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새천년 루도비꼬 영어 제 3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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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vico] 쪽지 캡슐

2000-07-03 ㅣ No.1320

                   

                         안녕하세요?

 

루도비꼬 입니다. 날씨가 정말로 찌는군요. 십수 년전에 브리스번의 골드코스트에서 일광욕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코발트 빛 하늘 (우리의 가을 하늘만 못하지만) 금빛 모래 깨끗한 바다 션하게 차려 입은 여인들…. 그만하자.

 

         [도대체 누가 시작했나? 엉터리영어] 제3부

 

 위엄을 갖춘 일본인 영어 선생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는, 못 말리는 발음 보다는 ’영어’라는 것이 사람들이 매일같이 의사 소통에 사용하는 ’살아 있는 언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학술적인 연구 분석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를 배워서 실제로 원어민과 대화할 기회도 없고, 또 영문 문서, 신문 등을 통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닌 그 당시로는 당연한 것이었으니 그들만 탓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영어의 감이 전혀 없는 일인 선생들이 가장 자신 있는 대목이 바로 ’따지기 문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문 독해를 한다면 그냥 주욱 읽어 가면서 그 뜻을 이해하면 되는 것을 문장 하나마다 격·형식·태·시제·화법·시제일치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따지고, 분석하고, 다시 일본말로 재정리하고 마치 암호 문서 해독하듯이 해석을 억지춘향식으로 해나갑니다. 별 것도 아닌 문장 하나 해석하는데 5-10분씩 걸리고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도 밑줄 치고, 받아적고, 외우고 하다보면 정신이 사나와져서 도통 뭘 배우고 있는지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뼈가 골절 되어 오는 환자’에게 소화제를 주는 격입니다. 한술 더떠서 선생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문법 사항이나 예문 같은 것들도 학생들이 모르는 것들만 뽑아서 가르치고, 시험도 될 수 있는 한 못 풀만한 아주 까다로운 것 위주로 내다보니, 미처 ’기초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골치 아픈 문법과 단어들을 외우느라 수도자들 처럼 고행 을 하듯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리하야 재미있어야 할 영어 공부가 마치 암호 해독하는 골치 아픈 웬수가 되어 버린 것 입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낙오하는 학생이 가하 급수적으로 늘어나서, 결국에는 10년 이상 영어를 공부하고도 유창하기는커녕 영어라 하면 보기도 싫어진 것이지요. 일제 때 시작된 이런 식의 영어교육은 ’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일대의 전환기를 맞습니다. 바로 점령군인 미국 군정이 약 2년 동안 시작이 됩니다. 이때에 일부 영어를 구사하던 식자들이 통역을 하기 시작 하였고 가장 중요한 군사학교 교육을 미군 고문단들이 담당을 하였던 것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바리 영어 (일명 G.I 영어) 는 싸구려 영어라고 우습게 말씀들을 하시는데, 어떤 것이 고급영어 입니까? 본인도 부유층(?) 아줌마 (내 눈에는 이렇게 밖에는 보이질 않습니다.)들의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이 질문 입니다.

 

언어란 기본적인 문법을 지키면서 자연스레 하면 되는 것 입니다. 미국 아니라 유럽 일본 중국 남미를 통틀어 국가의 통치 수반자들 치고 군인 아닌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생겨난 것이 군사영어 학교였고 우리나라 영어 발전에 큰 족적을 남깁니다. 이 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을 시킬 목적으로 영어를 가르쳤지만 미국 현지교육이라는 아주 중요한 코오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지엘 가서 진짜 실생활 영어를 접해 본 군대통역 장병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것이지요. 본인의 생각으로는 아직도 영어를 제일 잘 한다고 생각 합니다. 민족의 비극인 6.25 동란 시 군사통역 학교 출신들은 눈부시게 활약을 합니다. 요즈음의 통역사 들은 전시통역을 못해봐서 도저히 이해를 못할 것 입니다. 사방이 포탄이 터지는 소리 각종 총기의 소음 무선 통신기의 잡음 암구호로 된 교신 속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전우의 생명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그런 쌀벌한 상황을 말 입니다. 저도 직접 전투는 못해 보았지만 전투 훈련시 미군들과 꽤나 작전 통역을 많이 해보았지만 영어 실력은 유창함이 기본이고 눈치 코치 발치까지 동원해서 때려 잡기도 하고 온몸으로 긴장해서 하는 피곤한 것 입니다.

이렇게 영어 교육은 ’60-80년대 까지 중·고등 학교를 중심으로 대충 유지되어 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훌륭한 선생님들이 아주 많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저도 중학교 때의 영어 선생님이 3분 계셨는데 지금 회상해 보면 현재의 선생님들보다 인품이나 실력면에서 월등히 우월함은 물론, 무지하게 열심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때의 열성교육 덕분에 제가 오늘날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 하게 된 것 입니다. ’70년대에는 또 제가 존경하는 당시 20대 약관의 ’J’ 선생님께서 Tape에 녹음을 하여서 영어를 강의 하는 교재로 돌풍을 일으킵니다. ’80년대에 들어서 해외를 여행 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늘게 되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유학강사 들이 방송을 타고 실생활 영어가 대두가 됩니다. 이때 터진 걸프전은 미국CNN 방송을 타고 현지 생중계가 되면서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을 공중파에 소개합니다. 주역 통역사는 내 동기생 ’G’ 이었고요. 4부에 계속 합니다.

 

오늘의 격언은 Easy come, easy go.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 쉽게 취하면, 쉽게 잃는법)

                  

                  대단히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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