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13]

인쇄

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15 ㅣ No.890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철민과 동엽은 합심이라도 한 듯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둘 다 맞아 죽기는 싫었

나 보다. 거의 반에서 삼십등 까지 떨어졌던 성적이 이학년 일학기가 끝나는 무

렵에 가서는 고교를 들어 올때의 성적 수준까지 회복시켰다.

“너 새끼야, 니가 이러면 안돼지.”

“왜 임마.”

“이러다 같은 대학가게 되면 어떡할래?”

“제발 그것만은 피하자.”

“그래. 나는 처음부터 공부를 그런데로 했잖아. 니가 성적이 팍 떨어졌으면 좋

겠다.”

“아니야. 내가 양보할게. 너 대학 못가게 되더라도 우리 과수원에 꼭 취직 시

켜 줄테니까 너는 놀아라.”

“아니야. 내가 성공하면 널 꼭 내 밑으로 취직시켜 줄테니까 편한 맘 가지고

놀아.”

고등학교 때는 아무래도 제일 관심사가 성적이었다. 가정환경도 별 문제가 되

지 않았다. 입시 기준으로 학생들은 가꾸어져 갔다.

 

시간은 계속 흘러 갔다. 동엽도 철민이를 통해서 지윤과 친해졌다. 사람 일이라

는 것이 알수 없듯이 지윤은 이유없이 동엽이의 마음에서 풋풋한 사랑으로 자리

잡아 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철민이기에 동엽이가 지윤을 좋아하던 말던 별

로 상관이 없다. 그냥 적어 봤다.

하여간 동엽이가 지윤을 좋아하면서 지윤을 대하는 태도가 꼭 철민이가 현주를

대하는 태도처럼 변해 갔다는 것이다. 철민은 자신이 그러한 행동에 대한 경험

이 있기에 얼마 안가 동엽이가 지윤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됐

다. 별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철민은 그 사실에 대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욕심이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었을까. 자신의 마음속에 지윤은 항상 현주

의 뒤에 서 있었는데, 지윤이가 딴 사람 곁에 서는 것을 생각하기 싫어했다. 지

윤은 철민이의 친구였기 때문에 동엽이에게 잘해 주었다. 지윤이가 동엽이에게

잘해 줄수록 철민은 동엽에게 시큰둥해졌고, 동엽이는 지윤에게 감정이 생길수

록 철민이를 어려워 하기 시작했다.

 

또 가을이 되었다. 셋이서 등,하교 하는 일은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사소한 문

제로 한달 정도 서로 뿔뿔히 흩어졌다. 등교때는 물론이고 하교때도 셋은 따로

다른 버스를 탔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서로 서로 삐쳤다.(이것도 누군

가 삐지다가 맞다고 하더군요. 근데 사전을 찾아 보니까 삐지다라는 단어가 없었

어요. 저 공대 출신이에요. 틀린 글자가 어디 한두개 뿐이겠습니까. 흠, 그래도

그렇게라도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니까 기분은 좋네요. 김나는 미역국 애고 뜨

거버라.)

서로가 삐친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지윤이가 동엽이를 추켜 세우는 말을 하자

철민이는 동엽이를 깎아 내렸다. 지윤이가 그런 철민이를 나무라자 동엽이도 철

민에게 반격을 했다. 그래서 철민은 지윤에게 화를 냈다. 이때 동엽이는 차라리

철민이 편을 들었어야 했는데 지윤이 편을 들어 버렸고 철민이는 그래 둘이서

잘 노는구나. 생각하고 자리를 떠 버렸고, 원래부터 철민에게 마음이 가 있던 지

윤은 동엽이에게 더 이상 친한 척 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서 동엽인 그냥 바보

가 되어 어느 한쪽편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렇게 혼자서 하교를 하던 어느날이었다. 철민은 버스 정류장에서 그가 마음속

에 품고 있던 소녀를 만났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밤 늦은 시간이었다. 버스

를 기다리며 다소곳이 서 있는 현주의 모습은 고등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성

숙해 있었다. 지윤이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은 현주의 모습으로 인해 가려졌다.

그 후로 며칠 더 철민은 하교 할 때 현주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현

주가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냥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 버스만

기다릴 뿐이었다. 철민은 현주가 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방향이 같았지만 국

민학생일 때처럼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는지 현주가 타는 버스를 타지 않고 현주

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멀지 않은 곳에서 모습만 지켜 봤다. 그리고 같은 번

호의 다음 버스를 타고 오면서 현주 생각으로 미소 짓곤 했다.

비가 오는 가을날 밤의 버스 정류장 정경이 나트륨등으로 오묘히 어두워 있다.

철민은 현주를 보기 위해 다른 아이들 보다 조금 늦게 학교를 빠져 나왔었다. 그

러나 현주의 모습은 버스 정류장에 없었다. 철민은 조금 실망을 하고 집으로 가

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한동안 출발하지 않았다. 백미러로 달려 오는 이 버스

를 탈 손님을 보고 그들을 기다릴 요량으로 말이다. 철민은 버스 앞문이 바로 보

이는 곳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꿈쩍 놀랐다. 자신이 탄 버스에 현

주가 올라 타는 모습을 본 것이다. 마땅히 빈 자리가 없어 현주는 서 있게 되었

다. 그리고 그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철민이가 앉은 자리 바로 근처였다. 현주는

철민은 힐끗 쳐다 보았으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현주가 들고 있는 가방이 무

거워 보인다. 철민이는 그때부터 버스가 두 정거장을 가는 시간 동안 망설였다.

가방을 들어 줄까, 말까. 가방을 들어 주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생긴 망

설임이었다. 철민은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현주가 들고 있는 가방을 잡았다. 그

런데 하필은 나온 말이 존댓말이었다.

“가방 들어 줄게요.”

현주는 철민에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쫑긋 내 밀었다. 가벼운 헛웃음을 내 뱉더

니 아무말 없이 가방을 철민에게 맡겼다. 현주와 철민은 침묵했다. 버스 승객들

의 가벼운 말소리와 엔진 소리만 들릴 뿐이다. 창 밖에는 비가 내려 작은 흔적들

을 남기고 있었다.

현주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었다. 철민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현주가 가방을 달

라고 하기 전에 가방을 주는 시늉을 했다. 현주가 가방을 받았으나 고맙다는 말

을 하지 않았다. 현주가 뒷문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철민이는 입맛만 다셨다.

쩝.

현주가 내리는 정거장에는 내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버스는 뭐가

급했는지 사람들이 다 내리기도 전에 출발을 해 버렸고. 느린 속도였지만 버스

안에는 물기가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미끄러웠다.

“아야.”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버스는 급제동을 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을 향

했다. 철민이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한 여학생이 버스 바로 옆에 주저 앉아

있다. 가방은 그 학생에게서 멀리 떨어졌고, 여학생은 일어 나지 못하고 있었

다. 철민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운전 기사도 놀랐는지 시동을 끄

고 버스 운전석에서 일어섰다. 철민이는 급하게 앞문으로 내려 그 여학생에게로

달려갔다. 넘어진 여학생은 현주였다. 현주는 주저앉아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손

으로는 무릎을 감싸고 있었다. 치마 밑으로 나온 하얀 종아리가 흙탕물에 더럽혀

져 있었다. 현주는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일어 서지 못했다. 철민이가

현주에게로 다가갔을 때까지 주위 사람들은 학생 괜찮아, 정도의 말만 건넬 뿐,

또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구경만 할 뿐 누구도 현주를 일으켜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철민이도 조금 머뭇거렸었다. 그렇지만 도움을 청하는 현주의 가여운 눈

빛을 보고 무엇에 홀린 것처럼 현주에게로 달려 가 물었다.

“괜찮아?”

운전 기사는 이제서야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다.

“다리가 삔 것 같아. 못 일어 나겠어.”

“당장 병원으로 가자.”

철민이가 병원 얘기를 꺼내자 그제서야 주위에서도 “그래 병원으로 데려가

라.”“빨리 데리고 가는게 좋겠어.”“길 건너 조금만 가면 병원이 있잖아.”

“여학생이 못 일어 서네. 학생이 업고 빨리 병원으로 대려 가.”하는 말들이 잡

담처럼 울려 퍼졌다. 철민은 현주와 주위 사람들을 번갈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아주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는 바로 현

주에게 등을 내 밀었다. 현주는 그냥 말없이 업혔다. 주위 소근 되는 사람들로부

터 이 자리를 빨리 벗어 나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리고 철민이는 국민학교때 친

구였다. 철민은 현주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병원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다른 교통수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철민아 잠깐만.”

철민은 아직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또 불러주는 현주가 고마워 더 힘껏 달렸

다. 자신의 가방을 배에다 매고 여자 치고는 상당히 거구인 현주까지 업고도 철

민은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잠깐만.” 한 십여미터 이상 달렸을 것이다.

철민은 달음질을 멈추고 바로 자신의 머리옆에 있는 현주의 얼굴에 고개를 돌

려 말했다.

“내 가방. 가방 안가져왔어.”

현주는 철민에게 업힌 채 아까 넘어지면서 손에서 놓친 가방이 놓여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철민은 도로 돌아가 현주를 업느라 사용중인 한손에 현주

의 가방까지 들었다. 그리고 또 급하게 신나게 달렸다.

아까 현주를 다치게 한 버스가 철민을 앞질러 갔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 보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무심결에 소리쳤다. 버스 운전사에게 소리 친 것

일거다.

“야이, 나쁜 놈아. 사람을 이렇게 해놓고서는 그냥 가냐. 차비 물어 내라.”

철민이의 그 소리에 현주가 아픔을 잊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철민은 그 웃음소

리가 좋아 더 신나게 달렸다. 병원까지 백여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철민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응급실로 들어가 철민은 현주를 침대에 눕혔다. 다리가 심하게 다쳤나 보다. 현

주가 아얏,그러며 조심스럽게 눕혀 줄 것을 원했다.

의사가 달려왔고, 현주는 어딘가로 실려 갔다. 철민 자신이 있는 곳에는 현주

의 가방만 등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잠시 후 간호사 한명이 현주의 보호자를

찾았다.

“학생이 성현주 보호자야?”

“아닌데요. 그냥 업고 왔을 뿐인데요. 많이 다쳤나요?”

“아니야. 그냥 뼈에 금이 간 것 뿐이야. 그 학생 보호자 연락처 몰라?”

“모르는데요. 현주한테 물어 보세요.”

“지금 치료중인데. 저거 아까 그학생 가방 아닌가?”

“맞아요.”

“가방에서 연락처 한 번 찾아 봐요. 그리고 부모님 걱정할테니까 집에 전화

좀 해 줘요.”

“알았어요.”

철민은 간호사의 말을 듣고 현주의 가방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막상 현주

의 가방을 열어 보려니 가슴이 떨렸다. 그 애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가방을 열어 보는 데도 철민은 용기가 필요했다. 가방 속에서 수첩

을 발견했다. 현주를 닮은 예쁜 수첩이었다. 거기서 현주네 집의 연락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거기 현주네 집 맞죠?”

“맞는데요.”

“다름이 아니구요. 현주가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 제일병원 응급실에 있거든

요. 오셨으면 해서요.”

“네?”

“많이 다친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구요. 다리를 약간 삐인 것 뿐이에

요.”

“진짜 많이 안 다쳤어요?”

“네. 그러니까 걱정하시지 말고 빨리 오세요.”

철민은 현주의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현주가 다쳤다는 소리에 어머니가 많이

놀라는 듯 해서 철민은 최대한 안심시키면서 답을 했다. 사려가 깊은 행동이었

다.

철민은 현주의 보호자가 병원으로 올때까지 다시 현주의 가방과 함께 있었다.

아까 꺼내어 놓은 수첩이 철민을 유혹했다. 철민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뒤적였

다. 발급된지 얼마 되지 않은 주민등록증. 예쁜 현주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또 현주의 얼굴이 담겨 있는 학생증. 여러명의 이름이 적힌 전화 번호부. 현철이

는 없었다. 짤막하게 적힌 현주의 생각들과 잡담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러

장의 증명 사진들. 증명 사진 속 현주의 모습이 참 예뻤다. 철민은 주위를 살폈

다.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자 철민은 증명 사진 한장을 슬쩍했다. 그리고 주위

를 살피며 히죽 웃었다.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잠시간 멀뚱히 앉아 있었다. 누군

가 급히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얼핏봐도 현주의 부모님인 것 같았다. 두분은

철민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응급실을 두리번 거리더니 간호사를 찾아 가 버

렸다. 철민은 조금 더 기다렸으나 현주의 부모님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철민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간호

사가 보이길래 얼른 달려가 현주의 가방을 맡겼다.

“이거 아까 제가 업고 온 학생의 가방이니까 꼭 돌려 주세요.”

철민은 그 말만을 남기고 병원을 빠져 나왔다. 버스가 끊겼다. 할 수 없이 철

민은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 갔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리셨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또 동생에게 졸라 욕을 들어 먹었다. 그래도 철민은 아까 현

주를 업었던 기억이 좋아 웃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 와서 철민은 현주의 얼굴을 예전 현주와 같이 찍었던 국민학

교 졸업 사진 옆에다 고이 꼿았다. 한 참을 그 사진 둘을 돌려 보다가 함박 웃음

을 띄우고 철민은 잠이 들었다.

 

그 뒤로 그 해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현주를 볼 수 없었다.

현주가 버스에서 넘어진 사건 이후로 철민의 마음속에는 현주가 여전히 높기는

했지만 멀지는 않다고 느꼈다. 다시 보게 된다면 현주가 따스한 말 해 줄것 같았

고, 그도 친근한 말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엽과 철민은 다시 어색하지 않게 친해졌다. 하루의 시간중 삼분의 이를 얼굴

맞대며 같이 하는데 계속 어색해 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철민은 지윤과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갔다. 하지만 지윤은 철민의 눈치를 살피며 동엽에게는 예전처럼

친하게 대하지 못하고 다소 어려워 했다.

 

고 이의 생활도 빠르게 지나 갔다. 겨울 방학도 끝나고 철민은 곧 고 삼이란 직

책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철민은 현주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러던 이월

달의 어느 날이었다. 철민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을 때

현주와 지윤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 현주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지윤이가 철민

을 보자 반가운 웃음을 띄우며 다가 왔다. 하지만 현주는 철민이에게 다가 오지

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셋은 같은 버스를 탔다. 지윤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섰으나 현주는 철민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철민은 섭섭했다. 그때 현주를 병

원으로 업고 간 사실을 기억하면서 고맙다,라는 말은 아닐지라도 따스하게 자기

이름이라도 불러 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모른 척 하는 현주를 원망했

다. 현주가 따스하게 말을 건네 주면 자신도 친한 척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이란

철민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현주는 지윤이에게만 말을 붙였다. 그래서 철민은 지

윤과 현주가 버스에서 내릴 때에 지윤에게만 잘 가란, 인사를 했다. 철민은 창밖

으로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버리는 현주를 보면서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며 씁쓸

해 했다. 현주는 철민의 마음에서 다시 머나먼 존재로 인식 되어졌다.

 

"야이, 너 왜 그러냐?"

"내가 뭘 임마. 나도 진짜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게 무슨 개떡같은 운명이란 말여."

"너, 왠만하면 전학가라."

"나도 가고 싶다 새꺄."

"팔자려니 생각하고 이제 모른척 하기는 힘들테니까 그냥 이대로 일년만 참고

열심히 공부하자."

"못참으면 어떡하지?"

"그럼 죽어 새꺄."

"너네 과수원 가서 목 메달까?"

철민이는 고삼이 되었다. 동엽이는 고삼이 된 철민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고 삼 생활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철민은 지윤과 고 1때나 고 2때처럼 자주 만

나지 못했다. 서로가 바쁜 만큼, 등,하교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그래도 일주일

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그 이상의 주기에 한 번씩 마주치는 경우가 있

었다. 그래도 철민과 지윤은 서로 어색해 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러웠다.

 

고 삼 생활은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철민의 체격은 더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학교에서 돌아 오면 철민은 항상 역기를 들거나 팔굽혀 펴기등 운동을 하

며 체격과 아울러 체력도 키워 나갔다.

 

여름 방학도 훌쩍 지나갔다. 철민과 동엽은 성적이 꾸준히 상승했다. 서울의 중

상위권 대학의 인기 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까지 되었다. 구월달이 되어 철

민은 대입에 필요한 체력장을 치루게 되었다. 거의 모두가 만점을 받는 체력장이

었지만 운동에 소질이 있던 철민은 한종목, 한 종목 두각을 나타내었다.

철민이 반이 던지기 종목을 치루게 되었다. 철민이가 던질 차례가 왔다. 철민이

는 공을 던지기 위한 원안에 들어 서기는 했으나 공을 던지는 것을 망설였다. 던

지기 담당 선생님이 머뭇거리는 철민이가 답답했는지 한 소리 했다.

"야 임마, 너 왜 안 던지는 거야?"

"아무래도 저기 백미터 달리기 하고 있는 애 들 중에 한 놈이 공에 맞을 것 같

아서요."

"뭐 임마?"

던지기는 55미터 이상을 던지면 만점을 받는다. 던지기를 측정하는 선은 60미터

까지만 오미터 간격으로 그어져 있었고, 던진 공을 잡는 학생들은 55미터 선과

60미터 선 사이에 서 있었다. 그 뒤로 십여 미터 뒤에 백미터 달리기를 위한 트

랙이 있었다.

"힘껏 던지면 저기 백미터 달리기 하고 있는 곳 보다 더 멀리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너 정말 거기까지 던질 수 있단 말이야?"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던져 임마."

"그럼 달리던 학생이 맞아도 전 책임이 없습니다."

"너 55미터도 안 날아 가면 나한테 맞을 줄 알아. 빨리 던져 임마."

"알았어요. 던지면 될 거 아네요."

철민은 엄숙하게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공이 참 멀리도 날아 갔다. 그리고 정

말로 백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던 한 녀석의 머리를 맞추었다. 그것도 안쪽 트랙

에서 달리던 녀석이 맞은 것이 아니라 바깥쪽 트랙에서 달리던 녀석이 맞았다.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 맞은 것처럼 공에 맞은 녀석은 놀라 어리둥절해 하며 달음

질을 멈추고 이리 저리 돌아 보았다. 담당 선생이 놀란 표정으로 멍해졌다.

"너 야구 선수냐?"

"우리 학교에는 야구 선수가 없는데요."

"너, 너..."

"왜요?"

"만점."

철민의 어깨는 여전히 강했다.

 

 



4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