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성당 게시판

[청년] 광화문 네거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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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정 [ljkjustina] 쪽지 캡슐

1999-12-31 ㅣ No.2178

광화문 네거리 하면 떠오르는 추억(?) 한가지...

고1때 였는데, 날씨가 화창한 봄의 어느 주말 오후였다.

몇몇 친구들과 시험도 끝나고 해서, 지금은 서울시의회 건물로 쓰이고 있지만, 당시에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이었던 곳에서 공연하고 있던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러 가기로 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덕수궁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보이는 건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우리는 그날 그 공연을 볼 수 없었다.

 

87년 봄은 최루탄이 가시지 않았던 계절이었다. 명동 성당과 붙어있던 계성여고의 학생이었던 나는 매일 등하교길에서 전경 아저씨들의 호위를 받아야 했고, 단축 수업은 예사였다. 어느날 명동 성당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하나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지게 되면서 시위는 더 거세졌다. 그가 바로 이한열이었는데, 철없는 우리가 뮤지컬을 보러가겠다고 한 그날이 바로 이한열의 장례를 치르는 날이었던 것이다.

 

난 그날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넓고 큰 거리에 빈틈없이 꽉 차서 소리를 지르는 광경을 본적이 없었다. 광화문 앞에서 덕수궁 앞 시청까지... 차량은 당연히 통제되었고 시위 군중들은 모두 격양되어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세종문화회관 별관의 닫혀진 문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고, 어느 흥분한 넥타이 부대 중 한 사람은 너희들도 참여하라며 우리를 다그쳤다.

그러나, 우리 눈엔 시위대를 위협하며 조여오는 무서운 전경 부대, 그리고 그 악명높았던 청카바 청바지(웬 황교백?!)에 헬멧을 뒤집어 쓴 백골단이 들어왔다. 그리고 일순간 파파파팍 터져대는 최루탄, 그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옆에 떨어져 무시무시한 연기를 뿜어대며 우리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줄을 맞춰 뛰어 오는 전경들과 백골단... 그 많던 시위 군중들은 골목골목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우리는 너무 무서웠다. 촌스러운 치마에 배낭을 매고 멍하니 서있는 어린 우리를 잡아가기야 할까 싶지만, 그때엔 그저 우리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친구들 중 유난히도 몸집이 작았던 B모양은 문을 닫아거는 어느 사무실의 철창 사이로 혼자 살겠다고 쑤시고 들어가버렸고, 지금은 결혼해서 쌍둥이 엄마가 된 H모양은 옆에서 울면서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울 따름이다.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던 나와 K모양은 그저 눈물 콧물 흘려대며 허둥대고 있었는데, 우리의 구세주 등장! 최루탄에 역시나 눈물 콧물 흘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 대학생이 우리에게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며 자기를 따라 오라며 우리를 앞세워 뛰기 시작했다. 그 대학생은 어느 대학의 학보 기자였는데, 수동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틈틈이 사진을 찍어대기도 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따라 열심히 뛰고 걸어 샛길과 골목길을 돌아돌아 덕수궁 저 뒤편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앉아 쉴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최루탄 내음에 켁켁거리면서 우리에게 오늘 같은 날에 너희들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하면서도 열심히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눈을 빛내면서... 우리는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고, 잠시 쉰 후에, 그 사람은 자신은 다시 가 봐야 한다면서 우리더러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는지 길을 일러주며 떠나갔다. 지금 그 대학생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여전히 산발적으로 시위대들이 깃발을 들고 뛰고 그 뒤를 백골단이 쫓고 하는 그런 종로 거리를 지나 우리는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내가 대학시절 데모한다고 껍적대어 봤을 때에도 나는 그때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그 큰길에 모여서 소리쳤던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광화문 네거리에서 오늘 저녁6시부터 차량을 전면 통제하고 새천년 맞이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어제밤 우연히 그쪽을 지나는데 길 양쪽으로 모든 가로수에 내걸은 화려한 트리불빛이 마치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인 것 처럼 (가보지도 않은 파리의 거리를 내가 어찌 안다고 할까마는...) 너무 아름다왔다. 그리고 길 곳곳에 레이져쇼와 그밖의 각종 쇼를 벌이기 위한 무대 장치를 준비중인 모습이었다. 우와~ 가보고 싶다, 흥분된다!

그런데, 마침 어제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 일로 오늘은 포천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때로부터 벌써 12년의 시간이 흘렀고(이렇게 쓰니까 내가 꼭 할머니가 된 것 같아 ^^;),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했다. 오늘의 광화문 거리도 그때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 앞의 광화문 네거리 안에 내가 서있을 수 있다면, 그때 차마 내가 할 수 없었던 걸 하고 싶을 것 같다.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한번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타도하자, 타도하자!" (무엇을? 나의 이십대에 남은 찌꺼기를!)

"쟁취하자, 쟁취하자!" (무엇을? 나의 화려한 삼십대를!)

 

1999년을 마감하고, 이십대를 마감하는 쥬스타나의 단상이었습니다.

혹시 오늘저녁 광화문 네거리에서 헤매이실 분들은 나중에 그 감상기를 저에게 들려 주세요!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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