하나 사 주마."

철민이는 첫날은 그냥 운동장만 돌았다. 다른 일학년 선수들이 선배들 뒤취닥거

리나 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혜택 받은 일이었지만, 철민은 홀로 운동장

을 돌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철민이는 야구 선수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하지만 포기

하지는 않았다. 훈련으로 인해 땀으로 뒤범벅 되어 하숙집으로 돌아 와서 그냥

잠이 들고, 그 다음날 일찍 또 훈련 받으러 나갔다. 철민은 친구들을 만날 시간

이 없었다. 지윤이도 팔월달 들어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철민은 한달이 지

나도 공을 손에 잡아 보지 못했다. 스트레칭이나 순발력 향상을 위한 왔다 갔다

뛰어 다니기. 그리고 남는 시간은 운동장을 돌았다. 철민은 이학기 개강을 하는

날 집에서 연락을 받았다. 등록금 고지서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었다. 철민은 거

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에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동엽이가 보고 그냥 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그냥 제 통장에 돈을 보내 주세요. 제가 낼게요."

철민은 동엽의 표정을 살피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걸로 동엽이와의 생활을

청산했다. 철민은 다음날 야구 부원이 쓰는 합숙소로 들어 가게 되었다. 자기가

쓰던 하숙방에 선수가 아닌 일반 학생일 때의 짐을 모두 남겨 놓은 채, 그 방을

동엽이에게 맡기고서는 합숙소로 들어 갔다.

"이 방은 내 방이야. 내 짐들 그대로 둬라. 그리고 내가 언제 들어와서 잘지 모

르니까 방 청소도 좀 하고 깨끗이 사용해. 알았어."

"알았다. 일찍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한달을 버텼구나. 언제든 와라. 이

방이 내 방이란 생각은 하지 않을게. 그리고 하숙비는 내가 부담하마."

"니가?"

"나 아르바이트 하기로 했다. 중학생 둘이 과외 해 주기로 했다. 하숙비 정도

는 낼 수 있어."

"새끼 공부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게."

"노력하지 뭐. 이왕 하는거 열심히 해라."

"너 내가 선수복 입은 거 봤냐? 멋있다 너."

"후회되냐?"

"아니다."

"등록금 빌려 준 거 고맙게 생각한다. 빠른 시일 내에 갚으마."

"그래. 빨리 갚아라. 나 간다. 언젠가 날 야구장에서 보게 될 날이 있을거다."

철민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가지고 하숙집을 나왔다.

 

구월달이 들어서도 철민이는 야구 글러브는 커녕 야구공도 제대로 잡아 보지 못

하고 땀만 흘리며 체력 훈련만 받았다. 그래도 철민은 기분 좋은 경험을 하게 된

다. 구월달에 열린 추계 대학 야구 대회에 선수로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철민

은 난생 처음으로 덕 아웃이란 곳에 앉아 보았다. 철민 자신은 참 신기하다고 느

꼈다. 아직 철민은 자신이 야구 선수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민은

분명 야구 선수복을 입고 선수들과 함께 야구장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의

를 느끼던 야구란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자기 학교 야구팀은 제법 인

정을 받는 강팀이었으나 이회전에서 탈락했다. 철민은 자기팀이 일찍 탈락한 탓

에 며칠간의 휴가를 받았다. 철민은 아직 선배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다들 끼리

끼리 어딘가 외출을 나갔지만 철민은 그러지 못했다. 합숙소에 홀로 남아 자기

방을 지켰다. 같은 방을 쓰는 삼학년 형이 그런 철민이가 안스러웠는지 한 마디

던져 준 것이 조금 위로가 되었을 뿐이다. 그 형과는 같은 방을 쓰기 때문에 다

른 사람들보다는 친했다. 하지만 성장해 온 생활이 다른지라 서로 어색했던 것

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형은 철민이를 데리고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

다.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다른 선수들과 친해 질거야. 열심히 훈련에 임해라.

네가 보기에도 넌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철민이는 합숙소에 혼자 있다가 지윤이 생각이 났다.

철민은 지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지윤이는 학교를 간 모양이다. 전화를 받

지 않았다. 철민은 뭘 할까 고민을 하다가 괜히 세울대 근처로 바람을 쐬러 갔

다. 자신이 훈련을 받으면서 어려울 때 생각이 나던 두 소녀 중 하나를 보러 간

셈이다. 철민은 자신의 생활이 힘들자 가까이 지냈던 지윤이 보다는 마음에 품

고 있던 현주 생각이 더 났었다.

만 오천명이 넘는 학생이 다니는 큰 학교에서 현주를 만나기란 어려웠다. 우연

은 일어 나지 않았다. 철민은 그냥 시원해지는 가을 바람따라 묘한 가슴떨림만

느끼다 자신의 학교로 돌아 왔다. 철민은 합숙소로 돌아 가지 않고 하숙집을 찾

았다. 하숙집 자기 방문은 잠겨 있었다. 동엽은 아직 돌아 오지 않은 모양이었

다. 철민은 거기서도 괜한 웃음 한 번 짓고는 돌아 섰다. 철민은 합숙소로 들어

가다 자신이 몸 담았던 공대 건물을 보았다. 하나 둘 씩 불 밝힌 곳이 있었다.

그곳에도 그리움은 있었다. 철민은 자기만 변했을 뿐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은 그

대로 흘러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철민은 그날 부터 하지 않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철민은 합숙소로 돌아 오면서 토익 책 한권과 영어 회화를 위한 테이프

와 교재를 샀다. 두달 동안의 변화된 생활을 하면서 그 하기 싫었던 공부도 그리

움이 되어 버린 것에 철민은 약간의 허탈함을 느꼈다.

다음날도 철민은 오전 한동안 홀로 합숙소 자기방을 지켰다. 금요일이었다. 철

민은 오늘도 지윤이는 학교에 갔을 거란 생각을 했다. 전화 하기를 망설이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여보세요?"

"지윤이냐? 집에 있네?"

"너 철민이야?"

"그렇다."

"어떻게 된거야 너."

"왜?"

"왜라니? 도대체 두달 동안 왜 연락 한 번 없었던 거야. 내가 너 얼마나 찾았는

지 아니?"

"우리 하숙집 전화 번호 모르냐?"

"알지. 전화 해도 동엽이만 있고 넌 없었어. 내가 니네 하숙집도 여러번 갔었

어."

"동엽이가 암말 안해?"

"너 잘있다는 말만 하고 니가 어디 있는지는 말하지 않더라. 그리고 동엽이도

없었던 적이 많았어."

"그녀석 그래도 입은 무겁네."

"무슨 일 있는 거니?"

"없어. 오늘 한 번 볼래?"

"당연히 봐야 지 그럼."

"무슨 또 당연히야."

"나 너 꼭 봐야 돼. 그리고 참 오늘 현주 만나기로 했는데."

"응?"

"현주가 우리 집에 온다고 했어.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갈거야. 같이 보자."

"현주가 니네 집에 올거냐?"

"응."

"그럼 너네 둘이 만나라."

"너 안올거니."

"그래."

"야아. 나 너 참 많이 보고 싶단 말이야."

"현주가 언제 올거냐?"

"저녁때 쯤 올거야."

"넌 오늘 수업 없냐?"

"오전에 두시간 있었는데 늦잠 자서 못 갔어."

"잘한다. 그럼 현주 올때 까지만 너네 집 가 있으면 안될까?"

"그래. 근데 너 현주를 피하는 인상은 여전하다."

"그랬냐?"

"응."

"집에 있어라. 곧 갈게."

 

철민은 현주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보는 것을 피한 것이다. 철민은

여전히 현주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 말 정도는 건넬 수 있다고

자신했다. 왠지 모르게 철민은 지윤과 현주를 따로 생각하고 있었다.

 

"안녕."

철민이가 지윤이 집에 들어 섰다. 지윤은 철민을 보고 꿈적 놀랐다. 두달 사이

철민은 많이도 까맣게 피부가 타 버렸다. 더 건강해 보일 만도 하지만 지윤은 가

슴이 아픈 듯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너 무슨 일 있지?"

"무슨 일?"

"피부가 왜이리 탄거야?"

"내 피부가 어때서."

"요즘 뭐 다른 일 하는거야? 아르바이트 해?"

"아르바이트는 무슨. 들어가서 좀 앉자."

 

철민이가 들어 가서 자리에 앉았을 때도 지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뭔가 변

해 보이는 철민의 모습에서 걱정이 되는 표정이다.

"너 아무일도 없는거지?"

"이 기집애가 진짜."

"그럼 자주 연락 좀 해."

"알았어. 너 현주하고는 계속 연락하나 보다."

"그럼, 걔 고등학교때 친한 친구라야 나 말고 둘이나 될까? 그나마 서울 올라

온 친구는 나 뿐이야."

"그렇냐? 현주한테 잘해 줘라."

"그렇게 말하면서 넌 현주를 왜 피하냐?"

"피하는게 아니야. 그건 묻지 마라."

 

철민은 점심 무렵에 지윤이 집에 와서 밥을 얻어 먹고는 그냥 일어서려 했다.

그런 철민이를 지윤이가 저녁 무렵까지 붙잡아 두었다. 철민이는 예전 일반 학

생일때의 생활이 그리웠었다. 지윤이가 하는 이런 저런 생활들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 철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윤과 대화를 즐겼다.

"딩동."

철민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지윤이가 초인종 소릴 듣고 일어 섰다.

"누구세요?"

"나야 현주."

그 목소리를 듣고 철민은 당황했다. 급히 일어서 나갈 채비를 했다. 현주가 들

어서자 철민은 놀랐다. 현주는 지윤이 보다 더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

었다.

"어!"

현주도 철민을 보자 놀란 표정이다.

"어서와 현주야."

지윤이가 현주에게 반가움을 표시하자 현주는 놀란 표정을 바로 잡았다. 그리

고 철민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아주 친근한 어투였다.

"철민이도 와 있었네. 반가워 철민아."

철민이는 현주가 자신을 어제도 봐 온 친구에게나 하는 인사를 건네 주자 놀래

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 응. 오랜만이네."

"철민이 얘 많이 탄 것 같지 않니?"

"응. 고등학교 때 보다는..."

현주는 미소를 머금고 철민을 쳐다 보며 지윤의 말에 답해 주었다.

철민은 현주가 거실로 들어 오는 모습을 보며 지윤에게 소근거렸다.

"야 쟤가 날 언제 봤다고 쟤한테 그런 말을 하냐?"

"현주 우리 집에 자주 와. 둘이 있을 때 니 얘기 자주 한단 말이야."

지윤이가 현주도 들릴 만큼의 큰 소리로 답을 하자 철민은 좀 당혹스러웠다.

"나는 이만 가 볼게."

철민이가 간다는 소릴 내 뱉자 지윤도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현주도 마찬가지였

다. 그리고 지윤이와 현주가 동시에 말을 뱉었다.

"더 놀다 가지 왜?"

그래서 철민은 더 놀다 갔다. 아주 어색한 모습으로...현주와 지윤이가 하는 말

들만 들으며, 지윤과 현주의 표정을 살피면서 철민은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그

래도 철민은 국민학교 때, 고등학교 때 기억했던 현주의 모습을 지우고 이제 완

연히 숙녀티가 나는 현주의 모습을 마음에 품을 수가 있었다.

현주는 아주 오랜만에 철민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현주가 철민을 대하는 태

도는 같이 지냈던 국민학교 때 보다 더 거리감이 없어 보이는 친근한 어투였다.

 

가을 바람은 사내의 감성을 자극하지. 낙엽들은 사람들에게 가슴을 떨리게 하기

도 하지. 철민은 현주를 만나고, 옅어 졌던 그 애의 영상을 다시 뚜렷하게 가슴

에 담았다. 손을 잡고 걸어 가는 사람은 마음에 품은 사람을 이길 수 없었나 보

다. 지윤이가 현주 보다는 철민을 잘 았았고, 그와 친했지만, 늘 생각나는 사람

은 순간 순간 가슴 떨리게 하는 사람에게 가리워져 버린다. 철민은 지윤의 집을

떠나면서 온통 현주 생각 뿐이었다. ""친해 질 수 있다.""

다소 어이 없게도 현주의 모습은 아직 철이 없던 철민에게 의욕을 북돋아 주었

다.

철민은 막연히 꿈 꾸던 성공한 야구 선수와 아주 공부 잘하는 여자와의 결혼을

아예 자신의 목표로 바꾸었다.

 

철민은 야구 선수에 필요한 몸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철민은 자

신의 대학 동기들이 새로운 자유를 느끼며 유랑할때도, 시험기간이라 도서관을

찾을 때도 운동장에 있었다. 아직 공도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한 초보 야구 선수지

만 나름데로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철민이의 몸은 더욱 더 단단해져 갔다.

철민은 겨울 방학이 되면서 조금 자유롭고 편한 생활을 맛 보게 되었다. 철민

은 이제 야구 선수인 동료들과도 제법 친해졌다. 친해지면 친해 질수록 돌아 오

는 것은 낯선 생활이라 주어진 혜택들을 빼앗기는 것이었지만 철민은 그것이 더

좋았다. 자기도 이제는 진짜 야구 부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

배들의 짐도 들어 주고, 용구들을 챙기는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 그는 야구 부원

들과의 거리감을 좁혀 갔다. 겨울 방학이 되자 야구 부원들은 추운 겨울날이라

야외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다. 철민은 이미 다녀 본 적이 있는 헬스클럽에서 하

루 세시간 정도의 몸 만들기 훈련만 하면 되었다. 철민이는 합숙소를 떠나 동엽

과 함께 잠시간의 하숙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철민은 자주 만나지 못한 지윤이

와의 좋은 시간도 가졌고, 잠시간이었지만 자주 지윤과 같이 있던 현주도 만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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