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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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08 ㅣ No.851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1983년 늦은 봄 날, 어느 국민학교의 체육대회는 끝이 나고 있다. 운동장에서 오학년 일반과

육반의 야구 결승전이 벌어 지고 있다.

철민은 뭐가 좋은지 함박 웃음을 지으며 공을 던지고 있다. 야구 경기를 하고 있는 운동장

주위로 몰려 앉은 학생들의 응원 소리가 우렁차다.

"잘한다. 김철민."

응원 단장인 현주의 구령에 맞추어 오학년 일반 학생의 함성이 크게 들리고 있다. 철민은

그게 좋아서 웃음 꽃이 피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

소리 만큼 듣기 좋은 것이 있을까. 소년의 맘은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

모조리 삼진이다. 국민학생이 던지는 공이 제대로 포수의 미트로 들어 가기 힘들었지만 오

늘은 진짜 선수가 던지는 것 처럼 반듯하게 공이 던져 지고 있었다. 오회까지 무실점이었다.

이제 이번 회만 막아내면 일반이 우승이다.

삼진, 상대방 선수는 그냥 자기에게 오는 공이 무서워 피해 버리는 시융으로 물러 서 버렸

다. 1반의 야구 선수들은 기쁨에 방방 뛰며 자기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담임

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 했다.

"잘했어, 철민이."

칭찬 받는 것이 즐거웠다. 현주가 보는 앞에서 철민은 담임께 칭찬을 받았다. 현주가 많이

가까워 보였다.

"철민아 잘했어."

지윤이가 다가와 칭찬해 주는 것도 듣기 싫지 않았다. 함박 웃음을 지으며 다소 쑥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 철민에게 남학생들이 다가와 장난삼아 패 주었다. 많이 아팠지

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철민은 교실에 들어가서도 흐뭇해 했다. 바로 야구 우승으로 받게 된 공책들이랑, 필기구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학생들에게 나누어 졌을 때 그러니까 그것들 중 한사람 몫이 현주에게 돌아 갔을

때 철민은 꼭 자기가 그것을 선물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주가 그것을 받고

즐거워 하는 표정이었기에 철민은 더 기분이 좋았다.

 

퇴교길에 현주는 자신과 함께 하지 않았지만 철민은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장이

으쓱거리며 현주와 같이 가는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야구 경기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보

았지만 기죽지 않았다. 거기에 자기도 있었으므로...

"현철이 쟤는 오늘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대게 잰다 그치."

철민이와 같이 걷던 지윤이가 그 꼴을 보며 아니꼬운 듯 불만을 표시했을 때에도 철민은 기

분이 상하지 않았다.

"다 잘했어 뭐."

"너 야구 선수 해도 되겠더라."

지윤은 철민이의 기분을 복돋아 주려고 애쓰는 느낌이다. 동엽인 그저 받은 상품들이 좋았

는지 들고 있는 공책들과 필기구들에만 열중할 뿐 둘의 얘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철민 일행은 또 느린 걸음을 걷고 있는 현주의 일행을 앞지르게 되었다.

"현철이 네 덕에 선물 받게 되어 기쁘다."

현주가 내 뱉은 말을 철민이가 들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어린 소년은 마음이 아팠다.

’저 새끼는 진짜 한게 없는데..."

"쟤가 뭐 한 거 있어. 삼진만 당했는데."

지윤이가 대뜸 현주에게 말을 걸어 버렸다. 철민은 다소 무안한 표정이다.

철민이와 지윤이가 자기들을 지나치는 것을 몰랐는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현주와 철민이

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민은 현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했는지 지윤의

옷자락을 잡으며 그냥 지나치자는 뜻을 비추었다.

"야, 박지윤. 우리끼리 하던 얘긴데 네가 왜 끼들어?"

반장이 지윤이가 한 말에 불만을 표시했다.

"니가 잘한 것도 없는데, 꼭 니가 잘해서 이거 받은 것처럼 들리니까 기분이 나쁘잖아."

지윤이가 들고 있던 공책들을 들어 보이며 현철이에게 따지는 태도를 보였다.

"너 왜 그래. 동엽이 저기 갔어. 빨리 가자."

철민이는 지윤이 팔을 잡았다. 동엽인 자신의 일행들이 멈추어 서 있는 줄도 모른 채 들고

있는 공책을 보며 저 앞에 걸어 가고 있다.

"야, 성현주. 너 잘난 척 좀 하지마. 재수 없어."

괜히 지윤은 현주에게 심한 말을 내 뱉고는 철민의 바람데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철민도

같이 걸음을 걸었지만 시선은 고개를 돌려 방금 안 좋은 말을 들었던 현주에게로 가 있었

다. 현주는 그냥 주저 앉아 우는 듯 보였다.

"응. 쟤, 울지?"

뒤를 돌아 보는 것은 철민이었는데 말은 지윤이가 꺼내었다.

"너 왜 그래."

"현주, 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지가 공준줄 알아. 담임도 좋다 그러지. 잘 나간다

는 남자 애들 자기 곁에 붙지. 저번에 나 때문에 너 선생님한테 맞은 적 있잖아. 그때 너한

테 하는 태도도 진짜 맘에 안들었어.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그러는 거야. 아까 응원할 때

부터 계속 짜증나게 만들더니..."

’나는 니가 더 공주 같다.’

철민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나 좋은 말로 타일렀다.

"너 현주하고 친하게 지내. 너 알고 보니 깡패네."

"헤."

패주고 싶은 지윤의 웃는 얼굴이었지만, 옛 선현들을 존경하는 철민은 옛말을 따르기로 했

다. 참 잘나게 보였던 현주를 무참히 밟아 버린 자신의 친구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가 우는 모습이 안스러워 뒤를 돌아 보긴 했으나, 철민은 현주라는 아

이에게 가졌던 거리감이 조금씩 줄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소녀를 괴롭힌 지윤이가

오히려 더 좋아 보인다. 저쪽 패거리들에게 가지고 있던 약간의 열등감도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다.

"야, 신 동엽. 같이 가 임마."

"엉? 너네들 뒤에 있었냐. 빨리 와."

동엽이는 그저 받은 상품이 좋아 싱글벙글 할 뿐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가 버린다. 체육 대회 이후로 철민은 내세울 게 별로 많지가 않았다. 자

신 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현주에게 다시 거리감을 느꼈고, 일부 학생들만 편애하는 담임

때문에 기가 죽었다.

여름 방학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가을 소풍도 지나갔고, 곧 겨울 방학이다. 지윤과 철민은

더욱 더 친해졌었다. 간혹 그 친함으로 인해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철민이나 지윤이는

아이들에게 놀림감을 받고 가만 있을 아이가 아니었다. 한 소년이 터지거나, 한 소녀가 울거

나 하면 놀림이 수그러져 버렸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었다. 조금 있으면 통지표가 나올 것

이다. 철민이는 일학기때 우,가 하나뿐인 성적표를 받았다. 동엽이도 물론 우,가 하나 뿐인

성적표를 받았다. 최고로 못한 성적과 최고로 잘한 성적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방학이 시작하는 날, 담임은 통지표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철민이는 통지표를 받고 다소 놀

랬다. 우,가 두개나 되는 성적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받고 웃는 아이들과 고개를

푹 숙인 아이들, 그리고 보지도 않고 가방에 넣어 버리는 아이들의 표정은 제각기 이채로왔

다. 철민은 담임을 보면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야, 김철민. 통지표 바꿔 보자."

지윤이가 담임 몰래 철민의 옆구를 쑤셨다.

"그럴 기분 아녀."

"우 두개면 엄청 잘 받았거만."

동엽이가 아까 철민이가 통지표를 펼쳤을 때 그것을 훔쳐 본 모양이다. 지윤에게 고자질 하

듯 말을 내 뱉었다.

"그래 잘했네."

철민은 기분 나쁜 투로 뒤를 돌아 보았다. 담임이 잠시 학생들만 교실에 남겨 두고 교무실

로 자리를 비웠다. 내일부터는 겨울 방학이다. 담임이 돌아와서 빨리 방학이 시작되기만을

바라는 아이들은 연신 방금 받은 통지표 얘기들 뿐이다.

"너는 뭔데?"

"나는 우, 하나. 나머지는 다 수,야."

"뭘 우,를 받았는데?"

"미술."

"내가 너보다 체육 못하냐? 나는 체육이 우,다."

"이상하네. 니가 우리반에서 체육은 제일 잘하는 편이잖아."

"이러다 우등상 못 받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일학기 때는 우,가 하나 였지?"

"응."

"받겠네 뭐."

"야, 저기 뒤에 현주랑 쟤들은 뭐 받았는지 한 번 알아 봐라."

"그럴까?"

현주와 현철이, 그리고 다른 그의 패거리들이 성적표를 보며 모여 있는 곳으로 지윤이가 끼

어 들었다.

그리고 친하게 한 동안 속닥거리더니 철민에게로 돌아 왔다.

"쟤들 다 공부 잘하지 않냐."

"음, 현주는 올 수,이고. 현철인 너와 같이 우,가 두개더라. 미술하고 자연이 우던데. 현철인

일학기 때도 우가 두개였어."

"그래?"

"너, 우등상 받겠다."

"흠."

철민은 현주가 일학기 때에도 올 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심 자기가 현주보다 잘 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철민은 다시금 거리감을 느꼈다. 지윤이도 일학기 때 올 수,였는

데 왜 지윤이 한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철민은 느끼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짝사랑

하는 상대와 친한 친구와의 차이점을 알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다.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올 해, 철민은 앞으로 십 몇년을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을 여자와 그

리고 십 몇년을 계속 자기를 좋아하며 따를 여자를 만났다. 그것을 철민은 아직 모른 채 방

학이라 좋다 그러며 아까 받은 통지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종례를 마치자 마자, 집으로 뛰

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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