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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중 후대에 인위적으로 추가된 구절들??? [성경공부] [성경해석] 78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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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122.128.45.*]

2011-01-31 ㅣ No.1009

 
 
Re: 4812 - 복음서 중 후대에 인위적으로 추가된 구절들???
 
질문:  

질문 1:
단순한 성령의 감동이 아닌 복음화를 위해 인위적으로 후대에 추가된 구절들이 복음서에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질문 2: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 "너희는 세상 모든 민족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로 삼아라"

또한 성찬례를 제정하시는 구절들이 공관복음서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

역사적으로는 마태오 복음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지막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라는

구절은 루카복음에만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성찬례 중 인류의 죄를 대속해주기 위함을 암시하는 구절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너희를 위해 흘릴 내 계약의 피다."은 마태오 복음에만 나옵니다. (26장 28절)

이처럼 복음서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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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찬미 예수님

지금 주신 질문에서 하고 계시는 그러한 주장들은, 독일의 루터파 개신교측에서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난, 소위 말하는 "역사 비평가"들 및 이들의 후예들이 줄곳 해 왔던 주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철학 사조였던 "합리주의/실증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의 본문들을 상호 비교/검토하여서는, 이 복음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있는데 저 복음서에는 없거나 약간 다른 것으로 보아, "이들 중에 하나는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베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중의 하나는 거짓이다" 등의 결론을 잘 꺼집어 내었던 집단입니다.

이러한 집단의 20세기 후예들로서, 여기를 클릭하면 그 활동상을 읽을 수 있는, 개신교측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집단인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습니다. 특히 이들이, 남미 해방 신학의 창시자인 Boff(보프) 처럼, 개신교 신학자인 Bultmann(불트만)의 후예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1에 대한 답변: 

1-1. 거의 200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에, 지금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 딱 부러지게 대답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 것입니다. 다만, 말씀하신 바와 같은 "인위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묵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그렇게 하였다는 주장에 동의하여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누군가의 인격을 믿고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신 것인지요?

[내용 추가일자: 2011년 2월 1일]

주신 질문 1에 대하여, 제가 그동안 읽은 자료들의 내용들을 기억에 근거하여 되도록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에, 부족한 부분들은 바로잡을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출처들을 보강할 생각입니다.:

1-1-1. (필경자들의 실수) 중국으로부터 종이 제조법이 유럽 및 지중해 지역으로 전파되기 전까지 그리고 금속 활자로 책을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성경은 전문적인 필경자에 의하여 종이 대신에 양피지 등에 베껴 쓰는 방식으로 사본들이 후대에 전달되어 왔는데,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자신이 소장 중인 성경의 사본을 읽으면 몇 명의 필경자들이 자신이 귀로 들은 것을 받아쓰는 방식으로 사본들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읽는 자가 잘못 발음하는 실수, 자신의 귀로 들어서 받아 적는 자가 잘못 들어 그 결과 잘못 기록하는 실수 혹은 바르게 들었으나 잘못 기록하는 실수, 등 등이 아주 간혹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사본을 다시 읽으면서 잘못 기록된 부분을 바로 잡기도 하였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부분을 놓치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서방 교회(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언어가 라틴어였으므로, 지금 말씀드리는 문제는, 서방 교회의 경우에 있어 라틴어본 불가타 성경의 사본을 손으로 복사해서 사본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을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어를 공용 언어로 채택하였던 동 로마 제국에서도 그리스어 성경의 사본을 손으로 복사하여 사본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또한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한 예가 아마도 요한 1서 5,7일 것입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해-I (엮은이: 소순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부활 제2주일 제2독서(1요한 5,1-6) 해설로부터 발췌한 것입니다. 이것을 읽어보시면, 위에 드린 저의 설명이 아마도 잘 이해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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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제2독서의 바로 다음에 오는 1요한 5,7은 ‘요한의 짧은 구절(Johannine Comma)로 불리는 다음의 짧은 구절을 King James Version(KJV) 영어본 성경은 포함하고 있다: “...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1611년판 KJV, 1요한 5,7). 이 요한의 짧은 구절은 기원후 800년 이전의 라틴어 본 신약 성경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4개의 (일부 학자들에 따라서는 8개의) 그리스어 사본들에 나타나나, 이들은 라틴어 본 신약 성경으로부터 나중에 번역한 것들이었다. 이 짧은 구절은 (행간 난외의) 어구 주석(marginal note, a gloss)이었던 것이 실수로(mistakenly) 이후의 성경 본문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 복음서 19,30-34는 예수님께서 영(spirit, pneuma), 피 그리고 물을 내어주셨다고(gave up) 말한다. 1요한 5,8, 즉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구절이 성경 본문이라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오늘날 KJV 본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영어본 신약 성경 1요한 5,7에서 이 ‘요한의 짧은 구절’은 제거되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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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 사항: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번역자의 의지가 개입되어 발생하는 중대한 번역 오류의 종류/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비교도 할 수 없는, 별개의 문제들이라는 생각입니다.

1-1-2. (인쇄공/활자공들의 실수) 16세기 이후부터는 유럽 지역인들이 종이도 만들 줄 알게 되었고 또 활자 인쇄술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위의 1-1-1항에서 말씀드린 필경자 집단들에 의한 어떤 단어 혹은 문장의 우발적인 추가는 발생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인쇄공/활자공들의 오타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1-3. (번역 오류) 다른 한 편으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에 없는 단어를 인위적으로, 의도적으로 추가하는 일은, 예를 들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그 이후부터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하자가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피조물인 루터 스스로 새로운 교리를 만들고자, 자신의 주장인 (믿음만으로, faith alone) 의 근거로 삼기 위하여,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로마서 3,28에서 대단히 중대한 번역 오류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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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04.htm

루터가, 거기 로마서 제3장에서, 비록 그가 "만으로(alone)"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본 로마서 제3장 [3,28]있지 않음을 원숙하게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으로(alone)"라는 단어를 자신의 독일어 번역에서 삽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도 성령께서 믿음만으로 우리가 구하여진다고 말하라고 성경의 저술자에게 전혀 영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오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여진다고 가르치나, 그러나 갈라티아서 [5,6]에서 그는 우리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구하여진다고 말합니다.

(*) 번역자 주: 다음의 자료에서, "Translation of the Bible" 소제목 아래에 있는 부분을 참고하라:
http://en.wikipedia.org/wiki/Martin_Luther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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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영어본 성경의 경우에 위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저런 사정에 의하여 발생하게 된 1611년에 초판 발행된 영어본 King James Version(KJV1611)의 신약 성경에 있어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을 그리스어본으로부터 영어로 직접 번역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주: 여기에는 교황님께서 이러한 작업을 허락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음), 드디어 1950년경에는 가톨릭 성경 학자들과 개신교측의 성경 학자들이 공동으로 작업하여, KJV1611(1611년판 King James Version)의 고어 및 표현 등을 요즈음의 언어 및 표현들로 revise할 때에, 위에서 말씀드린 문제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거하여 바로 잡은, KJV1611의 현대 영어본인 소위 말하는 Revised Standard Version(RSV)가 출판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시면, 마르코 복음서 7,16이 언제부터 삭제되었는지에 대하여 제가 조사한 것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5. 그리고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면, 신약 성경의 어느 절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알게 모르게 삽입된 것들인지에 대하여 파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List_of_Bible_verses_not_included_in_modern_translations

참고: 아래의 표에서, NAB 열(column) 및 새 번역 "성경" 열은 제가 직접 추가한 것이며, 아래의 O, B 등의 각 경우에 대하여 각주가 주어져 있으므로, O*, B* 표시를 하였으며, 이들을 클릭하시면 NAB의 해당 주석들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O = omitted in main text (주 본문에서 삭제됨)
B = bracketed in the main text (주 본문에서 괄호 처리됨) - "The translation team and most biblical scholars today believe were not part of the original text. However, these texts have been retained in brackets in the Holman CSB because of their undeniable antiquity and their value for tradition and the history of NT interpretation in the church"
F = omission noted in the footnote (각주에서 삭제 주석이 주어짐)

  Bible translation
Passage NIV NASB NKJV RSV NRSV ESV NCV LB REB HCSB NAB 성경
Matthew 9:34                 F     *  
Matthew 12:47 F     O F O       F  B*  
Matthew 17:21 O O F O O O O F F B  O*  O*
Matthew 18:11 O O F O O O O F F B  O*  O*
Matthew 21:44 F     O F   F   F B  B*   *
Matthew 23:14 O O F O O O O   F B  O*  O*
Mark 7:16 O O F O O O O O F B  O*  O*
Mark 9:44 O O F O O O O O F B  O*  O*
Mark 9:46 O O F O O O O O F B  O*  O
Mark 11:26 O O F O O O O O F B  O*  O*
Mark 15:28 O O F O O O O F F B  O*  O*
Mark 16:9–20 F F F F F F F F   B  B*   *
Luke 17:36 O O F O O O     F B  O*  O*
Luke 22:20                 F F    
Luke 22:43 F F F O F O       B  B*   *
Luke 22:44 F F F O F O       B  B*  
Luke 23:17 O O F O O O O O F B  O*  O*
Luke 24:12   F   O F       F      *  
Luke 24:40       F F       F      
John 5:4 O O F O O O O F F B  O*  O*
John 7:53–8:11 F F   O F O F F   B  B*   *
Acts 8:37 O O F O F O O F F B  O*  O*
Acts 15:34 O O F O O O O O F O  O*  O*
Acts 24:7 O O   O O O O   F B  O*  O*
Acts 28:29 O O F O O O O O F B  O*  O*
Romans 16:24 O O F O O O O   F B  O*  O*

참고 사항: 시간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위에 나열된 절들에 대하여 다음의 영어본 성경들 및 라틴어본 성경에서 어떠한 조치가 취하여졌는지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NAB(1970), NIV(1988), Nova Vultata(1979년 판,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 라틴어 불가타 성경), CEV, GNB, 공동번역 성서, 성경 등.

저의 추측이지만, RSV가 초판 발행되었던 1970년 이후에 발행된 성경들에서는 이미 
(1) 삭제되었거나, 
(2) [ ] 처리 후에 각주로 설명이 주어지고 있거나,  혹은 
(3) 그대로 있으되, 각주로 설명이 주어져 있거나 하는 
등의 조치들이 취하여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NAB 및 새 번역 "성경"의 경우에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을 위의 표에 추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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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열된 요한 복음서 7,53-8,11에 대하여: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 (엮은이: 소순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사순 제5주일 복음 말씀(요한 복음서 8,1-11) 입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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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를 구성하는 구절은, 기원 후 약 3세기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다수의 초기 사본들에 빠져있으나, 그러나 이 구절은,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년)에서 [그리고, 비록 이들 두 종교회의(council)가 공의회(ecumenical council)는 아니었으나, 신약성경의 목록을 정의한 힙포 종교회의(Council of Hippo, 393년)와 이들이 영감에 의하여 저술되었음 선언한 카르타고 종교회의(Council of Carthage, 397년)에서도 그러하였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는 바인데], 교도권(Magisterium)이 성경의 정경(canon)을 정의하였을 때에, 라틴어 불가타 성경(Vulgate)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구절이 정경적이며(canonical) 또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aint Augustine of Hippo, 354-430년)는, 이 구절에 대한 의심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이유가,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자비심을 너무 많이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일부 엄격주의자(rigorists)들이 이 구절이 도덕적 규범(moral rules)의 해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 따라서 그 결과, 필경자(copyists)들이 자신들의 사본(manuscripts)에서 이 구절을 삭제하였던 것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Adulterous Marriages(De Coniugiis Adulterinis)", 2, 6]. 

(이상, 발췌 끝)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다해 사순 제5주일 복음 말씀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도 위와 동일한 설명을 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설명은, 4세기 이전의 오래된 성경 사본들이 지금에 비하여 많이 남아있었던 당시의 여건을 고려할 때에, 아무런 문헌적 근거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즉, 요한 복음서 7,53-8,11이 애초의 사본들에는 존재하였는데,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가 설명하고 있는 이유로 일부 필경자들이 자신들의 사본에서 임의적으로 삭제하였고 또 이 구절이 삭제된 사본들의 사본들이 그 이후에 살아 남아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 오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가 일찌기 위와 같이 지적하고 있음에는, 4세기 이전의 오래된 성경 사본들이 지금에 비하여 많이 남아있었던 당시의 여건을 고려할 때에,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며, 그리하여, 성 아우구스티노의 시기 및 16세기의 트리엔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의 상당히 오랜 시기들에 걸쳐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는 생각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은 더 자세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견해를 지지하는 글을 또한 읽을 수 있습니다:

(1) Augustine was a contemporary and challenger to Jerome, often disagreeing with him strongly on issues regarding his new translation of the Latin Bible. What is remarkable and extremely important, is that Augustine made no protest whatever of Jerome's inclusion of the Pericope de Adultera, but plainly agreed with him completely on its authenticity and even its detailed content. This is especially important, since Augustine was so independant from Jerome. Had Augustine felt that Jerome's claims about or position on John 7:53-8:11 was in any way false or exaggerated, Augustine would have been outspoken on the matter. 

(2) Jerome could not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 inclusion of the Pericope de Adultera, but must have found it in a large number of Greek and Latin manuscripts just as he claimed. These manuscripts would be much older than the handful of 4th century uncials surviving today. 

(3) Augustine is also very important for establishing the actual text in circulation. Because he comments on the section verse by verse in detail, often with repetitions, we have a very good idea of Augustine's text, and it is essentially identical with the Byzantine (Traditional) Text. This dates the traditional form of the text to circa 400 A.D. 

(4) Augustine's interpretation of the text is equally important, for it shows that his own tradition could not have been its source. Augustine appears naive as to the full purpose and meaning of the text, and this clears him and his contemporaries of any sensible motivation or likelyhood of having created and/or inserted the text. 

(5) Augustine's explanation of the cause of the omission is also important, because he was in intimate contact with heretical groups such as the Montanists who may have been responsible for its omission. He in fact had a large hand in restoring these fringe-groups to the Church. His testimony on this is more credible and weighty than many critics in the past have allowed.

(6) Augustine wrote a complete commentary on John including the verses. This means that a mainstream father near the heart of the Byzantine Empire knew and accepted the verses as authentic as early as 390 A.D., contemporary with Jerome. Some critics have claimed that "no Greek father comments on the verses until the 9th century", but this is a misleading statement. As Burgon remarked in 1886, to claim that these fathers (Augustine, Ambrose, Jerome) were Latin is irrelevant. They were familiar with the Greek manuscripts (Jerome used them for translating), and lived near the center of the ancient Roman Empire. All were important ecclesiastical leaders, and experts with the tex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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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그리고 1946-1957년 동안에, 거의 2000여년 동안 동굴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가 발견된, 소위 말하는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들이, 사해 서쪽에 위치한 꿈란 공동체 유적 서편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어, 기원후 9세기경 갈릴래아 호수 서편에 있는, 당시의 유다인들의 중심지였던, 티베리아스(Tiberias)에서 유다교측의 마소라 학파에 의하여 모음 방점을 추가하면서 유다교 용도로 편집된, 소위 말하는, 마소라본 히브리 성경의 본문과의 대조 작업을 거쳐, 상당한 교정을 하여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한 교정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것이 반영되어 발행된 것이,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에 의하여 1970년에 초판 발행된, 미사 중의 독서로 발췌하는 것을 교황청에서 승인한, 영어본 성경이 바로 New American Bible(NAB)입니다.

특히 구약 성경의 어떠한 경전들에 있어 사해 사본의 자료들과의 대조 작업이 이루어졌지는,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NAB의 Preface to the New American Bible 에 주어져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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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영어본 나바르 성경 주석서에서 채택하고 있는 영어본 성경의 본문은 RSV(Revised Standard Version)입니다. 따라서, 주신 질문 1과 관련하여, 신약 성경 본문 중에는 위에서 말씀드린 문제들이 없을 것입니다.

[이상, 내용추가 끝].


1-2. 다음의 글은,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출판된, 가톨릭 교회 교도권의 성경 해석에 매우 충실한, 영문본 "나바르 성경 주석서: 공관 복음서"에 대한 공신력 있으신 분(주: 후반부의 서평자에 대한 소개글을 참고하십시오)의 서평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차분히 읽어 보실 것을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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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94.htm

해석(interpretation)으로의 접근에 있어 우리의 기본적 태도에 관련하여,  이 주석자들은 "성경이, 그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 성경의 거룩한 영감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어떤 자에 의하여 이해될 수가 없으며 그리고 성경이 하느님을 그 주된 저자(principal author)로서 가지고 있다" 는 입장을 취하며,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결여는, "문헌적, 역사적, 철학적 혹은 어떠한 다른 종류이든지 간에, 어떤 인간적인 처리 방식(technique)에 의하여 상쇄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p. 18). 우리의 시대에 있어, 대부분의 역사 비평가(historical-critics)들이 성스러운 본문의 저술에 있어 하느님의 역할을 존재하지 않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실제적 부분도 가지지 못하는 비어 있는 추측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감안할 때에, 이것은 하나의 획기적인 선언입니다. 이 주석자들은 영감을 받은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가톨릭 해석을 전적을 따르는 입장을 이미 취하였으며 그리하여 지난 2세기 혹은 그 이상의 기간들에 걸친 역사 비평의 주류에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이미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합니다: "성경의 비밀은 단지 언어학, 고고학, 사회학, 심리학 혹은 어떤 다른 인간적 과학의 도움만으로써 열어 보여질 수가 없으며, 오히려 인격적 거룩함(personal holiness)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로 하느님에 기인하는 빛으로(in the light of God) 열려질 수가 있습니다."(p. 21). 그들은, 한 분이신 참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 헌신에 의하여 불이 붙게 되는 믿음에 기인하는 빛에 의하여서만이 오로지 해석자는 어떤 실체들을 성스러운 본문이 표현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들 실체들이 실재(reality)라는 하나의 연속체 안에 왜 존재하는 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의미의 추구와 관련하여,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요점입니다(p. 222). 합리주의(rationalism)와 직업적 자부심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가는 많은 역사 비평가들은 스스로를 속임으로 그리하여 자신들의 독자들을 속임으로 오로지 끝나게 됩니다. 필자는 나바르 주석자들이, 마태오 복음서 10,13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다음과 같이 그들이 말할 때에, 대부분의 역사 비평적 방법 밑에 있는(underlying) 합리주의(rationalism)를 거부함을 보는 것이 기쁩니다: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첫 번째 일은 예수님께서 조만간 당신께서 영광 안에서 오실 것임과 그리하여 이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셨다는 주장을 하는 어떤 합리주의자들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이다"(p. 115). 성경의 더 깊은 의미를 인지하기 위한 적절한 틀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명하였던 바와 같이 그리고 교부들과 성경의 영감을 받은 인간 저자들 자신들에 의하여 활용되어졌던 바와 같이,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119항들)(*)에서 성경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제안되고 있는, 네 개의 어의(語義)(Four Senses)들로 이루어진 망상 조직(network)임이 바로 필자의 습득된 견해입니다. 나바르 주석자들이 바로 이 틀(framework)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그러나, 그들의 주석에 있어, 그들은, 특히 다양한 교부들에 의하여 표현되었던, 성스러운 본문의 더 깊은 의미들로의 독자적인(isolated) 많은 언급들을 실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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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119항들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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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르 주석자들은 네 개의 복음서들이 성 마태오, 성 마르코, 성 루카, 그리고 성 요한에 의하여 저술되었음을 주장하는 데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본문의 문헌적 특징들에 대한 비평 분석(critical analysis)과 각 복음서에 있어서의 역사적 언급들이 전승(Tradition)에 대한 만장일치의, 정확한 증언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p. 29). 이것은 확실하게 사실이나, 그러나, 이것은, 역사 비평가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기에 오늘날의 성서와 관련된 학문(biblical scholarship)의 폭넓은 범위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역사 비평적 학문"의 영역에 있어 지난 2세기들에 걸쳐 제시되어 왔던 바는 그 고유의 방법에 대하여 진실로 역사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충분하게 비판적이지도 아니한 하나의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thinking)이었습니다. 나바르 주석자들은, 그들의 방법이 "역사 비평 학파(historical-critical school)"의 잘못된 원리(principles)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아니한, 교부들의, 중세의 가톨릭 주석자들의, 그리고 근세의 가톨릭 주석자들의,  더 견고하고 실제적인 접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의 해석을 위하여, 나바르 주석자들은 따라서 가톨릭 전승(Catholic Tradition)과 일치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는 입장을 이미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 세기들을 내려오면서 그리스도교 전승은 복음서들의 역사적 특징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왔음을 보입니다. [ . . . ]  그와 동시에, 교회는, 우리의 믿음이 이에 대하여 우리를 확신하게 하는, 이러한 역사성이 다음과 같이 이성적으로 견고한 근거를 또한 가지고 있음을 항상 유지하여 왔습니다: 능숙한 역사-문헌적 비평 학문은, 심지어 믿음의 주변부에 대하여 추구된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것이 진지한, 과학적인 논거들을 실제로 사용한다면,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p. 37). 필자는 복음서들의 역사적 특징은 견고한 진실이나,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복음서들의 역사적 특징에 반하여 논쟁하는 우리의 시대들에 있어 출판된 지나치게 많은 책들과 논문들에 의하여 증거되는 바와 같이, 역사 비평 학문 전체의 성향은 이에 반하여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능숙한 역사 학문은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점,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 있어 우세한 학파인  "역사 비평 학파"라는 문헌적 학문이, 심지어 가톨릭 교회의 안쪽에 있으면서도, 진지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이들에 의한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실의 약화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여(to say that), 나바르 주석자들의 이러한 마지막으로 인용된 판단을 적절하게 다른 말로 바꿀(reword) 것입니다.

(중략)

능숙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나바르 대학교 주석자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독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목적이 사건들을 변조하도록 혹은 역사적 정확성을 무시하도록 그들을 이끌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p. 38). 여기에 숨어있는 것은 바로 the finis operis (저작물의 목적)the finis operantis (저자의 목적) 사이의 중요한 구분입니다. 복음서들의 경우에 있어, 저작물의 목적은 실제로 발생하였던 사실들을 보고하는 데에 있으나, 이에 반하여 (복음사가들인) 저자들의 목적은 또한 자신들의 독자들의 믿음을 또한 강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역사 비평가들은 전형적으로 이러한 차이점을 모르고 있으며 그리고 저자들이, 자신들의 독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고자 하는, 혹은 믿음을 옹호하고자 하는, 혹은 어떤 사건의 더 깊은 중요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 등과 같은, 성스러운 저자들의 외적인 목적을 인지하거나 혹은 의심할 때마다,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바르 주석자들은 "그러므로, 복음서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의 첫 세대의 비옥한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할 근거들이 전혀 없습니다 "(p. 39) 라고 주장하는 정도에까지 나아갑니다. 실제 근거들이 전혀 없음이 사실이나, 그러나, 자신의 저서인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에서, 공관 복음서들을 조각들로 꼼꼼하게 찟어버렸으며 그리고 사실상 거기에 자세하게 이야기되어 있던 사건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세대들의 비옥한 상상력의 산물임을 결정적으로 보였다고 주장하였던,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성경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많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것을 말하도록 노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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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에 대한 답변:

다음의 글은 역시, "나바르 성경 주석서: 공관 복음서"에 대한 공신력 있으신 분(주: 후반부의 서평자에 대한 소개글을 참고하십시오)의 서평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훌륭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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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94.htm

루카 복음서 6,20에서, 이 주석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에 있어서의 일치하지 않는 표현들에 관한 역사 비평주의(historical criticism)에 의하여 제기된 많은 모순들에 대하여 신뢰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하는데, 거기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서로 다른 지역들과 성읍들에서의 당신의 공적 사목의 과정에 있어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시기들에 서로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시면서, 꼭 같은 것들을 설교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라고 말합니다(p. 390; p. 426을 참조하라).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6.htm
[다해 연중 제11주일 복음 말씀(루카 복음서 6,17.20-26)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 해설 중의 제20-49절에 대한 해설 중에서 발췌].

20-49. These thirty verses of St. Luke correspond to some extent to the Sermon on the Mount, an extensive account of which St. Matthew gives us in Chapters 5 to 7 in his Gospel. It is very likely that in the course of His public ministry in different regions and towns of Israel Jesus preached the same things, using different words on different occasions.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each evangelist would have chosen to report those things which he considered most useful for the instruction of his immediate readers--Christians of Jewish origin in the case of Matthew, Gentile converts in the case of Luke. There is no reason why one evangelist should not have selected certain items and another different ones, depending on his readership, or why one should not have laid special stress on some subjects and shortened or omitted accounts of others.

 

참고:

다음은 "나바르 성경 주석서: 공관 복음서" 제목의, 위의 서평의 저자 Msgr. John F. McCarthy 에 관한 간략한 소개이다:

John F. McCarthy 몬시뇰은 미국 Montana 주, 헬레나 교구(Diocese of Helena)의 사제인데, 미국 Wisconsin 주, Eastman에 있는 St. Wenceslaus 본당의 주임신부로서 차용 중(on loan)이다. 그는 the Society of the Oblates of Wisdom의 설립자이며 그리고 총 관리자이다.그는 로마에 있는 라테라노 대학교(Lateran University)에서 교회법을 가르쳤으며, 그리고 로마 교황청에 있는 동방 교회성(the Congregation for the Oriental Churches)에서 여러 해 동안 고위 관리였다. 그는 저서명 the Science of Historical Theology (1976) 그리고 (인터넷 상으로 http://www.rtforum.org 에서 구할 수 있는, 회보 “Living Tradition ”에 있는 많은 글들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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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6시간 (자료 찾기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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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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