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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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14 ㅣ No.883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철민은 중학생일때는 상당히 잘나가는 인물이 되었었다. 이학년때는 반장까지

했다. 아버지도 하시던 부업으로 사놓은 부동산들이 값이 뛴 바람에 형편에 여유

가 많이 생겼다. 일찍 자가용도 사시고, 엄마를 아들 학교의 이사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게 했다. 성적도 비록 일,이등 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에서 꼭 오등안에 드

는 우등생이었다.

이학년 겨울 방학때는 미술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철민은 중학생이 되고 이년동안 지윤을 가끔 만나기는 했었으나 예전 같은 자연

스러움은 없었다. 지윤의 태도가 많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사춘기

란 것은 여자들에게 빨리 오나 보다. 지윤은 철민을 만날 때 그냥 미소만 지을

뿐 수줍음 타는 눈빛으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중 일때는 웃으며 자주 하던 전화도 중 이가 되면서 철민이가 연락을 않자 지윤

이도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철민이에게서 지윤은 잊혀져 갔다. 지윤이 보다 현주는 더 빨리 잊혀 졌었다.

보이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잊혀졌었다.

 

그런데 철민이가 중삼이 되면서 잊혀졌던 지윤이와 현주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현주는 짝사랑했던 기억으로, 지윤이는 자기

와 친했던 기억으로 자주 생각이 났다.

책상에 앉아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는 날이면 철민은 히죽거리곤 했다. 지윤이

와 현주와 같이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보기도 했다.

’’그래. 지윤이도 많이 예뻤지. 연락이나 한 번 해볼까? 에이, 안 본지 오래 됐

는데...’’

여자 아이들에게 관심이 가면서 짝사랑 했던 현주 보다는 자기와 친했던 지윤

이 생각을 많이 했다. 애들이 꼬셔서 따라 나간 미팅때 상대편 여학생들을 보며

철민이는 지윤이가 쟤들에게 비하면 공주 중에서도 상공주다라는 생각을 하며 국

민학교 시절 자신과 친했던 지윤을 떠 올렸다.

 

중학교 시절은 철민과 동엽이와의 우정만 깊어 갔을 뿐 이 이야기에 필요한 별

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철민이는 중학교 삼년 동안 한번도 야구를 하지

않았다.

 

가을이 깊었다. 빡빡깎은 철민의 머리가 찹고 높은 파란 하늘을 보며 아직 애

띤 그의 얼굴을 장식하며 바람을 통과 시켰다. 철민은 지금 가을을 타고 있다.

사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름 모를 소녀의 얼굴들이 바람처럼 자신의

머리를 지나쳐 가고, 사랑이야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철민이가 아주 사춘기를 타게 된 동기는 티비에서 방영 된 단편의 드라마 영향

이 컸다. 바로 ’’소나기’’

내용도 좋았지만 그 드라마에 나온 소년, 소녀 때문에 철민은 풋풋한 사랑을 꿈꾸

게 되었다. 수줍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인 그 소나기를 보면서 거의 잊혀졌던 아

니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한 소녀가 떠 올라, 그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다가 가고픈 마음 말이다.

’’현주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각각 남중에서 여중에서 중 삼 쯤 되면 국민학교 때 친했던 이성 친구들은 대부

분이 어색한 존재로 변해 버렸을 시점이다. 내 경험으론 그렇다. 길 거리에서 서

로 지나쳐도 뻔히 아는 사이지만 모른 척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

가 허다하다.

 

철민이는 지윤과도 길거리에서 모른 척 지나 친 기억이 있다. 하물며 국민학교

시절에 어색함을 주었던 현주를 만나게 된다면 그가 아는 척 할리가 없었다.

 

가을이 끝나는 무렵, 철민이가 살던 도시에서 시 주체로 사생대회가 열렸다. 미

술 학원을 열심히 다닌 덕에 철민이는 그림을 제법 그렸다. 학교 대표가 되어 철

민이는 사생대회가 열리는 공원으로 그림을 그리러 가게 되었다. 거기서 철민이

는 현주를 만났다. 모든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러 온 학생들로 공원은 가득 찼었

다. 까까머리의 남학생들, 단발머리의 여학생들. 바람이 선선해서 좋다.

 

철민은 자신과 같이 간 일행 두명과 앞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열심히 도화지에

옮겨 가고 있었는데 이성에 눈뜬 한놈이 말을 꺼내었다.

"저기서 그림 그리고 있는 애들 예쁘지 않냐?"

한 녀석이 말을 뱉자 그림을 그리던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 쪽으로 쳐다 보았

다.

"그렇네. 예뻐 보인다."

철민이도 관심을 주고 말을 했다. 그리고 유심히 살피다 뜻밖의 미소가 피어났

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네 명의 소녀 중에 현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민이는

예전처럼 떨지는 않았다. 아는 척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고 싶은

소녀를 보게 된 것이 기뻐서 미소를 띄운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현주를 자주 쳐다 보았다. 저쪽에선 이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

다. 자신이 여기 있는 줄 현주는 모를 것이라 철민은 생각했다. 옅은 물감들이

다 칠해진 그림은 이제 짙은 물감들로 명암을 받고 있었다. 저 쪽 소녀들은 그림

을 다 그린 모양이다. 다 그린 그림을 둘이가 모아 가지고 제출하러 떠나는 모습

이 보였다. 현주는 그림 도구들을 챙기고 있는 중이다. 현주가 곧 떠날 것이라

생각하니 이제 언제 볼까 허전했지만 그래도 철민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

다 시선을 그림에다 주고선 굳어졌다. 그림 도구를 챙기고선 자기 쪽으로 오는

현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나칠 때까지는 모른 척 그림 그리는 것에만

열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현주가 자신을 지나치지 않았다. 대뜸 인사를 한 것이

다.

"응? 철민이도 그림 그리러 나왔던 거야?"

놀란 가슴으로 철민이는 현주에게 조심스런 시선을 주며 헛웃음과 함께 답을 했

다.

"그래. 오랜만이네."

"너 아는 애냐?"

철민은 같이 온 한 놈이 말을 꺼내었지만 무시하고는 현주를 바라 본 채 웃었

다.

"반갑다 야. 그림 잘 그리네. 근데 나뭇 잎 색깔이 너무 옅다. 지금 남아 있는

나무라고는 다 칩엽수들인데 네 그림은 활엽수 모양이잖아."

"그렇냐? 하하. 나 그림 잘 못그리는데 워낙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이 없어서..."

"붓 잠깐 이리 줘 봐."

"왜?"

"여기 나무만 내가 손을 좀 봐줄게. 내가 이래뵈도 그림은 잘 그린다."

철민은 어색하게 웃기는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현주에게 붓을 주었다. 자신이

앉아 있는 바로 옆에서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이 들고 있는 파렛에서 물감을 찍으

며 현주가 자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조금 손 봐 주었다.

"어때?"

"응, 훨씬 좋아진 것 같다."

"그래. 잘 마무리 해라. 나 이제 가봐야 겠다. 친구들이 저기서 기다리거든."

"응."

철민이는 잠시 파렛을 놓고 일어 섰다. 일어서자 마자 웃었다. 자신의 키가 이

제는 현주보다 컸기 때문이다. 현주는 국민학교 때보다 아주 조금밖에는 더 크

지 않았다. 그걸 현주도 알아 차린 모양이다.

"야, 너 키 많이 컸다."

"응. 허허."

철민은 머리를 긁으며 머쓱 거렸다.

"참. 너 지윤이는 만나니?"

"아니."

"연락 안해?"

"안 해."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봐. 안녕."

철민은 용기를 내어 악수 할 요량으로 손을 내 밀었으나 현주는 그것을 보지 못

한 모양이다. 그냥 손을 흔들며 인사만 해 주고는 친구들에게로 달려 가 버렸

다. 현주가 달려가는 뒷 모습에는 철민의 그리웠던 시선이 있었고, 풋풋한 마음

이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철민이는 현주를 예전처럼 마음에 꼭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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