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마태오복음 필사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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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온화 [onwha] 쪽지 캡슐

2000-05-01 ㅣ No.861

                   주님을 제가 버렸나이다!

           ---- 마태오복음 필사 끝에 얻은 깨달음 ----

 

  주님! 제가 주님께 큰 죄를 지었나이다. 주님 부활하심을 축하드리지는 못할망정 주님께

서 쓰레기더미에 끼어 들어가시도록 주님을 버려두고 그냥 왔나이다.  주님께서 진주를 돼

지우리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거늘, 저는 주님 말씀 성경책과 마태오복음 필사본을 쓰레기더

미에 버리고 말았나이다. 주님! 가련하고 불쌍한 저를 용서하소서!

 

  옛 엔젤성가대 단원들과 구름처럼 바람처럼 이 청량리성당으로 다시 흘러 들어와, 잊고

살았던 엔젤 젊은 향기에 취해 사느라고 저는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모른 채 마냥 행복했답

니다. 50줄에 들어선 이 나이에 바쁨과 원거리를 마다하고 매주 토요 특전미사에 성가하는

기쁨과, 모일 때마다 그 좋은 성가곡 합창곡을 목이 터져라 불러대고 지휘하는 희열, 거기에

옛 스무살적 청춘기가 발동하여 낄낄거리며 웃어제끼는 낭만은 이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랍

니다. 거기에 더하기론, 단원들이 정성껏 만들어 제공하는 누드김밥에 생버섯 맑은 된장국과

새콤한 김치, 녹두지짐에 잡채랑 약밥이랑, 이어지는 맥주 세례 속에 황홀한 노래방 행진

들.......

  이렇게 살았으니, 그러지 않아도 직장이나 사회에서 중추 핵심으로 인정 꽤나 받고 있는

터에, 어지간히 거만과 교만, 허영과 낭비의 싹이 트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 때 주님께서

통칭 제 교만의 싹을 잘라 주시려고 저를 아프게 괴로움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뒤늦게 엔젤인들

이 저를 위로하느라고 해 준 말에서 비로소 주님 사랑하심을 깨닫고, 주님께 용서를 빕니다.

 

  저는 마태오복음 필사 시작부터가 저를 포함한 우리 옛 엔젤인들이 잘 보이고 싶었었어요.

겉표지부터 만들었으니까요. 보라색 색상지에 예쁜 도라지꽃을 여러 송이 화려하게 잘라붙이

고, 온갖 아름다운 그림과 글귀를 넣어 그럴 듯하게 꾸몄지요. 또 파스텔톤 여러 색도화지에

그 잘 쓴다고 한껏 추켜주는 특유의 ’온화체’ 로 정성을 다하고 사이사이 컷을 그려 넣었으

니, 제가 봐도 복음서 필사본 중에서 단연 튈 건 뻔하더라구요. 제가 또 얼마나 인정을 받을

것이며, 손을 보험들어라, 어쩜 이렇게 많은 달란트를 받았느냐, 그 바쁜 중에 어떻게 그 많

은걸 할 수가 있느냐 등등 보지 않아도 환히 칭찬의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마태오복음 28장

중 26장까지 무슨 정신으로 밤을 새워가며 썼는지요! 이제 2장을 하루 정도만 쓰면 멋지게

마무리하고 끝에는 소감문도 곁들여야겠다고 내심 흐뭇해하고 있을 때 일이 벌어진거죠.

  부활 대축일까지 딱 3일 남은, 복음서필사본 완성까지는 시간이 충분한 날에, 서울시교육

청으로부터 장학사들 연수에 레크레이션 진행 부탁을 받았어요. 가평학생수련원에서 각 교

육청의 교육장, 초등교육과장, 계장, 장학사 일동, 교육연구원과 연수원의 연구사들이 180명

총 집합하여 1박 2일로 연수를 하는 데, 첫째날 ’만남의 밤’ 때에 박온화선생님 마음대로 이

사람들을 노래와 율동 등으로 뒤집어 흔들어 달라는 게 주문사항이었어요. 이게 웬 횡재입

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교감자격연수를 목전에 두고 있어, 이 분들이 모두 제게 점수를

주실 분들이시니, 저야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신이나서 진행할 악

보 만들고 준비하느라 주님 말씀 필사마무리에 차질이 생겼지요.  드디어 금요일 주님 돌아

가신 날이라는 것도 잊은 채 가장 돋보이는 빨간 체크원피스에 빨간 쟈켙을 입고 키타를

들러메고, 환호를 받은며 가평에 입성했지요. 마치 주님 예수살렘 입성하시듯이...... 벌써 제

머리 속에서 주님은 버림 받으셨어요. 얼마나 활짝활짝 웃으며 그날따라 잘 나오는 목소리

로 신나게 열정을 다해 진행을 했는 지, 벌벌 떨어야 할 장학사들과 교육감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육청 교육장님 교육과장님들이 제가 이쁘다고 대단하다고 난리난리 아닙니까?  거기

에다 이 번에 교감연수 받는다고 여기저기서 ’축하합니다’ 등을 연발하니, 제가 주님을 챙겼

겠습니까?  저같은 교만덩어리가 주님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잃어 버렸습니다!  조금 남은 복음서 필사본을 시간 날 때마다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쓰겠

다고 쇼핑백에 성경책과 필사본을 넣어 들고 다니더니, 그 가평수련원에까진 왜 들고 갔답

니까?  준비실에다 둔 쇼핑백, 그 안에 든 성경책과  복음서 필사본은 내팽개친 채 저는 기

타와 핸드백이 무에 그리 중하다고 그것만 달랑 들고 서울로 왔답니다. 그날 밤 황홀했던

시간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에 생각나기에 수련원으로 전화하면 그 준비실에 있는 주님책

쉽게 찾으려니 했지요. 아뿔싸 ! 준비를 하지 않은 자, 교만한 자에게, 그것도 주님꼐서 돌

아가신 날에 그토록 화려한 잔치를 벌인 제에게 돌아올 건 불보듯 뻔한 거지요. 준비실 뿐

아니라 아무리 다 찾아봐도 없으며,  쓰레기가 하도 많이 나오니까 청소하시는 분들이 그런

쇼핑백이면 그냥 쓰레기더미에 버렸을 거라는 충격적인 말. 버렸을 거라는 말. 말......

  안 됩니다. 그게 어떤 건데 버려요???  주님을 버린 듯 저는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루고 괴

로워 울었습니다. 기도도 못했습니다.  부활 성야미사를 청량리 현엔젤 성가들으며 하고 싶

었는데 못 갔습니다. 주님 축일 부활절날 도봉동 오후 3시 어린이미사에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미사참례를 감격스러이 하면서 영성체도 못했습니다.  드디어 합창연습을 위해 간신히  

옛엔젤인들과 만났습니다. 저는 지휘할 힘이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고백을 하고 말았습니

다. 지휘역할이 아니었으면 오지 못했을 지도 모르니, 저는 기가 죽을대로 죽었지요.

  그런데 주님은 저를 특별히 사랑하셨답니다.  제가 생각한 대로 제 속에서 자라고 있는

교만의 싹을 싹둑 자르심과 동시에, 쓰레기치우는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 주님께서 나름대로

계획이 계신 주님 사업이시랍니다. 한 권의 성경책과 그렇게 정성껏 쓴 복음서 필사본은 복

음을 아는 사람에게 전시할 게 아니라 감동과 감화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로 틀림없이 간 것

일 거랍니다. 엔젤합창단원 중의 누군가가 제게 해 준 이 말을 저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었

습니다. 감격스러워 목이 메이고 비로소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을 옮겨 적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제게 이 복음서 필사를 통

하여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이토록 사랑하시니, 제가 다시 살아났나이다. 주

님의 부활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변화하였다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들으며 마음

으로 외쳤나이다.  " 저도 변했어요!  저도 딴 사람이 됐어요! "   

  지금 이 순간, 지난 88년도 쯤엔가 창동성당에서의 미사참례 때 신부님께로부터 들은 강

론 말씀이 기억납니다. 우리 신자들 중에는 왜 그렇게 ’바닥신자’가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시

면서 특히 강조하신 ’3 바닥신자’ 이야기가!  3 바닥신자란 손바닥신자, 발바닥신자, 혓바닥

신자로 의무감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성당에 다니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남이 보는 앞

에선 항상 두 손을 거룩한 척 합장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척 손모아 비는 손바닥신자!  성당

의 일이라면 미사며 행사며 앞장서서 뛰지만,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정신없이 발바닥으로

열심히 다니는 발바닥신자!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여 미사경문과 기도문

등을 다 외운다고 크게 소리내며, 혀로는 ’주여, 주여’를 외쳐대는 혓바닥신자!  

  바로 제 모습입니다. 주님!  

 

          ---- 고백을 하는 박루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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