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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째서 하느님은 유다인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일까??? [성경공부] [교리학습_계시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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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ㅣ No.999

 
 
게시자 주: 
아래의 본글은, 다음과 같은 첫 질문을 주신 분께서 또 다시 주신 질문들에 대한 더 자세한 답변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를 많은 분들이 평소에 자주 읽도록 장려하고자 별도의 시간을 투입하여 특별히 마련한 글이오니, 되도록 많은 분들(개신교 신자들 포함)께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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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일부 개신교도들은 공자나 맹자, 이순신은 하느님께서 지옥으로 보내버리셨다고 주장하는데요,
 
 사실 공자나 맹자는 삶 자체는 위대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존재를 몰랐을 뿐이지요.
 
 이순신 역시 나라를 위해 외적과 싸웠고 그의 삶은 인륜적으로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살인을 많이 했으며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하여 지옥으로 갔을거라더군요.
 
 하느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그리고 천주교의 이슬람/불교/힌두교 등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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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찬미 예수님
 
여기를 클릭하신 후에, 차분히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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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그렇다면 어째서 하느님은 유태인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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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에 대한 한줄답변: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참으로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전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드러내심에 있어, 노아를 선택하셨으며, ...,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으며, ..., 야곱을 선택하셨으며, ..., ..., 마리아를 선택하셨으며, 그리고 강생하신 성자이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중의 가르침과 수난,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드디어 전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다 드러나게 된 것으로 이해하시면 무난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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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게 있습니다. 우리의 최초의 조상은 아담과 이브(하와)이고 여기에서 모든 민족들이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한민족이라 불리는 우리도 아담과 이브(하와)에게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태초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을텐데 어찌하여 토템/불교등이 발달을 했던 것일까요?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바알을 믿었던 페니키아라던가 고대 로마제국 등... 어떤 이유로 하느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믿음을 져버리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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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에 대한 한줄답변:
 
사람은 하느님의 특별한 피조물이기에,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문화들이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피조물인 그러나 원죄를 범한 인류에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고자,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과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이해하시면 무난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1) 그리스도교와 같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직접 찾아오시는 계시 종교"와, 
 
 (2) 불교 등과 같은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비계시 종교"
 
 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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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이 글은, 위의 질문 2질문 3에 대하여 드린 매우 간략한 답변들인 위의 한줄답변들의 연장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문헌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안내해 드리기 위하여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위의 제목이 신앙적으로 사실이 아님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질문 3 에 대한 더 자세한 답변:
 
답변 3. 사람은 하느님의 특별한 피조물이기에,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문화들이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피조물인 그러나 원죄를 범한 인류에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고자,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과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이해하시면 무난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1) 그리스도교와 같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직접 찾아오시는 계시 종교"와, 
  
(2) 불교 등과 같은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비계시 종교"
 
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답변 3의 연장으로서, 다음의 추가 답변들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답변 3-1.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6-49항에서,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에 대하여, 좀 더 자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6-49항에서의 가르침들을 천천히 여러 번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필독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특히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32 세계: 운동과 변화, 우연,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우리는 우주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
     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 1,19`-20) 8)

     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땅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바다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드넓게 퍼져 가는 대기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하늘의 아
     름다움에게 묻고`……`이 모든 실재하는 것에게 물어보십시오. 모든 것은 이
     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습니까.’그들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고백입니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들을 변하지 않는 아름
     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그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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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도 14,15-17; 17,27-28; 지혜 13,1-9 참조.
9.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 241, 2: PL 3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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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3-2. 그리고, 성 바로오의 서간들 중의 하나인 로마서 1,19-20, 1,21-23, 그리고 1,25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8_tue.htm <----- 또한 필독 권장.
 
특히 로마서 1,19-20에 대한 해설에서는, 위에 발췌 인용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이 또한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홀수 해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제1독서(로마 1,16-25)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
 
19-20. 하느님에 관하여, 당신께서 초자연적 방식으로 당신 스스로들 반드시 드러내심 없이도, 알게 될 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서로부터 알고 있는데(지혜서 13,1-9), 이 책은, 창조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힘 그리고 훌륭함에 의하여 미혹하게 되어(led astray), 이러한 사물들을 잡신(gods)들로 잘못 알았던, 다신교도(pagans)들은 모든 이러한 완벽 등이 자신들의 조물주(Author)로부터 유래함을 알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기" (지혜서 13,5) 때문입니다.
 
21-23. 이방인들은 하느님을 알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당신께, 흠숭과 감사의
정신으로 당신을 경배하는 것인, 당신의 몫을 드리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성 바오로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설명하듯이, [다수의 신들에 대한 믿음(belief)인] 다신교(polytheism) 및 우상숭배(idolatry)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과 여자들을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잡신들에게 인간의 형상을 주었습니다) 혹은 (이집트인들과 다른 동방의 종교들에 있어서의 경우였던) 동물들을 묘사하는
상들을 그들은 경배하였습니다. 
 
25. 거룩하신 창조주보다 오히려 창조된 것들을 경배하는 이방인들의 신성모독적 처신을 설명할 때에, 성 바오로는, 속죄(atonement)의 정신으로,  갑자기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걸림돌(offense, 즉 죄의 원인)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때마다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가르쳐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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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3-3. 그리고, 성 루카의 사도행전 14,15-1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5_mon.htm <----- 또한 필독 권장.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4,5-1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
 
15-18. 바오로(Paul)바르나바(Barnabas)는 자신들에게 바쳐지는 일체의 우상 숭배
(idolatry)
를 막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며, 그리고 그들은 리스트라인(the Lystrans)들에게, 당신의 섭리(providence) 안에서 인류를 지켜보고 계시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살아계시는 하느님에 관하여 말합니다.

"역사 전반을 통하여 심지어 오늘날에 있어서도, 사람(peoples)들 사이에서, 자연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사건들의 과정 뒤에 놓여 있는,  어떤 숨겨진 힘에 대한 확실한 알아차림(awareness)이 발견됩니다. 때로는 심지어 어떤 절대자(a supreme being), 혹은 심지어 성부(Father)에 대한 알아차림도 있습니다. 이러한 알아차림과 인식(recognition)은 깊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고취되는 삶의 한 방식을 초래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2].

[아테네(Athens)에서의 바오로의 연설의 주제들 중의 일부를 미리 논하는(anticipate)
(cf. 17,22-31)
] 이러한 짧은 권고에서, 이 사도들은 다신교도(pagans)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던 종교적 개념(religious concepts)들을 사용하여, 그리하여 그들의 충만한 
의미를 명백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청중들에게
우상 숭배(idolatry)
를 
포기하고, 그들이 막연한(vague)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살아계시는 하느님께로 향할 것을 요청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을 초월하시는 그러나 사람을 염려하시는. 참 하느님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합니다. 역사의 과정, 계절들의 변화, 그리고 고귀한 인간의 동경(yearnings)들의 구현인 매일의 경험은, 당신의 위업들 안에서 당신을 발견할 것을 
요청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입증합니다(demonstrates).


미래의 그리고 더 커다란 계시들을 미리 알리는, 하느님과의 이러한 첫 "자연적" 만남은 
내면적 회심(interior conversion)을 향하여, 즉 그들의 삶들을 바꾸어 그리하여 영적인 
평화로부터 그들을 빼앗는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행동으로부터 돌아서도록, 그들의 양심(consciences)들을 움직입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을 인정함은 모든 종류들의 실제적 결과들을 수반하여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안하며 그리고 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기초(foundation)입니다. 어떤 이가 자신의 거룩한 창조주(Creator)께서 외면적인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내밀함 안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심을 참으로 그리고 진실로 인식할 때에, 그는 자신의 영적 삶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조치를 이미 취한 것이며, 그리고 그는 윤리적 자율성(moral autonomy)과 잘못된 독립성(false indepencence)을 주장하는 자신의 성향(tendency)을 이미 규제하고 있으며 그리고 순명(obedience)과 겸손(humility)의 경로를 이미 택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은총의 자극(the inspiration of grace) 하에서 초자연적 거룩한 계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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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3-4. 그리고, 성 루카의 사도행전 17,27-2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6_wed.htm <----- 또한 필독 권장.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7,15,22-18,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
 
27-28. 성 바오로(St. Paul)는 모든 사람과 여자에게 있어 하느님의 절대적 가까이 계심과 당신의 신비로운 그러나 현존하시는 존재(real presence)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그가 다음과 같이 외칠 때에 이러한 가르침을 반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당신께서는, 저의 본심의 가장 내부의 장소보다 더 안쪽인, 그리고 가장 높은 데 보다 더 높은 장소인, 저의 안쪽에 계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Sugustine), "고백들(Confessions)", III, 6, 11].

단지 존재하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계속하여 존재하고, 살아 있으며 그리고 행동하고자 한다면, 그는 또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생각하고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특히 그는 선함(goodness)을 사랑하고 선(good)하기 위하여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릅니다. 이러한 하느님과 사람의 친밀한 결합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한하신 하느님과 유한하고 제한적인 사람 사이에 어떤 완벽한 구분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하지(take from)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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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학습을 위한 "신학 대전
여행(the tour of Summa)" Ia, q20,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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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타나시오(St. Athanisius)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스스로 존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공간(place)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며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당신께서는 만물들을 포함하시나 그러나 어떤 것에도 포합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선하심과 힘이 관련된 이상, 모든 것 안쪽에서 발견될 것이며, 그리고 당신께서는, 당신 고유의 신성이 관련된 이상, 모든 것 바깥에 계십니다. [성 아타나시오(St. Athanisius), "De Decretis Nicaenae Synodi", 11].
 
그리스도인교의 영성(靈性)(Christian spirituality)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개념들 안에서 하느님을 자신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추구하라는 그리고 항상 당신께 의존함을 
느끼라는 권유(invitation)를 보아 왔습니다.
 
아빌라의 성 요한(St. John of Avila)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이신, 그러나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없는; 살아 있는 모슨 생명의 생명이신, 그러나 당신 없이는 죽음뿐인;  행동할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의 활력이신, 그러나 당신 없이 나약함뿐인; 선한 모든 것의 전체 선이신 그러나 당신 없이는 어떠한 것도 그 안에 최소한도의 선함도 가질 수 없는,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아빌라의 성 요한(St. John of Avila), "Audi, Filia", chap. 64].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St. Francis de Sales)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있는 바로 그 장소에 계실 뿐만이 아니라, 당신께서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그대의 본심 안에 그리고 그대의 영혼의 깊은 곳에 계시며, 당신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거룩한 현존으로써 활기차게 하고 그리고 움직이는데, 이는 당신께서는 거기에 그대의 
본심의 본심으로서, 그리고 그대의 영혼의 영혼으로서 계시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는, 영혼이, 육체 전반에 걸쳐 퍼져 있기에,  육체의 모든 부분에 존재하고 있듯이, 그러나 여전히 특별한 방식으로 본심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물들에 존재하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존재하시며 그리하여 그 결과로 다윗(David)은 하느님을 '제 마음의 반석' (시편 73,26)
으로 불렀으며, 그리고 바오로(Paul)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행전 17,28)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묵상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본심 안에서, 거기에 너무도 친밀하게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커다란 
공경심을 분발시킬(stir up)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St. Francis de Sales),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 II, chap. 2]. 


이러한 인용은 -- 단수형으로 -- 금욕주의 시인인 아라투스(Stoic poet Aratus, 기원전 3세기)로 부터입니다. 이 인용에 있어 복수형은 클레안테스(Cleanthes, 또한 기원전 
3세기)에 의하여 쓰여진 제우스의 찬미(hymn to Zeus)
에 있는 유사한 절에 대한 언급일 것입니다.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악마는 성경의 말씀들을 말하였으나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를 침묵으로 줄이셨습니다. 바오로는 세속적 저자들을 인용하나, 그러나, 그는 성도(saint)이기에, 그는 그들에게 영적인 의미를 
제공합니다"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 "De Synodis", 39]. "우리는, 당신의 신성의 자녀들이 아니라 당신의 영에 의하여 자유롭게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자녀들로서 입양을 통하여 재창조된(recreated), '하느님의 자녀(God's offsprin)' 라고 올바르게 불립니다" [성 베다(St Bede), "Super Act Expositio, ad l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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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3-5. 그리고, 지혜서 13,1-9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2_fri.htm <----- 또한 필독 권장.
 
[홀수 해 연중 제32주간 금요일(지혜 13,1-9)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
 
13,1-9. 이것은 유비에 의한(by means of analogy) 하느님의 존재 증명에 대한 훌륭한 
성경의 본문입니다. 그 시기에 유행된(in fashion) 많은 철학들에 대한, 그리고
자연의 
"정령(elements)"들과 천상의 무리(heavenly bodies)
들을 수반하는 우상 숭배에 대한 엄밀한 비평의 구성 요소가 되었습니다(11,1-12,2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여기서의 
사유의 방법(the line of reasoning)은 구약 성경에 있어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어떤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신약 성경
로마서 1,18-32에 발전시켜져 있습니다.  지혜서(Wisdom)  로마서(Romans)
로부터의 이들 구절들을 사용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시적 피조물(visible creation)로부터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 그리고 사람은, 그들이 그 자신들 안쪽에 자신들의 첫 원리와 그들의 최후의 목표를 지니고 있지 못하나, 그러나 대신에 그들은, 당신만이 원천과 끝이 없으신 분이신, 거룩한 존재자(Being) 당신 자체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들로, 사람은 모든 사물들의 첫 원인이며 최종 목표인 하나의 실재, 즉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실재가  존재함을 알게 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1, 2, 3]["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34항].


교회의 교도권(Magisterium)은, 특별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 (1870년) 이후부터, "모든 사물들의 시작이며 끝이신 하느님은 인간 이성(human reason)의 자연적 빛을 통하여 창조된 사물들로부터 확실하게 알게 될 수 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 "Dei Filius", Chap. 2] 는 사실을 크게 강조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는, 그 역할에 있어,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에 대하여 알게 되고 또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라고 말하며,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사람의 존엄은 무엇보다도 그가 하느님과의 하나 됨(communion, 친교, 통공)에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로의 초대는 사람에게, 그가 존재하게 되자마자, 전해졌습니다. 이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그를 이미 창조하셨으며, 그리고 사랑을 통하여 존재 안에 그를 계속하여 수용하고 계시기(hold)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2 and 19].

하느님의 자비(mercy)에 의하여, 결코 이성과 상반되거나 혹은 이성을 밀어내고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더 높은 수준으로까지 들어 올리고 그리고 이성을 계몽하는, 초자연적 거룩한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에 의하여, 자연적 이성(natural reason)은 도움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당신과의 참된 친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드러내심, 그리고 믿음 안에서 이러한 계시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은총(grace)을 그에게 제공하심 둘 다를, 의도하셨습니다(willed).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the proofs of God's existence)들은, 여전히(still), 우리를 믿음으로 기울게 하며 그리고 믿음이 이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35항].

창조된 세상은 그 자체가 다음과 같이 하느님에 의한 하나의 (자연적) 거룩한 계시입니다: "심지어 진리의 말씀들로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이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말씀의, 당신의 지혜의 위업인, 창조라는 보편적 언어를 통하여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십니다: '아름다움의 조물주(the author of beauty)가 그들을 창조하였기에(지혜 13,5)', 창조된 사물들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으로부터 그들의 창조주에 대한 하나의 대응하는 인식(a corresponding perception)이 떠오르는, 어린이와 과학자 둘 다가 발견하는, 우주(the cosmoss)의 질서와 조화"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2500항].
이러한 가르침들을 발전시키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계시에 대한 하나의  첫 번째 단계로서, 인간의 이성에 기인하는 적절한 도구들과 함께 읽혔을 때에, 창조주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이 경이로운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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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1) 따라서, 이상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된 매우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두루 나타나셨으므로, 유다인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2 에 대한 더 자세한 답변:
 
답변 2.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참으로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전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드러내심에 있어, 노아를 선택하셨으며, ...,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으며, ..., 야곱을 선택하셨으며, ..., ..., 마리아를 선택하셨으며, 그리고 강생하신 성자이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중의 가르침과 수난,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드디어 전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다 드러나게 된 것으로 이해하시면 무난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답변 2의 연장으로서, 다음의 추가 답변들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답변 2-1.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0-73항에서 대단히 자상하고 풍부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0-73항에서의 계시의 단계에 대한 가르침들을 천천히 여러 번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필독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계시의 단계"에 대한 소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신다(제54-55항)
노아와 맺으신 계약(제56-58항)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다(제59-61항)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다(제62-64항)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제65-66항)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다(제66-6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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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2-2. 그리고, 마카베오서 1,1-64항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3_mon.htm <----- 또한 필독 권장.
 
[홀수 해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1마카베오 1,10-15.41-43.54-57.62-63)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 덕분으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들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게 될, 선택된 백성으로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허락하였다. 바로 이 점이 마카베오서들의 메시지인데, 이 메시지는 이들을 성경의 일부분으로서 받아들인 후부터 교회의 전통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책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유다인들이 이들을 율법서, 예언서들 및 시편들과 같은 수준에 놓여 있다고 간주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만약에 이 책들이, 특히 하느님의 율법을 위한, 참된 순교자들이며 그리고 참혹하고 치욕스러운 일들을 겪었던 마카베오 집안 사람들 자신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들이, 조용히 읽혀지거나 혹은 듣게 되면, 그들(이 책들)이 교회에 의하여 불경스럽게 (in vain)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 [성 아우구스티노, "Contra Gaudentium", 1, 31, 38] 임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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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2) 이상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전체 인류에 대한 당신의 구원 의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다가오는 여러 과정들 중의 한 단계로서, 유다인들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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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일자: 2011년 1월 16일(가해 연중 제2주일)]
 
다음은 가해 연중 제2주일 제1독서(이사야 49,3.5-6) 전문입니다. 이 구절들은 이사야서의 네 개의 "고통받은 종의 노래들" 중의 두 번째 노래에서 발췌한 것인데,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을 왜 선택하셨는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초록 색깔은 필자가 입힌 것입니다:
 
3. 그분깨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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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제6절에서 민족(the nations)들은 이방인들의 나라들을 말합니다. 

참고 2: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 (출판사: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에서 발췌한 위의 제6절에 대한 해설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위의 (결론 2)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같아 가져왔습니다:
 
이 거룩한 종의 임무는 이스라엘로부터 지구의 끝에 있는 동네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2,3에 있는 아브람(Abram)에게 주어진 약속의 실현이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은 또한 예수님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성전에 데려갔을 때에 시메온(Simeon)이 하였던 예언의 구현이기도 하다(루카 복음서 2,31-32):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바오로와 바르나바에 의하여, 그들이 피시디아에 위치한 안티오키아의 유다교 회당에서 반대에 부딪히자 이방인(Gentiles)들에게로 그들의 전교의 방향을 돌렸을 때에 인용이 된다(사도행전 13,47).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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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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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40시간 (발췌 인용 중인 자료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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