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성당 게시판

[자료]풍납동 본당10년사-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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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근 [pnc339] 쪽지 캡슐

2001-07-27 ㅣ No.1240

안녕하세요!

 

지난날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변화를 거쳐 왔는지

다시금 그때의 추억과 정열과 사랑을 되돌아 보며

사귐, 섬김과 나눔을 통한 대희년을 거쳐온 현재의 신앙을

어떻게 승화 시킬 것인가를 잠시만이라도 묵상을 가져 보았으면 하는 뜻에서

작년 8월에 발간된 풍납동 본당 10년사 책자에 기록된 글을 순서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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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동 본당 10년사   

 

 - 차 례 -

 

 1부 풍납동 교회사

   1장 풍납.성내동의 여명기

 1) 유래

 2) 신앙공동체의 형성   

                      -------- 1차분 ------

   2장 초기 공소 시절

 1) 공소 설정 배경과 경위

 2) 공소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3) 초기 공소활동 및 성전건립의 꿈

                      -------- 2차분 ------

   3장 풍납동 본당설립

 1) 초대 이재철 신부의 부임과 활동

 2) 초기의 사목조직과 복음생활

 3)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4) 사목협의회의 구성과 신심단체의 활성화

 5) 성전건축 추진위원회

                      -------- 3차분 ------

   4장 성전신축을 위한 노력

 1) 주상배 신부의 부임과 소공동체 활성화

 2) 부임 초기의 사목 조직과 활동

 3) 성전 착공을 위한 노력과 성전건립기금 모금

 ① 신립금 모금

 ② 바자회 모금

 ③ 주임신부의 모금강론

 ④ 폐품 수집

 4) 청소년사목과 여름캠프

 5) 난항을 겪은 초기 건립 공사

 

   5장 새성전 축성과 대희년의 준비

 1) 임시성전에서의 첫미사

 2) 신자배가운동

 3) 새성전의 축성 및 봉헌식

 

  2부  풍납동 성전 건축약사

   1장 당시의 상황과 성전건축의 취지

   2장 성전건축의 준비-성전건축의 횃불이 타오르다

 1) 성전부지 구입과정

 2) 성전부지의 조건

 3) 형질변경

 4) 성전 건축설계 지침 결정

 5) 설계의 공모

 6) 시공회사의 선정

 

   3장 성전의 착공

 1) 기공식

 2) 토목 공사와 주변민원 발생

 3) 골조 공사와 설계변경

 4) 부분입주와 공사일정

 5) 성전건축상의 세부문제

 6) 성탄미사

 7) 성전의 내부장식과 성물들

 

   4장 축성미사와 본당설정 10주년 기념

 

  3부  사진으로 보는 풍납동 본당 10년

 

  4부  우리 본당의 단체사

 

  5부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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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풍납동 교회사

 

제3장 풍납동 본당설립

 

1) 초대 이재철 신부의 부임과 활동

공소시절 1년동안 본당의 기틀을 만든 오태순(토마) 신부가 자본당으로 돌아가고, 1989년 2월17일 이 재철(요셉)신부가 풍납동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이재철(李載鐵)신부는 1959년 6월2일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1983년 가톨릭 대학 신학부를 졸업함과 동시에 부제서품을 받은 후, 천호동본당(’85년~’87년), 논현동본당(’87년~’89년)의 보좌를 거쳐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풍납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이제 주임신부의 부임으로 공소시절의 신앙공동체는 천주교 풍납동교회가 되어 거듭 태어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풍납동에 부임한 즉시 이신부는 예비자교리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교우들의 얼굴을 익히고 신앙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전신자 가정방문과 구역미사를 시작하였다.

5년의 임기동안 이신부의 사목방향은 크게 ’신자들의 화합과 일치, 교육을 통한 신자들의 신앙수준 고양’에 놓여 있었다.

특히 천호동에서 분가하여 나왔기 때문에 풍납동본당 초기에는 신자들이 정서적으로 천호동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신부는 신자들의 화합과 일치를 재임기간동안 내내 강조하였다. 폐품수집, 음식잔치 등의 활동은 성전기금마련이라는 명분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시도였고 이신부의 이러한 사목방향은 꾸준히 실천에 옮겨졌다.

새로운 본당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화합을 위해 스스로 면담, 방문을 요청했고, 오물 쓰레기로 악취가 풍기고 쇠파리떼들이 모여있던 성전부지에서 본당 봉사자들과 똑같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을 하고 땀을 흘렸다.

 

이신부의 부임을 전후해서 본당에는 여러 단체들이 발족하였다.

1989년 2월 중에 제헌회, 선종회, ME, 복사단, 레지오, 즉 평화의 모후 프레시디움(이후 Pr.로 표기함),성가정의 어머니 Pr., 인자하신 정녀 Pr., 로사리오의 모후 Pr., 바다의 별 Pr. 등이 새로 생겨났다. 곧 이어서 3월에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꾸리아, 4월에는 신비로운 그릇 Pr., 그리고 10월에는 청년전례단, 청년성가대가 발족하였다.

곧이어 11월에는 구세주의 모친 Pr., 애덕의 모후 Pr., 순결하신 모후 Pr., 찬송하올 정녀 Pr., 천사들의 모후 Pr., 자비의 모후 Pr.이 구성되었다.

이제, 제대봉사와 전례교육, 주일학교운영, 가정성화 등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봉사단체가 발족함으로써 본당의 기본 틀은 차츰 잡혀 나가게 되었다.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나 비록 임대한 건물이나마 신심이 타오르는 신자들로 인해 빛이 났다.

 

4월 11일부터 시작한 본당신부의 가정방문은 6월 16일에 모두 끝났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이신부는 각 구역과 반 신자들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착하고 순박한 신앙심으로 가득찬 신자들의 모습 속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이신부는 이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16)  이 신부는 구역의 활성화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다루었다.

 

냉담교우를 찾아내어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와 일체감을 이루는데 다시 없이 중요한 구역의 활성화는 어찌보면 본당의 사활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레지오 단원들의 냉담교우 찾기를 독려하고 이신부 스스로 구역모임, 반모임에 참석했다. 이것은 본당신부의 재임내내 꾸준히 지켜졌다.

 

한편으로 이신부는 신자들의 재교육에 사목의 주안점을 놓고 성지순례, 성서공부, 피정, 특강 등 여러 활동을 지도했다.

1989년 5월 12일, 기획분과장 정영택(베드로) 형제는 봉사자들을 모아 교육을 실시하고 대형버스 15대와 봉고차 1대에 탑승 할 책임자들을 선정하며 묵상 및 기도자료를 작성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700여명의 신자들이 베티 성지순례에 참가했다. 사전교육과 차량책임자들의 관리 그리고 모든 교우분들의 질서있는 모습으로 인해 처음으로 하는 본당야외활동이 잘 이루어졌다.

 

야외행사에서는 구역별 가장행렬, 장기자랑도 있었는데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때 그시절에는 모든 교우들이 새로운 장을 연다는 꿈을 가지고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모두가 하나로 되었었다.

특히 남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요. 이웃의 기쁨이 자기의 일인양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던 염회장은 신부님의 큰 머슴 아니, 모든 교우들의 착실한 심부름꾼으로써 맡은 소임을 다해 주었다.

 

초등부 여름성경학교와 초등부, 중?고등부 여름 캠프는 청소년들의 재교육을 위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아직 보좌신부가 없고 미사 강론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름성경학교와 여름캠프는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

많은 교사들의 노고로, 그리고 사목위원들의 협조로 곤지암에서의 여름캠프는 잘 끝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선례가 되어 진행되고 있다.

 

2) 초기의 사목조직과 복음생활

이신부는 주로 공소 시절에 이미 구성되어 있던 사목협의회 임원들과 본당의 대소사를 의논하며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89년 11월, 부임후 처음으로 사목위원 및 단체장들을 임명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2대 사목협의회

총회장:염금천(스테파노)

부회장:유성환(그레고리오), 김진영(안드레아, 작고), 전홍재(미카엘)

총  무:이일우(안드레아),

부총무:이경국(토마)

분과위원장:기획분과 정영택(베드로), 재정분과 정호순(시몬), 전례분과 심재희(시몬),

            선교분과 심만택(안드레아), 교육분과 김두봉(스테파노),

            청소년분과 서영국(이냐시오), 사회복지분과 정정해(시몬),

            관재분과 박정길(에바리스또), 홍보분과 주봉용(안셀모),

            남성구역분과 조칠성(베드로), 여성구역분과 원경연(유스티나),

            감사 박정모(파비아노) 초등부 교장 최진호(스테파노),

            중고등부 교장 하두남(안드레아), 꾸리아 김창현(그레고리오),

            M.E대표 강홍식(요한), 송정금(안젤라), 성가대 박영화(글라라),

            선종회 조춘식(리노), 성령봉사대표 강태승(미카엘, 작고)

 

교회라는 공동체는 신부의 책임하에 운영되면서, 동시에 사목위원들이 신부의 각 업무를 분담하는 소임을 맡아 각 분과별로 소속단체들을 두어 성무를 관장하는 것이 교회의 관례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목위원들의 일체감 조성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리하여 이신부는 사목위원들과 대림절, 성탄절 및 새해맞이 등 교회의 큰 행사들이 끝나는 1990년 1월 20일 1박2일 예정으로 피정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한 후 처음으로 사목위원 및 단체장들이 임용되었기 때문에,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성지는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피정지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삶을 묵상하며 사목협의회 위원들과 단체장들은 각자 소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풍납동본당에서는 매년 2월이면 구역활성화를 위해 윷놀이대회가 벌어졌다.

1990년 2월부터 행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많은 기억이 남아있다.

윷놀이대회를 하루 앞두고 봉사자들은 트럭을 몰고 포천으로 떠나 막걸리를 사오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안주를 마련하느라 성당 안팎이 잔치준비에 바빴다.

이렇게 준비가 끝나고 다음날 윷놀이대회장에는 푸짐한 상품이 성당 마당에 그득히 쌓인다. 상을 타겠다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윷을 던지고 앞서가는 상대방의 말을 잡을 때는 환호성과 함께 손뼉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특히 노인들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거나 지화자 노래가락으로 흥을 돋구고 이러한 행사 속에서 성당 식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신축성전부지 정리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미 구입한 성전부지는 풍납동본당이 공소에서 본당으로 빨리 탈바꿈하는데 중요한 매개가 되었지만, 아직 구체적인 성전건축작업이 수행되지 않은 상태라 공터는 쇠파리가 들끓는 쓰레기더미로 가득했다.

이신부와 신자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크고 작은 돌을 리어카에 실어 옮기느라 비지땀을 쉴새없이 흘렸지만, 바로 자신들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성전의 기초에 놓일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 열심히 힘을 쏟았다.

 

교우들이 몇차례나 계속되는 정지작업(땅고르기)으로 지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 다른 교우들이 그 뒤를 이어 계속 노력봉사하였다.

주님은 장차 당신이 거처하실 성전신축 정지공사를 계속하시도록 하시어 공동체의 중요성을 심어주셨고 일깨워 주셨다.

이러한 성전부지의 열악한 현장에는 자매님들이 쉴새없이 매달렸고, 어떤 구역에서는 음료수 그리고 어떤 구역에서는 막걸리에 안주등을 마련해 와서 일하는 교우들의 땀을 닦아주며 노고를 같이 나누었다.

 

공동체! 정말 주님이 바라시는 우리들의 일치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퀘퀘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땀이 범벅이 되면 아무리 곱던 얼굴도 원래의 모습들을 찾기 힘들었던 정지작업 현장,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쯤 주름살이 몇가닥은 더 늘었고 머리카락도 흰빛을 띈 분들이 많겠지만 그때가 정말 보람스러웠다고 입을 모은다.

 

본당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90년 10월 27일과 28일 양일에 걸친 성전기금마련 바자회였다.

많은 교우들이 생업을 뒤로 미루고 열심히 봉사했으며 거의 모든 신자들이 한마음이 되어 뛰었다.

본당으로서 처음 시도했던 당시 바자회는 구역별로 바자회 티켓을 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 한 장에 5천원이나 하는 티켓을 어떤 교우분들은 분에 맞지 않게 많이 사기도 했다. 성전부지에 텐트를 치고나면 음식, 의복, 가재도구 등의 코너마다 생활필수품이나 갖가지 음식등이 군침을 삼키게 했다.

흥을 돋구는 노래와 풍믈이 넘치는 정말 푸짐한 주님의 잔치였다. 한쪽 모서리에서는 노래자랑도 하고 여기 저기서 한점의 물건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모습과 소리로 흥정을 하는 모습들은 정녕 사랑이 넘치고 활기가 솟아 났다.

 

한 세대를 살아가는 동안 성전건립에 참여한다면 그 만큼 주님의 은총이 더해진다 하여, 어떤 교우들은 일부러 풍납지구로 이사와 성전기금마련에 적극 참여하는 일도 볼 수 있었다.

교우들은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회 건립에 한치의 차질도 빚지 않게 해주었으니, 특히 바자회를 통해 마련된 기금은 큰힘이 되기도 했다.

주님께서는 ’희생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라면 사랑했다고 말할수 있느냐?’ 하신것처럼 이틀동안의 바자회와 준비기간동안 봉사한 사목임원,단체장,구역 반장을 포함한 기백명의 봉사자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 내맡기고 바자회에만 매달렸으니 희생의 기쁨을 체험하는 현장이었다.

 

3)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1990년 여름, 풍납?성내동 지역은 엄청난 대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그동안 장마때마다 어김없이 물이 들어 상습적으로 수해를 입어왔던 이 지역 주민들은 장대비가 퍼부은 9월9일부터 11일까지 다시 한번 엄청난 일을 당하였다.

3일간에 걸쳐 내린 총강우량 553mm 중에서 서울지역에만 486mm가 내렸다. 하루 평균160mm를 퍼부었으니 하늘에 구멍이 펑 뚫려 양동이 물을 통째로 맞는것 같았다.

9일 아침부터 퍼붓기 시작한 비는 순식간에 성내천을 메웠고, 강으로 흘러야 할 내수는 불어난 강물로 오히려 역류되어 도로로 흘러들어 왔다.

 

마침내는 잠실, 풍납동, 성내동, 그리고 암사동 일대의 모든 도로는 물이 차올라 차량통행마저 통제되었고 수해를 피해 높은 지대로 가재도구를 옮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천재(天災)앞에 망연자실 손을 놓고 하늘만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이불, 옷, 가재도구 등을 차례로 삼키어갔다.

여기 저기서 순식간에 벌어지는 처참한 천재앞에 무능하기 그지 없는 인간은 고스란히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수구가 범람하고 정화조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빗물과 범벅이 되어 안방으로 계속 차 들어와 집안에도 있지 못하게 된 주민들은 빈 몸에 임시수용소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 풍납동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에는 어른 가슴팍까지 물이 차올랐으니 완만한 저지대는 지붕까지 물에 잠겨 일부 벽이 허물고 부서지는 등 눈으로는 차마 볼수 없는 현장이었다.

 

이와 같은 악몽의 3일이 지나고 비가 갠지 이틀이 흘러서야 이 지역에 괴어있던 내수가 강으로 흘렀다.

1984년과 1987년 두 번에 걸친 수해 때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던 이 지역에서 이번 수해로 인해 1만 2천가구가 침수되고 4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주)  1, 2호 배수펌프 관리 잘못과 배수용량부족 등을 내세우며 주민들은 비가 그친 사흘 뒤부터 강동구청으로 몰려가 천재가 아닌 인재라 하여 보상청구 시위를 이틀 동안이나 벌이기도 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본당교우들은 주머니를 털어 양수기 2대를 사들였으며, 조를 구성하여 우선 급한 집부터 봉사를 시작했다.

 

어느 집이고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그 물은 연탄더미가 뭉개져 시커멓게 변한데다 온갖 폐수, 정화조 오물과 범벅이 되어 냄새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전재강(시몬), 차부남(니꼴라오), 공선영(베드로), 박후진(젤라시오), 이안년(루피노), 박순환(베드로), 박종섭(요셉), 최규현(시몬), 유택현(암몬), 조칠성(베드로) 등 봉사에 나선 교우들은 땀인지 오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검게 물든 얼굴을 연신 손으로 씻어 내리며 쉴새없이 물에 젖은 물건들을 끌어 올리고 정리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본당교우들은 직장 일이 바빠도, 그리고 자신들은 홍수피해가 크지 않다 하더라도 수해를 입은 이웃의 집안 구석구석을 손보고 봉사하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는 모범을 보였다. 끼니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고 잠시도 허리 펼 짬도 없이 고스란히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초죽음이 되었지만, 풍납동 신앙공동체는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해 수해복구에 발벗고 나섰다.

이재철 신부는 본당교우들의 봉사 현장을 찾아와 빵과 우유를 내어놓고 신자들의 노고를 독려했다. 그리고 신자들이 빵을 먹는 동안 반바지 차림으로 대신 물을 푸거나, 물에 젖어 못쓰게 된 가재도구 정리를 하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에서 많은 감명을 주기도 했다.

 

함께 어려움을 나누면서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앙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웃을 위해 내 자신의 몫을 쪼개야할 때 주저하곤 하는 편협한 마음을 초월하여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여라.

그리고 이기심에서 자신의 껍질 속에 숨어버리고 싶을 때 그 껍질을 깨뜨려 버리고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라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삶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신자들은 지금처럼 이웃을 위해 서로 돕는 평화스런 나날이 이어지기를 하느님께 갈구 했다.

      

4) 사목협의회의 구성과 신심단체의 활성화

1990년 12월 22일 성탄절이 임박해서 이재철 신부는 사목협의회 임원 및 단체 봉사임원들은 임명하였다. 새임명장을 받지 않은 경우는 기존의 임원들이 연임된 경우이고 부분적으로 새로 임용되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3대 사목협의회

총 회 장      :유성환(그레고리오)

자문위원      :박정문(파비아노)

부 총 무      :김상훈(안드레아)

분과위원장    :노인분과 이경국(토마)

분과부위원장  :노인분과 박정석(제노),

재정 분과      : 박정식(제노)

꾸르실료 간사 :심재희(시몬)

M.E대표       :박성목(요한), 김정숙(글라라)

 

그리고 이신부는 구역활성화를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였다. 체계적인 조직강화를 위해 매월1회 남성구역장 회의를 설치하고 자신이 직접 참석하여 구역의 현안 문제들을 풀어 나가기로 결정하며, 구역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구역장 전원에게 인사와 격려를 잊지 않았다.

사목임원과 그외 단체 봉사 임원들을 임명한 후 1991년 4월7일, 이신부는 구역분과 총무를 비롯한 일부 구역장들을 개편 임명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역분과 총무:이안연 (루피노)

  풍납1구역장:공선영 (베드로)

  풍납2구역장:김봉식 (안셀모)

  풍납3구역장:김윤상 (베드로)

  성내1구역장:정길수 (베드로)

  성내2구역장:박영기 (발렌티노) 등 5개 구역이다.

 

아울러 1989년에 이어 본당에는 여러 신앙단체가 새로이 발족했는바, 1990년 3월에 노인대학, 4월에 성령기도회가 창립했다.

그리고 1991년 3월에는 자모회가 발족하고 1991년 12월에 레지오 사랑하올 어머니 Pr.이 새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신앙단체들은 본당 신앙공동체의 중요한 기초가 되어주었다.  

 

한편 이재철신부는 홍보분과 주봉용(안젤모) 분과장에게 성당에서 영화를 상영, 그 수익금으로 성당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하도록 배려하고 사목 각 분과별 특성을 최대한 활용토록 유도하여 어느 한 분과도 침체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도록 당부했다. 그리하여 홍보분과에서는 몇해에 걸쳐 영화를 상영해 신자들로 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본당의 역사와 이재철신부의 재임시기를 뒤돌아 볼 때 생각나는 일화는 역시 폐품수집을 빼놓을 수 없다.

이신부는 사목활동에 있어 특히 무슨 일이든지 앞서 해당 분과장에게 계획안부터 작성하고 시행에 들어가도록 했다.

폐품수집 계획 역시 해당 분과인 구역분과에 맡겼다. 구역분과에서는 고덕동 본당에서도 폐품을 수집하며 그 수익금으로 성당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고덕동 관계자들을 찾아가 자료를 입수하여 시행에 만전을 기했다.

 

아무때나 폐품을 가져오면 관리 정리가 곤란할 것에 대비하여 매월 셋째주일 오후(91년 4월 7일)부터 폐품을 받는 날로 정하고, 폐품의 수납 관리는 각 구역별로 정리 처리하도록 하되 월간 수납 폐품운반 역시 각 구역에 일임했다.

이같이 한달이 되어 모은 폐품은 8톤 트럭 5대에 이르렀고, 이를 폐품수집상에게 넘기니 1백 20만원이 넘었다. 그리하여 월간 120만원에서 150만원의 수익을 거두어들였다.

본당 초창기 시절에 시작한 폐품수집은 그후로도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약 10년동안 1억이 넘는 수익을 올렸으며 성당기금 조성에 도움이 되었다.

이같은 폐품수집의 지속으로 교우들의 일치된 모습과 폐품 재활용으로 폐기되는 인력낭비, 운반비용 절감, 나아가 성전기금 조성에 적게 나마 한몫을 하게 되었으니 1석 4조의 효과를 거두었다.주)

이신부의 그 같은 아이디어는 날로 늘어나는 폐품처리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교우들은 이웃집에서 버린 폐품까지 모으는 열성을 보였으니 폐품수집 재활용 운동은 성공적이었다.

폐품을 성전부지에 한꺼번에 모았다가 그것을 처리하는 날 수녀님, 구역봉사 자매들은 부침개에 소주와 막걸리를 준비해 주었고, 한잔씩 나누던 그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신부의 부임과 본당으로 승격된지 3년째를 맞는 해인 1992년 2월 초 사목협의회 위원들이 임명되었다. 임원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4대 사목협의회

총회장    :심재희(시몬)

부회장    :전홍재(미카엘), 김두봉(스테파노)

총  무    :정정해(시몬)

분과위원장:기획분과     노우석(토마스),

            전례분과     한종수(베드로),

            교육분과     남승례(아가다),

            선교분과     심만택(안드레아),

            구역분과     조칠성(베드로),

            여성분과     김경애(베로니카),

            재정분과     정정웅(베드로),

            청소년분과   이경국(토마),

            사회복지분과 권종일(야고보),

            시설분과     박정길(에바리스또),

            홍보분과     주봉용(안셀모),

            노인분과     강천형(안토니오),

            감사 정영택(베드로)

구역장    :1구역 정춘길(요한 보스꼬), 2구역 정길수(베드로), 3구역 최재곤(베드로),

            4구역 김원복(요셉),        5구역 전익환(미카엘), 6구역 서병열(바오로),

            7구역 이건영(시몬),        8구역 류택현(암몬),   9구역 공선영(베드로),

           10구역 박경완(시몬),      11구역 김명천(방지거), 12구역장 이창수(토마),

           13구역 우정구(베드로),    14구역 김수관(요한),   15구역 박성목(요한)

 

새로운 사목협의회의 구성으로 더욱 탄탄해진 성당운영과 더불어 여러 신심단체들이 발족하였다.

1992년 1월에는 레지오 상아탑Pr.과 하늘의 문Pr.이 발족하였고 5월에는 천상 은총의 어머니 꾸리아, 7월에는 레지오 우리 즐거움의 원천 Pr.과 매괴의 모후 Pr.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1993년 2월에 모든 성인의 모후 Pr.이 구성되었다. 오로지 신심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진 이들 단체들은 상반기 풍납동 본당의 기본조직들이 모두 소공동체활성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잘 반영해준다고 하겠다.

 

5) 성전건축 추진위원회

1992년에 본당의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서 우선 성전건축 추진위원회 발족을 들 수 있다. 이신부는 5월 10일 준비위원을 임명했다. 지금까지는 성전부지 정지작업과 기금조성 등 성전건립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면, 이제 성전건축 추진위원회의 발족으로 풍납동본당의 성전건축은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모습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추진위원의 명단이다.

 

성전건축 추진위원회

위원장:전홍재(미카엘)

총  무:정태산(바오로)

위  원:박정길(에봐리스또), 정영택((베드로), 한종수(베드로), 유현종(요셉),

        권순개(안젤로)

 

임명을 받은 준비위원들은 우선 첫 작업으로 설계업체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여러 업체의 공모 계약을 의논하는 등 심사숙고를 하느라 연일 회합을 가졌다.

회합에서 위원들은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고, 의견이 다를 때에는 합의점을 모색하느라 나름대로 노력들을 쏟았다.

1994년 1월 16일에는 다음과 같은 사목협의회 개편이 이루어졌다.

 

제5대 사목협의회

총회장    :전홍재(미카엘)

부회장    :김두봉(스테파노), 정정웅(베드로)

총  무    :권종일(야고보)

부총무    :김상훈(안드레아), 정창의(화경 안드레아)

분과위원장:기획분과 김수관(요한), 전례분과 남승례(아가다)

 

임원들은 대부분 유임되었고 부분적으로 개편되었다. 이신부의 재임기간 내내 매년 사목협의회가 구성되었으나, 이는 주로 봉사자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다른 분과로 가도록 하는 것이었고 본당활동의 일관성을 염두에 두었다.

 

1993년 8월 11일, 신축성전부지를 추가매입함으로써 성전건립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93년 성전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회의를 거듭했고, 설계 결과 땅의 형태상 이상적인 성전을 건축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었으며 또 현 부지 지목이 밭(田)으로 되어 있어 대지로 지목 변경하려면 서울시에 20%인 140여 평을 기부해야 했다.

나머지 560여 평에 가설계를 거듭해 보아도 흡족한 성전 모양이 될 수 없었을 뿐더러 부지도 너무 협소하였기에 현 부지 남쪽에 위치한 두 채의 가옥(풍납동 412번지 3, 4호)을 매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성당에서 그 가옥을 사겠다고 하면 가격이 상승될 것을 우려하여 모든 일은 극비리에 진행되었고, 부동산을 운영하는 신자의 도움으로 171.5평을 평당 5백만 원에 주임신부의 명의로 계약을 하여 중도금 지불 완료 후 사실을 알리고 잔금 지불시 성당으로 명의를 변경하였다. 신자들은 성전 부지 추가 매입을 하면서 비밀이 누설되어 부당한 값을 요구하거나 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라는 시편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드렸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추가 매입을 완료할 수 있었다.

1993년은 본당 승격 5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했다.

10월에 바자회를 할 때 이를 기념하여 기념사진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1992년부터 시작한 각구역별 대항 연도대회를 발전시켜 구역활성화와 일치를 위한 성가경연대회가 있었다.

모든 신자들이 참가하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본당은 이재철 신부의 재임기간 동안 어느정도 운영체계가 확립되었으며, 각분과들을 중심으로 소공동체 활동이 활성화되어 신앙공동체로서의 안정된 틀을 만들 수 있었다.

 

본당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전과 사제관도 없던 상황에서 신자들의 친교와 융합을 위해 노력하던 이재철 신부는 1994년 9월 9일, 교구인사 이동에 따라 중곡동 본당주임으로 전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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