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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宰相書(상재상서) 1/2 - 정하상(丁夏祥 정바오로丁保祿) 792_ capital [교리용어_사욕편정] [칠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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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2 ㅣ No.1312




<< 부록 1 >>

출처: http://history.catb.kr/new_sabo/edu_view.asp?h_id=93

사보29  - (올린날: 2002년 2월 6일 수요일 , 조회수: 80 )

주 제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
부 제 徐光啓의 〈辯學章疏〉와 丁夏祥의 〈上宰相書>
저 자 장정란(덕성여대 강사, 동양사)
번 역    
   
1. 머리말
2. 서광계와 정하상 연보(年譜)
3. 〈변학장소〉
1) 저술의 배경과 동기
2) 내용
4. 〈상재상서〉
1) 저술의 배경과 동기
2) 내용
5.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
6. 맺음말

첨론(添論) - 〈상재상서의 우사(又辭)〉에 대한 의문


1. 머리말

〈변학장소〉와 〈상재상서〉는 중국과 한국 천주교회사상 최초의 호교론이다. 시대적으로는 변학장소가 1616년, 상재상서가 1839년에 지어져 223년의 차이가 있지만 천주교가 전래된 시점에서 볼 때에는 호교론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되었다.
이 두 호교문은 다 같이 상소문이다. 변학장소는 고위관료인 봉교사대부 서광계가 만력제(萬曆帝)에게 올린 상소이고, 상재상서는 믿음을 위하여 스스로 영락한 사대부 가문의 후예 정하상이 재상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린 상소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중국과 조선의 초기 천주교회의 중심인물이며 지도자였다.
유교사상을 정통 통치이념으로 삼는 명(明)왕조와 조선왕조에서 천주교는 조정으로부터 모두 공인받지 못하였다. 서광계는 이미 반교(反敎) 상소문에서 익명으로 박해의 표적이 되었으나 교난의 진원지 남경(南京)에서 멀리 떨어진 북경(北京)의 관리로 있음으로서 변학장소를 통해 호교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난을 막지는 못하였다. 정하상은 자신이 박해의 표적으로서 미리 상재상서를 작성하여 체포당한 후 제출하였으나, 기대한 반응 없이 장렬히 순교하였다.
변학장소는 제목, 관직명, 말미의 상소 일자까지 포함하여 2,289자의 짧은 글이며, 상재상서는 본문 3,460자, 덧붙이는 글 〈우사〉196자까지 도합 3,656자로서 변학장소 보다는 1,367자 많으나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글이다. 그럼에도 이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은 상소문이라는 일정한 격식을 갖춘 제한된 지면 안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선교사를 소개하고, 천주교회의 순정(純正)함과 유교적 사회질서 내에서의 그 역할을 제시하며 그리스도교 사상을 해설하였고, 그로써 천주교에 대한 교난을 중단시켜야 할 충분한 근거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성격의 이 호교론은 당시 천주교도, 특히 교회 평신도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그리스도교 인식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한국과 중국 천주교회 비교사 연구의 장을 연다는 의도로 두 나라 최초의 호교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서광계와 정하상의 이력을 연보를 통해 간략히 알아보고, 각각의 호교론 저술의 배경과 동기 및 내용을 고찰한 후, 그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을 비교, 검토하겠다.
추기하는 것은, 상재상서의 〈우사〉를 다루며 의문점이 있어, 본고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으나 첨론으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2. 서광계와 정하상 연보

서광계(徐光啓) 연보

1562년 3월 21일 강소성 상해현(江蘇省 上海縣) 출생.
1597년 순천 향시(順天 鄕試) 거인(擧人) 급제.
1603년 남경에서 로챠(Rocha 羅如望) 신부에게서 영세. 세례명 보록(保祿. Paul).
1604년 진사(進士) 급제.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
1604-1609년 북경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와 기하원본(幾何原本), 측량법 의(測量法義), 측량이동(測量異同), 구장산술(九章算術), 구고의(勾股義) 등 서양학술서 공역. 감수.
1607년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
1607-1610년 부친 3년 복상으로 상해 체류. 전교 활약기.
1610년 복직.
1613-1616년 사직하고 천진(天津)에서 둔전(屯田)하며 반불교서 벽망(闢妄) 저술.
1616년 출사. 남경에서 제1차 교난 발발. 변학장소(辯學章疏) 상소.
1617년 좌춘방좌찬선겸한림원검토(左春坊左贊善兼翰林院檢討). 그러나 곧 칭병하 고 천진에서 둔전.
1619년 첨사부소첨사겸하남도감찰어사(詹事府少詹事兼河南道監察御使)로 임명되어 통주(通州)에서 연병(練兵) 관리.
1621-1624년 상해에서 둔전하며 삼비아소(Sambiaso 畢方濟) 신부와 영언여작(靈言 勺) 저술.
1624년 예부우시랑겸한림원시독학사협리첨사응사(禮部右侍郞兼翰林院侍讀學士協理 詹事應事). 찬수신종실록부총재(纂修神宗實錄副總裁).
1625년 어사 지정(智鋌)의 탄핵으로 사직.
1625-1628년 천진, 북경 등지에서 학술연구. 농정전서(農政全書) 60권 초고 완성, 서씨 포언(徐氏 言) 5권 출간.
1628년 원직에 복직.
1629년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郞). 가태자태보희종실록부총재(加太子太保熹宗實錄副 總裁). 역국 독령(曆局 督領)으로 임명되어 9월에 역국 개국. 중국 예수회 회독 롱고바르디(Longobardi 龍華民), 테렌쯔(Terrenz 鄧玉函)와 이지조(李 之藻), 이천경(李天經) 등 봉교사대부 참여시킴.
1630년 예부상서겸한림원학사협리첨사부사(禮部尙書兼翰林院學士協理詹事府事)
1932년 예부상서겸동각대학사(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 찬수희종실록총재(纂修熹宗實 錄總裁).
1633년 가태자태보문연각대학사(加太子太保文淵閣大學士). 10월 9일 서거. 시호 문 정공(文定公).

정하상(丁夏祥) 연보

1795년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丁若鍾)과 유 세실리아의 둘째 아들로 경 기도 양근 마재(혹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 출생. 이 해에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하자 곧 서울로 이주하여 주 신부에게서 영세. 세례명 바오로(保祿).
1801년 부친과 맏형 철상(哲祥) 순교. 모친, 누이동생 정혜(情惠, 엘리사벳)와 낙향.
1814년 홀로 상경하여 여신도 조증이(趙增伊)의 집에 기거. 선친의 친구인 봉교학 자 조동섬(趙東暹)을 유배지 함경도 무산으로 찾아가 교리와 한학 수학.
1816-1823년 현석문(玄錫文)·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교회의 재건 위한 성직자 영입 추진. 부경사(赴京使)의 통역관 하인 자격으로 아홉 차례 북경왕래, 세 차례 변문(邊門)왕래. 1823년부터는 역관 유진길, 노복 조신철(趙信喆)을 밀사로 파견하며 함께 북경 주교와 교섭.
1825년 이여진(李如眞) 등과 연명으로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선교사 파견을 요 청하는 내용의 대 교황 청원문 발송.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이 청원문 접수.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한 조선교구 설정 선포. 파리 외방전 교회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선교 자원, 초대 교구장에 임명.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변문에서 비밀히 영입.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영입.
1836년 샤스땅(Chastan) 신부 영입 .
1837년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 영입.
1837년-1839년 앵베르 주교로부터 방인(邦人) 사제를 위한 신학교육을 받음.
1839년 6월 1일 모친 유 세실리아와 누이 정혜와 함께 체포,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 론 상재상서(上宰相書) 제출.
1839년 9월 22일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인과 함께 복자 시복(諡福).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3위로 시성(諡聖).


3. 〈辯學章疏〉

1) 저술의 배경과 동기
변학장소는 중국 천주교사상 최초의 호교론이다. 또한 명(明)시대의 두 차례 교난 중 공식적으로 조정에 그 종식을 요청한 유일한 상소문이다.
근대 중국 천주교회사에서의 공식적 교난은 명 신종 만력 44년(1616)에 일어났다. 그러나 교난 이전에도 선교사들이 북경에 체류할 수 있었던 1600년을 전후하여 이미 사사롭게 선교사들을 구금, 구타하거나 혹 교회를 습격, 파괴하는 사건들은 많이 있었다. 마테오 리치에 이어 1610년부터 중국 예수회 회독(會督)을 맡았던 롱고바르디의 기록에 의하면 1차 교난 이전까지의 천주교 탄압은 무려 54건에 달하였다.
이러한 반교의 기운이 쌓여 1616년의 교난이 발발하였는데 이것은 남경(南京)의 예부시랑(禮部侍郞) 심각(沈  )의 주소(奏疏)로부터 발원되어 그에 의해 주도되었다. 심은 독실한 불교신도로서 마테오 리치가 남경에 머물던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천주교를 증오하였고 교난 발발에는 불승들과의 공모와 연계가 있었던 듯하다.
심각은 1616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3차에 걸쳐 천주교와 선교사들의 축출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6년 5월의 1차 상소에서는 오랑캐(夷人)들이 중국에 와서 북경에는 龐迪我(Pantoja)와 熊三拔(Ursis) 남경에는 王豊肅(Vagnoni)과 陽瑪諾(Diaz)이 있으며 기타 지방과 성성(省城)의 각 처에도 역시 그들이 있다. 그 교의 이름을 천주교라 한다. 신도들을 모아 그 당이 많고 그들의 설도 사람들 마음에 점점 스며들어 이제 사대부조차 이를 믿는 자가 있으니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어떻겠는가. 그러니 병부에 명하여 이를 행하고 말하는 자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상소가 인준되지 않자 심은 다시 7월에, 오랑개들이 역법(曆法)에 능통함으로 인해 망령되이 성관(星官)의 말을 하고 사대부들 역시 그 혼미한 속에 빠져있다. 이미 20년 이래로 (그들의) 결속과 교제가 넓어져 향리의 사대부(縉紳)들 또한 이것이 일상인 것처럼 익숙하니 급히 처치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또한 7월 20일에는 예과급사중(禮科給事中) 余懋 가 마테오 리치 이후 전래된 천주교가 王豊肅, 陽瑪諾 등이 수도에 머물면서부터 백성을 선동하고 유혹하여 (사교인) 백련(白蓮)과 무위(無爲)를 본받으니 그들을 해산하고 관진(關津)을 엄하게 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상의 상소들은 모두 선교사들이 국내에 잠입하였다는 것, 천주교가 중국전래의 가르침과 다르고 어긋남에도 사대부와 백성들을 선동, 유혹하여 세력을 확대시켜서 나라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 서양역법으로 중국의 정통 역법을 완곡히 중상한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어 선교사들의 축출을 주장하였다.
이때 서광계는 翰林院檢討로 북경에 있으며 최초의 호교론인 변학장소를 저술하였다. 그 시기는 심각의 제2차 상소가 올려진 후인 1616년 7월로 심각이나 여무자의 상소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축출이 확실하여지면 중국 천주교회의 존립이 불가능할 것을 염려하여 장소를 올리며 호교론을 펼쳤다. 이같은 저술의 목적은 변학장소가 쓰여지기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서찰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심, 여의 반교 상소가 그들의 무지와 오해로 인한 때문이며 따라서 정당하고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임을 지적하였다. 이것이 사신임으로 심각과 여무자 2인의 이름을 호칭하여 비판한 것이 흥미롭고 아울러 국가의 현명한 판단을 위한 목적으로 이 장소를 저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소 후 '알겠노라(知道了).'는 비답을 받은 때를 전후한 시기에 심에게도 황제의 조서가 내렸고, 마침 동향의 方從哲이 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로 임명되자 드디어 8월 심은 "내지(內地)의 선교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체포, 구금한 후 다시 죄를 다스릴 유지를 청하라"는 조정의 인준 하에 실제적 교난을 시작하였다.

2) 내용
변학장소는 천주교회와 교회의 표상인 선교사의 본모습을 설명하며, 동시에 유교와 상합하는 종교라는 점을 주장한 교회론 부분과, 실질적으로 천주교와 선교사들을 시험해 보는 방안과 그 결과에 의해 그들을 조처하는 구체적 방법을 각각 세 가지씩 제안한 현실론적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교회 및 선교사론
천주교가 바른 종교(正敎)로서 그 가르침이 진실하고 옳다는 것을 말하며, 이의 한 징표로 천주교의 호국과 보유를 강조하였다. 특히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선교사들의 사람됨을 기술하고, 선교사들과 서양학술을 나라에서 유용하게 채택하여 씀으로써 왕조의 태평을 도모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하여줄 것을 호소하였다.
먼저 심각의 상소에서 지적한 '사군자(士君子)'나 '성관지언자(星官之言者)'는 모두 서광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천주교 선교사들을 접해 본 결과 그들은 '성현의 무리(聖賢之徒)'로서 "그 도는 대단히 바르고(其道甚正), 그 지키는 바는 대단히 엄하며(其守甚嚴), 그 학문은 대단히 박식하고(其學甚博), 그 지식은 대단히 정수이고(其識甚精), 그 마음은 대단히 진실되며(其心甚眞), 그 견해는 대단히 확고(其見甚定)한 사람들로서 모두 수신(修身)하여 하늘(天)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선교사를 묘사하였다.
아울러 천주교 교리의 대단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유학(儒學)과 부합됨을 명시하고 있다.
즉 중국에 성현의 가르침이 있고 모두 '수신함으로써 하늘을 섬긴다(修身事天)'고 하므로 선교사들은 만난을 무릅쓰고 중국에 와서 상제(上帝)를 섬기는 것을 종교의 근본으로, 유가의 근본 이념인 '충(忠), 효(孝), 자(慈), 애(愛)와 천선개과(遷善改過)'를 그 교지로 하였다. 또한 하늘에서 사는 진정한 복록으로 착하게 산 것에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하고, 지옥의 영원한 재앙으로 악하게 산 것의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천주가 상선벌악을 내리는 이치를 설명하였다. 또한 서양 인근 30여 개의 나라는 모두 이 가르침을 봉행한 지 천수백 년이 되었는데 크고 작거나, 높고 낮은 나라들이 모두 서로 안정되어 국경도 없고, 임금의 성(姓)도 없고 사기꾼, 음란한 도둑들도 없어서 밤에도 관문을 닫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단지 천주에게 죄를 얻을까 그것만을 걱정한다고 하니 그 가르침이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광계 자신은 사실여부를 확인하려고 그들의 책을 보았는데 과연 망령됨이 없이 모두 그러했다고 하여 천주교가 인간을 착하게 만드는 종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오랜 동안 공인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여한 바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불교는 중국에 전해진지 1,800년이 지났으나 도가와 더불어 모두 그 도와 행함이 순수하지 못하고 교법은 미비해서 세상의 도와 사람의 심성을 바꾼(改易)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며, 그러므로 만약 나라에서 불교나 도가에게 용납하던 것을 이제 선교사에게도 베푼다면 반드시 당우(唐虞) 삼대의 위에 가는 복지를 이룰 수 있고, 사람의 심성도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불교와 도가가 국가의 수혜를 입었음에도 기여한 바 없는 무능을 비판하는 한편, 천주교는 실질적으로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윤리적, 도덕적 교화에 유학과 같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종교임을 천명하였다.

(2) 현실적 제안
서광계는 중국 실학(實學)의 거두(巨頭)답게 실제적 방법으로 의심되는 점을 시험하는 방법(試驗之法) 세 가지와 그 결과에 따라 그들을 조처하는 방법(處置之法) 세 가지를 각각 제안하였다.
시험하는 방법은 첫째로 선교사들을 경사에 불러 내외 신료들도 여러 명 참여시켜서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논설,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밝히는 이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조화롭게 하는 기술(事天愛人之說, 格物窮理之論, 治國平天下之術)로부터 아래로는 역산(曆算), 의약(醫藥), 농전(農田), 수리(水利)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저서를 함께 번역하게 한 후 조정 신하들에게 그 시비(是非)를 가리게 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선교사들이 말하는 논설은 유가와는 서로 합치하고 불교와 도가와는 서로 어긋나서 불교 승려들이 방해하고 중상하는 것이니, 선교사들과 명승들을 함께 마주하게 하여 토론하고 공박하게 하고 그들 사이에서 결론이 얻어지면 그 다음 유학자들을 참석시켜 시비를 판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셋째로는 선교사들에게 천주교 교리서와 그들의 행적을 약술한 책, 그들이 이미 번역한 약 30권의 서적과 그 원문 경전을 아울러 바치게 하여 친히 어람한 후, 그것이 과연 (반대자들의 주장대로) 선을 권유하고 악을 경계하는데 부족하고 중국의 풍속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즉시 천주교와 선교사들을 배척하여 축출하고 서광계 자신도 그 죄를 받겠다는 것이다.
이상의 '試驗之法'은 조정과 유가계층에서 천주교와 선교사의 참된 면목을 미심쩍어함을 알고 시험하는 방법을 자진 제시함으로써 유학과 합치되는 천주교의 본질, 선교사들의 사람을 선하게 이끄는 임무와 자질, 그리고 그들이 소지한 여러 방면에 걸친 중국에 유용하게 쓰일 학식, 그간 중국에서 이룬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한 학술적 기여, 아울러 천주교는 불교, 도가와는 다르며 그들의 모함으로 천주교가 부당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이 짧은 문장 안에 모두 담아 말하고 있다.
조처하는 방법은 첫째 선교사를 투기하거나 의심하는 자들은 그 이유로 반비(盤費) 즉 여비라거나, 금은(金銀)의 연금술이나, 혹은 외국 상인과 공모하여 살아갈 방도를 궁리하는 것 등을 구실로 삼는데 이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선교사들은 이미 출가하여 스스로의 의식(衣食)을 위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서국(西國)의 헌금자들이 기탁한 것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광록시(光祿寺)에서 베풀고 있는 금전과 양곡을 외에 의연보조금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고, 광동(廣東)에 있는 외국 상인에게도 유(諭)로써 서양에서 오는 금전을 우송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관진(關津) 수륙의 요처를 더욱 엄하게 지키는 방법을 쓴다면, 선교사들이 부정한 금전을 소지하거나 연금을 행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지방에 선비(士)와 평민, 부귀와 빈천을 가리지 않고 열 집이나 스무 집을 하나로 묶어 일종의 보(保)인 감결(甘結)을 조직해서 교화시킨 후 만약 그들이 덕을 잃고 외람된 행동을 하거나 요사스러운 말이나 망령된 생각을 한다면 관장 부처의 의결에 의해 선교사를 추방하고 감결된 사람들도 연좌제로 함께 벌을 받도록 한다. 만약 위반하여 죄를 범하였다는 고발이 있으면 관청에서 실적을 정밀 조사하여 진위를 판가름하게 한다. 셋째로는 지방의 (천주)교도에게 관청에서 인신(印信)과 문부(文簿)를 준 후, 혹시 죄명이 있으면 기재하여 올려 매 3년마다 조사한다. 그래서 교인은 많은데 범죄를 저지른 자가 없다면 그것은 선을 행함을 뜻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벌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관청에서는 참고할 문적이 있게되고 또한 여러 사람들은 서로 관찰할 수 있으니 시비는 자연히 밝혀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處置之法'은 선교사들이 비정상적, 비상식적인 연금술에 의한 선교비용의 조달이나 혹은 외국 상인들과의 연계를 통한 중국 침략에 대한 의구심 등을 제기한 심각의 상소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해명하였으며, 제2항과 3항은 모두 선교사와 교도들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모든 것을 해나가도록 맡겨보고 관에서는 그것을 감찰하도록 한다는 일종의 연좌제의 시행을 건의한 것이다.
변학장소는 이 같은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며 천주교를 수용함으로써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책략으로 삼고, 선교사들의 진심과 성실을 알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4. 〈상재상서〉

1) 저술의 배경과 동기
상재상서는 1839년(헌종 5년) 6월 1일 기해교난(己亥敎難) 때 체포된 정하상이 우의정으로서 좌의정, 영의정을 겸하여 당시 유일한 재상이던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린 글이다. 정하상은 1938년 12월에 이미 교회 성물을 만들던 권득인이 잡히고, 기해년 3월초에는 궁녀 박희순 등 수십 명이 체포되어, 4월 12일 권득인, 박희순을 비롯한 아홉 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자, 자신도 곧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미리 재상에게 올리는 호교문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정하상은 상재상서의 서두와 말미에서 이 글을 쓰게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서두에서는 첫째로 나라에서는 천주교에 관해 무지하며, 사도(邪道)로 몰아 인명을 크게 손상시키면서도 그 교리의 연원과 전래에 관하여 조사하고 살핀 적도 없다는 것. 둘째로 천주성교를 금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며, 천주교는 유교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로 천주교는 백성들을 어지럽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쓰고 언제나 행해야할 바른 도리"라는 것이다. 즉 정하상은 이 글을 통하여 천주교 교의의 대강을 설명함으로써 그 무지함을 일깨우고, 또한 천주교는 유교에 부합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행할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라는 것을 밝히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미에서 직설적으로 밝히는 궁극적 저술 동기는,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 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아니하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음에 나아간다면, 산더미와 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 대(百代)를 두고 폭로하여도 다할 수 없겠습니다"라고 하여 조정에서 천주교의 진면목을 보고 판단하여 교난을 멈출 것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정하상은 첫째 동기를 위하여 만물(萬物), 양지(良知), 성경(聖經)의 세 가지 증거에 의한 신의 존재 증명, 영혼의 실체와 그 불멸성, 상선벌악과 천당지옥 등 천주교의 기본 교의를 간략하나 명료하게 설명하였고,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에 보이는 천주교의 전래도 기술하였다. 둘째, 셋째 동기를 위해서는 십계명(十戒命)을 유교의 가르침과 연계시켜 설명하였다. 여기에 불교와 도교의 해악과 이단성, 민간에 만연한 미신적 의식의 폐해를 언급하며 그럼에도 나라에서 묵인하고 있음에 반해, 천주교는 그들과 달리 합리적이고 도뎍적임에도 용인되지 않는 점을 의문으로 제기하였다. 궁극적 동기는 말미에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정하상은 자신의 순교를 예측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천주교회의 정통 교의를 조선 조정에 공식적으로 천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천주교의 핵심 교의를 해설하며 조선의 유교적 질서와의 부합성과 백성을 교도하는 윤리적 정당성을 설파함으로써 교난을 종식시키고자하는 목적을 이 짧은 호교문 안에 구현하고 있다.

2) 내용
상재상서는 그 내용을 천주교의 근본교의의 대강을 해설한 교의론(敎義論) 부분과, 천주교의 일상의 실천윤리로서의 성격을 십계명을 통해 설명하고 천주교회의 본질을 다른 종교, 사상과 비교하며 변론한 호교론(護敎論)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교의론
교의론에서 정하상은 가장 절실하고 최우선적으로 천지 위의 주재자인 천주의 존재를 만물(萬物), 양지(良知), 성경(聖經)을 증거로 제시하며 증명하였다.
만물로서는, 이 세상을 큰 건물에 비유하며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만물의 창조자와 그것을 질서 있게 운용하는 주재자의 존재로 천주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였다. "무릇 천지는 큰 건물입니다. 나는 것, 뛰는 것, 동물, 식물과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어찌 저절로 생겨난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여 창조자로서의 천주의 존재를 명쾌히 설명한 후,

이 세상의 사물은 모두 질(質), 모(貌), 작(作), 위(爲)의 넉 자를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질이라는 것은 재료이고, 모라는 것은 형상이며, 작이라는 것은 만드는 이고, 위라는 것은 쓰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더라도 모두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천지에 어찌 그 지은이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만물을 통하여 주재하는 이가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라고 만물을 창조한 주체로서의 그 주재(主宰)를 밝히고 있다.
양지로서는, 인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도덕적 이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양지인데 이 양지에 의해 "선을 상주시고, 악을 벌하시는 큰 주재자가 마음속에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음으로써 하늘에 주재하는 분이 계심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으로서는, 우선 중국이 경전과 역사서를 통하여 고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천지 창조이래 끊임없이 기록된 역사가 바로 성경이다. "이런 서적은 소가 땀을 흘릴 만큼 많이 실어다가 온 집안에 가득 채우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그르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 기록의 정통성을 인정하듯 그보다 더 오랜 천주의 말씀인 성경의 기록과 천주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중국 삼국시대의 쇠 십자가, 당(唐)시대 성당과 경교비(景敎碑)의 건립 및 어진 재상 위징(魏徵)과 방현령(房玄齡)의 의심 않는 독실한 신앙, 명(明)시대의 저술서 등을 보아도 "지금까지 중국에 전해 내려옴은 천주께서 묵묵히 동양을 도우심이고, 우리나라에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易經, 詩經, 書經, 論語 등을 인용하여 '상제(上帝)', '천(天)'으로 표현되는 천주의 존재가 중국의 유교경전에서 이미 증명되어 있음을 설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천주교의 합유성(合儒性)을 드러내고, 천주교가 중국에 역사적 사실로 실증될 수 있음을 열거하여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이상의 만물, 양지, 성경을 통한 천주의 존재 증명 외에, 정하상은 천주가 부여한 인간의 영혼과 그 불멸성이라는 중요 교의로도 신을 증명하는데, 이때에도 유학과의 연계를 시도하였다.

영혼이라는 것은 사람의 혼으로서 살 수도 있고, 자랄 수도 있고, 지각할 수도, 감각할 수도 있으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고 도리를 추론할 수 있으니,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고귀합니다. 사람이 고귀하다는 것은 그 혼이 영특한 까닭이니, 이른바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하며, 하늘이 사람의 태(胎)중에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영혼이 어찌 초목과 금수처럼 썩어서 없어지겠습니까? 선유(先儒)들 또한 혼이 세 가지가 있고 영(靈)이 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한 영혼의 불멸과 함께 상선벌악과 천당지옥의 중요 교리도 아울러 해설하였다.

영혼이 죽지 아니함은 명백합니다. 이미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면 필경에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착한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땅으로 들어가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이라는 것은 천당의 영원한 행복이요, 벌이란 것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입니다.

(2) 호교론
상재상서의 호교론은 주로 십계명에 의하여 이론이 개진되었다. 즉 실천윤리로서의 천주교의 가르침은 "은밀한 일을 찾아서 기괴한 일을 하는 따위도 아니고, 다만 잘못을 고침으로 스스로 새로워져서 천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일 따름"이다. 계명이란 천주가 계시로 가르치신 열 가지 계율로서, 어떤 것인지를 모두 제시한 다음,

열 가지 계율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 계율은 천주를 밝혀 섬기는 절차이며, 다음의 일곱 가지 계율은 자기를 닦아 성찰하는 공부입니다.

라고 설명하며 "이 속에는 충(忠) 서(恕) 효(孝) 제(悌)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모두 포괄되어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하여, 유교의 근본사상을 십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는 덕성(德性)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또한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행하면 그 집안이 가지런해질 것이고, 한 나라에 행하면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으며, 천하에 행하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유교 실천윤리론의 기본을 이루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 십계명에도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교회의 합유(合儒)를 설명하고 있다 .
이러한 천주교의 실천윤리는 한층 엄격하고 고차원적인, 그래서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범하는 것까지 금한다고 하였다. 즉 세상을 다스리는 법률은 그 행동을 다스릴 수 있으나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데, 천주의 계명은 그 행동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마음도 다스리게 한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미약하여 사욕(私慾)과 편정(偏情)이 백방으로 유인하니, 오만, 분노, 탐욕, 사음, 질투, 인색, 게으름을 언제나 경계하고 배척하고 그때 그때에 공격하여 물리치지 않으면 함정에 빠짐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여 칠죄종의 교리도 십계명과 함께 천주교의 윤리로 제시하였다.
이같은 정하상의 윤리론은 앞에서 언급한 '양지'와 함께, 심(心)을 근저에 두고 '심즉리(心卽理)'의 유심론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陽明學의 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정하상은 천주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의하여 "지극히 거룩하고(至聖), 지극히 공변되고(至公), 지극히 바르고(至正), 지극히 참되고(至眞), 지극히 온전하며(至全), 지극히 절대적인(至獨), 오직 하나이고 둘도 없는 가르침(惟一無二之敎也)"이라고 옹호하였다. 지극히 거룩한 교회라고 이르는 것은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인 까닭이고, 공변된 것은 온 세상사람이 모두 마땅히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고, 바르다는 것은 치우친 행위나 올바름을 굽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참되다는 것은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기 때문인데, 그 가르침이 참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 예로 老子와 莊子는 허무에서 참됨을 잃었고, 선도(仙道)와 불교는 환상과 망상에서 참됨을 잃었으며, 이 밖의 군소 사상가들의 방술(方術)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다고 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배척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여 일부 항간의 인식처럼 천주교는 불교의 別派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불교란 서역의 이단으로 천주교의 글을 표절하였고, 성교의 규칙을 본따고, 의리는 그르쳐 어지러우며, 윤리는 끊어져 기강을 뒤집었다. 헛된 화복(禍福)의 말을 떠벌려 어리석은 하층 백성을 공갈한다고 비판하였다.
천주교회와 교도를 아비와 임금을 업신여기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라고 하는데 대해서는 성교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열 가지 계명의 넷째가 효도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무릇 충(忠)과 효(孝)의 두 글자는 만대에 변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라고 하여 충효를 전력을 다해 행하려 한다는 것을 밝힌 후, 그러나 한 집안 안에서는 집안의 아비가 가장 중하나, 한 나라 안에서는 집안의 아비보다 높은 것이 나라의 임금이요, 한 나라 안에서는 나라의 임금이 가장 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의 큰 임금(天地大君)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김은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인데, 이 한 가지를 들어서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라고 교회와 교도가 주장하고 행하는 충효의 바른 뜻과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충효'와 '무부무군'의 개념은 유교의 상제(喪祭)인 신주, 제사 문제와 관련되어 대단히 중요하다. 이에 관해서는 우사(又辭)에서도 언급하였다.
천주교회의 통화(通貨) 통색(通色)에 관한 의심에 대하여 통화는 긍정적으로, 통색에는 부정적으로 변호하였다. 즉 재물을 융통하는 것은 예로부터 나라와 가정을 다스리는데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일로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해야만 백성들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할 수 있으니 이것을 좋지 못한 법이라고 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를 서로 융통한다는 것은 금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더욱이 교회에서는 십계명 중 몸으로 범하는 여섯째와 마음으로 범하는 아홉째 계율로 거듭 사음(邪淫)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고 강조하여 교회를 옹호하였다.
정하상은 무당, 풍수, 점쟁이, 관상쟁이 같은 사람들이 사람을 속이고 재물을 낚아 가는 것은 예사롭게 보면서 홀로 교회만이 포용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조목조목 묻고 있다. 즉 "가정에 해를 끼쳤습니까? 나라에 해를 끼쳤습니까? … 저희 무리들이 일찍이 역적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도적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간음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살인을 하였습니까?" 이는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이런 해악은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는 강한 주장과 변론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하상은 성교를 믿는 사람도 임금님의 자식이니 구하여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무조건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며 "도리가 참된 것인지, 거짓인지, 그릇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를 자세히 판단하신 다음에,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도리에 돌아와서, 금령(禁令)을 늦추고, 체포하는 법을 철회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과 더불어, 제 고향에 안정하여 제 생업을 즐기면서 모두 함께 태평세월을 누리도록 하시기를 천 번 만 번 바라고 바라나이다"라며 상재상서를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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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

이상에서 살펴본〈변학장소〉와〈상재상서〉는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으로서 상소문이라는 제한된 지면 안에 그리스도교 사상을 해설하였다. 그러므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성격의 이 호교론은 당시 천주교 신도, 특히 교회 평신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그리스도교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교의론적 측면에서, 변학장소에서는 천주교를 정교(正敎)로서 그 가르침이 진실하고 옳다고 하였다. 신의 존재 증명 등 신론(神論)은 보이지 않으나 천주교가 공인되어있지 않음에도 도리어 신의 존재를 당연시하여 '천주(天主)', '천(天)', '상제(上帝)' 등으로 호칭하고 있다. 특히 기록에서 황제나 왕조 등의 높임을 나타내는 대사(擡寫)의 형식을 쓰고 있음은 놀랍다.
신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았으나, 천주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상세하여, 그 사람됨을 "성현의 무리(聖賢之徒)"로서 "모두 수신하며 하늘(天)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묘사하였다.
상재상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는 극력 주력하고 있으나, 변학장소와 달리 선교사에 관한 언급은 없다. 천주교와 그 가르침은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온전하며, 지극히 절대적인, 오직 하나이고 둘도 없는 것"이라고 명확히 정의하였다. 또한 신의 호칭도 '천주(天主)', '상주(上主)', '천(天)' 등으로 변학장소와 같으나 특이한 것은 '천지대군(天地大君)'(나라의 임금님보다 더 높은 천지의 임금님)으로 충성을 바쳐야할 人格神으로 호칭한 것이 흥미롭다.
아울러 상재상서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 그와 연계된 상선벌악과 천당지옥의 교의를 상세히 해설하고 있으나, 변학장소는 영혼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으며 단지 상선벌악과 천당지옥의 개념만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호교론적 측면에서는 상재상서는 주로 십계명에 의거하여 천주교가 바르고 가치 있는 실천윤리만을 가르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유학의 충(忠) 서(恕) 효(孝) 제(悌) 인(仁) 의(義) 예(禮) 지(智)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근본 사상과 실천윤리를 십계명과 연계시켜 교회의 합유(合儒) 내지 보유(補儒)의 성격을 설명하였다.
변학장소에서도 보유론은 강조되었는데 실제로 중국에서 '보유역불(補儒易佛)'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만들어 쓰기 시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서광계이다. 변학장소에서는 선교사들이 중국에 성현의 가르침이 있고 모두 '수신함으로써 하늘을 섬긴다(修身事天)'고 하므로 만난을 무릅쓰고 중국에 와서 상제를 섬기는 것을 종교의 기본으로, '충(忠), 효(孝), 자(慈), 애(愛)와 천선개과(遷善改過)'를 그 가르침의 뜻으로 삼는다고 상재상서와 동일하게 설파하고 있다.
반면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는 배척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두 호교론이 같으며, 그 배척의 논리도 동일하다. 즉 불교와 도교는 참되고 바른 종교가 아니며 국가의 수혜를 입었음에도 도리어 백성들을 미망에 빠뜨렸으므로 배척하는데, 천주교는 유교와 같이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윤리적, 도덕적 교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상재상서는 무부무군과 통화 통색, 제사와 신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근거가 되던 여러 문제를 상세히 해명함으로써 의구와 반감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에 비해 변학장소에서는 교회와 선교사를 시험하고 조처하는 세 조목씩의 대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부당한 상소와 무지로 인한 모함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직접 선교사의 실체와 진면목을 파악할 것을 건의하였다. 무지한 모함이란 예를 들어 선교사들의 연금술, 외국상인과의 연대설 등으로 당시 일반에서 선교사들에게 품고 있었던 의구심을 지적한 것이다.
상재상서와 변학장소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은 이상과 같이 교의면, 호교론의 측면에서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두드러진 인식의 차이는 선교사와 서양학술에 관한 것으로 상재상서는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반해 변학장소에서는 선교사와 서양학술을 채택하여 유용하게 쓸것을 건의하였다. 먼 곳에서 온 자들의 학술이 최고로 옳다는 것을 말하며, 나라에서 그것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게 하여 만년의 복지와 왕조의 태평을 도모하는데 기여하도록 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는 왕조의 몰락이 가속화되던 명조 말엽에 실학자며 관료이던 서광계로서는 신앙 뿐 아니라 왕조의 중흥을 위해서도 선교사들과 서양학술 및 기술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종교보다 서학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정하상 이전 세대의 조선 실학자들의 인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실제로 서광계는 그들 실학자들이 연구하고 본받고자 했던 모범이었다.
또 다른 부분은 제사와 신주에 관한 것으로 상재상서에서는 '덧붙이는 글'에서 부정적 인식을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변학장소에는 언급이 없다. 이는 변학장소의 시기에는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한 예수회 선교단의 적응주의적 전교방침에 의해 제사를 용인하였으므로 근원적으로 이 문제에 관한 갈등이나 공식적 마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며 만물의 창조자, 주재자로 인식하였다.
둘째, 천주교와 선교사는 유교와 합치되는 가르침으로 유교적 질서 하에 백성을 바르고 선하게 인도하는데 그 목적과 임무를 가지고 있다.
셋째, 영혼은 천주가 부여한 것으로 불멸한다. 영혼이 죽지 않으니 당연히 상선벌악을 위한 영원한 천당과 지옥이 있다.
넷째, 참되고 바른 종교가 아닌 불교와 도교는 배척한다.
한마디로 천주교는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온전하며, 지극히 절대적인, 오직 하나이고 둘도 없는 것"이며, 그 교회를 대표하는 선교사는 '성현'들로서 "그 도는 대단히 바르고, 그 지키는 바는 대단히 엄하며, 그 학문은 대단히 박식하고, 그 지식은 대단히 정밀하고, 그 마음은 대단히 진실되며, 그 견해는 대단히 확고하여, 모두 수신하며 하늘(天)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인식하였다.

6. 맺음말

근세 그리스도교의 중국 전교는 마테오 리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이것이 17세기 이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존속하는 중국 천주교회의 시작이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 어문과 습속 및 문화를 익힌 후 1583년 廣東省에 들어간 후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드디어 1601년 북경에 정착하여 전교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후기 사회에 창립되었다. 주지하듯이 이는 17세기 중국에서 전교활동을 펴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부연사행원(赴燕使行員)이 얻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이루어졌다. 즉 그리스도교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양학문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知的 호기심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한국 천주교는 한역서학서의 조선도입 후 학문적 연구를 통해 그것이 신앙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천주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전교자 없이 전통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율적 구도를 통해 종교를 수용한 세계 종교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교회인 것이다.
이후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천주교회사는 일반 역사에서도 그러했듯 각각 혹은 함께 연계되어 전개되었다. 비유하자면 씨앗과 종묘상회와 종묘상인의 관계와 같은 역할이 중국과 한국 천주교회사에 번갈아 주어졌다고 하겠다. 한국 천주교회의 씨앗은 중국 천주교회라는 종묘상회에서 예수회 선교사라는 종묘상인으로부터 얻어왔다. 한국교회가 스스로 뿌린 씨앗을 싹틔우고 기르기 위해 애쓸 때 종묘상회는 음으로 양으로 돕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사정으로 모르는 척 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씨앗은 말할 수 없이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도 잘 자라서 이제는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을 사철 피우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천주교회는 도리어 종묘상회도, 상인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한국 천주교회가 그들을 위해 씨앗과 비료를 준비해야될 때가 아닐까.
이 준비를 위하여 교회사 연구도 이제 비교사로 지평을 넓힐 때가 된 듯하다. 그 시론(試論)으로 최초의 호교론을 비교, 검토하여 중국과 한국 초기교회의 중심적 인물들의 그리스도교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시론이므로 무리한 논리의 전개나 치밀하지 못한 연구방법 등의 문제점이 있겠으나, 천주교회사를 통한 한국과 중국의 교류와 조화, 더 나아가 동서문화의 교류 내지 교섭에 대한 관심의 촉구라는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첨론(添論) :

〈상재상서의 우사(又辭)〉에 대한 의문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마친 후 '다시 올리는 글' 우사를 쓰고 있다. 이 우사에서는 천주교에서 제사와 신주를 금지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고 굳건한 소신으로 밝히는 있다. 1791년 윤지충, 권상연의 진산(珍山)사건 이후, 제례(祭禮)와 신주(神主)의 부정을 천주교의 무부무군의 증빙으로, 또한 박해의 중대한 표면적 이유로 삼고 있던 조선 왕조에 대해 정면으로 그 부당성을 설파한 것으로 상재상서의 뒤에 덧붙인 명문장으로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우사가 과연 정하상이 상재상서에 덧붙여 쓴 글인가에 대해 필자는 감히,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우사에 쓰이는 용어의 문제이다. 정하상은 상재상서 본문에서 교회를 일컬을 때 반드시 '천주성교(天主聖敎)'나 '성교(聖敎)'라고 하였지 '천주교(天主敎)'라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의 다른 교리서나 전교서에서도 일반적으로 교회는 '천주성교', '성교' 혹은 '주교(主敎)' 등으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우사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천주교'라고 부르고 있어 이질적이다. 바로 위의 본 문장에서 교회를 반드시 '성스럽다'는 존칭으로 여러 차례 쓴 후에, 바로 아래의 덧붙인 글에서 존칭을 뺀다는 것은, 더욱이 상재상서가 교난의 총책임자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납득할 수 없다.
또 다른 용어는 '양지(良知)'이다. 본문에서 정하상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양지'를 세 차례나 들며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주지하듯이 '양지'란 양명학(陽明學)에서 사용하는 핵심적인 용어로 정하상은 이를 의도적으로 골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사에서는 '양심(良心)'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느닷없다.
또 하나는 '도덕(道德)'이라는 용어로, 본문에서는 '도리(道理)'라는 표현으로 무수히 쓰이고, '도덕'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다음은 〈우사〉라는 문장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준비하여 가지고 있다가 체포된 후 우의정 이지연에게 올렸다. 우사는 그 내용으로 보아 쓰려고 했다면 본문의 여러 부분에서 기술될 수 있었다. 오히려 본문의 내용과 연계되어 언급되었어야 하고 그것이 논리적으로도 더 정연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넷째는 효도로서 충과 효는 만대에 변할 수 없는 도리"라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혹은 영혼의 불멸과 천당지옥을 해설할 때 제사와 신주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의심스러운 것은 천주교가 무부무군의 종교가 아니며 그 윤리적, 도덕적 가르침은 유교와 다름이 없음을 강조하며 박해를 멈출 것을 호소하는 이 글에서 과연 이미 한차례 옥사를 거치며 공식적으로 금기시된 제사와 신주의 문제를 덧붙여 언급했을까는 의심스럽다.
이 위에 상재상서가 "한 종교의 요지를 이만큼 간명하게 기술한 글을 과연 다른데서 찾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또한 "당당한 문장으로 고전을 인용해가며 근엄하게, 때로는 명쾌하게 교리를 해설해나가며, 천주교를 사교로 몰고 박해함이 부당함을 논증"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호교론의 완벽함은 정하상이 오랜 동안 고심하여 궁리하고, 쓰고, 추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말미에 스스로 고백하였듯,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아니하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음에 나아간다면, 산더미와 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 대(百代)를 두고 폭로하여도 다할 수 없겠습니다"라고 하여 이 글을 위하여 장고(長考)를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하는 것이 당연한 문장을 사족의 형태로 거두절미하고 덧붙였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문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에 대한 토론

서종태(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사)

오늘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해 주신 장정란 선생님은 중국 서학사를 오랜 동안 연구해 오신 분입니다. 그 구체적인 연구 성과로 아담샬의 활동과 그에 대한 중국측 반응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 《그리스도교의 중국 전래와 동서문화의 대립》이란 단행본을 1997년에 부산교회사연구소 연구총서로 간행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장 선생님은 〈辯學章疏〉를 지은 서광계에 대해서 1971년에 〈서광계 연구〉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 장 선생님의 발표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품어 오던 것을 구체화 시킨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장 선생님의 농익은 연구 덕분에 오늘 우리는 중국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호교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정하상에 관한 연구를 보다 더 심화시켰다는 점에서도 오늘 장 선생님의 발표는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담당한 역할은 장 선생님의 연구 가운데 부족한 점을 찾아 비판하여 보다 더 좋은 논문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다는 점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장 선생님은 서광계의 〈변학장소〉와 정하상의 〈上宰相書〉를 비교 검토한 결과 서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를테면 〈변학장소〉에는 신의 존재 증명 등 神論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상재상서〉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점, 〈변학장소〉에는 선교사와 서양학술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상재상서〉에는 그것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변학장소〉에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반면에 〈상재상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는 점, 〈변학장소〉에서와 달리 〈상재상서〉에서는 無父無君과 通貨通色에 대해 상세히 해명하고 있는 점 등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장 선생님이 오늘 발표에서 밝혀낸 중요한 연구 성과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탐구했다면 더욱 더 좋은 발표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미처 꾸리지는 못했지만 아마 장 선생님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으로 이해됩니다. 장 선생님의 생각을 좀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둘째, 장 선생님은 '첨론'의 형식을 빌어 〈상재상서〉의 〈又辭〉에 대해 교회를 일컫는 용어가 〈상재상서〉의 그것과 다른 점 등을 들어 정하상이 〈상재상서〉에 덧붙여 쓴 글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배척하고 있는 〈우사〉의 내용은 유교와 천주교가 배치되지 않는다고 논증하고 있는 〈상재상서〉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장 선생님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상재상서〉를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지만 〈우사〉를 정하상이 덧붙여 쓴 글이 아니라고 의심한 사람은 장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장 선생님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사〉의 문제는 '첨론'의 형식이 아니라 〈상재상서〉의 내용을 검토하는 본론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셋째, 장 선생님은 제2절과 제5절에서는 서광계의 〈변학장소〉와 정하상의 〈상재상서〉를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제3절과 제4절에서는 그와 달리 각기 별도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떨어지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제3절과 제4절의 내용도 예컨대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의 저술 배경과 동기',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의 내용'과 같이 재조정하여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에 대한 토론

서종태(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사)

오늘 〈중국과 한국 최초의 호교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식〉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해 주신 장정란 선생님은 중국 서학사를 오랜 동안 연구해 오신 분입니다. 그 구체적인 연구 성과로 아담샬의 활동과 그에 대한 중국측 반응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 《그리스도교의 중국 전래와 동서문화의 대립》이란 단행본을 1997년에 부산교회사연구소 연구총서로 간행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장 선생님은 〈辯學章疏〉를 지은 서광계에 대해서 1971년에 〈서광계 연구〉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 장 선생님의 발표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품어 오던 것을 구체화 시킨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장 선생님의 농익은 연구 덕분에 오늘 우리는 중국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호교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정하상에 관한 연구를 보다 더 심화시켰다는 점에서도 오늘 장 선생님의 발표는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담당한 역할은 장 선생님의 연구 가운데 부족한 점을 찾아 비판하여 보다 더 좋은 논문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다는 점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장 선생님은 서광계의 〈변학장소〉와 정하상의 〈上宰相書〉를 비교 검토한 결과 서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를테면 〈변학장소〉에는 신의 존재 증명 등 神論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상재상서〉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점, 〈변학장소〉에는 선교사와 서양학술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상재상서〉에는 그것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변학장소〉에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반면에 〈상재상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는 점, 〈변학장소〉에서와 달리 〈상재상서〉에서는 無父無君과 通貨通色에 대해 상세히 해명하고 있는 점 등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장 선생님이 오늘 발표에서 밝혀낸 중요한 연구 성과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탐구했다면 더욱 더 좋은 발표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미처 꾸리지는 못했지만 아마 장 선생님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으로 이해됩니다. 장 선생님의 생각을 좀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둘째, 장 선생님은 '첨론'의 형식을 빌어 〈상재상서〉의 〈又辭〉에 대해 교회를 일컫는 용어가 〈상재상서〉의 그것과 다른 점 등을 들어 정하상이 〈상재상서〉에 덧붙여 쓴 글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배척하고 있는 〈우사〉의 내용은 유교와 천주교가 배치되지 않는다고 논증하고 있는 〈상재상서〉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장 선생님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상재상서〉를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지만 〈우사〉를 정하상이 덧붙여 쓴 글이 아니라고 의심한 사람은 장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장 선생님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사〉의 문제는 '첨론'의 형식이 아니라 〈상재상서〉의 내용을 검토하는 본론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셋째, 장 선생님은 제2절과 제5절에서는 서광계의 〈변학장소〉와 정하상의 〈상재상서〉를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제3절과 제4절에서는 그와 달리 각기 별도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떨어지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제3절과 제4절의 내용도 예컨대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의 저술 배경과 동기', '〈변학장소〉와 〈상재상서〉의 내용'과 같이 재조정하여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답변요지

먼저 부족한 글을 읽고 자상한 논평을 해주신 서종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첫째 번 지적은 중국과 한국의 호교론은 서로 차이가 있는데 왜 그런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이는 우선 호교론을 쓴 배경과 읽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선 배경이 되는 동기와 목적이 <변학장소>의 경우 심각의 선교사와 천주교 축출이라는 상소문에 대한 반박문의 성격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교회와 선교사는 공식적으로는 용인되지 않았으나 묵인은 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는 실은 자명종(自鳴鐘) 즉 시계수리를 위하여 북경에 머무를 수 있었고, 또한 1613년부터 예수회선교사들은 비공식적이나마 명 조정의 수력업무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변학장소는 선교사의 축출을 막는 것이 최우선의 저술 목적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상재상서>는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있고 이미 신유년 대교난의 역사가 있으며 더욱이 정하상은 이 때 부친과 형을 잃었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 박해의 와중이어서 천주교의 근본교의를 설명하고 설득시켜 교난을 중지시켜야하는 절박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호교론을 올린 대상도 다릅니다. 변학장소는 명목상 '신의 아들'인 '천자(天子)'에게 올리는 글이고, 상재상서는 유학자고 행정관리이며 동시에 교난의 주도자인 재상에게 바치는 글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두 호교론의 내용과 의미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둘째, <우사>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공감해주셔서 크게 용기를 얻고 고무되었습니다. 다만 본 발표문에서는 이 문제가 본 주제와 달라서 첨론의 형식으로 독립시켰습니다. 다음에 완고로 다듬을 때에는 본론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셋째는 논문형식의 기술적 문제를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제한된 시간 내의 발표문이므로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편법입니다. 이것도 추후에 완고를 쓸 때에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사가 주전공이 아닌 저에게 선생님의 지적은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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