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성당 게시판

나도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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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진 [땔감] 쪽지 캡슐

1999-09-27 ㅣ No.539

외로운게 어디 사람 만인가. 나도 외롭다. 어쩜 너희 사람들보다 훨씬 더 외로울지 모른다. 네가 기도한다고 감실 앞에 와 앉아 졸고 있을 때도 나는 외로웠고, 네 그 좋은 머리와 재능으로 멋들어지게 준비를 한 후 사도직을 행하고 숱한 사람들로 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있을 때도 나는 외로웠고, 좋은 사람이 생겨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도 역시 나는 외로웠다. 아름다운 성당 안에서 미려한 전례가 행해지고 있을 때도 다소간 나는 외로움을 탄다. 나는 끝임없이 외롭고 사랑에 목말라 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사랑에 있어서만은 내 스스로도 욕심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안다. 허나, 이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정말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것을 보면 속이 매스꺼워지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다.

너희들은 곧잘 내가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너희들의 기도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푸념한다. 혹은 내가 너무 엄격한것을, 과도한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온갖 규정을 만들어 놓고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다 쓴다. 적어도 평일 미사를 주3회 이상 참여해야 한다, 기도는 매일 1시간 이상씩 해야 한다, 교회 봉사 활동은 주1회 이상 해야 한다, 헌금은 일정액 이상 꼬박꼬박 내야 한다는 등등으로, 너희들은 그렇게 숱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만 겨우 나를 만날 수 있고, 너희들의 청이 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려고 애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제를 만들어 아득히 높은 제단 위에 모셔 놓고 온갖 화려한 예식과 제물 속에서 나를, 너희들이 만든 박제를 경배하려고 한다.

거듭 말하지만 난 너희들에게 아무런 행위도, 아무런 형식도, 아무런 부담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마음 한 자락을 달라고 했을 뿐이다. 마음을 주는데 돈이 들거나 힘이 들지는 않는다 그건 너희들도 잘 알지 않느냐. 너희들끼리 사랑을 나눌 때 땀흘려 애쓰며, 수고하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 짝사랑만 하다 새까맣게 타버린 내 속을 아느냐.

너희들은 끊임없이 나를 무슨 연적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양자택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 네 연인을 뺏기고 말 것이라고, 네가 하고픈 일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의식주에 있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에 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다. 허나, 생각을 좀 해 봐라. 어떻게 네 연인과 내가 둘일 수 있으며,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어떠한데 네가 하고파하는 것을 못하게 하겠으며 의식주에 어려움을 겪게 하겠느냐. 이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모르는 게 아니냐. 본디 너랑 내가 나뉨이 없이 하나임을 그토록 알아듣기 힘드냐. 내가 무슨 자비심이 한량없이 넓어 네게 그토록 마음을 주고 있는 줄 아느냐. 물론 그렇기도 하다. 허나, 그보담은 애초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인 것이다. 병든 이가 아니라면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있겠느냐. 네가 바로 나인 것이고, 나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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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네 혼자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다가 힘이 딸리면 그때나 날 찾곤 하지 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늘 함께 하자.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고, 실천해 나가자. 어느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가 않다. 호흡처럼 그렇게 늘 함께 하고픈 것이다. 이게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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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숯이 된다.

                                                  글 - 유시찬(보나벤뚜라) : 예수회 ’말씀의 집’ 원장

p.s 혜화동 교우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어서 허락도 없이 올렸습니다. 용서합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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