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이윤석 선생 및 촛불난동 세력의 각성과 회개를 위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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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979aaa] 쪽지 캡슐

2008-08-18 ㅣ No.7542

일제 말기 친일 장교들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위 그림은 만주의 동북 삼성(三省)에서 항일연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소련국경으로 축출한 야부(野副)토벌대 사령부의 전과를 기념화로 보존한 것이다. 매우 귀한 자료인데 현재는 망실되어 구할 수가 없다. 일제는 만주지역에서 출몰하는 무장 항일세력들을 토벌하고자 여러차례 계획(治安肅正計劃)을 세웠으나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다가 야부(野副) 토벌대가 이끄는 제3기 숙정공작 때에 이르러 내공이 급상승. 마침내 토벌에 성공한다. 물론 어마어마한 물량과 인원이 동원된 탓도 있겠지만,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통하여 귀순한 유격대의 간부들을 역으로 토벌작전에 투입함으로써 항일연군의 근거지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도주로와 병참은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방진성, 양정우, 조아범, 전광(오성륜), 박득범, 한인화, 진한장 등 기라성 같은 유격대원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고 3,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전멸되었다. 삼성숙정공작은 1939년 10월부터 시작하여 1941년 3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추격에서 살아남아 소련 하바로프스크 근교의 브야츠크로 도망간 지휘부는 김일성을 포함 몇 안되었다. 위 그림에서 동그라미의 크기는 무장세력의 규모를 의미한다.

위 그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2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하나는 1942년 이후 만주 동북 3성에 배치된 조선인 만군장교들은 독립군은 물론이고 항일연군 유격대와 교전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군을 때려잡은 친일장교 운운은 택도 없는 소리다. 두번째로는 만군, 일군 조선인 장교들이 해방 후에 중용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공산 게릴라와의 전투 경험을 체계적으로 교육, 훈련받았다는 강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들에게 이런 자질이 없었더라면 4.3 사태와 여순반란 진압작전, 지리산 및 오대산 빨치산 토벌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

by 眞明行 | 2008/06/15 18:10 | 근.현.대.사.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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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6/15 18:38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은 41년도에 거의 끝을 봤다...그럼 "친일 반민족세력의 핵심"으로 그 이름도 드높은 간도특설대는 말 그대로 치안 유지부대로 마적이나 쫓았다는 이야기인가요?
Commented by 眞明行 at 2008/06/15 19:00
1939년 5월 안도현 명월구에서 창설되어 1941년 동북항일연군의 주력부대가 궤멸될 때까지는 본래의 임무를 수행했었겠죠. (간도특설대 1, 2기에 해당) 그러다 1941년 후반부터는 화북지방의 팔로군을 진압하는데 투입이 되었습니다. 소관 사령부도 2관구->6관구->5관구->철석부대로 계속 바뀌어 그때 그때 일제의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했었습니다.
Commented at 2008/06/15 20: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眞明行 at 2008/06/15 22:24
비밀글/ 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적 상황은 조선혁명군이 분화되기 이전으로서 양세봉의 주력부대가 이동하고 국민부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 기존 만주 노령 등지의 비적단들을 중국 공산당이 규합하면서 세가 커진 것으로 보입니다. 전성기때 2만까지 그 숫자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광복군의 국내진공 작전에 대해서는 언제 말씀을 나눌 때가 있을 것입니다.
Commented at 2008/06/15 23: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眞明行 at 2008/06/15 23:44
ㅎㅎ.. 과거를 뜯어 고치면 정통성이 거저 얻어지나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대한민국을 정통성 없는 국가로 보는 자체가 ㅄ짓이고 전형적인 자학사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임시정부를 부정한 여운형 같은 사람은 철석같이 떠받들어요.
Commented by 瑞菜 at 2008/06/15 23:26
저 토벌 작전이 마지막 지도자인 김일성이 견디다 못해 소련으로 달아난 것으로 끝났는데,
그 시점이 토벌대의 자체 예상 기일보다 3개월이 빨랐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眞明行 at 2008/06/15 23:50
안광훈이나 정빈 등 고급 간부들이 투항하면서 급속도로 붕괴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죠. 일제에 협조하여 유격대 토벌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비참한 최후를 면치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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