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이윤석 선생 및 촛불난동 세력의 각성과 회개를 위하여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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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친일 장교들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위 그림은 만주의 동북 삼성(三省)에서 항일연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소련국경으로 축출한 야부(野副)토벌대 사령부의 전과를 기념화로 보존한 것이다. 매우 귀한 자료인데 현재는 망실되어 구할 수가 없다. 일제는 만주지역에서 출몰하는 무장 항일세력들을 토벌하고자 여러차례 계획(治安肅正計劃)을 세웠으나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다가 야부(野副) 토벌대가 이끄는 제3기 숙정공작 때에 이르러 내공이 급상승. 마침내 토벌에 성공한다. 물론 어마어마한 물량과 인원이 동원된 탓도 있겠지만,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통하여 귀순한 유격대의 간부들을 역으로 토벌작전에 투입함으로써 항일연군의 근거지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도주로와 병참은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방진성, 양정우, 조아범, 전광(오성륜), 박득범, 한인화, 진한장 등 기라성 같은 유격대원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고 3,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전멸되었다. 삼성숙정공작은 1939년 10월부터 시작하여 1941년 3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추격에서 살아남아 소련 하바로프스크 근교의 브야츠크로 도망간 지휘부는 김일성을 포함 몇 안되었다. 위 그림에서 동그라미의 크기는 무장세력의 규모를 의미한다. 위 그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2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하나는 1942년 이후 만주 동북 3성에 배치된 조선인 만군장교들은 독립군은 물론이고 항일연군 유격대와 교전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군을 때려잡은 친일장교 운운은 택도 없는 소리다. 두번째로는 만군, 일군 조선인 장교들이 해방 후에 중용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공산 게릴라와의 전투 경험을 체계적으로 교육, 훈련받았다는 강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들에게 이런 자질이 없었더라면 4.3 사태와 여순반란 진압작전, 지리산 및 오대산 빨치산 토벌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 # by | 2008/06/15 18:10 | 근.현.대.사. | 트랙백 | 덧글(8) 2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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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국내진공 작전에 대해서는 언제 말씀을 나눌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시점이 토벌대의 자체 예상 기일보다 3개월이 빨랐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