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고해성사를 통한 해방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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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 [haein] 쪽지 캡슐

2002-03-10 ㅣ No.8915

고해를 통한 해방의 체험, 자유의 체험

 

어린 소년 존니와 그의 누이 샐리가 외갓집에 놀러 갔다. 존니는 할아버지에게서 새총을 선물받았다. 그는 숲속에 들어가 열심히 새총을 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토끼도 잡아볼까 하여 새총을 쏘기도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존니는 실망해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집 뒤뜰에는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꽥꽥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존니는 그 중 한 마리에다 대고 충동적으로 새총을 겨누었다. 돌멩이가 정확히 오리의 머리에 맞아 즉사해 버렸다. 오리는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것이었다. 존니는 할머니 모르 게 얼른 헛간에서 삽을 가져다 땅을 파고 오리를 묻었다. 마침 그것을 여동생 샐리가 보았다. 샐리는 오빠가 하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 나자 할머니가 샐리에게 함께 접시를 닦자고 했다. 그러자 샐리는 할머니에게 “존니가 오늘 부엌일을 돕겠다고 했어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오빠에게 귀엣말로 “오빠, 오리 잊지 마.” 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존니는 풀이 죽어 접시를 닦았다. 그날 늦은 오후에 할아버지가 존니와 샐리를 데리고 낚시를 하러 나가려는데 할머니가 샐리에게 집에 남아 저녁 준비를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자 샐리는 다시 생긋 웃으면서 말하였다. “할머니, 오빠가 저녁준비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요.” 하고는 존니에게 살짝 말하였다. “오빠, 오리!” 존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에 남아 할머니를 도와드렸다. 그 주간 내내 샐리는 존니에게 “ 오리를 기억하고 있겠지?”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허드렛일을 존니에게 시켰다.

한 주가 지나자 존니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자 할머니는 존니를 안아주면서 말하였다. “난 벌써 알고 있었단다. 네가 새총으로 오리를 쏘던 바로 그 순간 창문으로 보고 있었거든. 넌 그때 너무나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구나. 이 할민 그때 벌써 너를 용서했단다.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네가 언제까지 샐리의 종 노릇을 할 건가 궁금했단다.”

 

인간은 회심하기 전까지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 죄는 우리 주인이 되어 우리를 좌지우지한다. 죄는 우리 마음 안에서 샐리처럼 “오리를 기억하고 있겠지?”라고 속삭이면서 우리를 예속시켜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순간 죄는 그 파괴력을 상실한다. 우리가 정말로 고백하기 어려운 죄를 고백하고 나서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은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죄의 파괴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무섭고 두려운 정의의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하며 “무조건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거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겁에 질린 죄인들이지 회심하는 죄인들이 아니다.

 

잘못을 통회하는 것과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다고 하시는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 입으로 그분을 구세주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폭군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이다. 지치고 피곤한 우리를 안아주고 힘을 주려는 바람만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이 못된 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시며 벌을 주려 벼르고 계신 분이 아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만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언뜻 훌륭한 것 같아 보이지만 올바른 신앙 태도는 아니다. 그러한 고백은 현실성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폭풍우처럼 밀려올 때에는 그러한 결심을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언제 그랬냐 싶게 까맣게 잊게 되고 만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 밑바닥에는 자기애와 자만심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고해성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까닭은 우리가 또다시 넘어진다 해도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해주기 전까지는 우리가 얼마나 죄스런 존재인지 인식하도록 이끌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우리 죄에 대한 인식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는 말이다. 하느님은 당신 정의보다는 사랑을 먼저 알려주고 싶어하신다.

 

“어서 야훼께로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주신다. 이틀이 멀다하고 다시 살려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그러니 그리운 야훼님 찾아 나서자.”(호세 6,1­3)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보냈다.”(이사 44,22)

 

“내가 그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보아주겠고 그들의 죄를 더 기억하지 않으리라.”(히브 8,12)

 

그러니 회심하는 인간은 자기 죄와 허물에 지나치게 주목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용서에 더 주목하며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시편 130의 저자처럼 회심하는 순간에 “나는 희망하나니 내 영혼은 희망하나니, 나는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를 배반하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똑같이 통회했지만 유다는 자살을 하고, 베드로는 으뜸 제자가 된 까닭은 유다는 자기 죄만을 바라보고 절망하여 스스로를 단죄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을 의탁하고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 송봉모 신부님의 ’회심하는 인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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