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성당 게시판

2000년사순1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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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yk1004] 쪽지 캡슐

2000-03-19 ㅣ No.295

2000년 3월 19일 사순 2주일 강론

 

제1독서: 창세기 22, 1 - 2; 9ㄱ; 10 - 13; 15 - 18.

제2독서: 로마 8, 31ㄴ - 34.

복음: 마르꼬 9, 2 - 10.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마 오늘 주보에 서울 대교구장이신 정진석 대주교님의 사순절 메시지가 실려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생략)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마르꼬 9, 8)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한 사순절도 이제 2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회개의 사순 시기, 그렇지만 회개하는 이들의 머리에 쏟아 부어지는 은총의 이 사순 시기에 오늘 우리가 지내는 이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통해 함께 묵상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이라고 하는 것,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고통스러운 것도 기쁨으로 바꾸어 주는 존재, 속을 썩일 때에는 원수 같이 보이더라도 이 세상 모든 것과 바꾼다 해도 아깝지 않고, 바꿀 수도 없는 존재가 자식입니다. 더군다나 착하디 착한 아이라면 어떨 것인가? 그런데 그 자식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면 어떨까? 더군다나 그 아들이 100살이 다 된 나이에 얻은 아들이고 이 아들이 없다면 이제 아브라함은 쓸쓸히 세상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야 합니다. 이사악은 유일한 상속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아들인데 그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떨 것인가?'라는 것은 부모된 사람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순히 '하느님의 뜻이라면'이라는 생각인 듯 아버지가 묶는 밧줄에 몸을 맡기는 그런 어리고 착한 아들을 향해 칼을 치어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 것인가? '아들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이길 정도로 '큰 것이었다.'가 1독서의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마음을 받아들이시고 아들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제사를 중지시키십니다.

   여기서 자신의 희생제사에 쓸 장작을 지고 모리야 산에 올라가는 이사악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려는 희생제사를 중지시키셨지만 세상 사람들을 구원코자 했던 당신의 아드님의 희생제사를 봉헌케 하심으로써 하나 뿐인 아들인 예수님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자식이 귀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아드님이 귀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1독서를 통해 아브라함의 괴로운 선택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도 아들의 희생은 괴로운 선택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아드님에 대한 사랑을 누를 정도로 컸던 것입니다. 이것이 1독서를 통해 묵상할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은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아드님까지 희생시키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제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심판의 주관자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아들을 아까와 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심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이미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두려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늘 2독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이유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무서워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 '착한 자녀들이 부모 앞에서 자신의 모자랐음을, 철없는 시절에 부모님을 괴롭혔음을 죄스럽게 생각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 회개의 마음이다.'하는 것을 오늘 2독서를 통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예언자들의 하느님 말씀의 선포를 통한 예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 백성으로 유지시켜 준 두 개의 수레바퀴이며 두 개의 기둥입니다. 율법의 상징은 모세이고 예언자의 대표자인 엘리야, 이 두 사람은 메시아의 날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믿어 왔던 것입니다.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감격해서 초막 세 개를 짓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어 주겠다는 초막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심으로 해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셔야 함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영광스러운 변모'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본래 모습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원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잠깐 보여준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제자들은 감동을 하였지만 정말 감동스런 것은 그 영광스러운 분이 비참하게 매를 맞고 죽으려고 했으며 그럼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 죽음 후에 부활하심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에 감동하는 것은 그분이 본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크신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려고 모리야 산에 오름으로써 자신의 크나큰 믿음을 보여 주었었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산에 오르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위한 크나큰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착한 아들 이사악은 장작을 지고 가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에 동의하셨으며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구원의 완성이고 모든 인간들도 또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구원과 부활의 은총을 입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자녀로서의 도리이듯이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우리 신자들, 하느님의 충실한 자녀들의 도리입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마음이 회개이고 그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 희생, 극기, 자선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달은 우리들의 응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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