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성당 게시판

"델리아자매님의" 아버지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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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lee67] 쪽지 캡슐

2001-10-24 ㅣ No.8483

 

 

 

 글이 좀 길긴 하지만 ! 옮겨 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시면  기쁨이 느껴질거예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기뻐하는사람들 -

 

 

’내 이름이 뭐라고 그랬노?’

 

말년에 위암으로 세상을 뜨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일 전부터

자신의 세례명을 묻고 또 물으셨다.

’요한, 요한, 김 요한이요.

당신 죽어서 예수님 만날 때 예수님이 니 이름 뭐냐고 물어 보시면,

꼭 그렇게 대답해야 되요’

벌써 보름째 곡기를 끊으신, 두 눈이 쾡~한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시면서 안타까워 하셨다.

요..한  알았대이...

힘없이 고개를 끄떡이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요한 이라는 쉬운 이름이라도 과연 제대로 기억이나 하실지 조차도

걱정이 되곤 하였다.

 

나이가 40줄에 접어들자 주변에서 부고가 심심찮게 날아 오기 시작하였다.

누구네 부모님이 돌아 가셨고, 누구네 남편이 갑자기 일을 당했고,  

누구가 말기 암이라는 둥 이곳 저곳에서 죽음의 소식이 들려 오기 시작 하는 것이,

아마도 이 나이가 지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정리하여 앞으로의 남은 삶을

후회 없도록 잘 살아 보라는 그런 나이인 것 같다.

 

노인들이 흔히 말하는 그 ’죽을 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삶에도 각기 다른 형태의 삶이 있듯이

죽음에도 여러 종류의 ’복’ 이른바 ’죽을 복’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건강하셨다.  

늘 병약하셨던 어머니는 언제나 죽음을 기쁘게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사시는데 비해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죽음에 대해 늘 두려워 하시면서 사셨다.

하루를 기도와 함께 시작하시고 기도로서 끝내시고,

매일 미사며, 성당의 온갖 모임에 빠짐 없이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와는 달리

종교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사셨던 아버지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까?

어쨌던 두 분이 받아 들이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였는데,

어머니는 늘 그러한 아버지를 보시면서 어머니 당신보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 가셔야한다고 걱정을 하셨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보나마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

성당묘지에 교우들과 같이 묻히고 싶다는 - 을

무시하고 선산에 어머니를 모실 것이고,  아버지는 영원히

예수님과 만나는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걱정이셨다.

 

아버지와 예수님…………….

그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종교라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였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아버지에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 될 정도였다.

그냥 부모님이 돌아 가실 때 고통 받지 않으시고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 달라는 묵주기도를 매일 1단씩 3년 정도를 바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참으로 아버지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바치셨는데

아버지는 쓸데 없는 짓….이라시면서

기도 드리는 어머니 옆에서 몇 십년을 같이 사셨다.

간혹 어머니가 기도 드림을 소홀리 할 라 치면

’와, 오늘은 저 여자 (성모님) 한테 기도 안하노?’

라고 하셔서 우리를 웃게 하셨는데,  

그래도 아버지와 예수님은 서로 안 어울리는 관계처럼 보였다.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윗대의 많은 조상들이 농사짓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온 깡 시골

그곳에서 아버지는 초등 학교도 제대로 못 끝내시고

농사지으면서 살아 오셨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양반이라는 한가지만으로도 큰소리치면서

살아 오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둘.

다른 집은 맏아들이 공부하고 아래 동생들이 희생한다지만,

아버지는 자신보다 더 똑똑한 동생들이 공부하고 성공해야 한다 시며,

동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시면서 살아 오셨다.

아버지 3형제의 우애는 참으로 남달라서

우리는 사촌끼리도 마치 친형제이상으로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면서 지내오고 있는데,

그 남다른 아버지의 형제 우애로,

아버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우리 집안에서

고성이 오고 가는 희한한 일이 벌어 졌다.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시던 아버지는

특히 바로 아래 둘째 동생의 말이라면

콩으로 팥죽을 쑨다고 해도 믿으실 만큼 사랑하셨는데,

아버지의 묘 자리 문제로 나와 작은아버지가

서로 소리를 지르는 일이 벌어 진 것이다.  

 

우리 집안을 살펴보면, 아버지 3형제 중에서 맏이인 우리 집과

셋째인 막내 삼촌집안에서 돌아가신 내 아버지만 빼고

모두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들인데 비해

둘째 삼촌,작은 아버지는

예수쟁이 절대 반대자, 내지는 철저한 무신론자 이셨고

폐암 말기이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시다.  

 

가을 묘사 때 선산에 모두 모일 때면 늘 아버지는

할아버지 묘 아래 부분을 가리키시면서

여기는 내가 누울 자리,그리고 그 옆은 애 엄마,

저기는 동생자리, 그리고 저기는 막내자리라고

늘 말씀하시곤 하셨다.

’죽어서도 3형제 같이 있자. 동생.’

’그럽시다 형님.....’  

3형제의 애절한 사랑으로 우리 집안은 가족끼리 서로

얼굴 붉히는 일 한번 없이그렇게 잘 지내 왔다.  

아버지가 이미 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늘 부지런하시고, 건강하셨던 아버지가 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해 추석을 앞둔 얼마 전 이었다.

너무나 건강하셨던 분이셨기에 우리 가족은 도저히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었는데,

이미 암이 위를 지나 식도에까지 올라와 있다는 암담한 통보와 함께

병원에 모시고 올 필요 없이 남은 몇 달을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해지면, 병원에 모시고 오라는 의사의 말이

마치 거짓말처럼 들렸다.  

 

대수롭지 않은 위장장애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는

추석 전날 밤도 꼬빡 새시면서

우리들과 고스톱을 치시다가 새벽녘이 되자 피곤하시다 면서

자리를 뜨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화투를 잘 치시지 않지만,

오빠와 나, 그리고 올케 이렇게 4명이서 툭하면 고스톱을 같이 치곤 하셨는데,

아버지에게는 이렇게 출가한 딸까지 끼여서 토요일 밤을 같이 보내는 것이

당신에겐 최고의 기쁨 이셨기 때문에 나는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는

본의 아니게 밤늦도록 아버지와 같이 화투를 쳐 드리는 이상한 효도를 하게 되었다.

젊은 우리들은 밤 12시가 넘으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하여

화투 치다가 짬짬이 바닥에 들어 누워서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고...

푸념도 하곤 했지만, 아버지만은 처음의 그 자세 그대로

밤을 꼬빡 새워도 끄떡없이 버티시곤 했다.

 

’우리 집은 거꾸로야, 거꾸로.....

어째 70넘은 노인은 쨩쨩한데 자식허리는 끊어 질 것 같이 아프네....’  

 

우리는 아픈 허리를 두들겨 가면서도 아버지가 그만 치자고 하실 때까지

함께 하였는데,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돈을 잃어 주시고는,

잃은 돈 찾아야 하신 다며 더 치자고 고집을 피우시곤 하셨다.

아버지가 잠 오지 않는 긴긴밤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오빠와 내가 모를 리가 없어서 그냥 함께 하다 보면

밤을 꼬빡 새울 때도 많았다.

그 긴 밤을 기다리다가 지친 어머니는 거실 소파에서 주무시고

다 큰 조카들은 조카들대로 할아버지 옆에 앉아 할아버지를 응원하면서

지면 졌다고 웃고, 이기면 이겼다고 웃으며,

사소한 일에도  배꼽이 빠져라 웃고…….

그렇게 우리는 밤새 즐거워 하였다.  

 

’아버지, 나 남편에게 쫓겨나면 어떻게 해요?

 친정만 갔다 하면 함흥차사라고 윤 서방이 그러겠어요.’  

 

화투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남편도,

장인과 아내가 함께 원 없이 고스톱을 치게 해 주기 위해서(?)

친정과 같은 단지 안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배려까지 해 주었다.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신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 추석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는 밥에서 죽으로 죽에서 요쿠르트로 요쿠르트에서 아이스크림으로........

그리고 물로..........

그리고 물조차 삼키시기 힘드신다면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시기 시작하셨고,

성당의 많은 분들이 오셔서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 해 드리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절대 반대를 하시는 통에 우리를 무척 안타깝게 하셨다.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계속 예수님과의 만남을 거절하시는 아버지는 오직 둘째 동생만을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기대야 하는 상대인양 여기셨다.

작은아버지는 대구에서 매주 올라 오셔서 아버지를 보셨는데

작은아버지도 폐암2기 판정을 받으신 터라

두분의 애절한 사랑은 더욱 절절해 보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대세’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 드리기 위하여 애를 쓰곤 하였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절함도, 당신의 유일한 아들의 말도 듣지 않으셨다.

 

오빠와 올케는 나에게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막중한 책임을

또 다시 나에게 지웠는데,

꼭 이런 어려운 부분이 닥치면 모두들 나를 쳐다보는

이상한 환경이 늘 만들어지곤 하여, 그날도 나는 긴 한숨만 푹~ 쉬고

아버지와 단 둘이 방안에 있게 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를 막막함과

교육을 받지 못하신 아버지에게 종교라는 개념부터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서 얻는 진정한 평화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될 것인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나는 예수님 옷자락만 잡아당기면서

다 해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라면서 떼를 쓰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고,

얼마 후 나는 아버지의 방을 나오면서

문 밖에서 모두들 초조히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V자를 그려 보이면서 빨리 성당에 연락하여

아버지 마음이 바뀌기 전에 대세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또 하나의 영광스러운 이름 "요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늘, 성당 묘지에 묻히시기를 원하시던 어머니의 원을 내세워,

내친김에 나는 아버지를 성당묘지로 모셔 가는 어려운 과정도 이루었는데 문제는-

다음 주에 서울로 올라오신 작은아버지의 반대로 집안이 발칵 뒤집어 졌다.  

 

올케의 SOS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친정으로 달려온 나는

집안의 분위기가 예상했던 것 보다 더욱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의 장손인 오빠는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작은아버지에게 제대로 의견한번 내보지 못한 채 꾸중만 듣고 있었다.  

장손인 오빠가 선산을 거부한다는 것은 대단한 반란이었다.  

작은아버지의 분노와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이번에도 악역은 내가 맡게 되었다.  

 

주님은 왜 매번 저를 이런 일에만 꼭 쓰시는지...... 그러나,

또다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작은아버지는 아예 우리와 얼굴조차도 마주 하시고 싶어하시지 않으셨다.

고개를 외로 돌리신 채로, 폐암이심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연신 피워 대시는 그분의 옆 얼굴에 말 할 수 없는 섭섭함이 가득 하였다.  

언젠가는 한번은 부딪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는 이겨야만 했다.

사실, 선산은 많은 조상들의 묘들로 이미 초만원이라

좋은 묘자리가 없을 정도였고,

아버지가 묻히시고 싶어하시는 자리도 지난여름 폭우로

산이 많이 깎여 내려가는 바람에 가까운 산 흙으로 자리를 돋우어야만 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선산에 가신다는 것은

어머니도 선산에 묻히셔야 된다는 의미였고,

오직 기도하고 성당에 열심인 어머니의 마지막 간절한 바램인,

아버지와 함께 교우들이 있는 성당 묘지에 함께 묻히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

마지막 떠나시는 아버지를 예수님께 인도 해 드리고 싶은 우리들의 초조함,  

돌아가신 후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장례 미사일지언정

아버지 일생의 단 한번만이라도, 성당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보고 싶은

우리 가족 모두의 바램을 위해서도,

나는 난생 처음으로 70넘은 깐깐하고 고집 센 노인과의 한판을 치러야만 했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을 무시하고

종교 집단인 우리들끼리 짝짜꿍이되어 일방적으로 성당 묘지로 결정했다는

그 부분이 괘씸하다고 오해를 하셨지만,

곧 당신도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때 사랑하는 형님과 아래 위에 같이 묻히고 싶은

그 간절함이 깨어지는 아픔이 더욱 크셨으리라....

집안에 고성이 오고 가자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아버지 방으로 부르셨다.

내 평생동안 집안에 큰소리 한번 나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 마지막 가는 길에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시다면서,

작은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지으셨다.

’동생….. 미안허이... 용서하게.....

내 동생하고 같이 묻힐 수가 없게 되었네.....’

두 노인이 손을 맞잡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모두 함께 울었다.   

 

그리고, 2주 정도 지났을까

퇴근 후 아버지께 들렀다가 잠이 드신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니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옆으로 누우신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시더니

또 잠이 드셨고,

나는 아버지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당겨 덮어 드리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불 차내지 마세요.  

손이 이렇게 차지잖아요.’

다음날, 새벽 올케의 전화를 받고 남편과 나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갔고,

아버지의 호흡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는데,

내가 방안에 들어서서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아버지는 희미하게 눈을 다시 뜨시고 나를 보시더니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는 듯 하시다가 이내, 마지막 길을 떠나셨다.

두 눈에 눈물을 주루룩 흘리시면서........

’아버지, 예수님이 이리 오너라 하시면, 예, 저는 요한 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무서워하지 말고 따라 가세요, 아버지,

꼭 그렇게 하셔야 해요......’

마지막 떠나시는 아버지에게 우리는 간절한 잔소리를 해 대었다.

꼭 기억 하셔야 할텐데......

어젯밤 이미 아버지의 몸은 식어가고 계셨던 것을......

 

아버지의 손이 그렇게 차가웠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된 나는,

어제 밤 아버지 곁에서 몇 마디라도 더 얘기 할 것을 하는 후회로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사시더니

돌아 가실 때에도 그렇게 돌아 가셨다.

행여 자식들이 잠 못 잘세라 밤새도록 잘자게 기다리셨다가

새벽7시경에 조용히 유언한마디 없이 아주 평온하게 돌아 가셨다.

남들처럼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신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시골에 땅 한뼘 남기시지도 않았다.

그저 형제간의 우애와 가족간의 화목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분,

사람 몸뚱이는 잠시도 놀려서는 안 된다면서

늘 부지런함을 손수 보여 주신 분.......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를 떠나 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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