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2월7일 성 요셉의 성 에지디오 마리아♬평화의 기도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03-22 ㅣ No.1977

 
축일 2월7일
성 요셉의 성 에지디오(질스) 마리아, Alcantarines(맨발의 작은형제들)
Sant' Egidio Maria di San Giuseppe (Francesco Pontillo) Professo Frate Minore  
Taranto, 16 novembre 1729 - Napoli, 7 febbraio 1812
Saint Giles Mary-of-Saint-Joseph
Also known as :  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Pontillo,  Egidio Maria de Saint Giuseppe,  Francis Pontillo,  Saint of the Little Way
Born : 16 November 1729 at Taranto, Apulia, Italy as Francis Pontillo
Died :  7 February 1812 at Naples, Italy of natural causes while at prayer
 huge crowds turned out for his funeral
Beatified : 1888 by Pope Leo XIII
Canonized : 2 June 1996 by Pope John Paul II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의 타란토(Taranto) 출신인 성 요셉(Josephus)의 성 에지디우스 마리아(Aegidius Maria, 또는 에지디오 마리아)는 끈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25세 때에 그는 성 베드로 알칸타라(Petrus Alcantara)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문지기로 일생을 보내면서도 병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서 큰 성덕을 쌓았다. 그는 나폴리(Napoli) 시내를 돌며 탁발을 하였으며, 그의 손에는 항상 애긍으로 얻은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탁월하여 요셉 신심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하느님의 눈에는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6년 6월 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3월19일,게시판1669번.

*노동자 성 요셉 축일:5월1일,게시판1740번.

*성 베드로 알칸타라 축일:10월19일,게시판142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요셉의 에지디오 마리아 -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

번역 송영웅(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평수사로 잘 알려져 있는 에지디오(Aegidius Mary of St. Joseph Francis Anthony Postillo, 1729-1812)는 이탈리아 아풀리아(Apulia) 지역의 타란토(Taranto)에서 태어났으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소박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그는 고향에서 밧줄을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1754년에 그는 나폴리(Napoli)에 있는 알칸타라(Alcantara)의 성 베드로 맨발의 작은 수도회(프란치스코회)에 수도자로 지원하였다. 그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어려워 수도회는 그를 평수사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에지디오’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 서원한 에지디오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그 지방의 신학교에서 일하는 짐꾼과 문지기 소임을 받았다. 에지디오는 자기가 맡은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은 그를 나폴리 시 변두리 지역과 나폴리 시 외곽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게 하였다. 신학교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은 에지디오의 경건한 신앙심과 성실한 봉사활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에지디오 수사는 환자들을 돌보고 간호하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있는 수도원으로 찾아왔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돌보아 주었다. 그는 다친 사람들과 병자들로 인해 매일 매일을 분주하게 보냈고 그런 중에라도 틈만 나면, 나폴리 시 경계선 주변의 아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 수도회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성인의 정신적인 유산, 곧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병환자를 만났을 때 행했던 그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도움을 청하는 나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씻어 주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하여도 이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에지디오는 80세가 넘도록 깊은 연민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1812년 2월 7일 나폴리에서 에지디오가 기도하는 중에 숨을 거두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에지디오의 장례식에는 어마어마한 군중이 몰려와 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에지디오가 죽은 다음 즉시 그의 행적과 그가 추구한 정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1888년 교황 레오 13세는 에지디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6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지디오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대표자로 대우받을 만한 영예를 지닌 분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겸손한 사람으로 그의 뛰어난 사랑과 성덕은 나폴리와 현대 교회에 영원히 기억될 모델입니다. 에지디오 수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 요셉의 에지디오 마리아의 축일은 2월 7일이다.
[교회와역사, 2012년 2월호]

 


프란치스칸 묵상 방법

기경호(프란치스꼬) ofm
 

개요
이 묵상 방법은 작은 형제회의 알깐따라의 성 베드로가 창안한 묵상법이다. 이 묵상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묵상의 주제는 항상 하느님과 연관되어야 한다. 이 묵상에서 자기 자신이나 이웃의 관계에만 국한된다면 묵상이 아니라 양심성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 묵상은 보통 15-30분에 걸쳐 하게 되며, 6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단계 준비, 제 2단계 독서, 제 3단계 고찰, 제 4단계 감사, 제 5단계 봉헌 및 결심, 제 6단계 청원. 이는 준비 단계, 묵상 부분, 감사 및 결심, 청원 부분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있다.


제 1 단계
묵상기도 바로 전의 준비
① 간접적인 준비(먼 준비)는 평소의 내적인 상태로서 평소에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말한다. 이를 위하여 오관을 조절하고 절제함으로써 고요와 침묵의 마음 상태를 지니도록 한다.
② 직접적인 준비(가까운 준비)는 묵상의 주제를 정하고 독서를 선정하는 것이다.
③ 기도 바로 전의 준비: 다음 사항에 마음을 집중시키도록 한다.
-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한다. 여기서 짧은 기도를 할 수도 있다.
- 분심을 버리도록 한다. 지나친 지성적인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 마음의 정리.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도록 한다.


제 2 단계
영적 독서 - 적어도 전날 밤에 준비한 읽을 거리(묵상 재료)를 천천히 읽는다. 초기의 묵상에서는 영적독서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좋다. 즉 독서 - 고찰 - 감사 - 봉헌 및 결심 - 독서 -고찰 - 감사 ...
여기서는 어떤 독서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제 3 단계
고찰 - 여기서 고찰이란 협의로는 반성하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이 단계는 본질적인 묵상 단계로서 시간은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고찰을 하는 목적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실천을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 뛰어들고, 기억력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을 되살리도록 한다(상상력과 기억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지력을 통하여 위의 두 가지를 일치시키도록 한다(분별 능력).
고찰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부활, 교회 안에서의 신비, 인간의 가치와 지상적 산물, 죄에 대한 것, 나아가 프란치스칸으로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다.


* 묵상시 주의점 *
① 이론적인 주제를 피해야 한다(주제는 항상 우리의 신앙과 연결되어야 한다.)
② 자기 자신의 말로 하도록 한다. 즉 자신에 알맞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제 4 단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단계로서 마지막 단계의 구체적인 청원과 연관된다.


제 5 단계
봉헌 및 결심 - 묵상기도를 통하여 주신 선물과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해 드리고, 구체적인 결심을 한다. 이는 다음 단계의 청원과 연관되어 있다.


제 6 단계
청원 - 이는 봉헌 및 결심과 관련된 것으로서, 구체적인 청원과 보편적인 기도를 바친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 참고

3) 옵세르반트의 확장

요한 22세의 교황기가 끝나자 공동체 형제들의 대수도원주의(Con- ventualismo) 를 반대하여 회칙의 ‘총체적인 준수’를 열망하는 여러 그룹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프랑스에 나타났다. 영적 형제들과 그들의 ‘개혁’ 의지가 암암리에 각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1334년 발레의 요한은 교황의 회칙을 준수하며 살 수 있는 허락을 총봉사자로부터 얻어냈다. 이것은 초기 단순성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의 시발이었다. 1350년 스폴레토의 젠틸레는 회칙 준수 보장과 수련자들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클레멘스 6세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1354년 총회는 개혁운동과 반대노선을 지향했다. 젠틸레는 이단자로 고발되었고 쇄신의 첫 시도는 무산되었다. 젠틸레 그룹의 바올루쵸가 은둔소 생활을 하자 움브리아 지방의 버려진 은둔소에 형제들이 살기 시작했다. 1373년에 이 개혁운동은 12개의 집을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은 1390년경 이탈리아 전역에 확산되어 있었다. 개혁운동의 초기형제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우수한 개혁자들이 직접 회칙 준수파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의 개혁 그룹인 리포르마티(Riformati)는 1402년에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414년에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1415년에는 살테아노의 성 알베르토, 1416년에는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가 입회를 했다. 이들은 모두 옵세르반트의 방향을 결정짓는 인물들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옵세르반트(Alcantarini, Discalceati, Guadalupesi)는 통합성은 부족했지만, 아비뇽의 교황 보호 아래 이탈리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어났다. 이 개혁 그룹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은둔소 칩거의 형태로 살았다. 1415년에는 12개나 되는 은둔소가 설립되었다. 알칼라의 성 디에고(+1463)가 1441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도 이 은둔소였다.

프랑스에서의 옵세르반트(Recollect) 개혁 운동은 은수적 생활이 아닌 학문과 사도적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또 교황은 회칙의 영적 준수를 위해 집짓는 일을 허락하였다. 15세기 초에 프랑스 관구의 여러 수도원은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 개혁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관구봉사자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했다. 이들은 1415년에 자신들의 사정을 콘스탄츠공의회에 상정하여 교황들의 초기 해석을 가지고 회칙을 준수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관구의 옵세르반트 수도원들에게 개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수도자들을 받을 수 있는 자유와 독자적인 장상을 달라고 요청했다.

공의회는 1415년 9월 23일 칙서 <Supplicationibus personarum> 에서 옵세르반트에게 그들이 요청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었다. 더구나 관구 내 속관구들은 해당 관구봉사자들의 재치권 아래에 있지 않으며 나름의 총장 대리를 가지고 총봉사자는 시찰할 권한만 있다고 선언했다. 어떤 수도자라도 본인이 원하면 회칙 준수파 형제들에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옵세르반트 조직 체계를 확장시켜나간 그룹들 외에도 많은 다른 개혁 그룹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는데, 그들은 자치를 누리면서도 법적으로는 형제회에 속한 채 남아 있었다. 프랑스 북부와 독일의 콜레타니(Coletani), 이탈리아의 아매디테(Amaeditae), 클라레니(Clareni) 등이 있다.
(김창재다미아노ofm,이현주ofs 엮음,재속프란치스코회역사,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출판부,2011,123-125쪽)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444, 입회 1402) 축일 5월20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1456, 입회1414) 축일 10월23일
살테아노의 복자 알베르토(+1450, 입회1415) 축일 8월15일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1476, 입회1416) 축일 11월28일
알칼라의 성 디에고(+1463) 축일11월13일(11월12일)



 

 

 

 

♬평화의 기도 - 러시아볼쇼이합창단

 

 

 

 








Sant' Egidio Maria di San Giuseppe (Francesco Pontillo) Professo Frate Minore
7 febbraio 
Taranto, 16 novembre 1729 - Napoli, 7 febbraio 1812 
 

Al secolo Francesco Pontillo, questo umile frate professo si meritò il titolo di «consolatore di Napoli». Nato a Taranto nel 1729, a 24 anni, dopo alcune esperienze da artigiano, entrò nella famiglia francescana riformata degli Alcantarini. Cambiò nome prima in Egidio della Madre di Dio, poi in Egidio Maria di San Giuseppe. Nel 1759 fu destinato al convento napoletano di San Pasquale a Chiaia. Cuoco, portinaio e infine questuante, fece della raccolta di elemosine un modo per stare vicino alla gente, soprattutto sofferente. Dopo le visite andava a piangere presso la «Madonna del pozzo». Morì nel 1812. È santo dal 1996.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A Napoli, sant’Egidio Maria di San Giuseppe (Francesco) Pontillo,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he ogni giorno per le vie della città mendicava con grande umiltà dal popolo l’elemosina, dando in cambio parole di consolazione.

Fu chiamato il “Consolatore di Napoli”, eminentemente ‘francescano’ e ‘meridionale’, Francesco Pontillo nacque a Taranto in Puglia il 16 novembre 1729, da Cataldo e Grazia Procaccio, in un’umile casetta di uno dei tanti tortuosi vicoli della vecchia città medioevale.
La sua famiglia era composta da modestissimi artigiani, che sbarcavano il lunario, come si dice, con il misero guadagno lavorando le funi. Al battesimo ebbe il nome di Francesco, Antonio, Pasquale quasi un presagio dell’Ordine Serafico che avrebbe abbracciato, nella rigida Riforma promossa dal mistico s. Pietro d’Alcantara, di cui una stella di prima grandezza fu s. Pasquale Baylon; infatti divenuto religioso egli imiterà la povertà e la penitenza di s. Francesco, ripeterà i miracoli di s. Antonio da Padova ed i fervori eucaristici di s. Pasquale.
Crebbe aumentando ogni giorno di più il fervore a Gesù Sacramentato, Comunione frequente, visite quotidiane e la devozione alla Madonna, iscrivendosi subito alla Confraternita del SS. Rosario.
Probabilmente non conobbe mai la scuola, perché ancora ragazzo, fu mandato in una bottega di felpaiolo a guadagnarsi il pane; anche sul lavoro aveva un atteggiamento devoto, prima d’iniziare, faceva il segno della Croce e prima ancora assisteva alla s. Messa; il suo padrone di bottega diceva: “Da che tengo con me Francesco, la mia bottega è diventata un oratorio”. A 18 anni gli morì il padre e così superando il forte dolore, si trovò ad essere il sostegno della già povera famiglia, che comprendeva la madre e altri tre fratellini più piccoli; lasciò il mestiere di felpaiolo e si dedicò a quello un po’ più redditizio di funaiolo; del suo guadagno una parte era anche destinata ai poveri, non conservando niente per sé.
In seguito la madre convolò a seconde nozze, fra il dispiacere di Francesco, ma i disegni di Dio erano ben definiti, il patrigno conquistato dalle sue virtù, lo liberò dal peso della famiglia, dandogli la disponibilità dei suoi guadagni, facilitandogli così l’attuazione del suo sogno di farsi religioso; vocazione che sin dalla adolescenza era fiorita in lui e che la repentina morte del padre aveva ritardato.
Il 27 febbraio 1754 a 24 anni, entrò tra i Francescani Alcantarini di Taranto, da poco presenti in città, dove fu accolto come Fratello laico. A Galatone fece il suo noviziato, cambiando il nome in frate Egidio della Madre di Dio, in questo ambiente di formazione e perfezione religiosa frate Egidio si trovò a suo agio, estasiato da tanta povertà, da tanto fervore e da tanta intima pace; suscitando ben presto l’ammirazione e l’affetto dei Superiori e Confratelli.
E nel convento di S. Maria delle Grazie a Galatone, alla fine dell’anno di prova, il 28 febbraio 1755 fece la sua professione solenne emettendo i tre voti cardini della povertà, obbedienza e castità, il suo nome si modificò in fra Egidio Maria di S. Giuseppe.
Dopo un certo periodo a Galatone, fu trasferito nella Comunità di Squinzano; nel 1759 fra Egidio verrà destinato dai superiori al Convento di S. Pasquale a Chiaia in Napoli, che renderà illustre e conosciuto, con la santità della sua vita.
All’inizio ebbe l’incarico di cuoco, poi quello del lanificio conventuale e infine l’ufficio di portinaio, che secondo le regole degli Alcantarini, veniva affidato al migliore dei fratelli laici, perché dal comportamento del portinaio, spesso ne derivava la stima ed il buon nome dei frati.
L’accoglienza, la pazienza, la carità che aveva verso i poveri, che nella grande città erano numerosi e affluivano giornalmente alla porta del convento, fecero sì che il suo nome e le sue virtù, venissero esaltate dagli stessi poveri che le diffusero per tutta Napoli.
Tutto ciò convinse i Superiori, che frate Egidio era una lucerna da non tenere nascosta e quindi con le virtù che emanava e trasparivano dalle sue parole e comportamento, poteva essere più utile alla gloria di Dio, portando anime alla Sua Misericordia e gli affidarono l’incarico di questuante che tenne per 50 anni.
E da quel giorno Egidio lo si trovò sempre in giro per tutte le strade, vicoli, piazze, rioni e case di Napoli, passava gran parte della giornata girando per la questua, ma il suo giro era più una visita di carità e di buon esempio, che un raccogliere elemosine per la sua bisaccia. Tutti prendevano da lui una parte della sua intima pace e l’appassionato consolatore, se ne tornava al Convento col cuore pieno di pianti e pene e così andava a piangere di notte, dopo le preghiere del coro, ai piedi della sua ‘Madonna del Pozzo’ venerata con questo titolo in quel convento; implorando la salute per gli ammalati, la provvidenza alle famiglie povere, la pace agli sventurati, il pentimento o il perdono per gli oppressori del popolo.
La sua presenza era desideratissima presso il letto degli ammalati e dei moribondi, nessuno, scettico o credente, popolano o nobile, disdegnava di avvicinarlo, per chiedere consigli nelle difficoltà della vita e implorare da lui preghiere al Signore.
Divenne anche famoso per i prodigi che effettuava, così da divenire un emulo dei grandi taumaturghi, spesso li operava con la reliquia di s. Pasquale; sono così numerosi da non poterli elencare in questo scritto, ma costituirono un corposo incartamento dei Processi Canonici in cui sono registrati e descritti.
Profezie, predizioni, guarigioni improvvise, apparizioni di oggetti, frutti, pesci, risuscitazioni, moltiplicazioni di cibi, ecc. lo resero popolarissimo in Napoli, al punto che durante l’occupazione francese, le Autorità lo temevano per possibili insurrezioni, visto la gran folla che lo seguiva o si adunava al suo passaggio.
Cito solo un episodio, il più noto e caratteristico; i frati di S. Pasquale avevano una vitellina che se ne girava per le vie di Napoli, da tutti conosciuta, perché portava una targhetta di metallo con il nome di s. Pasquale e chiamata ‘Catarinella’; ricordo che siamo nel 1799 e traffico automobilistico non ce ne stava, alla sera la vitella si ritirava sempre da sola in convento.
Una sera ciò non avvenne, i frati addolorati lo riferirono ad Egidio, il quale la mattina dopo andò dritto da un macellaio della popolare zona della ‘Pignasecca’ e senza preamboli dice in tono deciso “prendi la chiave e la lanterna e seguimi nella grotta, Catarinella dove l’hai messa?”. La grotta era il frigorifero dell’epoca; il macellaio furfante fu preso da tanta tremarella che non obiettò l’ordine; la vitella era stata sezionata e scuoiata, frate Egidio fece distendere la pelle con dentro tutti i pezzi, situati al loro posto naturale, ricongiunse i lembi della pelle tra loro e tracciando un segno di croce a voce alta disse: “In nome di Dio e di s. Pasquale, alzati Catarinella e ….al convento”.
Seguì un grande muggito, uno scuotimento di tutte le membra e la vitella balzò su viva e vegeta come prima; lo scalpore fu enorme e la vitella fu accompagnata in processione dalla Pignasecca al convento di San Pasquale a Chiaia.
Già sofferente di una grave forma di sciatica, frate Egidio venne colpito da un’asma soffocante e poi da una idropisia di petto, tutto sopportato con lucidità, rassegnazione e fiducia in Dio e raccomandandosi alla Madonna, morì il 7 febbraio 1812 fra i pianti dell’intera città di Napoli; il suo corpo venne sepolto nella chiesa conventuale di S. Pasquale a Chiaia.
Fu iniziato subito il processo per la sua beatificazione; Pio IX il 24 febbraio 1868 lo dichiarò venerabile, Leone XIII il 5 febbraio 1888 lo dichiarò beato e papa Giovanni Paolo II il 2 giugno 1996 lo canonizzò santo per la Chiesa Universale.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3-02-06



 

 

Saint Giles Mary-of-Saint-Joseph
 
Also known as
 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Pontillo
 Egidio Maria de Saint Giuseppe
 Francis Pontillo
 Saint of the Little Way

Memorial
7 February

Profile
Born to a pious family and raised in a small village. Rope maker by trade. Drawn to a religious life, he applied to the Discalced Friars Minor of Saint Peter of Alcantara at Naples, Italy in 1754 at age 25. He wished to become a priest, but lacked the education, and was received as a lay brother.

Porter and gate-keeper at his monastery's seminary, a position that put him in constant contact with those in need. Had a special ministry to the sick, and worked with lepers, travelling outside the city to help those who had become shunned and isolated. Even in life he was considered by locals as a saint and patron of the sick and outcast. Legend says that when he was charged with distributing food and alms to the poor, Saint Joseph would intervene to insure he never ran out.
Born
16 November 1729 at Taranto, Apulia, Italy as Francis Pontillo
Died
 7 February 1812 at Naples, Italy of natural causes while at prayer
 huge crowds turned out for his funeral
Beatified
1888 by Pope Leo XIII
Canonized
2 June 1996 by Pope John Paul II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John Paul II's Book of Saints, by Matthew Bunson and Margaret Bunson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February 7
St. Giles Mary-Of-Saint-Joseph
1729 – 1812
Also known as  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Pontillo; Egidio Maria de Saint Giuseppe; Francis Pontillo; Saint of the Little Way

 
Born 16 November 1729 to a pious family and raised in a small village Taranto, Apula, Italy as Francis Pontillo. Rope maker by trade. Drawn to a religious life, he applied to the Discalced Friars Minor of Saint Peter of Alcantara at Naples, Italy in 1754 at age 25. He wished to become a priest, but lacked the education, and was received as a lay brother.

Porter and gate-keeper at his monastery, a position that put him in constant contact with those in need. Had a special ministry to the sick, and worked with lepers. Even in life he was considered by locals as a saint and patron of the sick and outcast. Legend says that when he was charged with distributing food and alms to the poor, Saint Joseph would intervene to insure he never ran out.

Died 7 February 1812 at Naples, Italy of natural causes while at prayer; huge crowds turned out for his funeral. He was beatified  by Pope Leo XIII in 1888 and canonized on 2 June 1996 by Pope John Paul II.
 

Reflection
People often become arrogant and power hungry when they try to live a lie, for example, when they forget their own sinfulness and ignore the gifts God has given to other people. Giles had a healthy sense of his own sinfulness—not paralyzing but not superficial either. He invited men and women to recognize their own gifts and to live out their dignity as people made in God’s divine image. Knowing someone like Giles can help us on our own spiritual journey.
 

Prayer
 Lord God, you kept St. Giles faithful to Christ's pattern of poverty and humility.
May his prayers help us to live in fidelity to our calling
and bring us to the perfection you have shown us in your Son,
who lives and reigns with you and the Holy Spirit,
one God, for ever and ever.





 

 



40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