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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복자 프라 안젤리코 화가♬시편 제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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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2-17 ㅣ No.1624

 

축일:2월18일

복자 프라 안젤리코(피에솔레의 요한)

Bl. Fra Angelico

Beato Angelico o Fra Angelico

(detto Beato Giovanni da Fiesole)

Vicchio di Mugello, Firenze, 1387 - Roma, 18 febbraio 1455

Patronato:Artisti (Papa Giovanni Paolo II, 1984)

Domenicano

 

 

복자 프라 안젤리꼬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화가이자 사제였다.

그의 속명(俗名)은 구이도(Guido) 혹은 구이돌리노(Guidolino)라고도 하였으며,

그의 수도(修道)명은 천사들의 요한이었다.

또 일생을 ’경건한 그리스도 신앙의 표현에 헌신하였다’ 고 하여

베아토 프라 안젤리꼬(축복 받은 천사 수도사)로도 불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것들은 그의 유명한 그림과는 달리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플로렌시아(피렌체) 근교의 비키오(비쿄)에서 태어난 안젤리꼬는,

20세 때 베네데토 (그는 성 마르꼬 수도원의 성가책에 정교한 그림을 그렸는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가 피렌체의 정치적 폭동으로 살해당해 미완성으로 남았다.)와 함께

피에솔레의 도미니꼬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얼마 후, 종문 분규(宗門 紛糾)로

코르토나 수도원으로 옮겨 10년동안 코르토나, 토리뇨, 그리고 피에솔레 등지에서 지낸 다음,

1436년 피렌체의 성 마르꼬 수도원으로 옮겨 활동을 하였다.

 

 

당시 유럽 사회는, 교회의 대분열과 흑사병 등으로 혼란했는데,

프라 안젤리꼬는 교회와 수도원을 개혁하는데 주도했던 도미니코회의 복자 요한 도미니치, 베드로 카푸치,

리파 프라타의 라우레시오,피렌체의 성 안토니오(그는 후에 피렌체의 주교가 되었을 때,

성 마르꼬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안젤리꼬)와 성가책의 그림(베네데토)을 위탁했는데

그들의 그림을 보고 ’천국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경탄했다.)와 함께 살았다.

 

프라 안젤리꼬의 그림은 종교적인 내면성(특히 중세의 종교성이 그의 필력의 근원에 있다.)을 표현하는데

그지없이 정교했으며 세밀화를 방불케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양체 표현(量體 表現)과 원근법을 이용해 그린,음악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천사에 둘러싸인 유명한 <아마상인(亞麻商人)의 성모상, 1433년>이다.

또 <그리스도 강생, 1435년>에서는 자연의 직접적인 관조에서 비롯된 듯한 풍경 묘사도 선보이고 있다.

 

 

Paintings for the Armadio degli Argenti -ANGELICO, Fra

(detail: lower left side)1450. Tempera on wood. Museo di San Marco, Florence

 

지금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성 마르꼬 수도원의 일련의 벽화에서는,

프레스코 화법을 채택, 그 제약과 특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주제의 본질을 파악한 단순화와 입체적인 구도에

조형적인 인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그림들엔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대제단의 성모상을 비롯하여

그의 뛰어난 작품의 일부가 있다.

그 곳에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곧 무너졌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의 폭풍에 물들지 않고 남아 있다.

 

그의 제단 장식들을 보면, 사물의 핵심을 추려내고 불필요한 세부를 생략하는

사본 색채가의 뚜렷한 터치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엔 흐트러진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은 분명 사본 채색으로 단련된 손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신학으로 단련된 정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당시 화가들은 성모님을 그리기 위하여 평판이 나쁘더라도

얼굴이 아름다우면 모델로 이용했던 관습 아닌 관습들이 흔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꼬가 그렸던 성모의 모습에서는 그가 신학자의 분명한 입장에서

그림이나 조각, 설교, 시 또는 건축 같은

어느 분야에서도 자신의 사고와 방법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일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1445년, 교황(에우제니오 4세)의 소명으로 로마로 가, 바티칸궁 니콜라오 5세 성당에서 그린 여러 벽화는

로마 고대 건축의 장대함을 보여주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이 밖에 <수태 교회>, <최후의 심판>, <동방 박사들의 경배> <천사들의 합창, 1447년 오르비에트 대성당>

<성 스테파노와 성 라우렌시오의 생애, 1447-1450년 바티칸의 니콜라오 소성당>등의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프라 안젤리꼬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이나 단테의 시와 같은 문학과 함께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를 그만의 미술로서 표현하였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예술성에 대한 역사의 공경성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는 성품이 본래 겸손하고 너그러워 사람들로부터 칭송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득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기도를 드린 후가 아니면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프라 안젤리꼬의 생활 신조는 ’그리스도를 그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의 형제들이 목소리나 펜으로 했던 웅변적인 설교를, 그는 붓으로서 최고의 본보기를 드러낸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가 남긴 교회의 미술적 가치는,

다른 어떤 설교도 들리지 않는 곳에까지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미니코회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복자로서 존경으로 대했으며,

1904년 수도회 총회에서는, 그에 대해 성인의 공인을 교황청에 요청했었다.

그는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그의 축일은 2월 18일이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The Annunciation-ANGELICO, Fra

1440-41. Fresco, 190 x 164 cm. 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베아토 안젤리코는 15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화가로 성모영보를 즐겨 그렸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려진 ’성모영보’ 이다.

이 곳은 현재 안젤리코 미술관으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도원이었다.

1436년 코시모 데메디치는 미켈로초라는 건축가를 시켜 이 곳을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개조했다.

그리고는 안젤리코를 초빙하여 1436년부터 1445년까지 수도원 전체에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2층 복도에 그려져 수도자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 갈 때마다 수도자들의 구도생활에 평화를 주고

구세주 탄생으로 인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보여 주는 묵상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림의 무대는 우아한 기둥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이다.

 

그림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 앞에 내려와서 구세주 예수 잉태를 예언하고 있다.

천주의 모친이 되실 여인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의 모습은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여인에게 예를 다하고 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

라고 무릎을 꿇은 채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전형적인 동정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보이고

마리아의 얼굴은 한없이 청순하고 성스러워서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왼쪽에는 이 신비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한 수도자의 모습이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3세기 초에 살았던 성 베드로 순교자로서

성 도미니쿠스로부터 직접 사제 서품을 받고

평생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며 지낸 수도자의 모범이 된 이 성인을 이 신비에 동참시킨 것이라고 한다.

안젤리코가 그린 성모영보는 화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종교적 의미 전달에 충실하여 엄격한 신앙심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안젤리코는 하느님 말씀 앞에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수도자들의 자세와 분심 없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지풍 신부)

 

 

Deposition (Pala di Santa Trinita)-ANGELICO, Fra

1437-40. Tempera on wood, 176 x 185 cm. Museo di San Marco, Florence

 

 

 

 

 

♬시편 제39(40)

 

 

 

 

 

 

 

 

 

 

 

 

 

 

 

 

 

 

 

 

 

 

 

 

 

 

 

 

 

 

 

 

 

 

 

 

 

 

 

Beato Giovanni da Fiesole (detto Beato Angelico o Fra Angelico) Domenicano

 

18 febbraio

Vicchio di Mugello, Firenze, 1387 - Roma, 18 febbraio 1455

 

Il beato domenicano Giovanni di Fiesole e meglio conosciuto come Beato Angelico. Esercito l’arte predicatoria con il pennello, dipingendo moltissimi capolavori tra i quali la celeberrima Annunciazione. Nato alla fine del Trecento - con il nome di Guido - a Vicchio di Mugello, entro con il fratello Benedetto nel convento di Fiesole. Opero a Firenze, in tutta la Toscana, a San Pietro e nei palazzi vaticani, su invito di Eugenio IV. Mori a Roma nel 1445 nel convento di Santa Maria sopra Minerva, dove tuttora sono conservate le sue spoglie. Giovanni Paolo II l’ha proclamato nel 1984 patrono universale degli artisti. (Avv.)

 

Patronato:Artisti (Giovanni Paolo II, 1984)

 

 

 

Questa soave e genialissima figura di Frate Predicatore fu un dono magnifico fatto da Dio all’Ordine. Guido o Guidolino, figlio di Pietro, nacque a Vicchio di Mugello in Toscana alla fine del XIV° secolo e fin da giovane fu pittore in Firenze. Quando senti la vocazione, insieme al fratello Benedetto, si presento al convento domenicano di Fiesole. Ordinato sacerdote assunse il nome di Fra Giovanni da Fiesole, ma subito dopo la sua morte fu usanza comune chiamarlo “Beato Angelico”. L’azione di santo e di artista del giovane si svolse mirabilmente nel clima di alta perfezione spirituale e intellettuale trovato nel chiostro. Le sante austerita, gli studi profondi, la perenne elevazione dell’anima a Dio, affinarono il suo spirito e gli aprirono orizzonti sconfinati. Cosi preparato, da buon Frate Predicatore, pote anch’egli dare agli altri il frutto della propria contemplazione e dar vita, col suo magico pennello, al piu sacro dei poemi, narrando ai fratelli la divina storia della nostra salvezza. I suoi Crocifissi, le sue Madonne, i suoi Santi sono una predica che risuona nei secoli. Anima di una semplicita evangelica, seppe vivere col cuore in cielo, pur consacrandosi a un intenso lavoro. Sue sono molte pale d’altare a Fiesole (1425-1438) e le celle, i corridoi, l’aula capitolare e i chiostri del Convento di San Marco a Firenze (1439-1445). Recatosi a Roma, su invito di Papa Eugenio IV, dipinse nella Basilica di San Pietro e nei Palazzi Vaticani, e dal 1445 al 1449, per Papa Niccolo V la sua cappella privata e lo studio in Vaticano. Il Papa gli offri la Sede Vescovile di Firenze, che energicamente rifiuto, persuadendo il Pontefice a nominare il confratello Sant’Antonino. Fu da Dio chiamato al premio eterno il 18 febbraio 1445 a Roma, nel convento di Santa Maria sopra Minerva, dove il suo corpo e ancora conservato nella attigua Basilica Domenicana. A suo onore, e per la promozione dell’arte sacra, Papa Giovanni Paolo II il 3 ottobre 1982 ha concesso il suo culto liturgico a tutto l’Ordine e il 18 febbraio 1984 lo ha proclamato Patrono Universale degli Artisti.

 

 

Autore: Franco Mari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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