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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979aaa] 쪽지 캡슐

2008-08-19 ㅣ No.7609

Re:간단한 답변
 
작성자   이용섭(979aaa)  쪽지 번  호   6661
 
작성일   2008-07-29 오전 2:10:32 조회수   80 추천수   4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민족,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작성자 : 이용섭  2007-08-20 18:13:47   조회: 530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민족



1995년 10월 말 서울 시내 한 호프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이 날을 쉽게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또 하나 있다. 나의 "조용기 목사 비판서" 원고를 도서출판 ''움직이는 책''에서 가져간 날이기 때문이다. 원고는 6월에 완료되었지만 출판하려는 출판사가 없었다. 제1차로 ''개마고원''에서 원고를 가져갔으나 약 한 달 후 출판을 하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후 내 원고가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으나 모두 다 퇴짜를 맞았다. 그 날 나는 마지막으로 원고를 보내놓고 여기서도 퇴짜를 맞으면 원고를 모두 다 불 살라버리고 출판을 포기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얼마 후 운이 좋게도 여기서 책이 출간되었다.

그 날 호프집에서 친구 둘과 술을 마셨는데 그들 중 하나는 유명 현역 정치인의 친동생(당시 쌍용철강 과장)이다. 술을 마시다가 내가 "이 상태 이대로 나가다가는 적화통일이 온다"고 하자 두 친구 모두 다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그러나 유명 현역 정치인의 친동생인 바로 그 친구는 2000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는데 유독 나에게만 이민간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서도 전화 한번 하지 않았다. 그 날 호프집에서의 다른 친구는 천주교 신자인데 화곡동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서 이 친구에게는 자주 전화를 하였다. 서로 통화 중 그가 항상 적화통일을 걱정한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민간 그 친구의 형인 유명 현역 정치인의 장인이 대단한 부자이다. 그나 그의 형은 재산이 별로 없다. 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나는 한국논단 1997년 2월호에 "김대중敎와 강준만"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거기에서 나는 김대중이 집권하면 그의 "대북관과 도덕성" 때문에 대한민국이 파멸로 가게 된다고 장담했고 그것이 또한 사실로 증명되었다. 나는 2002년도에 이회창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을 때 이번 선거도 또 졌다고 여러 사람에게 얘기하였다. 오늘 오후 4시 반 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결정된다. 이명박 장로로 결판이 나면 올 대선은 과거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내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민족의 일원이라는 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희생자(전사자+실종자)의 수가 5만4천2백4십6명이다. 그런데도 이라크 파병과 아프간 파병을 결사 반대하는 인간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많다. 여기에는 개신교의 목사들도 많고 천주교와 성공회의 신부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다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인간들이다. 6. 25 때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여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벌써 김일성 김정일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신교+구교)는 그 뿌리가 뽑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2003년 10월에 미국의 한 개신교 중보 기도단 전체가 "한반도에서 적화통일이 일어난다"는 사적 계시를 한꺼번에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잘 아는 어떤 천주교 신부(부산교구. 성령운동가)는 1988년에 "통일은 베트남 식으로 된다"는 사적 계시를 받기도 했다. 아래에 조갑제의 글을 하나 인용했다.

6.25 때 딘 소장을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한국인

길을 헤매는 딘 24사단장을 북한군에 신고하고 3000원씩 받은 두 한국인.

趙甲濟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死守하여 한국을 구한 제1공로자 워커 8군 사령관(중장)은 1951년 1월 의정부 근방에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한국군이 몰던 트럭에 받혀 죽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미군 장교 하우스맨이 말려서 재판을 받고 옥살이만 하도록 했다.

한국전선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던 미 24사단의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 공방전에서 밀려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3년간 고생했다. 그는 휴전 때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그는 1950년 7월18일부터 3일간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大田을 방어했다. 이 3일은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는 데 소중한 시간이었다. 戰史학자들은 이 3일간의 지연작전이 한국을 구했다고 말한다.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부하들의 앞장을 섰다. 그는 후퇴할 때도 부상자를 자신의 지프 차에 태우고 가는 등 부하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는 혼란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때부터 35일간 딘 소장은 낯 선 한국 마을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딘 소장은 한국인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는 세 번 배신을 당했다. 첫번째 한국인은 그를 보호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이때는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두번째 배신은, 딘 소장이 한국인 형제가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 며칠간 보호를 받았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이 "떠나라"고 쫓아낸 일이다.

세번째는 딘 장군이 대구를 향해서 길을 걸을 때였다. 한, 최라는 두 한국인이 딘 장군을 안내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딘 장군은 포로가 되었다. 그 代價로 두 한국인은 3000원(5달러)씩의 현상금을 받았다.

한국을 구하러 와서 목숨을 바친 미국인이 있는가 하면 그 미국인을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돈을 번 한국인도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고마운 것은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워커 장군의 후임 8군 사령관은 릿지웨이 장군이고 릿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돛徨?이후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는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였다. 아버지 곁에 있기 위해 戰線 근무를 자원했던 아들은 북한지역 폭격임무를 수행중 실종되었다. 밴 프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수색작전이 너무 지나치다고 중단시켰다.

북한군은 한국군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미군을 공격했다. 미군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것도 양민을,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으로 오해한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에 흥분했던 한국인들중 과연 몇 사람이 딘 소장을 북한군에 팔아넘긴 이들이 한국인이었음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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