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동성당 게시판

[생각해 보는 글 7]-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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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성 [dooly] 쪽지 캡슐

1999-03-11 ㅣ No.164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둘리입니다.

나날이 늘어 가는 게시물에 저의 마음은 기뻐 뛰놉니다.

이번 월요일에 126번에 글을 올렸는데 3일만에 163번에 이르는 이 놀라움.....

물론 기적이 있었으니까 가능했겠지만...(도대체 130번부터 154번까지는 어디 간거죠..)

아마도 더 좋은 글을 올리위해 올리신 분이 지우셨겠죠...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는 밑에 있는 단추, {수정}을 이용하세용.....

하여간 너무 기쁨니다.

새로 들어온 현주, 금이, 중고등부 교감 호만이, 모두 환영합니다.

나래야 들어왔었으면 흔적좀 남겨라....

 

오늘의 글은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나온 "닐 기유메트"신부님의 [하느님께 다가가게 해주는 짧은 이야기들]에 있는 이야깁니다. 사실 그리 짧지는 않지요.. 이껏 올린 글 중 가장 긴 글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p.s. 오늘 따라 말이 무진 많죠... 왜 이러지... 기뻐서 그런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때는 성금요일 밤이었다. 사도 요한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흥분된 마음은 한 가지 의문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게 되는 한결같은 유일한 질문은, 왜 예수님은 큰 권능을 보이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그분의 적들을 전멸시키시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침내는 그분을 믿었을 텐데!

결국은 몸을 뒤치락거리고 돌아눕기를 수도 없이 한 후에야 사도 요한은 단속적인 잠에 빠져들었다. 자면서 그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는 갈바리아 수난의 잔학한 장면이 모두 세세하게 재현되었다. 십자가들과 십자가의 고통, 군인들, 구경꾼들, 그리고 믿음에 충실한 여인들, 예수님이 피흘리시며 서서히 죽어 가고 계신 어느 순간,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며 그분을 조롱했다.

"남들은 구했지만 자신은 구할 수 없는가 보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 터인데."

야유와 조롱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대해 무관심하신 것 같았다 그분이 의식을 잃으신 것일까? 아니었다.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지금 그를 구출하시라지."라는 말을 들으셨을 때 그분은 눈을 뜨셨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말이 골수에 사무치도록 그분을 자극한 것 같았다. 그분은 숨쉬기가 한층 더 힘들게 되셨다. 그분의 관자놀이의 정맥들이 이 순간 눈에 띄게 불거져 퍼렇게 드러나 보였다. 그분의 입은 분노로 굳어지셨다. 그분의 아버지께 대한 그 언급이 그분을 참으실 수 없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분은 격노해 적들에게 소리치셨다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의 불신앙 때문에 너희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귀가 찢어질 듯한 천둥 소리와 함께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번개가 무섭게 쳤다. 하늘로부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이 십자가를 비추었다. 그리고 구경꾼들이 두려워하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앞에서 예수님은 거룩하게 변모되셨다. 그러고는 예수님의 피와 땀과 함께 못이 사라졌다. 예수님은 이제 완전히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오시어, 하늘을 바라보시고 경외감을 느끼게 두 팔을 위엄있게 펴시고는 눈부시게 찬연히 빛나는 평온한 모습으로 공중에 서 계셨다. 그 순간 그분을 조롱하던 모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땅에 쓰러졌다. 그들은 입에서 피를 토했고, 배가 괴물같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더니 배가 터지며 구더기가 섞인 고름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곧 모든 것이 끝났다. 예수님의 적들은 모두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것이다.

이 광경에 뒤이어 일어난 수라장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구경꾼들은 두려워 뒷걸음질치다가 겁에 질려 도망쳤다. 일생 동안 학살에 익숙해진 로마 군인들조차도 공포에 사로잡혀 황급히 막사로 물러가 틀어박혔다. 곧 예수님만이, 극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아직도 광휘에 싸여 남게 되셨다. 마리아, 요한 그리고 몇몇 여인들이 그들의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그들의 믿음이 올바르고 참됨이 입증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온 세상을 새로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나자렛 예수님에게 저항을 하겠는가?

사도의 꿈은 계속되었지만, 꿈은 흔히 그렇듯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도중에 장면이 전환되어 시간이 단락(短絡)되었다. 이제 배경은 초대교회의 장면으로 바뀌어, 갈바리아에서 예수님의 위대한 승리 이후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꿈 속에서 요한은 순간순간들이 연속적으로 빨리 지나가는 가운데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이러했다.

온 예루살렘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순식간에 회심했다. 유다인치고 복음 선포에 저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 나아가 유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전역에 걸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과, 예수님이 그분의 모든 적보다 훨씬 강한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이셨던가를 알게 되었다. 그 적들의 소름끼치는 무서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그처럼 전능하신 주님께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줄줄이 너도 나도 제자가 되었다. 곧 온 나라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는 만인의 아우성 소리가 들끓었다. 그 결과,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하고 성대한 장관 속에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환히 볼 수 있는 곳에서 왕으로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대의(大義)는 대성공을 거두며 그대로 성취되었다. 새 왕에게는 자신의 뜻을 강요해야 할 적이란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 그분을 거역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분은 절대적인 막강한 힘으로 통치를 하셨으며, 단순한 백성을 위한 그분의 지혜와 애정어린 보살핌이 세상과 싸워 이기시려는 그분의 뜻에 잘 부합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 전체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그분을 따르게 되었다

자연히, 그 다음에 취하셔야 할 행동은 지중해 유역에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시간의 경과와 거리상의 간격으로 하여, 갈바리아에서 예수님이 피흘리신 대가로 쟁취하신 승리는 다소 설득력을 잃었고 그 신빙성에 대해서조차 다소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곧 급전되었다. 몇몇 황제와 왕들이 예수님의 권능있는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불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을 때 그 백성들은 더 이상, 설득력 있는 신통력을 입증해 보이실 필요도 없이 그저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이기만을 열망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마지막 단계는 물론, 광대한 이교도 지역들을 포함해, 알려져 있는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시는 일이었다. 다시 똑같은 복음화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불신앙은 시의 적절한 때에 몇 가지 본보기를 통해 강한 힘을 보여 주심으로써 자취도 없이 근절되었고, 즉시 불가사의한 기적적인 결과를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이제는 온 세계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님이 골고타에서 보여 주신, 그리고 그 후에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그분의 제자들이 보여 준 것과 같은 예수님의 경외스런 권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꼭 나쁜 것일까? 어쨌든 두려움이란, 성서 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의 시작인 것이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의 폭군들보다는, 진정 이상적인 왕이신 예수님처럼 현명한 왕이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바뀌어, 다른 모든 사람처럼 예수님도 이젠 노인이 되셨다. 그리고 마침내는 노령으로 돌아가셨을 때 세계는 풍요롭고 평화로웠으며 모든 것이 질서가 잡혀 있었다. 사람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더 이상의 전쟁도, 더 이상의 강도짓도 더 이상의 외국의 침략도 없었다. 또한 다른 형태의 사회악뿐만 아니라 도둑질, 간음과 착취가 사라졌다. 누가 무엇 때문에 교구 주교나 신부에 의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급사하게 되는 위험올 무릅쓰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요한의 꿈은 아주 가까운 길가에서 개가 짖는 소리 때문에 갑작스럽게 끝났다, 그는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갔다.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적이 없지 않으셨던가!"

그분이 그분의 적들을 무참히 죽여 버리신 것은 다만 터무니 없는 꿈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꾸짖었다

"아니야. 그건 하나의 악몽일 뿐이야."

이제 그는 왜 예수님이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던가 그 이유를 이해했다. 그것은 폭력이 온 세상을 그 발 아래 완전히 무릎꿇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지 결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 아무것도 원치 않으시고 오직 사랑만을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폭력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전적인 약한 것 안에서만 사랑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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