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성당 게시판

성모님이 네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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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섭 [jayhan] 쪽지 캡슐

2003-10-25 ㅣ No.4100

- 대천동 성당 정화숙 세실리아자매님의 글입니다. -

 

97년 가을! 태어나서부터 유난히 몸이 재고 건강하여 늘 새 운동화를 사주어야 했던 개구지고 말썽쟁이인 아들이 골육종이라는 암에 걸려 몇 해를 신발 한 켤레 신어 보지 못하고 제 등에 업혀 어둡고 힘든 투병생활의 긴 터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간혹 절에 다니시며 사주관상을 잘 봐주시던 저의 시어머니 밑에, 저희도 별 부족함 없이 잘 삵 있어, 종교는 부족한 인간이 애원해야 할 돌파구 정도로 생각하고, 남에게 나쁘게 하지 않고 남이 저희를 해코지도 못하게 경계하며 살았습니다.

 

남편이 안법 고등학교(천주교 재단)를 나와서인지 미사예식이 아름답고, 나중에 천주교에 다니고 싶다고 연애할 때 자주 얘기하더니, 결혼 후 얼마가 지나 말이 씨가 되어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저랑 두 아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천주교는 자유롭고 구속력이 없어 그것을 핑계로 시들한 신자가 되어 냉담자 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돈 떨어지고 애 아프면 기도는 했는데, 자판기 커피 빼내듯 저는 “해 주세요, 해 주세요”라는 기도 외에 별로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큰 아들 마르티노가 첫 영성체를 할 때가 되었는데, 이 녀석이 무슨 영문인지 복사를 서겠다고 하면서 40일 새벽미사를 나가야 복사를 설 수 있다고 매일 새벽이면 찬물로 세수를 하고 성당으로 달려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드디어 복사를 섰는데 대부분의 복사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신자의 자녀들이었지만 요녀석의 부모는 안면도 없고 누군지도 알 수 없으니 신부님께서 아이가 복사 서는 것을 보러 나오라고 하셔서 냉담을 풀고 성당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식사 전 기도에 밥숟갈을 입에 물고 ‘아멘’을 따라하면서 저도 차츰 신앙생활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싫고 좋은게 분명한지라 그 다음 해에는 성서공부를 하고, 그 다음 해에는 주일학교 교사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싶어하던 성서 속의 여인처럼 예수님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저희 예쁘고 착한 아들에게 큰 소명을 주셨는데 지금은 소명이라 생각하지만 그때는 천형인 줄 알았습니다. 마리티노가 오른쪽 허벅지에서부터 무릎까지 암세포가 생겨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가운데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현실은 바윗덩어리보다 더 큰 돌덩어리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저희를 찍어 눌렀습니다.

 

신부님을 찾아가서 신부님께 따지듯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제가 그때 “십자가란 십자가마다 다리를 다 분질러버리겠다”고 악을 쓰며 울자 신부님께서는 “그렇게 하세요”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하느님 하시는 일은 저도 모르겠어요”하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상하게도 하느님과 제일 채널이 맞는 신부님이 하느님 하시는 일을 모른다는 데에 오히려 무슨 큰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각에서는 복과 벌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저는 잘난 체도 많이 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지도 않았고 이기적이었지만, 우리 마르티노는 못난 어미 만나 매일 혼나고 욕을 들으면서도 당신 성전에서 얼마나 예쁘게 복사를 섰는데... 저를 싫어하던 사람조차 제 아들 마르티노는 다 예뻐했으니깐요. 어떻게 이런 아들에게, 아직 겨우 햇수로 십일 년밖에 살지 못한 아이에게 주어진 그 큰 시련을 인간이 이해하겠습니까?

 

마르티노를 무슨 괴물에게 넘기듯 저희 부부는 비장한 각오로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 전날 저희 부부가 한 일은 앞으로 다가올 공표, 불안 그리고 아들에 대한 가여움, 부모로서의 죄책감을 다 쏟아내기 위해 하루를 펑펑 울면서 그 밤을 그렇게 지새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둘이 결심하기를, 우리 서로 과거를 돌아보며 기운 빠지게 울거나 감상에 젖지 말자. ‘늘 감사하고 즐겁게 지내자’라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너무 힘들어 하자 마르티노가 “엄마, 치료하면서 제일 힘든 게 뭔지 알아?”라고 제게 물으며 답하기를 “심심한 게 제일 싫어. 그리고 엄마가 우는 거” 그래서 그 애 앞에서 다시는 울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네 차례의 화학치료는 역시 힘들고 무서웠습니다. 앞으로 수술과 여덟 차례의 화학치료가 남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빛이 터져 눈을 뜰 수 없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퇴원 후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갈 때 갑자기 다함께 죽고 싶다는 충동이 얼었습니다. 장애도 불쌍한데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가여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제 자신이 맛보아야할 무력감, 참담함을 외면하고 싶었는지... 하지만 입원 때면 병실에서 부활 예수님과 성모상을 제일 좋은 자리에 올려놓고 저희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때 지난 매일미사 책의 성서구절을 읽어 주며 많이도 울고 뉘우치며 저희는 이상하게 결혼 후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작은 목소리, 서로 미안해하며 격려해주는 사랑의 말, 왜 그랬는지 마르티노가 아프기 전, 저희가 부족한 것 없이 살 때에 팽팽히 자기 입장을 이해시키려 싸우고, 악을 쓸 때와는 달리 바닥으로 떨어진 그 때에 느끼는 행복은 무엇이었는지... 서로 소중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남편은 제가.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 앞에 저희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함을 느껴야 한다는 무력감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습니다. 그 때 남편은 복사 아들에게 묵주기도를 배우며 9일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 병원 가까이 있는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큰 위로를 받았는데 제가 의탁을 서서히 하게 된 것이었나 봅니다. 마르티노에게 “엄마는 아무 힘없는 껍데기야. 네 엄마는 성모님이시니깐 성모님께 살려달라고 하라고, 엄마는 너 대신 항암제 한번 대신 맞아 주지 않는데 내가 무슨 엄마냐? 성모님이 네 엄마야. 성모님께 빌어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쭈어 봤습니다. 저희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의사 선생님께서 담담히 얘기를 꺼내시기를 과학에서 제일 뒤떨어진 게 의학과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체실험을 직접하지 못하니 통계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꼭 집어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되려 개인차가 크다는데 또 희망을 걸고 의사 선생님께 “제 아이는 열 달 제 뱃속에서 키웠고 또 제 젖을 물려 키웠습니다. 저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고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선생님도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최악에서도 최선은 있으니까요.”하고 매달렸습니다.

 

몇 차례 수술이 지연되었는데, IMF라는 게 국제적 공신력이 떨어진 나라의 일만은 아니더군요. 뼈를 미국에서 가져오기로 했는데 선약한 저희를 무시하고 미국에서 먼저 가져가 자꾸 수술이 보류되어 초조한 저희를 무시하고 미국에서 먼저 가져가 자꾸 수술이 보류되어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지요. 그때 본당 수녀님과 몇몇의 신자들이 힘들어 하는 저를 데리고 미리내 성지에서 성시간 미사를 열심히 드리고 왔는데 다음 날 우연의 일치인지 뼈를 구했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골 은행’이 있어서 심장, 신장, 간, 혈액, 안구 등만 기증하는 우리와는 달리 뼈도 기증하여, 그 뼈를 영하 70도 이하에서 보관하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나 저희 아이 같은 암 환자에게 이식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13세 정도의 아이가 죽으면서 기증한 뼈(동종골)를 저희 아이에게 이식해야 하는데 구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지라 네 차례 타진 끝에 결국 뼈를 구해 수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수술 전날 저희 부부에게 너무도 가혹한 말을 한꺼번에 꺼내 놓으시더군요. 그렇게 어렵게 구한 뼈가 있어도 종아리 쪽에 미세한 암세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리를 절단하겠다고, 그리고 그 뼈는 죽은 뼈이기 때문에 아들의 몸에서 자라지 못해, 무릎을 구부릴 수도 없다고... 저희는 어린 아들을 차가운 수술실에 혼자 들여보내고 주모경을 바쳤습니다. 남편은 한참을 우는데 아들과 저는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아주 성스러움 같은 걸 느꼈습니다. 온전히 아들을 봉헌했습니다.

 

아들도 그러더군요. “엄마! 예수님과 열 두 천사들을 다 내려오라고 했다”고. 수술실에 들어가 서서히 마취가 되어 갈 때 아이는 주치의를 예수님으로, 다른 의사는 천사들로 다 하나하나 바꾸었답니다. 성모님 망토에 싸여 들어간다더니 12시간 수술을 마치고 수술부위를 꿰매는 동안 직접 보호자실로 주치의가 올라왔습니다.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대성공입니다. 한국 최초의, 최대의 수술입니다.” 다리 절제와 이식만 하기로 했는데, 그럼 뻗정다리가 되는 것도 최선이라 했는데, 무릎인공관절을 넣어 무릎을 90도 정도 구부릴 수 있게 수술이 된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수술이었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아이의 몸을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14시간 이상의 수술을 견딘 아이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더군요.

 

퉁퉁 부어 누렇게 뜬 아기 예수님을 보러 중환자실로 갔습니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라 했던가요? 수술 후에도 자기 뼈를 내어버린 아들의 고통은 몰핀과 같은 진통제를 투어여야 했는데 아들은 그런 진통제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아픔을 아픔으로 겪어 냈습니다. 암투병은 꼭 마라톤과 같다고 하더군요. 자기와의 싸움, 외롭고 처절한 마르티노는 그런대로 부작용 없이 잘해냈는데 긴 병에 장사없는 지라 결국 패혈증에 걸려 죽음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8일을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입에서 피고름을 흘리며 눈을 뜨지 못하는 아들을 붙잡고 저는 쏘아댔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부모 앞서 가는 놈이라고, 그 까짓게 뭐가 대수라고...” 그리고 그 애 앞에서 밥을 먹어댔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듯이... 화장실에 가서 저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데려가세요. 제것 아니잖아요. 데려온 데서 다시 데려 가세요. 저애는 착한 아이니깐 천국에 데려 갈 테고 그러면 저 아이도 아프지 않을테고 저는 그 아이 그리워하며 보속할게요.”

 

그날 밤, 입에 피고름 때문에 말을 못하던 아이가 제 손을 툭툭치기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더니 제 손바닥에 ‘성모님’이라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성모님이 뭐라시든?”하고 물으며 노트를 내밀었더니 노트에 ‘성모님이 꿈에~’라고 쓰더군요. 그 다음날 마르띠노는 우리 반원들의 기도와 희생을 받고, 그리고 거전에 모든 천주교 신자들의 기도와 개신교 신자들의 새벽기도, 불교신자의 기도, 성모님의 전구로 고속촬영하여 시든 꽃이 피어나듯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 살아돌아왔습니다.

 

그 후로도 항암제 부작용으로 아이는 피똥을 누며 아무 원망도 없이 또 죽어가고 또 다시 살아나고를 반복했습니다. 빈대 한 마리를 잡으러 가삼간을 다 태운다더니 우리 아들 암세포를 죽이자는 건지 아들을 죽이자는 건지 고용량의 항암제가 한번 들어가면 모든 정상기능조차 평형을 잃고 다 고장이 나버려 간도, 신장도, 위도 다 나빠져 버렸습니다. 같이 들어온 소아암 병동의 어린 천사들이 하나 둘씩 하늘나라로 향할 때 참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서움보다 쓸쓸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마르티노 꿈에 성모님 말씀대로 마르티노는 죽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술이 거나해서 집에 들어오면 마르티노의 만들어진 다리를 만지며 “너는 내 것 아녀. 내 것은 도흥이 뿐이지 너는 성모님꺼여.”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살려주신 데에 대한 고마움보다 제일 큰 위안이 되는 것은 마르티노가 ‘예수님꺼’라는 확신입니다.

 

마르티노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덤으로 얻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마르티노의 다리는 저희 아버님, 어머님을 세례 받게 하였고 마르티노의 고모부의 세례 또한 그랬고 마르티노의 큰 아버지는 조당을 풀어주며 나중에 성당에 나가겠다고 하여 집안이 하나로 일치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절에 다니시며 기도해 주신 불교신자, 아침에 눈뜨면 기도한다는 개신교신자, 우리 본당의 신부님, 수녀님, 전신자들의 간곡한 기도는 하늘의 옥좌를 흔들었습니다. 지금 사춘기라 성당에 나가기 귀찮아 하는 마라티노는 안답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장례미사 때면 큰 신부님의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오히려 지금 죽은 이 형제를 부러워해야...”라는 강론말씀에 저는 공감합니다. 살려주셔서 고마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희의 주인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 뭐 이런 앎에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희 주변 병실보호자들은 마르티노에게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 니다. 저는 지금도 두렵지만 그렇게 믿습니다. 그 아이는 제가 업고 입원, 퇴원했으며 십 개월이 지나 휠체어를 탔으며 후에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지금은 멀쩡하게 걸어다닙니다. 제가 천주교신자니까 “열심히 기도하더니만...” 그렇게들 말하는데 지금 저는 세상에 취해 살고 있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변하라고 제 입을 통해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고백하도록 하셨나 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복사하러 안개 낀 새벽을 앞 뒤 살피며 찻길을 건너 성당으로 뛰어가는 우리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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