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3주일(다해) 루가 13,1-9; ’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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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3-09 ㅣ No.4965

사순 제3주일(다해) 루가 13,1-9; ’22/03/20

 

 

 

세계 뉴스를 보다보면, 새삼스레 자주 듣는 소식은 사고 소식입니다. 그중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에 대한 빈번한 총기 사고와 유괴 및 각종 범죄가 종종 벌어집니다. 세상 곳곳에서 여러 가지 사고들이 생겨나지만 그 중에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행위는 참으로 피하기도 힘들고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사고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무슨 원수라도 진 관계도 아닌데 그야말로 억울하게 당해야 하기 때문에 왜 내가 당해야 하는 충격이 사고를 겪는 충격과 겹쳐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그저 죄라면 한 사회에 함께 살고 있다는 죄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이의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일반적이고도 대표적인 이유를 든다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의 불합리하고 부적절한 제도와 그에 따른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 그리고 이 사회의 역학관계 등이 나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나 개인의 행동 수준을 넘어서는 변수로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이들이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사실의 원인관계를 넘어 신앙의 신비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희생제사를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씀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카 13,2-3) 그 뿐 아니라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는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4-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고와 범죄를 별개의 행위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같은 사고를 당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을 못 받고, 또 사고를 당한 것이 내 범죄행위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안전장치를 하고 주님의 보호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장치라면 보안장치를 들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안전장치라면 우리가 기회가 될 때마다 동네와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안전장치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행위로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이 사회의 형제자매들과 우리의 시간과 재물을 나눔으로써 우리 자신이 안전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서 우리로 넘어가는 과정이고, 작은 우리에게서 큰 우리 즉 다민족 다문화 사회의 일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주님은 주인에게 소작인의 역성을 들어주는 포도원지기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8-9)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주님께서 아버지께 우리의 역성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고 주님의 말씀을 배반하면서 신앙의 문턱 앞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일으켜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께 빌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고해성사를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기 힘들어 성당에 가기 힘들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고해성사라는 제도를 통해서나마 용서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그나마 고해성사마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씻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싶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시고 인도해주시지만 그 길이 연약한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재생의 기회를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매번 마음만 먹으면 되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이, 우리에게 판공성사 때마다 아니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매일 매일 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문을 열고 기다리시는 주님 앞에 회개하여 돌아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의 고집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고해성사를 보고서도 회개하여 새 삶을 시작하지 않고 매냥 고해성사 보기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별 문제만 없으면 그냥 그렇게 거기 안주해 머물고 싶어하는 우리의 부정직한 미련도 문제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오늘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출애 3, 7)라고 하시면서 새 삶의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 인간들이 어려워하는 삶의 조건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시기에, 거듭 우리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면서, 우리를 희망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기꺼이 다가가 새롭게 살도록 합시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루카 13,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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