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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0일(7월9일)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 동정♬태양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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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7-08 ㅣ No.1262

 

축일: 7월10일(7월 9일)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 동정녀, OFM Cap. Abbess
Santa Veronica Giuliani Vergine
9 luglio 
Mercatello, Urbino, 1660 - Città di Castello, 1727
Veronica = portatrice di vittoria, dal greco

Saint Veronica Giuliani, OFM Cap. Abbess (RM)
Also known as : Ursula Giuliani,  Veronica de Julianis
Memorial : 9 July
Born : 1660 at Mercatello, Duchy of Urbino (part of modern Italy) as Ursula Giuliani
Died : 9 July 1727 at Città di Castello, Italy of natural causes
the figure of the cross was found impressed upon her heart
body incorrupt
Beatified : 17 June 1804 by Pope Pius VII
Canonized : 26 May 1839 by Pope Gregory XVI 

 

      

성녀 베로니까 율리안나(수도회축일:7월 10일)는 이탈리아 메르 카텔로에서 태어났다.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녀의 부모는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베로니카는 1677년,17세에 움브리아 지방 카스뗄로의 치따에 있는 카푸친 글라라 수녀원에 들어갔다.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Veronica entro diciassettenne nel convento delle Clarisse Cappuccine di Citta di Castello)

 

그곳은 성녀 글라라의 첫 회칙이 준수되고 있는 엄격한 수녀원이었다.

여기서 수련장으로서 봉사하면서 순명, 겸손 그리고 극기를 하면시 참다운 수도 생팔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에게는 여러 번 성흔과 가시관 자국이 새겨졌다.

 

이 일로 인하여 요즈음도 항용 있는 일이지만 교회 당국자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겸손한 순명은 이 모든 현상이 진실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1716년 생애의 말기에 자의와는 상관없이 수도원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 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베로니카는 여러가지의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비스런 체험을 "수난의 일기"라는 제명으로 책에 기록하였다.

1839년 그레그리오 16세가 시성하였다.

 


카푸친 글라라회 회원들의 개혁
이 개혁은 나폴리에서 생겨났는데, Catalonia 출신의 귀족부인, Maria Lorenza Longo에 의해 설립된
"Incurabili" 병원에서 시작 되었다.
이 병원은 프란치스칸 3회원들이 돌보는 곳이었다가 1533년 Thiene 의 성 Cajetan 이 후에 인수한 곳이었다.
1533년 그는 "성녀 글라라의 회칙을 따르는 성 프란치스코의 3회 자매들"
(sisters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under the Rule of St. Clare)의 생활양식을 인준받았다.

바오로 3세는 같은 해에 이 생활 양식을 확인해 주었다.

개혁은 이탈리아 도시들 전역으로 퍼져갔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밀라노였다.
밀라노에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가 세 개의 개혁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이 개혁운동은 후에 스페인과 멕시코, 칠레에 까지 퍼져 나갔다.

이 개혁에 있어 가장 현격한 인물은 Maria Maddalena Martinengo(+1737)와
St. Veronica Giuliani(+1727)였다.
(간추린 프란치스칸 역사 강의록 79쪽에서)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1584)축일 : 11월4일
*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 동정(+1727)축일:7월10일(7월9일)
* 복녀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넨고 동정(+1737)축일:7월27일.
 

 

 

이탈리아는 옛날부터 수많은 성인, 성녀를 냈는데,

베로니카 율리아니도 역시 1660년에 그 나라의 소도시 우르비노의 메르카텔로에서 태어난 성녀이다.

물론 양친은 명성이 높았고, 특히 그 어머니는 신심이 매우 두터운 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적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 생활을 꿈꾸었다.

 

그가 네 살때에 어머니와 작별했으나,

그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십자가를 가리키며 "어려운 때에는 저 예수께 부탁해라"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리마의 성녀 로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거울삼아 고신 극기와 기도생활을 하며 신심생활에 열중했다.

 

*리마의 성녀 로사 축일:8월23일.게시판604번,1327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4월29일.게시판1129번.1738번.

 

17세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했다.

훌륭한 가문의 청년들이 구혼했으나 그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기의 뜻에 맞는 사람과 성혼된다면 무슨 요청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단 한마디 ’저는 예수의 것입니다."였다.

이와 같은 대답에는 그의 아버지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카스텔로에 있는 클라라 수도원에 입회하고

1677년 10월 28일 착복해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베로니카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해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충실히 지켰다.

성실한 수도자에게는 시련이 더 심했다.

하느님께서는 악마에게 그녀를 시험하는 허락을 주시어, 지옥의 무리들은 갖은 수단을 다해 그녀를 유혹하며 마음을 산란케 하고 육체를 괴롭혔다.

이러한 유혹은 수년간 계속적으로 그녀를 습격했으나, 항상 인내하고 겸손하게 끊임없이 주님의 도움을 구했다.

이에 마침내 주님께서도 그 온정의 손을 베풀어 그녀를 위험한 처지에서 구하시고 가끔 발현하시어

그를 격려하시며 성모 마리아를 보내시어 그녀를 위로했다.

 

베로니카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더 깊어져 덕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시련은 더 커졌다.

그녀는 가끔 예수 수난에 대해 묵상했다.

묵상 때 가끔 예수의 가시관과 매맞으신 상처에 대한 고통을 실감했는데,

특히 1697년 성 금요일에는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도중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직접 발현하셔서

다섯 상처에서 비치는 눈부신 빛이 그녀의 수족과 늑방을 관통해 고통과 더불어 오상의 상처를 남겨 두셨다.

 

 

오상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베푸신 것과 동등한 하느님의 특은이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고통을 느껴야 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인창동성당게시판676번,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즉 이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 지방의 주교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친히 그 상처를 검사하며 네 명의 수녀로 하여금 그녀를 감시케 하고,

네 명의 독실한 신부에게 더욱 세밀한 검사를 하도록 명했다.

 

베로니카는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었다.

전에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간청함과 같이 보이는 상처를 없애 주시고 고통만을 남겨주시기를 주님께 겸손되이 간청했다.

기도가 허용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700년 4월 4일이었다.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그 상처에서 광선이 비치자 그녀의 오상은 즉시 사라지고

 붉은 점만 나타났으나 고통을 여전했다.

그녀는 이고통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참으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으로 바쳤다.

이렇게 하기를 5, 6일이 지나자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아

수련자들을 어머니처럼 애정으로 대했다. 그녀는 어떤 일이나 항상 깊은 애정과 충실성으로 일을 했다.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그녀는 겸손한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를 사양했으나,

하느님께 순명하는 마음으로 잘 받아들였다.

겸손한 그녀는 자기로서는 수도원을 개선해 나갈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꼈기에

수도원에 대한 일체를 성모의 전구하심에 일임하였다.

성모께서도 이를 기특히 여기셨음인지 항상 뚜렷한 증거로써 그녀를 도와주셨다.

수녀원은 날로 번창하고 경건한 수도원으로서 타에 비할 바 없는 훌륭한 수도원이 되어,

가끔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수녀원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기 50년, 베로니카에게도 천국을 향할 날이 왔다.

1727년 6월 6일 그녀는 갑자기 쓰러지자 재기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병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열렬한 사랑으로 성체를 모시고 7월 8일 이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순명 서원의 기도문을 외우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므로 고해 신부가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순명하는 마음으로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십시오"하자

베로니카는 그 말을 듣고 잠든 듯이 조용히 운명했다.

베로니카는 여러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2년 시복, 1839년에는 시성되었다.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글에 나타난 사랑의 불 -번역 이미경 에우제니아

출처는 The Cord V. 49 N. 4 pp188-195(1999).
저자는 Pacelli Millane,
원제는 The Fire of Love in Writings of Veronica Giuliani입니다.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글에 나타난 사랑의 불

클라라 수녀원 전통 안에서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신비가적인 기도에 관한 그녀의 경험에 관한 탁월한 글들을 남겼다.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또한 그녀는 12세기와 13세기에 걸친 수도 개혁의 시대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의 풍요함을 재발견하듯
우리는 베로니카의 신비가적 경험과
17-18세기 성녀 클라라의 영성의 귀감이 되는 다른 여성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의 주교들과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 연구 센터는
그녀의 명확한 신비가적 가르침 때문에 그녀가 교회 박사가 될 것인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녀는 신학적인 개념과 정의의 정제된 구조가 없이
그녀 자신의 하느님 체험에 관해 서술했으나 그 텍스트는 그녀의 삶에서의 활동의 진보와
하느님의 불에 관해 밝히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해 특히 강조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배경에 관하여 다루고 나서
그녀의 글 중 하나인 "사랑의 연옥"에서의 "세 가지 불"에 관한 그녀의 경험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녀가 묘사한 불은 극도로 강렬하며
빙겐의 힐데가르데의 계시에서 나타나는 불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빙겐의 성녀 힐데 가르데 축일: 9월17일.게시판136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기본적인 성녀의 생애에 관한 배경지식

우르술라(오르솔라) 줄리아니(베로니카의 세례명)은
1660년 12월 27일 이탈리아 메르카텔로에서
프란체스코와 베네데타 줄리아니 부부의 일곱번째 딸로 태어났다.

우르술라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싹텄다.
그녀가 훗날 세 살 때 경험한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과의 대화(D. I,2-5)를
그녀의 "영적 일기"에 기록하였다.
세 살에서 여섯 살 사이에 순교자들과 리마의 로사의 삶에 관하여 듣고나서
그녀는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들을 본받기를 원했다.(D. I,5: V.666)

이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깊은 개인적인 고통은
갑작스런 가족들의 죽음으로 멀지 않아 찾아왔다.
그녀가 일곱 살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녀의 언니들 중 두 명은 보다 일찍 죽었다.
임종 자리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살아있는 다섯 딸들을 불러다 놓고
딸들 각각에게 예수님의 오상 중 한 부분씩을 맡게 하였다.
우르술라는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맡았다.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에 대한 신심은 그녀의 일생을 통해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종종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우르술라는 첫 영성체 때와 어린 소녀 시절, 사랑의 불꽃을 경험하였다.

우르술라는 보다 엄격한 삶을 살기를 열망했고 움브리아 치타 카스텔로에 있는
카푸친 클라라회에 들어가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녀가 수련기에 들어간 1677년 10월 28일에 우르술라는 베로니카 수녀로 이름이 바뀌었다.
1년 뒤, 1678년 11월 1일에 그녀는 서원을 발하였다.

수도생활 중 엄격함에서 오는 혐오감을 처음 경험한 후,
베로니카는 관상을 통해 주입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예외적인 은총을 받았다.
성령강림 축일 간 어느 아침에 그녀는 자신 안에서 불타오르는 불을 느꼈지만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녀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이 타버렸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그런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강렬한 열망을 경험했고
단지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이시여, 오 사랑이시여"라고만 말할 수 있었다.(D. I,24-25)

1681년 성 토요일에 주님께서는 베로니카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주셨다.
(D. I,46-50, 122, 158; V. 752-768)

그녀 안에는 고통받고 그녀의 죄를 보속하고픈 열망이 있었다.
회개에 대한 깊은 굶주림이 있었다.
주님의 수난에 관한 그녀의 관상은 그녀의 실제적인 고통 참여에 수반되었다.
7년 후, 스물 일곱 살의 베로니카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녀원장이 되었을 때까지도 두 번이나 더 수련장으로서의 직무를 맡았다.
1694년에 베로니카는 내적인 성(Castle)의 계시와 신비적인 결혼의 은총을 받았다.(D. I,391-394)
2년 뒤, 성탄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심장에 화살로 상처를 새겨주셨고
그 상처에서는 종종 피가 흘렀다.(D. I,734-35)
1697년 4월 5일에 베로니카는 그녀의 살에 오상이 새겨지는 은총을 받았다.(D. I,97-103, 894-899; V. 796)
수녀원장은 검사성성에 이 오상에 대해 보고했고
뒤에 이은 세월에 걸쳐 베로니카는 지긋지긋한 시험과 괴로움과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50일 동안 그녀는 병실에 감금되어 있었고
17년간 공동체 내에서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으며
한동안 수련장의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고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해신부와 주교와 그녀의 공동체의 수녀들과 메르카텔로의 자매들 외에는
일체의 방문이나 서신교환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의 고해사제이자 영적 지도자인 우발도 안토니오 카펠레티는
1702년 3월부터 1708년 7월까지의 베로니카 수녀의 시련에 대해 상세하게 적고 있다.(D. V,395-659)
1703년 2월, 베로니카는 그녀의 일기 중 독립된 작은 논설(treatise)에서
1704년에 시작되어 이듬해 성령강림절에 끝난 사랑의 연옥의 첫번째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시기는 그녀의 내적 정화시기이자 예수님의 수난,
특히 십자가의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시기였다.
베로니카는 1711년에서 15년에 걸쳐 또다른 강렬한 어두움의 시기를 견디어내야만 했다.
이 기간 중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매우 두터운 어두움 속에 혼자 내버려져 있다.
이것은 실제로 나에게 내가 묻혀 있고 최소한의 도움도 없이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와중에서도 만족한다.
내 영혼 깊숙이로부터 나는 하느님의 뜻 외엔 갈망하는 것이 없기에 만족함을 느낀다.(D. III,741)

이듬해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다. 지금 나는 위로 속에서는 만나뵙지 못하지만
메마름과 포기와 적대와 고통 속에서
만나 뵈올 수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진정한 방법을 알고 누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거룩한 삶의 진정한 양식을 배우는 한 사람이 있다.
하느님 안에서 모두이자 하느님 안에서 모두 감추어진.
하느님을 사는 사람.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D. III,939-940)

어두움 속의 3년이 지난 후, 베로니카는 점차 외부적인 제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1716년에 검사성성은 피선거권에 대한 금지를 풀었고
그녀는 여전히 검사성성의 감독 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동체의 선거에서 자격권을 갖게 되었다.
즉시, 공동체는 그녀를 원장으로 선출했고 그녀는 재선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그녀가 원장으로 있는 동안, 특히 그녀의 말년 8년간 베로니카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기를 갈망했다.
그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727년 3월 25일에 그녀는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썼고
그 해 6월 6일에 몸 한쪽에 마비가 와서 한 달 후인 7월 9일에 선종했다.

영향

우리는 수녀원 도서관에 그녀가 이용할 수 있었던 책들을 통해
그녀의 삶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의 일부를 알 수 있는 행운아이다.
치타 델 카스텔로의 클라라 수녀원 도서관은
수도생활과 신비주의적인 도서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헬프타의 젤뚜르다에 관한 랑스페르주의 전기 3판과 (성녀 (대)제르투르다 축일:11월16일.게시판1472번)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축일:4월29일.게시판1738번)
마드리드의 알폰소와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 축일:10월30일.게시판1443번)
에스텔라의 디에고와   (알칼라의 성 디에고 수도자 축일:11월13일.게시판1467번)
아빌라의 데레사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축일:10월15일.게시판1420번)
십자가의 요한의         (십자가의 성요한 사제  축일:12월14일.게시판1523번)

저서들이 가장 그 공동체의 수녀들에게 많이 읽혔다.


베로니카가 잘 알고 있던 다른 영성가들은
프란치스코 드 살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축일:1월24일.게시판1584번)
파치의 마리아 막달레나,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5월25일.게시판1781번)
카푸친 회원인 캔필드의 베네딕토와 파르마의 마테오였다.
그녀는 지난 4-5세기 동안에 걸친 기간에 이르는 남성과 여성들의 저서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적, 수덕적 전통을 익힐 수 있었고 이 전통이 그녀의 저서에 반영되었다.

저서

베로니카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기록한 것은 고해신부들과 장상들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수도생활에 관한 약 2000페이지가 넘는 원고가 탄생하였다.
그녀의 저서는 일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전기적, 영적 체험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메르카텔로의 자매들과 고해사제들과 그녀의 개인적인 체험을 기록하는 것을 감독한
연이은 두 명의 주교들에게 보낸 500여통의 편지들도 남아있다.
대부분의 자서전적인 이 기록물들은 19세기 말까지도 출판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현재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일기의 원본과 그녀의 저서들의 모은 세 가지 총서들이 있다.
첫번째 총서는 피에트로 피찌카리아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레스테 피오루치과 편집했으며 세번째는 학생들을 위한 영인본이다.
아직도 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학술적인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영적 일기"의 일부가 프랑스어와 기타 언어로 번역된 반면에
영어로 옮겨진 텍스트는 거의 없다.

베로니카의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통/보속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베로니카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고통에 직면해 있었고
그 고통 중 일부는 자신 자신이 부과한 것이었다.



사랑의 연옥

그녀의 글, "Il Purgatorio d'amore"(사랑의 연옥)은
이탈리아로 쓰여진 2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이것은 베로니카의 변모된 경험의 짧은 보고서이다.

예수회원인 실베리오 제다에 따르면
이는 하나의 요약이며
"베로니카의 전체 영적 체험기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 글은 그녀의 고해신부가 이 경험에 대해 쓰라고 한 1705년 6월 11일에 작성되었다.

베로니카는 불과 빛의 풍부한 비유를 통해
"거룩한 사랑의 불"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우리는 베로니카가 묘사한 대로 세 가지의 불 사이의 차이를 논하고자 한다.

그녀는 1703년에 처음 "사랑의 연옥"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이 이전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1705년 성령강림절의 세번째 경험에 대한 그것과는 다르다.
1704년은 준비 기간인 것으로 나타난다.(D. III,72, 150, 178, 231, 234, 245)
그녀는 이 해에 종종 그녀 안에서 타오르는 불이 1시간 동안 지속되기도 하고
그러나 또 종종은 5시간씩 계속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죄에 대한 슬픔이 그녀를 압도했고
그래서 그녀는 깊이 슬픔에 잠겼으며 그녀의 마음은 계속해서 불타올랐다.
거룩한 사랑은 그녀 안에서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불꽃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불타오른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모든 죄의 찌꺼기마저 살라버리는 이 불에 대하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였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타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이 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어떤 불꽃도 눈에 뵈지 않으며 단지 타는 것이 느껴질 뿐입니다."(D. V, 804-805)
안에서 타오르는 불은 매우 강렬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이 불에 더해지고 영혼은 거룩한 뜻에 고정해서 남아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렸고
그것은 더 타오르기를 열망했습니다."(D. V,805)

베로니카는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두 가지 구조를 창안했다.
그녀는 종종 영혼의 두 부분에 대해 언급하였다.
보다 하등한 "인간적임"과 "영혼", 즉 "우리의 불사적인 존재의 빛"으로 말이다.
그녀는 "인간적임"은 그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그래서 "선함"의 적이라고 설명하였다. "

인간적임"은 불평하고 투덜거리고 고통을 겪거나 희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적임"은 감각과 인간적인 분별과 애욕에 친하다.
"인간적임"은 유혹의 시기에 내던져지거나 어두운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위로와 달콤한 휴식을 찾는다.

그래서 "사랑의 연옥"에서의 이 첫번째 불은
모든 죄와 잘못을 진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남겨두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타오르는 정화에 관한 것이다.

베로니카는 다음과 같이 생생한 표현을 하였다.
"'인간적임'이 새로운 고통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면 그것은 매우 강하게 떨어
그것이 나의 유일한 생각인양 나를 둘러싼 모든 세포도 떨게 만든다."(D.V,804)

두번째 이미지는 보다 강하다. 그녀는 그녀의 영혼을 하느님께 고정시키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그녀에게 무엇을 물으실 지 이해하기 위해 기다린다.
"영혼"은 충만하여 지상적인(세속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그녀에게 거룩한 사랑으로 불 붙여 주신다.
그녀는 자신이 불타 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불타 올랐고 나의 애와 뼈는 불에 먹히듯이 타올랐다."(D. V,806)
그래서 "인간적임"은 굴복하여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영혼"의 이미지는 보다 강해진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시며 그 빛은 더욱 강해진다.
그 빛은 너무 강력해서 "영혼"은 보다 충만히 하느님께로 인도된다.
"영혼은 거룩함을 나눔을 안다.
영혼은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느낀다."
베로니카는 이 빛이 진정한 탈혼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이 빛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비밀스러운 실패가
실은 덕성스러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D. V,806)
두 번째 불은 첫 번째만큼 지속되지 않았지만 보다 강력한 효과를 가져왔다.
영혼은 은총과 순순한 사랑으로 변모하려는 상향적 움직임에 열려 있다.
영혼은 보통 감각과 뛰어넘어
빛과 하느님의 활동 안으로 사람을 인도하며 믿음의 벌거숭이 상태로 옮겨간다.
거기엔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만이 존재한다.(D.V,808)

세 번째 불은 순간적인 섬광이고
베로니카는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불꽃이 심장에서 놓임을 경험한다.
여러 군데서 그녀는 이 경험을 묘사한 적절한 단어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순수한 사랑에 반해 행동하는 한 존재의 두 분을 결합시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애와 '인간적임'이 전적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된 것 같고
"인간적임"은 이로부터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면 어떠한 다른 고통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룩한 사랑은 영혼을 소유하고 그 영혼을 맹렬한 시련과 결합시킨다.(D. V,807)
이 시련은 거룩한 뜻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그녀를 하느님만을 갈망하도록 인도하고 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목마름 느끼게 하며
하느님 안에서 굳건하게 서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세 번째 불이다.(D. V,808)
이 거룩한 사랑이 타오르는 불은 변모 작업을 수행한다.

"사랑의 연옥"은 불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현시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글이다.
이것은 베로니카의 변모 시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녀의 모든 저작의 요약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결론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생애는 바로크 시대의 신비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의 영적 생활은 사랑의 관상과,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와 보속을 위한
고통과 희생을 위한 어마어마한 갈망의 강렬한 체험으로 이루어진 명확한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녀의 삶은 특별한 현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프란치스코처럼 베로니카도 오랫동안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고통의 신비에 대한 그녀의 접근법은 그녀의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그리스도의 오상과의 관련성은
중세 시대의 여성들에게서 나타는 단지 신심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실제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가지의 삶.-강렬한 내적 삶과 수녀원 공동체에서의 외적 삶- 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는 이 내적, 외적 여정을 통합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을 보여준다.

이 여인은 12-13세기의 비옥한 수도적 토양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신비가의 저서들과 달리
그녀의 저서들에 있어선 다른 접근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선택을 바라보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항상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 시대의 심리학적 연구의 발달을 고려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베로니카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그녀의 성덕 때문에 시복 소송이 제기되었고
1839년 5월 26일, 그녀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래서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자신의 전 생애를 하느님의 내적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알았던 여성으로서
클라라 회원들의 오랜 신비주의적 전통선상에 서 있다.

그녀는 이것을 "지상에서의 낙원(천국)"(D. I,184,210,572; IV,594; VI,177)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기 6개월 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주님,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이제껏 죄를 지은 것에 용서를 청합니다.
더 이상 저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삶과 피를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바칩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만을 따르며 다른 의지는 없습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저를 만들었고
저는 그 안에서 살고 죽을 것입니다.
죽음 뒤에, 영원토록 저는 당신의 뜻대로 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D. IV,903)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매우 실리적인 신비가,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     

 

얼마나 엄청나게 긴 일기를 썼는지!!
베로니카 쥴리아니(Giuliani)는 몸에 예수님의 오상 성흔을 받은 신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실천적인 여인이었고 동시에 저술 활동이 정말 뛰어난 일기 작가였다. 220,000장에 달하는 그녀의 '일기'를 보면 그녀 자신의 관상생활과 신비신학에 대한 출중한 통찰력이 잘 드러난다. 이 때문에 그녀가 교회 학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기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극적이고도 결렬한 체험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녀가 표명한 바, 그 글들은 '단순한 순종을 위하여 고행과 쑥스러움으로' 쓴 것이라는데, 실제로 수면 부족을 불사하고 밤이 깊도록 공들여 기나긴 글을 써 나갔다고 한다. 그 일기는 (초기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한) 5개의 특정 소책자로 이루어져 있고, 1727년 3월 5일까지 이어져 있으며, 67년간의 성녀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그 날에 성모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다!"라고 일러주셨고, 그제서야 성녀는 펜을 영영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앙생활이 독실한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우르술라
베로니카 성녀는 1660년 12월 27일, 메르카텔로 술 메타우로(Mercatello sul Metauro)에서 태어났고, 그 다음 날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쥴리아니'는 그 고장의 주둔군을 지휘하는 소위였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베네딕타 만치니(Mancini)'는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 중 두 명은 유아 때 사망했다. 쥴리아니 집안은 매일의 공동기도와 화합과 선행 실천으로 인한 독실한 신앙생활이 잘 드러난 가족이었다. 베로니카의 시성 운동 때, 한 증인은 '쥴리아니 집안에서, 그들은 성인의 전기를 매일 저녁에 낭독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어릴 적 놀이친구는 아기 예수님이었다
막내였던 우르술라는 네 명의 언니와 함께 신심이 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우르술라는 성화들 속의 아기 예수님과 대화하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서는 제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아기 예수님께서는 "너는 온전히 나의 것이며 나는 네 것이다."라고 대답하시곤 했다. 한 번은 아기 우르술라가 정원에서 꽃을 모을 때에 아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나는 너의 참된 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사라지셨다. 우르술라는 아기 예수님을 찾으려고 집과 마당을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1667년 4월 28일, 매우 경건하고 섬세하며 다정했던 우르술라의 어머니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서 우르술라는 고아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 딸들을 불러 십자고상을 가리키며 예수님의 오상에 각각 딸들을 맡겨드렸다. 우르술라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에 맡겨졌다. 그 후,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의 세무 관리사로 고용되어 '피아첸자(Piacenza)'로 이사 다녀야 했을 때에도 딸들은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생활을 했다. 훗날에 베로니카는 이 시절의 행복을 장난 가득한 어린 시절, 착한 주변 사람들과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가득찬 시절로 그려냈다. 그리고 초창기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과 수도성소에 대한 아버지의 짜증스럽고 끈질긴 반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



아버지의 맹렬한 반대를 극복하고 카푸친 글라라회에 입회하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쥴리아니는 네 명의 큰 딸들에게는 수도원 입회를 기꺼이 동의했지만,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막내딸 우르술라의 입회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영특한 우르술라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결혼시킨 뒤 늘 자신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르술라는 9살 때 벌써 카푸친 글라라회 수녀가 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딸의 확고한 의지에 결국 아버지는 한 발 물러서야 했고, 1677년 10월 28일, 17살이 채 되지 않은 우르술라는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서 수녀복을 입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르슬라는 '베로니카'라는 의미심장한 수도명을 받게 되는데,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참된 형상(vera icona)'이라는 뜻이다. 카푸친 글라라회 수련자가 된 베로니카 자매는 처음부터 망설임 없이 열정을 다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님의 충실한 모방이 되기로 결심했다.


수도원의 '막내둥이'
수도원에서 가장 어렸던 베로니카 자매는 '아기' 또는 '막내둥이'를 뜻하는 'la Bambina(라 밤비나)'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는데, 별명답게 늘 생기 넘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회 할 때부터 그녀는 특유의 천진함과 습관으로 다져진 기도생활, 한없는 열정과 진지함으로 다져져 있었는데 그로 인해 영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접해 온 성인들의 모범을 자신의 생활 전형으로 삼았고, 그 어떤 장애가 와도 수도생활의 완덕에 이르려는 결정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자매는 애초부터 영웅다운 거룩함에 이르기로 결심했고, 성인들이 앞서 걸어간 길을 (성인들의 훈련소가 되었던 이 수도원에서) 관상기도와 고행과 보속으로 굳건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녀는 성공할 초심을 잊지 않았고, 어떠한 난관이나 오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삶이란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지만, 베로니카 자매는 하느님께 이르는 그녀만의 독특한 길로 부지런히 발을 디뎌 나갔고, 놀랍고도 특별한 여러 이정표에 이르렀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따른 이정표들
1678년 11월 1일 종신서약을 하고, 1681년 4월 4일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녀의 머리에 당신 가시관을 씌워 주셨다. 1688년부터 1691년까지는 수련장의 의무를 수행했고,  1693년 12월 12일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694년부터 1698년까지 수련장의 의무를 다시 한 번 수행했고, 성 금요일이었던 1697년 4월 5일에는 오상 성흔을 받았다. (오상에 당황한 베로니카는 주님께 간청기도를 올렸고, 손과 발에서는 출혈이 멈추었다. 그때가 1700년이었다. 하지만 옆구리에서는 피가 주기적으로 죽을 때까지 흘러 내렸다.) 그녀는 1697년에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성)의 재판에서 고소를 당했고, 그로 인해 2년 후 투표권과 당선권을 박탈당했다.
이 날짜들과 사건들은 베로니카 자매의 신비스러운 내면생활의 흐름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그 신비한 현상들에 대해 그녀의 많은 동료 수녀들은 수도자다운 신뢰심과 감탄으로 반응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또 다른 수녀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베로니카는 결국 자신의 '가여운 인간성'을 폐를 끼쳤을 온갖 궁핍과 굴욕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가 남으로부터 받아야 했던 고통들과 자기 스스로 가했던 그 고통들은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사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잘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도한 극기의 단계를 넘어선 후에야 비로소 베로니카 자매 자기 자신도 그 극심한 행동을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게 했던 그 미친 짓들'로 비난하게 되었다. 1697년 오상을 받았을 때부터 이 '미친 짓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1699년에는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일, 그것을 몸소 목격하고 알게 되었던 그 고통과 고뇌'에 만족하게 되었다.


현명한 수련장
베로니카 자매는 이 교훈을 젊은 후배 자매들에게 반드시 물려주고픈 황금률 원칙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보속 행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수련자들을 지도하는 34년 동안 베로니카 자매는 수련자들에게 신비 영성에 관한 책을 읽지 못하게 했는데, 이것은 신비주의에 대한 베로니카의 조심성과 현명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몫
베로니카 자매의 천성은 마르타의 몫보다는 마리아의 몫에 더 부합하는 편이었다. (루카 10: 38-42 참조) 수도원에서의 첫 몇 년 동안에는 관상과 묵상에 몰두함으로써 완덕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켰다. 사소한 손일이나 변변치 못한 봉사들에 대한 거부감 또한 그녀의 그러한 경향에 더욱 이바지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손일은 일종의 극기였고, 때문에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것은 관상하고 고행하는 일보다 더 유익하고 이타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690년 후반에는 생각이 바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 자매는 관상이 인생의 핵심적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주 의문을 품었으며, 급기야는 관상생활과 활동생활 중에 어느 쪽이 영적으로 더 나은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선행을 하기 위해서 너는 세속에 머무를 수도 있었고 그리했으면 다른 이들에게 더 유익할 수도 있었다."라고 말 한 적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도원에 머무르면서도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되었는데,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일은 기도로써, 또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써 어디서든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방으로 물러남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체 한 가운데에 있음으로써 내가 예수님과 은둔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요구하고 계신 일은 활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같습니다." 베로니카 자매는 하느님을 찾고 흠숭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 101가지 관심사들 중에서 그분을 진심으로 찾아뵙는 실제적인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도 죽을 때까지 그 실제적인 경험 법칙을 따랐고, 동료 자매들에게도 확신 있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수도원의 시설을 확장시켰던 원장수녀님
1716년 3월 7일, 감사성성은 베로니카 자매에게 취했던 징계 조치를 취소했다. 베로니카 자매는 당선권과 투표권을 다시 가지게 되었고 수도원 내의 선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주 후에 자매들은 베로니카 자매를 수도원장으로 선출했고, 그녀는 '어머니 아빠티사'가 되었다. 베로니카 어머니는 죽었을 때까지 이 의무를 이행했다. '아빠티사'로 지낸 14년간의 기간은 하느님의 복을 가득 받은 해였고, 기적의 빛들로 휩싸였던 때였다. 순교자적인 사랑의 고통(옆구리 성흔)으로 매우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낸 거룩한 신비가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이었던 성녀인 베로니카 자매는 이 시기에 좁은 수도원을 확장시키고 상당히 번거러운 상수도 시설을 개선시키게 되었다.
 

사랑이신 분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다!
1727년 6월 6일, 그 고통은 더욱 격심해졌다. 30일 동안 베로니카 자매는 몸과 마음과 영의 세단계의 연옥을 통과해야 했다. 시성자료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그 때에 그녀는 수련자들과 젊은 자매들을 병상으로 불러 말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내 고통의 원인이십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런 다음 말씀의 육화를 찬미하는 성가를 들려주라고 부탁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성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여러분들 중에 이 사랑에 울지 않을 사람은 누구신가요?"라며 외쳤다. 1727년 7월 9일 새벽, 치타 디 카스텔라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 아빠티사인 베로니카 쥴리아니 어머니는 고해사제에게 마지막 순종을 보인 뒤, 고요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 어머니에 그 딸!
5개월 후, 성덕에 대한 베로니카 자매의 명성 때문에 교구장이었던 '알렉산델 피란치스코 코데보(Codebò)' 주교는 교구 내 시성운동을 착수했다. 그리하여 1804년에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35년 후 1839년 5월 25일, 그레고리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치타 디 카스텔로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는 성녀 베로니카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있다. 놀랍게도 성녀 베로니카의 직계 후계자 아빠티사였던 플로리다 '체르볼리(Cervoli)' 자매도 영웅적으로 거룩한 생활로 인해 시성을 기다리는 복녀가 되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모전여전(母傳女傳)인 샘이다.   *복녀 플로리다 '체르볼리(Cervoli)'  축일: 6월12일.




"저의 하느님, 죄인들의 구원 외에는 당신께 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 모든 죄인들을, 그들을 모두 다 당신께 되돌아가게 하소서. 당신과 죄인들 사이에 중제자로 저를 세워주소서. 온갖 고뇌가 와도 될 것이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것이니이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극복하셨고, 사랑이신 분 당신 자신께서 극복되어 계시나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분께서 자체 안에 계심을 형언할 수 없는 양식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에 대한 베네딕토 16세의 교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중세 사람이 아닌 신비가를 한 사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바로 카푸친 글라라회의 승녀,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Giuliani)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12월 27일이 그 성인의 탄생 35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가장 오래 동안 거주하셨고 선종하셨던 곳인 '치타 디 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그녀의 출생지인 '메르카델로(Mercatello)'와 '우르비노(Urbino)'의 교구는 이 행사를 기쁘게 경축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로니카는 1660년 12월 27일, '메타우로(Metauro)' 계곡에 위치한 '메르카텔로'에서 '프란체스코 쥴리아니(Francesco Giuliani)'와 '베네데타 만치니(Benedetta Mancini)'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녀는 7자매 중에 막내딸이었는데 베로니카 외에도 이들 중 3명은 수도승의 생활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녀에게 '오르솔라(Orsola, 즉 우르술라)'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녀가 만 7세였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파르마(Parma)'의 공국의 세관 감독으로 '피아첸자(Piacenza)'로 이동되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우르술라는 자기 생활을 그리스도께 봉헌하고픈 갈망이 자신 안에서 점차 늘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그녀를 늘 더욱 더 재촉했고, 만 17세가 되자 그녀는 '치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의 엄격한 봉쇄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생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참된 형상(vera icona)'이란 뜻인 '베로니카(Veronica)'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사실상 이 성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이 되었습니다.

1년 후, 베로니카는 성대 수도서약을 하였습니다. 많은 보속과 커다란 고통, 가시관 씀과 신비적 혼인, '심상(心傷)'과 오상과 같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련된 신비적 체험들을 통하여 베로니카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시작되었습니다.
 

1716년, 만 56세 때에 그녀는 수녀원의 '아빠티사(Abbatissa - 원장수녀)'가 되었는데, 1727년의 선종 때까지 그 직무에 있어서 거듭 추인되셨습니다. 선종 이전 33일 동안, 성녀는 매우 고통스러운 괴로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은 결국 심오한 기쁨이 되어 임종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내 고통의 원인이십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알려주세요!" (Summarium Beatificationis, 115-120)

7월 9일,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 성녀는 지상의 주거지를 떠났습니다. 만 67세였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67년 중에서 50년이나 '치타 디 카스텔로'의 수도원에서 보냈습니다. 1839년 5월 26일, 그녀는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베로니카 쥴리아니는 편지, 자서전의 기록, 시 등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성녀의 사상을 재건하는 주된 자료는 1693년에 시작했던 '일기'라는 작품입니다. 손으로 쓴 22,000쪽에 달하는 이 글에는 봉쇄구역 속 39년간의 생활이 담겨져 있습니다.
 

글은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이어져 흐릅니다. 글 위에 줄을 긋는 것이나 수정된 글은 아무것도 없고, 구두점들도 없으며, 예정된 계획에 따른 어떠한 장이나 부의 나뉨도 없습니다. 베로니카는 문학 작품을 쓰기를 의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안토니오 에우스타키(Antonio Eustachi)의 교구장 주교의 동의를 얻은, '오라토리오회(Filippini)'의 수도자인 지롤라모 바스티아넬리(Girolamo Bastianelli) 신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서면화 할 의무였던 것입니다.
 

성녀 베로니카는 두드러지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이자 '신부(新婦)'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로니카는 언제나 몰두되어 열렬한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충실하시고 진정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녀는 모든 것을 '사랑의 열쇠'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그녀를 깊은 평정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또 그분께 피조물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는 그 기쁨으로, 그리스도와 일치 된 채로 그 모든 것을 살았습니다.
 

베로니카와 일치되어 계셨던 그 그리스도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성부께 몸을 바치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기도와 봉헌의 두 갈래의 유형 안에서, 교회에 대한 그녀의 열정적이고 고통 받는 사랑도 바로 이 체험으로부터 우러러 나왔던 것입니다. 성녀는 이 관점에서 살았습니다. 즉 당신 자신 모두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기도하고 고통 받으며 '거룩한 가난'을 무소유나 자기 상실로서 추구한 것입니다. (cf. ibid., III, 523)
 

저서의 매 페이지에서 베로니카는 온갖 고통 안에서 스스로를 봉헌함으로써, 자신의 중재기도들을 강화하여 누군가를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온 세상'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느끼며 살아가면서, 모든 '거룩한 교회의 요구들'을 기꺼이 드넓게 수용한 것입니다. (ibid., III-IV, passim)
 

베로니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오! 죄인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에 다가가십시오. 그분의 지극히 보배로운 피로 깨끗해지십시오. 그분께서는 두 팔 벌려 여러분을 안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Ibid., II, 16-17) 불타오르는 사랑에 고무된 채, 그녀는 수도원의 자매들을 돌보아주었고 이해해주었으며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녀는 교황과 주교와 사제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포함한 궁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와 희생을 바쳤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설교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는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의 고통으로, 즉 십자가가에 못 박힌 생활의 원칙으로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Ibid., IV, 877) 우리의 성녀는 이 사명을 사람과 하느님, 죄인들과 그리스도 사이의 '한 가운데에 있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로니카는 '기쁨으로 고통 받는 것'이 '사랑의 열쇠'임을 확신하여 예수님의 고통 받는 사랑에 깊이 동참하여 살았습니다. (cf. ibid., I, 299.417; III, 330.303.871;IV, 192). 성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만으로 고통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기를 거슬러 교회의 시대 안에서, 탄탄하고 한결같은 믿음 때문에 그분의 충실한 종들이 견뎌야 할 바로 그 고통들 때문에도 고통을 받으신다고 증언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분께 뽑힌 이들, 그분께 가장 귀중한 영혼들, 즉 그분의 피와 그분의 모든 고통에서 이익을 얻을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 모두를 보고 느끼게 하셨습니다." (ibid., II, 170)라고 그녀는 기록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세서 1:24)
 

베로니카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던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곧바로 나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상처들로부터 빛나는 광선 다섯 개를 보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다 나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광선들이 작은 불혀들처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불혀에는 못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불혀에는 마치 황금처럼 새하얗고 시뻘겋게 달궈진 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내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못들이 내 손과 발을 뚫었습니다. 나는 크나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안에서 나는 내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변모되어 있음을 보았고 느꼈습니다.” (일기, I, 897).
 

성녀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영원한 복을 기다리면서, 그 '복된 (천상)고향'의 모든 성인 성녀께 자기 봉헌의 이 지상 여정에 와서 도와주길 간청하였습니다. 그 영원한 복에 이르는 것은 그녀 인생의 끊임없는 열망이었습니다. (cf. ibid., II, 909; V, 246)

각 개인상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 그 당시의 설교와 관련하여, 베로니카는 하늘나라를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와의 친교 의식으로서 강한 '결속 의식'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를 위해서 살고 기도하며 고통을 받습니다. 끝에서 두 번째의 것들, 지상의 것들은 비록 프란치스칸 식으로는 하느님의 선물로 고맙게 여겨지긴 했지만, 항상 비교되어져, 항상 하느님께 대한 '맛'에는 완전히 부차적이며 근본적 가난의 표시 아래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Communion Sanctorum(성인들의 통공)에서 성녀는 몸소 자기 자신을 교회에 내주는 그 일을 순례하는 교회와 천상 교회 간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성인 성녀들은 예수님의 공로와 수난을 통하여 저 위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해 오신 그 모든 일에 협조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온전히 바로잡히어 규제된 것이었습니다." (ibid., III, 203)
 

베로니카의 글에서 우리는 수많은 성경 인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인용들은 가끔 간접적이긴 하지만 항상 정확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길러준 성경 본문에 익숙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베로니카의 신비적 체험의 그 강렬한 순간들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 특별한 자리를 잡고 있는 전례 안에서 거행되는 구원의 사건들과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경은 베로니카의 체험을 비추고 정화시키고 확인해주어 그 체험이 교회의 것이 되게 해줍니다. 반면에, 예사롭지 않은 강렬함으로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그녀의 체험은 더욱 더 말씀 그 자체의 심오하고 영적인 독서에로 이끌어주고, 그 속에 감쳐진 깊이에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성녀는 거룩한 성경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그 말씀은 성녀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성녀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표현을 자주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로마서 8:31; cf. 일기, I, 714; II, 116.1021; III, 48).
 

바오로 사도의 이 성구에 대한 소화, 즉 그녀의 크나큰 신뢰심과 심오한 기쁨은 성녀의 인격 안에서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영혼은 하느님의 뜻에 연결되어 있으니, 나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에 고정되고 확고해졌습니다. 내 보기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나는 결코 다시 분리되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음의 이 말씀들에 대해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아무것도 나를 하느님의 뜻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걱정도 슬픔도 노고도 멸시도 유혹도 피조물들도 악령들도 어두움도 죽음도, 왜냐하면 죽으나 사나 나는 그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 그 전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일기, IV, 272) 이리하여, 우리에게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확고해져 있으므로 진실로 영원한 생명 안에도 확고해져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베로니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끌고 자신을 만연케 하며 불타오르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그 아름다움과 힘에 대한 용감한 증인임을 보여줍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의 오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이신 사랑'이신 그분께서 성녀에 육신에도 '깊이 새겨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나의 신부여, 내 은총 바깥에 있는 그 사람들을 위해 네가 해주는 보속행위들은 나에게 귀중한 것이다.'라고 속삭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두 팔에 있은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내가 경험했던 것을 나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영원토록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옆구리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졌습니다." (ibid., I, 37)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포옹 안에 있음, 그리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이것 또한 성녀의 영적 여정, 성녀의 내적인 삶의 심상인 것입니다.
 

또한, 베로니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성모님께로부터 직접 들어 일기에 기록한 다음의 말로 입증됩니다. "너를 내 가슴에 쉴 수 있게 해 주겠다. 너는 내 영혼과 일치되어 있으니, 하느님께 비상하듯 이르게 되었다." (IV, 901)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는 우리를 초대하여 그리스도교 생활을 주님의 뜻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의 일치에 온전하고 완전한 신뢰심으로 우리 자신들을 맡겨드려, 타인들을 위하여 살아감으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일치를 발전시키도록 해줍니다.
 

그녀는 모든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고통스러운 사랑 안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지상여정의 목적지인 하늘을 향해 고정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많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 삶의 방향을 잡아주고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매일 우리 자신을 기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열정적인 신비적 체험에 대한 요약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사랑께서는 당신 자신이 발견 되는 것을 하락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태양의 찬가

 

 

 

 

 

 

 
Santa Veronica Giuliani Vergine
9 luglio 
Mercatello, Urbino, 1660 - Città di Castello, 1727

 

Veronica Giuliani, al secolo Orsola, è una delle più grandi mistiche della storia. Ebbe numerose rivelazioni e ricevette le Stimmate. Nata a Mercatello sul Metauro, presso Urbino, nel 1660, visse cinquant'anni nel monastero delle Clarisse di Città di Castello. Entratavi 17enne, vi morì nel 1727, dopo essere stata cuoca, infermiera, maestra delle novizie e badessa. All'autopsia risultò che il cuore era trafitto da parte a parte. Dopo aver ricevuto le piaghe della Passione di Cristo, infatti - rivela nel diario spirituale - «piansi molto e con tutto il mio cuore pregai il Signore di volerle nascondere agli occhi di tutti». Nulla sapremmo delle esperienze di Veronica, se il direttore spirituale non le avesse ordinato di trascriverle. Lo fece per 30 anni e il risultato è il «Tesoro nascosto», pubblicato in 10 volumi dal 1825 al 1928. Morì nel Venerdì Santo, dopo 33 giorni di malattia. È santa dal 1839. (Avvenire)

Etimologia: Veronica = portatrice di vittoria, dal greco
Emblema: Giglio

Martirologio Romano: A Città di Castello in Umbria, santa Veronica Giuliani, badessa dell’Ordine delle Clarisse Cappuccine, che, ricca di carismi spirituali, corrispose nel corpo e nell’anima alla passione di Cristo e fu per questo posta sotto custodia per cinquanta giorni, offrendo un mirabile modello di pazienza e di obbedie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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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a straordinaria mistica è nata il 27-12-1660 a Mercatello sul Metauro, nella diocesi di Urbania (Pesaro), dal capitano Francesco e da Benedetta Mancini. La sua vita fu un susseguirsi di meraviglie. Battezzata con il nome di Orsola, a soli cinque mesi prese a camminare da sola per recarsi a venerare un quadro raffigurante la SS. Trinità. Non aveva ancora sette mesi quando ammonì un negoziante poco onesto: "Fate la giustizia, che Dio vi vede". A due o tre anni cominciò a godere delle frequenti visioni di Gesù e Maria, che le sorridevano e rispondevano dalle immagini appese alle pareti di casa mentre ella esclamava: "Gesù bello! Gesù caro! Io ti voglio tanto bene". Durante la Messa, al momento dell'elevazione, nell'ostia vedeva quasi sempre Gesù che l'invitava a sé. "Oh, bello!... Oh, bello!..." gridava la piccina, e si slanciava verso l'altare. Quando il sacerdote portò il viatico a sua madre, Orsola vide l'ostia sfolgorante di luce. A mani giunte supplicò: "Date anche a me Gesù".
Appena la morente si comunicò, le si pose accanto, sul letto, esclamando:
"Oh, che cosa bella avete voi avuto, mamma! Oh, che odore di Gesù!". Prima di morire la pia genitrice chiamò le sue cinque figlie attorno a sé e a ciascuna assegnò una piaga del crocifisso come rifugio e oggetto particolare di devozione. Ad Orsola, di sei anni, toccò quella del S. Cuore.
Nella fanciullezza, sentendo leggere la vita dei martiri, la santa concepì grande desiderio di patire per amore di Gesù. Una volta mise di proposito una manina nel fuoco di uno scaldino e se la scottò tutta senza versare lacrime. Si disciplinava con una grossa corda; camminava sulle ginocchia; disegnava croci in terra con la lingua; stava lungamente a braccia aperte in forma di croce; si pungeva con gli spini; si costruiva croci sproporzionate alle sue spalle, bramosa di fare tutto quello che aveva fatto il Signore il quale, nella settimana santa, le si faceva vedere coperto di piaghe.
Per amor di Dio, Orsola aveva compassione dei poverelli ai quali donava generosamente quello di cui disponeva. Scriverà più tardi: "Mi pareva di vedere nostro Signore, quando vedevo essi". Col passare degli anni crebbe in lei sempre più la brama di fare la prima Comunione. Supplicava Maria SS.: "Datemi cotesto vostro Figlio nel cuore!... io sento che non posso stare senza di Lui!" Fu soddisfatta il 2-2-1670 a Piacenza, dove suo padre si era trasferito in qualità di Sopraintendente alle Finanze presso la corte del Duca Ranunzio II. Gesù allora le disse: "Pensa a me solo! Tu sarai la mia sposa diletta!". Ma come lasciare il mondo se la sua bellezza le attirava le più vive simpatie di giovani distinti? Al babbo che l'adorava un giorno disse: "Come posso ubbidirvi, se il Signore mi vuole sua sposa?... Anch'Egli è mio padre, e Padre supremo. Non solo gli debbo ubbidire io, ma ancor voi".
Dopo aver mutato il nome di Orsola in Veronica, il 17-7-1677 riuscì a entrare, diciassettenne, nel monastero delle Cappuccine di Città di Castello (Perugia). E impossibile descrivere il cumulo di grazie, doni, privilegi, visioni, estasi, carismi singolari che Dio elargì incessantemente alla sua "diletta". I fenomeni mistici che in lei si verificarono furono controllati a lungo e severamente dalle autorità competenti. Dal 1695 al 27-2-1727, nonostante la grandissima ripugnanza che provava, la santa scrisse, senza rileggerle, in un Diario le fasi e le esperienze della sua vita interiore per obbedienza al vescovo, Mons. Eustachi, e al confessore del monastero, il P. Ubaldo Antonio Cappelletti, filippino. Riempì 21.000 pagine raccolte in 44 volumi, pubblicati dal 1895 al 1928 dal P. Luigi Pizzicarla SJ., con versioni in francese e spagnolo.
Dopo che Gesù elevò Suor Veronica al suo mistico sposalizio, fu soddisfatta nella sua ardente brama di patire per Lui. In modo misterioso, ma reale e visibile, sperimentò a uno a uno tutti i martiri e gli oltraggi della sua Passione. Di continuo esclamava: "Le croci e i patimenti son gioie e son contenti". Giunse a dire: "Né patire, né morire, per più patire". Accoratamente diceva a Gesù: "Sitio! Sitio! Ho sete non di consolazioni, ma di amaritudine e di patimenti". Si può dire che fin dall'infanzia pregasse: "Sposo mio, mio caro bene, crocifiggetemi con Voi! Fatemi sentire le pene e i dolori dei vostri santi piedi e delle vostre sante mani... Più non tardate! Passate da parte a parte questo mio cuore".
Nel 1694 divenne maestra delle novizie e ricevette nel capo l'impressione delle spine. Dopo tre anni di digiuno a pane e acqua, il venerdì santo del 1697 le apparvero le stimmate e nel cuore ebbe impressi gli strumenti della Passione. "In un istante, scrisse la santa, vidi uscire dalle sue santissime piaghe cinque raggi splendenti; tutti vennero alla mia volta; e io vedevo i detti raggi divenire come piccole fiamme. In quattro vi erano i chiodi e in uno la lancia d'oro, ma tutta infuocata, e mi passò il cuore da banda a banda, e i chiodi passarono le mani e i piedi". Per questo soffriva talmente, anche in modo visibile agli altri, che veniva chiamata la "sposa del crocifisso".
Il vescovo di Città di Castello, al corrente dei fenomeni soprannaturali che avvenivano in Suor Veronica, dopo un rapporto al S. Ufficio, ricevette istruzioni che applicò con la più grande severità. Accompagnato da sacerdoti sperimentati, si recò nel monastero e si convinse della realtà delle stimmate. Alcuni medici ne curarono le ferite per sei mesi. Dopo ogni medicazione le mettevano guanti alle mani muniti di sigilli. Ma le ferite, invece di guarire, s'ingrandivano di più. La badessa ricevette dal vescovo ordini destinati a provare la pazienza, l'umiltà e l'obbedienza della santa nella maniera più sensibile. Le fu tolto l'ufficio di maestra delle novizie; fu dichiarata scaduta dal diritto di voto attivo e passivo; le fu proibita ogni relazione con le altre suore; colpita da interdetto non fu più ammessa all'ufficio in coro né alla santa Messa; fu privata persino della Comunione e per cinquanta giorni fu chiusa in una cella simile ad una prigione. Insomma, di proposito, fu trattata come una folle, una simulatrice e una bugiarda. Il Vescovo al S. Ufficio non poté fare altro che scrivere: "Veronica obbedisce ai miei ordini nella maniera più esatta e non mostra, riguardo a questi duri trattamenti, il più leggero segno di tristezza, ma al contrario, una tranquillità indescrivibile e un umore gioioso".
A queste sofferenze univa di continuo indicibili penitenze, accesissime preghiere per la conversione dei peccatori. "M'ha costituita mediatrice fra Lui e i peccatori. Questo è il primo offizio che Iddio mi ha dato" scriveva. Continui suffragi offriva alle anime dei defunti. Confidò nel Diario: "Mi ha promesso Iddio la grazia di liberare quante anime voglio dal Purgatorio". Aveva continuamente presenti al suo spirito pure i bisogni di tutta la Chiesa e specialmente dei sacerdoti.
Sottomessa sempre in vita ai superiori, la santa volle morire il 9-7-1727, dopo 33 giorni di malattia, appena il confessore, il P. Guelfi, le disse: "Suor Veronica, se è volontà di Dio che l'ordine del suo ministro intervenga in quest'ora suprema, vi comando di rendere lo spirito". Quando morì era badessa da undici anni. Nel suo cuore verginale furono trovati scolpiti gli emblemi della passione così come li aveva descritti e persino disegnati per ordine del confessore. Il suo corpo è venerato sotto l'altare maggiore della chiesa delle Cappuccine in Città di Castello. Pio VII la beatificò il 18-6-1804 e Gregorio XVI la canonizzò il 26-5-1839.

Autore: Guido Pettinat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11-02-19
 

 

 

Saint Veronica GiulianiJan 122009 
Also known as
Ursula Giuliani
Veronica de Julianis

Memorial
9 July
 

Profile
Born wealthy, the daughter of Francesco Giuliana and Benedetta Mancini. In her youth, Ursula developed a deep spirituality and desired nothing more than to dedicate her life to God. She received visions as a child, and her first words were reported to be “Do justice, God sees you,” said to a crooked merchant. Ursula’s father presented suitors in hopes that she would marry her; the girl became ill at the idea of not devoting her life to God, and she finally received her father‘s blessing on her call to religious life.

She joined the Poor Clares in Città di Castello, Umbria, Italy, on 17 July 1677 at age 17, receiving the veil on 28 October and taking the name Veronica. In 1693 she received visions that indicated that the Passion would be re-enacted in her own soul; in 1694 she received the first sign of the stigmata, in her case the visible wounds of the crown of thorns; on Good Friday in 1697 she received the wounds on her hands, feet and side. She submitted to medical treatment and many examinations, never trying to prove the stigmata was real, just suffering through the wounds, the exams and the scorn of her peers.

Veronica served as novice mistress for over thirty years; she refused to let them read any related to visions or mysticism, insisting that they become practical brides of Christ. Chosen abbess of her house in 1716, and served for more than a decade. Her 10-volume Diary of the Passion catalogues her religious experiences.
 

Born
1660 at Mercatello, Duchy of Urbino (part of modern Italy) as Ursula Giuliani


Died
9 July 1727 at Città di Castello, Italy of natural causes
the figure of the cross was found impressed upon her heart
body incorrupt


Beatified
17 June 1804 by Pope Pius VII


Canonized
26 May 1839 by Pope Gregory XVI


Representation
crowned with thorns and embracing the Cross
holding a heart marked with a cross


Images
Gallery of images of Saint Veronica

Additional Information
Catholic Encyclopedia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Wikipedia

MLA Citation
“Saint Veronica Giuliani”. Saints.SQPN.com. 9 August 2010. Web. {today’s date}.


 

 

VERONICA GIULIANI
CAPUCHINESS
Ursula Giuliani was born of gentle folk of Mercatello in Urbino in 1660. When Ursula was four her mother took ill and on her death bed she consigned each of her children to one of the Sacred wounds of Christ crucified. Veronica received Jesus's side pierced with a lance. Around this age Ursula had a very irritable temperament, inclining to be very cranky and dictatorial.

Ursula experienced at the age of seven her first mystical experience. "I remember that at the age of seven or eight years, Jesus appeared to me on two different occasions in Holy Week". It was from this time that Ursula practiced mortification freely and was attacked on many occasions by the Devil.

It was on July 17, 1677 that Ursula was admitted as a Capuchiness postulant. On October 28 she received the habit and the name Veronica. During her religious life she was frequently plagued by Satan. He pushed her down stairs, appeared as her Novice Mistress, and beat her severely. To this Jesus showed his peculiar favour by appearing to her in many forms and many times. At times she would fall to the ground, so wrapped up was she in mystical contemplation.

Veronica held most offices in the Monastery during her life. She was Novice Mistress for twenty two years. In 1716 she was appointed Abbess and remained so until her death. During her time as Abbess, Veronica proved herself in practical matters by building new dormitories on the Monastery and installing an elaborate water piping system.

The last thirty five years of her life were those years when she became totally immersed in Christ. God willed that she undergo terrible aridity. Satan coupled to this, binding her in chains striking her and appearing as savage animals in her cell. It was at this time that Jesus transferred his crown of thorns to her head. This was to be completed later by the transfer of all His wounds.

Veronica underwent continuous scrutiny from doctors and examiners which added more to her constant agony. It was on July 9th 1727 that Veronica passed away. To her vow of obedience she was so devoted that she required a ministerial permission to die. Her death was directly or indirectly due to the stroke which she suffered on June 6th. She was Canonised on May 26th, 1839 and her feast is celebrated on July 9th.

 

 
 

 

Veronica Giuliani, OFM Cap. Abbess (RM)
Born in Mercatello, Urbino, Italy, 1660; died at Città di Castello, Umbria, July 9, 1727; beatified in 1804; canonized in 1839.
Saint Veronica Giuliani was canonized for her piety but she is more often remembered for the marvels surrounding her life. She was born Ursula Giuliana, the daughter of a family of wealth and breeding.

Ursula was devout from a very early age. By the time she was six, she was giving her food and clothing to the poor. By age 11, she was pursuing a devotion to the Lord's Passion. Also early in life she was intolerant of those who were not as devoted as she, but this tendency was tempered by a vision.

She took great enjoyment in the increased station her father's promotion to public office at Piacenza brought, and she reproached herself for it in later years. She decided to become a nun after experiencing a vision of the Virgin Mary, but her father opposed her plan. He insisted on introducing her to eligible suitors, which caused her to become ill from anxiety. In 1677, her father finally gave in and allowed her to become a nun at the Capuchin convent of Città di Castello in Umbria, where she took the name Veronica.

Her novitiate was difficult. She became more intense in her devotion to the Passion of Christ and experienced a vision of Him bearing the cross. At this time, she began to experience a feeling of pain over her heart. In 1693, she had another vision in which the chalice of Christ's sufferings was offered to her. On Easter 1694 she was espoused to Jesus in a vision and the imprint of the Crown of Thorns appeared on her head.

Three years later she saw Blessed Virgin Mary say to Jesus, 'let thy bride be crucified with thee.' Then at age 37, she received the stigmata in hands, feet, and side during a long period of ecstasy on April 5, 1697. Medical treatment was given, but the wounds did not heal. Her journal records experience.

In her journal she tells of the rays of light that came from Jesus' wounds and became small flames of fire, four in the form of great pointed nails, the fifth a spear-head of gleaming gold. She writes, "I felt a fearful agony of pain, but with the pain I clearly saw and was conscious that I was wholly transformed into God. When I had been thus wounded, in my heart, in my hands and feet, the rays of light gleaming with a new radiance shot back to the Crucifix, and illuminated the gashed side, the hands and feet of Him who was hanging there. Thus My Lord and My God espoused me, and gave me in charge to His Most Holy Mother for ever and ever, and bade my Guardian Angel watch over me, for He was jealous of His honor, and then thus He spoke to me: 'I am Thine, I give Myself wholly unto thee. Ask whatsoever thou wilt, it shall be granted thee.' I made reply: 'Beloved, only one thing I ask, never to be separated from Thee.' And then in a twinkling all vanished away."

Roused, she found the wounds aching and blood and water pouring from her side. She did not want the wounds to be seen, but they were visible until 1700, because Jesus promised her that the marks would only last three years. Thereafter, only her side bled.

Shortly after they first appeared, her wounds were examined by the bishop of Città di Castello, who devised a special, fraud excluding regimen for her. The wounds were bandaged, and the dressings fastened shut with the bishop's seal; she was separated from the other sisters and watched carefully. The wounds remained. During her ecstasies she emitted a sweet odor of sanctity and she levitated. The local bishop was impressed by her obedience and humility throughout and was convinced that the phenomenon was genuine. A favorable report was given to the Holy Office and Veronica was permitted to resume normal community life.

Veronica was the novice mistress for 34 years, forbidding the novices to read books of advanced mysticism. Instead, she insisted on the fundamental virtues fostered by reading Rodriguez's Christian and religious perfection. She was elected abbess in 1716 and served in that capacity for the last 11 years of her life. Not only did the spiritual life of the community improve during her abbacy, but also their physical comfort for Veronica was a practical woman. She installed piped water into the convent and expanded and enlarged its buildings.

She died of apoplexy. She had told her confessor that the instruments of the Lord's Passion were imprinted on her heart, and she drew their positioning for him more than once as she said they changed location over the years. Her heart was examined after death and "miraculously" showed images of a cross, crown of thorns, and chalice, as she had said it would. Examination also revealed a curvature of the right shoulder as if she had carried a heavy cross. (Imagination of the doctors?)

An autobiographical account (10 volumes) she had written at the command of her confessor was used in the process of her beatification and has been published since her canonization. Her mystical experiences were accurately authenticated by eyewitnesses. Through she was in a state of almost continuous ecstacy, she was in no way visionary, but a most practical and level-headed religious. Levitations and stigmata, which ceased bleeding at a word of command, reveal Veronica as one of the best documented examples of how prolonged and intense consideration of Christ's Passion can have an extraordinary effect in the faithful.

She is portrayed in art holding a heart marked with a cross (Attwater, Benedictines, Delaney, Encyclopedia, Farmer, Harrison,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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