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시리즈.8] 소설...G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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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nadoly] 쪽지 캡슐

1999-10-15 ㅣ No.726

[단편] 봄에 돌아온 연인--전신영               

                                               

 

 

     

                                              흰 장미 속에

                            앉아 있었던

                            흰 나비가

                            꽃잎처럼

                            하늘하늘

                            바람에 날려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투명한 햇살 속을

                            돌고 돌더니

                            훌쩍 몸을 날려

                            울타리를 넘는다.

                            이 세상 하직길에

                            아쉬움만 남기고

                            차마 돌쳐서지 못하는

                            마지막 몸짓인 양.

                                      

                      김윤성 시인의 [점경]

 

 

 

 

불이 켜져 있었다.

  구멍가게에서 생수 한 병과 캔 맥주 두 개와 캔 참치죽 한 개를 사들고 나오다 고개를 들려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삼층, 오른쪽에서 네 번째,왼쪽에서

두 번째 방에 노란 불이 켜져 있었다. 아침에 정신없이 나오긴 했었지만 불을 켜 두었을 리는  없는데. 손목시계를 보니 여덟시 오분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내 방 열쇠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내 방에 들어와 불을 켜놓고 날 기다릴 놈들은 없었다. 게다가 삼월. 아직 풋풋한 봄냄새가스며드는 이런 좋은 저녁에 저런 짓을 할 놈은 없었다.

  그럼 누구지? 혹시?  문득 그 애가 생각났지만 그 이전의 생각보다 더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 애는 태평양 너머에 있다구.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일층위에 이층, 이층위에 삼층, 삼층위에 옥상,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뭐, 이런 노래가 있었던 것같다. 옛날에 술마시면서 장난삼아 몇번 불러봤던 것 같은데. 이 계단위에는 이층, 이층 위에는 삼층,  그 삼층에 어두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동굴같은 복도로 들어가는 두 번째 방이 내 방이다.

  방문이 비스듬히 열려 그 사이로 방안의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방문 앞에는 내가 신는 슬리퍼 하나와 운동화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불을

켜놓다 못해 이제는 방문까지도 훌렁훌렁 열어놓고 다니는군.

정신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혼자 궁시렁거리며 방문을 열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금방 다시 닫았다.

거듭 생각해봤지만 그 방은 내 방이었다. 보증금없이 한 달에 십오만원을 내기로 계약하고 얻은 방이었다. 다시 방문을 열어보았다. 천천히 살펴보니 내 방이 맞기는 맞았다. 방안에 어질러져있던 이불이 개어져 있고, 어제밤에 보면서 잠들었던 잡지들이 제대로 챙겨져서 방 한구석에 차곡차곡 세워져있고, 아침에 갈아입느라고 엉망으로 바닥에 내팽개쳐 놓았던 옷들이 모두 벽에 걸려져 있고, 벽에 붙여서 순서대로 세워놓았던 소주병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치워져있는 것만 제외하면 내 방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누나가 다녀간건가?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한참 조카재롱에 듬뿍 빠져있을 누나가 이 시간에 여기에 다녀갈리는 만무했다. 마치 남의 집에 초대받지 않고 불쑥 찾아가는 불청객마냥 멈칫거리며 내 방에 들어섰다. 이게 무슨 꿈을 꾸는 것도 아니구 정말.

  나는 황당해하며 내가 사온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가 환기부터 청소까지 확실하게 해놓은게 틀림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쾌쾌한 총각냄새에 양말냄새, 담배냄새까지 섞여 엉망이던 방이었는데 오늘은

방안공기부터가 달랐다. 머뭇거리며, 양복 웃옷을 걸어 대충 옆에 밀쳐놓고 담배를 꺼냈다. 그때였다. 문이 덜컥 열리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또 담배야? 들어오자 말자 담배부터 피워?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친거야?"  순자였다. 설마?

  순자가 문을 열고 작은 소반위에 무슨 냄비인가를 들고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당황하다못해 아예 어이가 없어하는 난 냅둔채 무엇인가를 들고 온 소반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생글거리며 웃었다.   

  "뭐야. 너!"

  "뭐? 이거 라면이야. 아무리 혼자 살아도 그렇지  쌀도 한톨 없냐? 내일은    

밥해줄게."  "너....."  "응? 왜?"

  분명히 갔었더랬다. 결혼식을 마치고, 3박 4일동안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친정에 일주일가량 머무른 뒤 미국으로 떠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내 호출기에 수신되어진 마지막 메시지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 순자야. 많이 시끄럽지? 여기 공항이야. 지금 가 봐야해. 오빠도 건강하고, 회사 잘 다니고, 밥은 꼭 챙겨서 먹어. 알았지? 술많이 마시지 말구. 응?

아, 지금 가봐야겠어. 오빠, 잘 살아야 돼. 알았지?]   꼬박 사개월쯤 전에

소란스러운 공항의 소음에 뒤섞여 그애가 남긴 메시지는

짧고 분명했다. 난 그날도 자취방에서 나와 회사로 갔고, 일을 하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아무 생각 없이 자취방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잠을 잤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런 일상속에서 별 생각없이 지내고 있었다. 순자의 부재란 걸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 지냈는데, 어느날 거래처에 전화를 걸기 위해 무심코 공중전화에 들어갔다가, 돈 백원을 넣고, 내가 누른 번호는 해지된 순자의 호출기 번호였다.

 부재란 잠복해 있던 게릴라처럼 여기저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머리를 휘갈기는 존재였다. 그런데, 미국으로 간다며 내게 음성을 남긴지 사개월쯤이 지난뒤에 그애는 느닷없이 내 앞에 튀어 나와있다. 무슨 이유로?

  "오빠, 조금 야윈 것 같애. 아직도 밥 안 먹고 술마셔?"  라면을 먹고 있는 내게 그애는 이것저것 물어봤다. 빨래는 언제하고 안한거야?

 아직도 오락하느라고 바빠? 퇴근은 언제하는데? 술은 조금 줄이지 그랬어?

 방 청소하면서 보니까 소주병이 열댓개는 되더라는둥의 잔소리를 섞은 혼잣말을 이어가는 녀석에게 내가 대뜸 되물었다.  "너, 여기 왜 왔어?"

  "..."  그랬다. 결혼까지 한 녀석이, 그것도 저 좋다고 따라다니던 놈이랑 결혼까지 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던 녀석이 새삼스럽게 여기에 나타날게 뭐란 말야.   

"오빠, 나 봐서 안반가와?"

  순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반가와. 반가와서 죽을 지경이야.

근데 말야. 너도 생각을 해봐라. 머리라는게 있음 말야."

  "나중에 생각하면 안되? 왜  오고, 왜 가고, 그런거 안물어보고, 나 여기 며칠만 있음 안되? 응?"

  "너, 쫓겨난 거야? 그  녀석한테 구박받고 친정가기는 뭐하니까 여기로 후다닥 도망온거아냐?"

  "피잇- 암튼 그 이야기 고만. 알았지?"  순자는 푸히히 웃으며 내 이야기를 거기에서 막아버렸다. 늘 그런 식이었지.

 그애는 뭔가 곤란한 이야기다 싶으면 그저 웃으면서 내 입을 막아버릴  뿐이었다.  

  봄에 만났던 봄처럼 이쁘던 아이, 작고, 귀엽고, 애교있고, 투정도 부리면서,내 밥먹는거, 옷사는거  하나하나 마치 마누라라도 된 것처럼 잔소리를 해대던

 기집애. 꼬박 반년을 만났고, 그 다음에 그 애는 약혼했던 남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버렸다.

  처음부터 나는 그 애에게 미국에 약혼자가 있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 애도 그 사실을 내게 말해주었었다. 결말은 빤한 만남이었고, 그래서 별 부담없이 생각하려 했지만, 사실 우리의 무게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다.

  순자와는 통신동호회 엠티에서 처음 만났었고, 유난히 나를 잘 따르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을 만난 직후 나는 이사를 하느라 통신을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연락이 거의가 끊겼는데도, 녀석과는 자주 연락이 되서 만나곤 했었다. 처음부터 하두 녀석이 광고를 하고 다녀서, 미국에 약혼자가 있다는 것,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는 데로 식을 올리고 다시 미국으로 같이

나갈꺼란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가 순자에게 해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다. 반지에, 목걸이에, 미국에서 보내주는 CD여러장까지, 하다못해, 같이 연말을 보내지 못한다고 챙겨주는 그런 세세한 여러 가지 것들까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아는 것과는 또 별도로 나는 그애가 좋았다. 그애가 웃는거나, 화내는 거나, 삐치는거나, 내게 투정부리는 것들까지 좋아했다.

 같이 영화를 보러 다니고, 밥을 먹고, 그리고 가끔, 그래 아주 가끔은 아주 절실하게 그 애를 원하기도 했지만, 그애는 반년 뒤 한국으로 잠시 돌아온  그에게로 갔다.

  뭐, 마지막이 어떠했다거나 그런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애는 만난 지 십여년째가 된다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건 내가 그애를 좋아하는 무게와 굳이 비교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굳이 저울에 매달고 재어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애가 결혼한 뒤, 그리고 미국으로 가고 난 뒤 애써 바빠지려 했다.

 애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이제까지 미뤄두었던 일 몇 개를 가지고 밤을 새우는 일이면 되었다.

  매일처럼 그 애가 생각나서 괴롭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부재]란 게릴라처럼 잠복해 있다가 습격하는게 특기니까 말이다. 아주 가끔,아주 가끔 그애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애가 좋아하던 만화책을 볼 때나,

 사달라고 조르던 인형을 볼 때, 그래, 아주 가끔 그저 생각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은 덜 나를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랬던 녀석이 라면을 먹는 내 옆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난 심퉁맞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며, 벽에 기대고 누웠다. 순자는 라면 그릇과 김치그릇을 가지고 나가서 설거지를 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난 일어나 옷을 입고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오빠. 어디가?"  

 "넌 여기서 자."  

 "오빠는?"

 "나가서 잘꺼야. 선배네 집에 가서 잘거니까. 문 잘     잠그고 자고 있어."  

  "오빠? 무서워. 같이 있으면 안돼?"  

  "문 잠그고 자."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막상 나왔지만 갈만한 곳이 없었다. 아홉시 반.

 집으로 돌아올 때부터 기껏 한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릿느릿 당구장으로 걸어갔다.

  단골로 가는 당구장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없다. 평소에 그냥 얼굴만 알던 녀석과 두어게임을 친 뒤 도무지 흥이 안나서 그만두어버렸다. 텔레비젼을 보고 멍청하게 앉아 있다보니 가게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걸어나왔다.

 한시가 바라다 보이는 시간에 남자 혼자서 갈데란 많지 않다. 어슬렁거리며 걷다보니 다시 자취방 앞이었다. 대문앞에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니 순자녀석이다.   

  "뭐하냐. 잠 안와?"

  "오빠"

 움찔거리며 놀라던 그 애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주눅든 표정.

  "오빠, 화났어? 내가 말도 없이 와서 그래서 화났어?"   "화날게 뭐있냐. 들어가자. 잠 안오니?"  

"응, 방에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

  "바보같네. 그래서 울었어?"  

  "안울었다 뭐!"  

  "뭐가 안울어. 얼굴에 눈물자국 찍찍 그려놓구선 말야."    "오빠!"

  그날부터였다. 우리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순자는 매일처럼 밥을

 해놓고, 빨래를 해주고, 내가 빌려다준 책을 읽거나하면서 내가 퇴근하는걸 기다

 리고 있었다. 애써, 미국이나 친정의 식구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본인이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들을 생각도 없고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내다보니 이상한건 이 녀석이 도통 뭘 먹으려 하지 않는거였다.  처음에는 나 출근하고 난 뒤에 먹겠다며, 그렇게 말을 하곤 했지만, 내가 퇴근하면서 사온 빵이며 치킨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예전에 잘 먹던걸

 사다주곤 했지만, 먹지도 않고 입맛이 없다며 방한쪽으로  미뤄둘 뿐이었다. 그런데도 몸이 상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다지 괴로워하지도, 힘들어하지도 않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제까지 내가 보았던 순자의 모습중에 제일 편해 보였다고 하면 아이러니 같은  거였을까?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정말 시간에 대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시간은 흘러간다. 그렇게 평탄하게, 표면에 물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강처럼.... 그저 속으로만 잔잔히 흘러갈 뿐이었다. 그애는 매일  저녁이면 나를 기다려 주었고, 나는 그애를 안고 잠이 들었다. 아주 잔잔한 향냄새가 은은하게 배여 있는 내 작은 방안에서 행복했었다.

  그다지 특별한 일들은 없었다. 마치 일상처럼, 이제까지 몇 년을 그렇게 살아온 습관처럼 그애는 내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다

 팔짱을 끼고 시장에를 갔다.  부부처럼 - 우습기도 하지만, 그 단어만큼 뚜렷한 비유가 또 있을까? -  

 그렇게 나란히 팔짱을 끼고, 물건값을 흥정하기도 하면서, 길에 서서 이것저것을 맛보는 그런 일상들이 그저 흘러가듯 지나갔을 뿐이다.

 무엇인가 뚜렷하게 각인되어진 도드라진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달하고도 열며칠이 더 지나갔을 즈음에, 난 퇴근길에 오래도록 골목길에 서 있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내 방을 오래도록 가로등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애가 내게로 찾아왔던 첫날, 불이 켜져있던 방을 한참이나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만큼 서 있다가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갔다. 그애가 보고 싶다며

욕심내던 책이 그렇게 무겁게 생각될 줄은 몰랐다.

  아마도 그애는 처음 왔을 때처럼 그렇게 가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애에게 무어라 타박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나는 그 애가 오건, 떠나건 한자리에

 머물러서 받아주고 보내줄 수밖에 없을꺼란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일층위에 이층, 이층위에 삼층, 삼층위에 옥상,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뭐, 이런 노래가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또 이 노래를 불렀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이 계단 위에는 이층, 이층 위에는 삼층, 그 삼층에 어두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짐승의 목구멍같은 복도로 들어가는 두 번째 구두통같은 방이 내 이쁜 여자가 살고 있던 방이다.

  방문을 열었다. 침전된 담배연기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그애가 오지 않았던 예전처럼 방은 그런 모습을 한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엉망으로

 널려있는 옷들, 며칠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아 퀘퀘한 냄새, 눅눅한 습기가 가득차서 벽에 스며든 물기마저 선명하게 보였다.

  그날 밤, 오래도록 꿈을 꾸었다. 순자는 제 무릎에 올려진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 오빠, 정말 미안해요. 잘 살고 싶었는데 내 맘처럼 안되네요. 나도 잘 살고 싶은데, 정말 오빠한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  아침이 될 때까지 그 애가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무엇인가 속삭이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전이 모두 지나 있었다.  열이 심하고 몸살기가 있는 것 같아 간신히 회사에다가 출근하는게 힘들다고 전화를 해준 뒤 이틀을 꼬박 앓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의식 불명의 상태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에서는 그애가 내게 속삭여 주었으니까.   

그리고 거듭도는 밤과 아침,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 정신을 차리고,몸을 추스리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서 먹고, 회사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다시 쳇바퀴같은 일상속으로 들어갔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프로야구를 보기도 하고, 밥을 먹는 것 만큼 거르기도 하면서 살아갔다.

 또 열며칠이 지나갔지만, 이번의 부재를 견디기는 더 힘들었다. 한번 해본것이니 잘 할 수 있겠지 싶었던 건 그저 내 오만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방한쪽 구석에 던져 놓았던 수첩을 찾아내었다. 예전에 연락처만 설핏 적어 놓았던 순자 친구인 지현씨가 생각이 나서였다. 사무실에서 호출해 놓은 번호가 다시 걸려오는데는 미처 삼십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였다.

  "김무영씨?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지현씨는 말머리를 흐리며 누구인지 의아스러했다. 난 천천히 순자와 같이 마주쳤던 때를 이야기해주었고,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아, 네.. 그러면서  되물었다.   "그런데 저한테 무슨?"  "네, 저, 죄송합니다만"

  난 말머리를 흐리며 순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걸 왜 물어보냐고, 서로 헤어진 거였으면 그것으로 끝나야하지 않느냐는 그런 매몰찬 대답이 되돌아 올 줄 알고

 조금은 각오하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잘 지내느냐고. 건강하냐고.

 그저 그것 뿐이었는데, 수화기 너머, 지현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도 말을 꺼내기가 어색해 머뭇머뭇거렸다. 설마 이십여년을 사귄 친구에게도 연락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

  지현씨의 침묵이 무겁게 무엇인가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나쁜 소식이 들리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면서. 그리고 지현은 조금 젖은 목소리로 내게 대답해주었다. 어쩌면 조금은 각오하고 있었던 일.

 그렇지만 지현씨의 대답은 너무 의외였다.   "무영씨, 순자..., 교통사고였대요.

남편이랑 같이 사고가 났는데, 신랑은 멀쩡한데, 그 애 혼자 그렇게 많이 다쳤었데요. 의식도 없이 편하게 ....   병원에 온 지 이틀만에 의식도 회복 못하고"

  "그, 그게 언제였다구요?"  "두달쯤 되었어요. 그러니까, 여기 시간으로 3월 1일 저녁에요."  "두달전이라구요?"

  한톤 높아진 내 목소리에 사무실 사람들이 내 쪽을 보았다.  지현씨는 내 목소리에 놀라 말을 죽였다. 소리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와 복도창문에서 담배를 물었다.   순자가 내게 왔던게 그맘때였다. 삼월 첫째 혹은 둘째날, 그리고 순자가 말도없이 가버린게 사월 열여덟째날 쯤.   49제동안 사람의 영혼은 살아서 사랑했던 사람들 곁을 맴돈다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49일이 지나고 나면, 매정하게 보내야 한다고,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니코틴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순간적인 어지럼증으로 머리가 핑 돌아 잠시 휘청거렸을 때, 어디선가 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무슨 영화를 보고 난 뒤였던가,책을 보고 난 뒤였던가. 그애는 내 목을 제 팔로 껴안으며 물었다.   "오빠, 나 나중에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 오빠 찾아오면 어떻게

할 껀데?"  

  "귀신?"

  "응, 나 귀신되면 무섭다고 나 쫓아내고 그럴꺼야?"   "흠, 물론 몸은 제대로 붙어있는 귀신이겠지? 다리없고, 팔없고, 그런 귀신이면 싫어. 안그러면 흠... 그럼 나랑 같이 살자."  

 "귀신인데 안무서워?"

  "그래도 니가 귀신되는거면 괜찮아. 알았지? 팔 없고 그런 귀신은 싫지만, 암튼 니가 귀신되는거라면이야. 뭐. 꼭 와라. 알았지?"

..................  그래서였니? 그래서 내게 잠시 머무르고 그렇게 간 거니,

이것봐. 순자야.

  담배 연기가 잠시 머물다가 창문밖으로 스러졌다.  순자에게 물어보는 내 물음도 어느 곳에 머무르지도 않고, 고이지도 않고, 그저 창문밖의 바람속에 섞여버렸다.   어디에선가, 노란 나비가 한 마리 들어왔다.

 온통 회색으로 뒤덮여있는 이 빌딩 건물사이 어디에선가 봄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실려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춤을 추다가 다시 빌딩숲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봄같이 작고 따스하고 노란 색깔을 가지고 있던 순자를 닮은,  참 예쁜 나비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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