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불효자는 웁니다.(묻어둔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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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경 [lsk55] 쪽지 캡슐

2004-01-24 ㅣ No.5635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산성당

불효자는 웁니다.(묻어둔 아픔)


이번 고향 길은 그 어느때 보다도 행복했습니다.



 


이번 명절엔 고향에 가면 그리운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시간을 쪼개듯 친구들도 貴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그리운 고향 친구는 분명 내 전화소리를 받고는 그냥 달려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난 그럴 勇氣가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 친구도 이 명절날에는 父母兄弟와 또 많은 一家親戚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소중한 시간을 차마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만난다면, 그냥 밤을 세워 쓴 소주라도 나누며 얼마간 머물러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곧 떠나야 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핸드폰의 번호를 누르다가 그만 두길 수차례, 결국 저는 어머님 얼굴만 뵙고 그냥 歸京 길에 올랐습니다. 아직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기에 故鄕 親舊들은 나의 처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理解하여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理解를 해 주지 않아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 사진은 16년전 어느 여름, 어머님을 모시고 온가족이 오대산으로 여름휴가를 갔을 때의 전경입니다.



용문검객의 오늘의 일기장 내용

제목 : 나의 어머니

그렇게 총기가 남달랐던 내 어머니는 이제 저를 당신의 자식인 것도 記憶 못하십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아픔이지만, 저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기억이 생생하시다면, 차마 요양원에 내 어머니를 모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저는 아주 많이 나쁜 놈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함께 고향을 찾은 제 동생들도 말은 없었으나 모두가 제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동생들도 저와 같이 고향에는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아주 많을 터인데, 저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각박한 서울, 객지생활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이 못난 형이 SOS를 칠 때마다 기백만원씩 아무 군소리 없이 제공하였던 동생들 내외가 오늘따라 왜 이리도 이쁜지 모르겠습니다.

수년전부터 병환이 깊은 어머님을 몇 개월은 우리집에, 또 몇 개월은 둘째 동생네 집에, 또 몇 개월은 막내동생네 집에 모셨으나 기억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계속 사고뭉치셨습니다.

동생네의 家庭이 서서히 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난 그때마다 승용차에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오길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마나님과 교대로 집을 지킨다는 것이 많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대학 입시준비중인 아들 녀석에게도 많이 미안했고, 좁은 자기 방을 내어준 딸아이에게도 많이 미안했습니다.



 


고교생 아들, 중학생인 딸아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여름휴가를 갔을 때의 전경입니다.


부양가족이 있는 사람은 요양소에 부모를 모실 수 없다는 국가 복지정책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고향의 누나와 매형이 그 역할을 담당해 주시겠다고 자청하셨습니다. 누나와 매형은 큰 아들은 서울에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둘째는 신부님이 되고자 멀리 수원의 신학교로 떠나있으니깐 당신들이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동생들은 이 말씀에 큰 감동을 먹고 감격해 했습니다.

일찍 선친이 돌아가신 후에도 저의 어린 동생들을 키워주신 누나와 매형인데...

긴급 가족회의를 개최한 우리 세형제들은 모두 생활비 일체를 각자 분담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전 요양소에 보증금과 월 사용료만 내면 된다는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그동안 누나와 매형께 꼭 죄지은 기분이었던 터였기에 요양소 입소가 가능하다는 연락에 감격의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저는 용감하게 이번 만큼은 눈 딱감고 마나님 몰래 적금을 깨어 보증금을 불입했습니다.

그리곤 이번 민속명절에 동생들 내외와 조카들 등 대부대원을 이끌고 어머니가 계신 요양소를 찾았습니다. 동해 바다의 파도가 출렁이는 언덕에 위치한 요양소는 마치 호텔과 같았습니다.

지난 밤 막내 동생이 이 형을 위해 큰맘 먹고 마련해준 현대호텔 517호실에서 내려다본 전경과 우리 어머님을 모시게 될 정동진 선클르즈 옆의 요양소의 전경은 아주 흡사해서 더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곳 복지시설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이신 우리 모교 선배님께서 직접 현장까지 안내해 주시고 방을 방문해 주셔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더욱 감격스러웠습니다.

그곳엔 여러 할머니들이 간호사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정겨워 보였습니다.

늘 죄인같은 마음으로 살았고 특히 내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 못하고 이런 곳에 모시는 것이 불효라고만 생각했는데, 같은 또래의 할머니들과 환한 웃음으로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뵙고 보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며 내 곁에서 자리를 뜨지 않으시는 어머니를 뵙고는 순간적으로 그냥 모시고 서울로 귀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생활에 적응하시면서 더욱 고와진 어머니의 모습을 뵙곤 이곳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의무와 책임이라는 이름 하에 삭막한 내집의 콘크리트 감옥에 홀로 늘 집을 지키도록 해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시절 운동회와 소풍때면 늘 김밥을 싸들고 따라 다니셨던 내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렇게 모실 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의 임관심 행사에도 당시 강원도 산골에서 그 먼 경상도 땅까지 꽃다발을 들고 홀로 나타나셨고, 또 대학 졸업식장에도 어떻게든 시골에서 자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달려오셨던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전혀 없으시면서도 누군지도 모르면서 또 놀러오라고 문밖까지 배웅나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요양소를 떠나왔습니다.

이번 설날의 고향 길은 그 어느때 보다도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만 쓸랍니다.


2004년 1월 24일

용문동 구역장 李 相卿 가브리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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