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꼴베 신부님을 기억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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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현 [mazkr] 쪽지 캡슐

2010-04-28 ㅣ No.4511

 
어제는 집에 와서 코린토서를 읽어보았다.
머릿속의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읽어 보았는데,
정리가 되지않고 먹먹하기만 하다.
요즘 형제들간에 서로 이해할려 노력해 보고 대화를 하면 풀릴것 같은데 답답하게 하는 일들도 있고,
기도도 안모아지고 하여,
코린토서가 맑은 답을 주리라 기대했지만 오늘은 안그렇다.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성인을 떠올려 봄이 좋을까 해서 떠 올려 보았는데.
역시 오늘도 평소 좋아하던 꼴베신부님이 떠오른다.
우리 형제들도 잘알겠지만 같이 한번 더  꼴베신부님을  회상하여 보는 것도,
기도와 묵상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분의 삶을 회상하는 글을 가져와 싣어 본다.
 
사랑의 순교자  막시밀리안 마리아 꼴베(Max. Kolbe) 
2세계대전이 터지자, 폴란드의 무염성모마을의 원장으로 있던 콜베신부는 독일군에 의해 지옥같은 아우슈비츠노동수용소에 감금된다. 1941년의 일이다.
명의 수인이 수용소를 탈출했다나치는 본보기로  10명의 수인을 처형하기로 했다
앞으로 불려나오는 사람은 물조차 주지않고 굶겨죽이는 아사(餓死)감방 행이다.
사람들은 아사감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알기 때문에 공포에질렸다. 무작위로 처형자가 불려나와졌다.
 
10명이 불려졌을, 그들 가운데 사람이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내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소." 하며 울부짖었다. 꼴베신부는 천천히 수용소소장 앞으로 나서면서  "나를 대신 죽여주시오. 나는 딸린 가족이 없는 천주교신부요.  사람 대신 나를 보내주시오." 라고 하였다수용소장은 이해할 없었지만, 유대인 다음으로 미워하는 천주교신부가 제발로 나서서 이런 청을하자 쾌히 허락했다.
꼴베신부의 나이는  47세였다.
 
신부 대신으로 목숨을 건진 이는 가요비니체코라는 사람이었다.
 "그때, 신부님과 이야기 하지는 못했습니다. 한 마디도 말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없이 헤어졌는데, 신부님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가요비니체코씨는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때 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다그는 심한 자책에 빠졌다.  
"그렇게 훌륭한 사제를 죽음으로 몰아낸 것은 나다. 내가 죽는 편이 좋았을 것을..."
 
그렇지만, 오랜 시간 후에 그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 말없이 미소 짓던 신부의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닫고세월의 고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꼴베신부의  "사랑"전하는 전달자가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게됐다가요비니체코씨는 93세의 나이로  1995세상을 떠났다.
 
꼴베신부는  1930년 부터  6년간 일본에 와서 선교사로 일했었다.
 큐슈의 나가사키에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가 남아있고, `꼴베 기념관`있다.
 
`꼴베 기념관`관장오자키(小崎) 신부의 .
"지금까지 나는, 꼴베신부가 가요비니체코씨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겠다고 신청한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그런데 신부는, 사실은 아사감방에 함께 넣어진  9 명을 구하기 위해 신청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사감방에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속옷을 입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먹을 것은 물론 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확실히 죽는다. 살아날 희망은 조금도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여기서는 완전히 짓밟혀 버렸다그들에게 삶의 의미 같은 것이 있을까?
가운데 꼴베신부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조용히 기도하며,  동료들을 격려했다.
그들의 망가진 마음을 받쳐주며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그리고그들의 임종을 지켰다.
전까지 아사감방에서는 절망과 고통하느님을 원망하는 소리뿐이었지만,
때만은 기도와 성가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신부는시체를 치우러 오는 병사를 상냥한 눈으로 쳐다보며그들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오자키신부)
9명이 죽어나가고 신부가 최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놀랍게도  17일간 살아남았다보통, 인간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17일을 산다는 것은 생각 할 없는 일이다게다가, 신부는  고질적인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감방에 들어가기 일주일전에 나치의 간수로부터 기절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나치는 신부에게 독주사놓아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최후의 한 사람이 되어서도 신부는 고결함을 유지했다.  존엄을 잃어버려야 할 상대가 자애로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니...나치는 결국 꼴베신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승리의 소식은 살아남은 수인들에게 전해졌다
 
"아우슈비츠에 희망은 전혀 없었습니다그렇지만 꼴베신부의사랑의 죽음을 알았을,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살자끝까지 살아남자생명은 소중하다.'하는 힘이 용솟음쳐 올랐습니다마음의 변화를 나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아담이라는 사람의 증언이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같은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기리며  1982막시밀리안 마리아 꼴사제를 '사랑의 순교자'시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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