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평소에 웃고 다니면 안 아픈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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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석 [kimhongsuk] 쪽지 캡슐

2001-02-22 ㅣ No.1194

한국의 자랑스런 수만명의 순교자 특히 정하상 바오로 성인에 관한 연극을 마치고…

 

<멀쩡한 젊은이의 고통 - 평소에 웃고 다니면 안 아픈 사람인가?>

나는 내자신을 볼 때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속으로는 곯아있는 과일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10여년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만성 위장병으로 새벽마다 깰 때도 그렇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엄청난 고통의 편두통을 참을 때도 그렇다. 특히 편두통은 중학교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앓기 시작했는데, 병원에서 별의 별 검사를 다 해보아도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의사 선생님은 아마도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결론을 내려 주셨다. 성장해서도 계속되어 미국의 병원에도 찾아가 보았는데 별다른 치료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편두통이 한번 오면 20분에서 2시간 가량 왼쪽 머리가 꼭 대형 트럭 뒷 바퀴에 눌려있는 느낌이다. 지압을 해보기도 하고 편두통 약을 먹어보기도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편두통은 보통 두통과 달라서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머리 한쪽 전체가 엄청나게 아프면서 온 치아와 목, 심하면 어깨까지 심하게 통증이 온다. 식은 땀이 줄줄 흐르면서 어쩔쭐 모르는 고통의 순간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들다. 어른인 나도 눈물이 찔끔찔끔 나고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무데나 앉거나 누워서 안절부절 못하고 뒤척이곤 한다. 집에서 아프면 그래도 누워있기가 쉬운데 일하다가 또는 누구를 만나다가 그러면 참 난감하기 짝이 없다.  집에 있을 때 고통이 오면 얼음과 같이 찬 물에 머리를 담가보기도 하고 머리에 뜨거운 물을 뿌려보기도 해도 그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때로는 성수를 머리에 뿌리면서 하느님 좀 어떻게 해주세요 했던 적도 있었다.

 

<고통중의 신앙>

어렸을 때 성당에서 순교자들에 관한 연극을 해본 관계로 얼마전 성 엘리자벳 성당에서 정하상 바오로 성인에 관한 성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편두통에 시달릴 때면 어쩔쭐 모르는 극심한 고통 와중에 생각나는 것이 정하상 성인이 순교하시면서 흘리신 피는 단 한 방울도 헛되지 않다는 것인데 이 생각이 요즘 머리에서 계속 반복된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편두통으로 죽을 지경으로 아픈데 하필 정하상 성인의 피는 한 방울도 헛되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자꾸 하는지 참으로 모를 지경이다. 두통이 심하다 못해 구토 증세가 나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될 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하느님은 Omnipresent하신 분이니까 지금 내 곁에서 보시고 계시겠지... 성모님께서도 나를 위해 전구 청해주시면서 나를 지켜 보시고 계시겠지… 혹시 정하상 성인도 나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시고 계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과연 나를 조금이나마 생각하시면 저분들이 그냥 보고만 계실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 어떻게 손을 써보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몸부림치다가 고통 중에서 결국 지쳐서 잠들어 버린적도 있었다.

 

 

<고통중의 감사>

두통의 고통이 심할 때 나는 모든 생각들을 종합해서 결국 나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보기에 좋고 나쁜 것이 하느님께서도 보시기에도 꼭 좋고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보고 느끼기에는 나쁜 것도 하느님의 신비한 계획안에서는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장차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좋은 밑거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힘들거나 아파서 신음하면 한번 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일이 잘되고 편안하면 그만큼 나의 신앙도 나태해 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잊을 만하면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지 하느님을 한번 더 찾게 하는 하느님이 오히려 고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어쩌면 조금은 구약 성서적인 사고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믿음과 영적 상태에 따라 구약적 방식 또는 신약적 방식으로 찾아오시는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구약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비유로 보여줘서는 안되고 몸으로 때워야 깨닫는 무식한 인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저 회초리를 들어야만 말을 듣는 미련한 인간이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신앙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래도 때려주신다는 것은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이기에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이 감사하기만 하다.

 

<구약에서 나타난 인간의 속성>

에집트에서 속박 받으며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하루를 살더라도 한번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했다가도 모세가 광야로 끌어냈을 때는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하고 투정을 부렸고, 물을 주고 먹을 것을 주었을 때도 사람이 어떻게 먹는 것만 해결되면 사는 것이냐 하는 투정을 바로 부린 것처럼,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기는 밥 먹기보다 더 쉽고 빠르게 하는 것 같다. 분명히 나도 구약의 유대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그들보다도 더 빨리 하느님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고통이 사라지면 금방 언제 내가 아팠었지?하고서는 다른 생각에 몰두하기 쉽상이다. 그렇다고 나의 신앙이 겨우 고통 때문에 유지된다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떤 주고 받는 계약적인 관계가 아니라 무상으로 은총을 주시고 나는 무상으로 감사를 드리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자각을 해본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아플 때나 기쁠 때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한다.

 

<하느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고통을 통해서 또 한가지 느낀 것은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선행을 하고 미사 참례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계획에 대해서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 삶은 단지 하느님을 아는 정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녀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믿으려면 확실히 믿든지 아니면 다 걷어치우든지 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영세를 받은 사람이라도 평생동안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미심쩍은 신앙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한다고 성당에서 보낸 시간, 억지로 하는 봉사, 귀찮고 길기만 한  기도, 이 모든 시간동안 차라리 비신자로서 나름대로 더욱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갈등을 한적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꾸르실료 교육을 받으면서 한가지 결심했는데 그것은 이제부터는 믿는다. 그리고 완전히 믿는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100%가 아니면 0%로가 되겠다는 결심을 세례 받은지 30년이 지나서야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30세에 공생활을 시작하셨으니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는 없지만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 최소한 3년간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어쩌면 건방진 책임감도 느껴본다.

 

<정하상 성인과 내 편두통>

내가 극심한 편두통중에 얻은 결론으로 인하여 오히려 나의 신앙은 더욱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통이 심할 때마다 머리 속에는 정하상 성인의 피는 단 한 방울도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자꾸하게 되었는가 하는 고민을 하다보니 물론 머리는 더 아팟지만 나름대로 해답이 나왔다.

결론을 보면, 나는 그분보다 잘난 것이 없다. 나는 그분보다 더 아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분의 믿음에 비하면 나의 믿음은 명함도 못 내미는 미미한 것이다. 그분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한글 성서도 없었고, 주일 미사를 마음대로 참여할 만한 여건 속에 사신분도 아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엄두도 못냈을 상황이고 당시는 지금처럼 간편히 전화로 고백성사 시간을 예약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과 마음대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은 물론 아니었다. 밥먹을 때 남들 앞에서 함부로 성호를 그을 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바로 사형당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믿음을 가지셨다. 그것도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신앙을 지키셨다. 자신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체 높으신 양반 신분을 숨기고 북경을 왕래하는 동지사의 짐꾼노릇을 하면서 20 여번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엄동설한에도 신부님을 모시기 위한 일념으로 목숨을 내놓고 남모르는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그것은 오직 믿음 하나 때문이었다. 그런 분이 계셨기에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는 자랑스러운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신앙이 지켜져 왔으며 복음이 전파되어왔다. 그리고 결국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앞에서 한칼에 목이 잘려지지 않아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도 얼굴에는 하느님을 곧 만나게되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시면서 목숨을 잃으시면서도 무시무시한 아픔이나 극도의 고통은 기쁨이요 감사 그 자체였으리라.

 

오늘날 나는 내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그분보다 잘나지도 않았고 똑똑하지도 않은 놈이 하느님을 믿는둥 마는둥하고 성서를 무슨 과학백과사전인양 들여다보고 의심을 갖고 교리가 이상하다느니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면, 그 옛날 정하상 성인께서 흘리신 피는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수많은 선인들께서 진리를 증거하면서 피를 흘리셨다. 나는 그분들 보다 하나도 잘 난 것이 없는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려고 하지 않는가? 내가 믿음에 의심이 있다면 수많은 선인들은 무엇 때문에 피를 흘리셨겠는가? 내가 그들보다 똑똑한가? 그래서 의심을 가져도 되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분들이 아시는 것에 비하면 내가 아는 지식은 개미 위장보다도 작은 양일 것이다. 그렇다면 뭘 믿고 완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이렇쿵 저렇쿵 따지려고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꾸르실료를 통해 100%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무시무시한 편두통을 통해 정하상 성인께서 흘리신 피는 단 한 방울도 헛되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헛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완전한 믿음>

완전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믿음은 성서에 나오는 위대한 사도들만의 것이 아니요 순교성인집에나 나오는 순교 성인들의 것만이 아닌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완전한 믿음을 갖기로 했으면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리를 전파하는데 무슨 눈치 볼일이 있으며 솔선 수범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속된 말로 좀 튀면 어떻고 좀 나서면 어떻겠냐는 생각이다. 물론 예수님의 자녀된 자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나타내고 전파하는데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낮출 자가 어디 있으며 그분의 명예를 손상시킬 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서는 기원후 400년경 다 쓰여진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서는 한 시대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정하상 성인이 흘리신 피와 그분의 업적도 또한 준성서요, 오늘날 우리가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진리를 증거하고 기쁜소식을 전파하는 일과 그 사업 또한 준성서 감이다. 성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우리는 그것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성서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한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하는 생각, 말, 행동이 성서 감인지 아닌지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믿음은 혼자 가지고 있을 때 지켜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믿음은 전하고 나눌 때 오히려 더욱 굳어지고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복음은 성직자들만의 것이 아니요 수도자들만의 것이 아닌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이가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맺음 말>

편두통의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하느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고통을 참고 있기란 정말로 힘들다.  지금 주시는 이 고통이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에 밑거름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고 정말로 아프고 힘들면 정하상 성인의 목에 첫 칼날이 들어 왔을 때를 생각하며 나름대로 고통을 참아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드는 순간까지 나의 생각을 사로잡는 것이 하느님이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30여년간 성당을 맴돌며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이제 부터라도 정말 제대로 된 믿음을 가져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말고 가슴으로 느끼고 기도로서 확인하고 남에게 상처주지 말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믿음을 가진 나지만, 조금씩 이나마 주위에 복음을 전하도록 노력하고 그러면서 나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 앞에서 죄없는 사람을 이야기 하기도 우스울 것이요 문등병 환자 앞에서 고통을 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죄가 많고 말로만 떠드는 사람이며 조금의 고통에도 벌벌 떨고 수선을 다 부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달리 갈 곳은 어디 있으며 내가 기댈 곳은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께는 비록 하찮은 기도와 보잘 것 없는 나의 신앙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이쁜 것이 있으면 그 미소한 것을 보아서라도 나를 포기하지 말고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할 뿐이다.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최고 갑부인 빌게이츠나 별볼일 없는 나나 눈감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그 사람이나 나나 별반의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육적인 욕심을 끊어 버리기는 정말로 어렵지만, 그것을 과감히 끊어 버리라는 것이 성서전반에서 보여주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주님의 잔치에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은 결코 멀쩡한 인간이 아니고 불구자 귀머거리 소경과 같이 육적인 것에서는 욕심을 가질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을 볼 때 나는 당장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너무 이상적이거나 극단적이라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복음은 전하고 나눌 때 살아있는 것이며 내 것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와 영적 동반자로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같이 해볼 사람은 없는가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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