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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정의(definition) 외 [교리용어_양심] 969_토미즘학습 [_거룩함][_성덕][_성스러운] 1032_heart 108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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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1/4 [122.128.44.*]

2011-03-18 ㅣ No.1026

 
 
게시자 주:
 
(2011/03/19)
+ 찬미 예수님! 아래의 글은, 각자의 고해성사의 필요 조건인 "양심 성찰" 시에 성찰의 대상인 "교회가 가르치는 양심(conscience)"이 무엇인지에 대한 글로서,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양심"의 정의(definition)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의 윤리신학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글입니다. 좋은 사순시기 보내시기 바랍니다.
 
"... 부정적 영향을 받기 쉽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며 권위있는 가르침을 거부하도록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 교육이 필요하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83항)
 
(2011/03/20)
위의 글은 또한 2010년 가을부터,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을 학습하는 데에 필요한 입문으로서, 
 
 
제가 그동안 마련하여 올려드렸던 글들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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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이 글에서는 "양심(conscience)" 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단, 제3-5항은 제외).
 
1.
우선,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양심(conscience)" 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CONSCIENCE

The judgment of the practical intellect deciding, from general principles of faith and reason, the goodness or badness of a way of acting that a person now faces.


양심(CONSCIENCE)

한 인격(a person)이 현재 직면한 행동 방식의 선함 혹은 불량함에 대하여, 믿음(faith)과 이성(reason)의 일반적 원리(general principles)들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실천 지성(the practical intellect)의 판단(judgment)을 말한다.


It is an operation of the intellect and not of the feelings or even of the will. An action is right or wrong because of objective principles to which the mind must subscribe, not because a person subjectively feels that way or because his will wants it that way.


이것은, 느낌(the feelings)들 혹은 심지어 의지(the will)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성(the intellect)에 의한 한 개의 작용(an operation)이다. 어떤 행동(an action)은, 어떤 사람이 주관적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느끼기 때문 혹은 그의 의지가 그러한 방식으로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하여 마음이 동의하여야만 하는 객관적 원리들 때문에, 올바르거나 혹은 불량하다.


Conscience, therefore, is a specific act of the mind applying its knowledge to a concrete moral situation. What the mind decides in a given case depends on principles already in the mind.


그러므로 양심은, 마음의 지식을 구체적인 윤리적 상황에 적용하는, 마음(the mind)의 어떤 구체적인 행위(act)이다. 어떤 주어진 경우에 있어 마음이 결정하는 바는 이미 마음에 있는 원리(principles)들에 따라 결정된다.


These principles are presupposed as known to the mind, either from the light of natural reason reflecting on the data of creation, or from divine faith responding to God's supernatural revelation. Conscience does not produce these principles; it accepts them. Nor does conscience pass judgment on the truths of reason and divine faith; it uses them as the premises from which to conclude whether something should be done (or should have been done) because it is good, or should be omitted (or should have been omitted) because it is bad. Its conclusions also apply to situations where the mind decides that something is permissible or preferable but not obligatory.


이들 원리들은1)
, 창조물로 이루어진 자료들에 대하여 숙고하는 자연적 이성(natural reason)의 빛으로부터, 혹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에 응답하는 신성적 믿음(divine faith)2)으로부터, 마음에 알려진 것으로서 전제된다(are presupposed). 양심은 이들 원리들을 산출하지 못하며, 양심은 이들을 받아들인다. 또한 양심은 신성적 믿음(divine faith)에 기인하는 진리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며, 양심은 이들 원리들을, 그것들로부터 어떤 것이, 그것이 선하기에 행하여져야만 할 것인지를 (혹은 행하여졌어아만 하였는지를), 혹은 그것이 나쁘기에 생략되어져야만 할 것인지를 (혹은 생략되어졌어야만 하였는지를), 결론내리기 위한 전제(premises)들로서, 사용한다. 그 결론들은 또한 어떤 것이 허락될 수 있는지 혹은 바람직하나 그러나 의무가 아닌지를 마음이 결정하는 경우인 바로 그 상황들에 적용된다.


Always the role of conscience is to decide subjectively on the ethical propriety of a specific action, here and now, for this person, in these circumstances. But always, too, the decision is a mental conclusion derived from objective norms that conscience does not determine on its own, receiving it as given by the Author of nature and divine grace.


항상 양심의 역할은, 이러한 상황들에 있어, 바로 이 사람을 위한, 여기에서 지금, 어떤 구체적인 행동의 윤리적 타당성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또한 항상 그 결정은, 양심이 단독으로 확정하지 못하는, 객관적인 규정들로부터 유래하는, 그리하여 그것을 본성(nature) 및 신성적 은총(divine grace)의 주관자(Author)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한 개의 마음의 결론(a mental conclusion)이다.


-----
1)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이들 원리들은, "첫 번째 원리들(the first principles)" 혹은 "첫 번째 진리들(the first truths)" 혹은 "기본 원리들(the basic principles)들"로 불리는, 소위 말하는 공리(axioms)들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5.htm

2) 번역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에 있는 "divine faith(신성적 믿음)"
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DIVINE FAITH
 

Assent of the mind to what God has revealed, as distinct from human faith, which is the acceptance of the word of a human being.


신성적 믿음(DIVINE FAITH)

 

어떤 인간의 말에 대한 승락인 인간적 믿음(human faith)으로부터 구분되는,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계시하신) 바에 대한 마음의 동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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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양심(conscience)" 에 대한 위의 설명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서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 2
:
여기를 클릭하면, Father John A. Hardon, S.J. 의 저서인 Moral Theology 중에서 발췌한 다음의 내용의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John A. Hardon 신부는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 의 저자이기도 하며, 다음의 발췌문에 의하면, 특히 위의 제1항에 주어진 "양심"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Conscience in Christianity.
If law is the basis of human conduct, conscience is the means by which the moral law is apprehended and interpreted. Different authors have differently defined conscience. According to Jeremy Taylor, conscience is the mind of man governed by rule. For the English divine, Joseph Butler, "There is a superior principle of reflexion, or conscience, in every man, which distinguishes between the internal principles of his heart as well as his external actions, which passes judgment on himself and them." But the classic definition is that of Thomas Aquinas, for whom "conscience is the mind of man passing moral judgments."


그리스도교에 있어 양심.
인간의 처신의 근본이 법(law)이라고 하면, 양심은 그것에 의하여 윤리적 법이 인지되고 그리고 해석되는 바로 그 수단이다. 다른 저자들은 양심을 다르게 정의해 왔다. Jeremy Taylor에 따르면, 양심은 규정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잉글랜드의 신학자인 Joseph Butler에게 있어, "각 사람 안에는 어떤 최상의 성찰 원리, 혹은 양심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외적 행동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의 내적 원리들 사이에서 구분하며, 이것은 자기 자신과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전형적인 정의(the classic definition)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것인데, 그의 경우에 있어 "양심은 윤리적 판단들을 내리는 사람의 마음(mind, 즉, 지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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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주어진 "양심(conscience)"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으니 필히 참고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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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inas further recognizes two aspects of conscience, which are essential to a correct understanding of its concept. There is first of all synderesis or the permanent, inborn disposition of the mind to think of general and broad truths of moral conduct that become the principles from which a man may reason in directing his own moral activities. St. Jerome in the fifth century seems to have coined the term in Christian usage as the equivalent of "a spark of conscience," and Aquinas described it as a habitual quality of the intellect, enabling it to know the basic principles of practical reasoning. He never confused this faculty with conscience proper.


아퀴나스(Aquinas)
는 더 나아가 양심의 두 양상(aspects)들을 알아차렸는데, 이 양상들은 양심의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필수적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데레시스(synderesis, 良知良能)가, 혹은, 거기로부터 사람이 자신 고유의 윤리적 활동(moral activities)들을 명령함에 있어 추론할 수도(may) 있는 원리들이 되는, 윤리적 처신(moral conduct)에 대한 일반적이며 폭넓은, 진리들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하는 타고난 성향(inborn disposition)이, 있다. 성 예로니모(St. Jerome)는 5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사용에 있어 "양심의 불꽃(a spark of conscience)"의 등가 용어(the equivalent)로서 이 용어를 만들었던(have coined)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아퀴나스는 이것을, 지성에게 실천적 추론 행위(practical reasoning)의 기본 원리(the basic principles)들을 아는 것을 허락하는, 지성의 한 습관적 특성(a habitual character)으로서 설명하였다. 그는 이 능력을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심(conscience proper)과 결코 혼돈하지 않았다.


Conscience in the strict sense, or conscientia, is the action of the practical intellect deciding whether a particular, proposed operation is good or bad, here and now. It is the conclusion at which reason arrives after duly applying the principles of morality to a specific course of action.


엄밀한 의미에 있어
양심(conscience in the strict sense), 혹은
conscientia 어떤 특별한, 제안된 작동(proposed operation)이, 여기서 그리고 지금, 선하거나 혹은 나쁜지(good or bad)에 대하여 결정하는 실천 이성(practical intellect)의 행동(action)을 말한다. 이것은 이성(reason)이 윤리의 원리(principles of morality)들을 행동(action)의 어떤 특정의 과정에 정당하게 적용한 후에 도달하는 결론이다.


The word itself appears to have come from the ancient Stoics, but the idea it couches is distinctively Christian. Even the Hebrews had no exact equivalent. In the Old Testament, wherever moral judgments were spoken of, the terms lebh (heart) or ruach (spirit) are used. Nevertheless, it should be remarked that "heart" in the Scriptures, whether Old or New Testament, refers to the cognitive aspects of the mind and not to the will or emotions exclusively. 


이 단어 자체는 고대 스토아 학파(the ancient Stoics)로부터 유래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그러나 이것이 나타내는 개념은 독특하게 그리스도교적이다. 심지어 히브리인들도 정확한 등가 표현을 가지지 못하였다. 구약 성경에 있어, 윤리적 판단들이 말해졌던 장소 어디에서든, lebh [심장(heart)] or ruach [영(spirit)]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혹은 신약 성경이든지 간에, 성경 본문(the Scriptures)들에 있어, "심장(heart)" 마음(mind, 즉, 지성)의 인지적 양상(cognitive aspects)들에 대한 언급이며 그리하여 배타적으로 의지(will) 혹은 감정(emotion)들에 대한 언급만이 아님이 반드시 주목을 받아야 한다.


참고 3
: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1979년 3월 21일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일반 알현 교리 교육 강론 말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4. It is now certainly easier for us to understand why Christ the Lord and the Church unite the call to fasting with repentance, that is, with conversion. To be converted to God, it is necessary to discover in ourselves that which makes us sensitive to what belongs to God; therefore, the spiritual contents, the superior values which speak to our intellect, to our conscience, to our "heart" (according to biblical language). To open up to these spiritual contents, to these values, it is necessary to detach oneself from what serves only the consumer spirit, satisfaction of the senses. In the opening of our human personality to God, fastingunderstood both in the "traditional" way and in the "modern" waymust go hand in hand with prayer because it is addressed directly to him.


4. 주님이신 그리스도 및 교회가 무슨 이유로 이 부름을 회개(repentance)와 함께, 즉 회심(conversion)과 함께, 단식(fasting)으로 결합시키는지를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은 이제 확실하게 더 쉬워집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개심하게 되기 위하여, 하느님에 속하는 바에 대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 우리의 지성(intellect)에게, 우리의 양심(conscience)에게, (성경 언어에 따르면) 우리의 "심장(heart)"에게, 말하는 최상의 가치들인, 영적인 내용들에 대하여, 우리를 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도록(sensitive) 만드는 바로 그것을 우리 자신들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 영적인 내용들에, 이들 가치들에, 공개하기 위하여, 감각들의 만족인, 소비자 마음(the consumer spirit)을 오로지 섬기는 바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간의 인격성(our human personality)을 하느님께 개방함에 있어, "전통적" 방식 및 "현대적" 방식 둘 다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단식(fasting)은 손을 마주잡고 기도와 함께 가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4
: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주어진 성 토마스 아퀴나스"양심"에 대한 소개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2.
그 다음으로,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집에 주어진 "양심(conscience)"에 대한 다음의 용어 설명을 함께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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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용어집의 우리말 번역본은 총 6권이 한 질을 이루는 저의 졸저서들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의 인터넷 부록으로 제공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틈틈히 우리말 번역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오늘 형재, 적어도 첫 용어인 Abortion 부터 Merit 까지 우리말 번역을 완료하였습니다. 이 용어집의 우리말 번역본이 주어질 인터넷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cc_glossary_kr.htm 
(주: 지금은 영어본 용어집으로 링크 설정되어 있으며, 번역 작업 완료시에 번역본으로의 주소 변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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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CE: The interior voice of a human being, within whose heart the inner law of God is inscribed. Moral conscience is a judgment of practical reason about the moral quality of a human action. It moves a person at the appropriate moment to do good and to avoid evil (1777-1778). An examination of conscience is recommended as a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Sacrament of Penance (1454).
 
양심(CONSCIENCE): 한 인간의 내부의 목소리(interior voice)를 말하며, 그의 심장(heart)의 안쪽에 하느님의 내면의 법(the inner law)이 새겨져 있다. 윤리적 양심(moral conscience, 도덕적 양심)은 인간 행위의 윤리적 질에 관한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의 판단을 말한다. 이것은 적절한 순간에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개인을 움직인다(CCC 1777-1778). 양심에 대한 검토는 고백성사를 받기 위한 준비로서 권고된다(CCC 1454).
 
참고: 위의 설명에서 괄호 안의 번호들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중의 관련 항목 번호들입니다.
 
2-1. 여기를 클릭하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77-1778항 및 전후 항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2-2. 여기를 클릭하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54항 및 전후 항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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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1년 8월 4일]
 
다음의 글들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사목잡지(1994년)에 게재된 번역문들인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에 대한 해설들입니다. 이 글의 독자들이 아래에 있는 이 교황 회칙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드리고자 안내해 드립니다:

제목: 양심은 양심에 우선하는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
리비오 멜리나(결혼과 가정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연구소 교수)
참고: 이 논문의 저자, Livio Melina is a professor of moral theology at the John Paul II Institute for Studies on Marriage and Family at the Lateran University in Rome (http://www.istitutogp2.it/dblog/articolo.asp?id=99 참조).
(원문: Livio Melina, “Conscience witnesses to a truth that precedes it and surpasses it”, in: L’ Osservatore Romano 1994.1.12, pp. 10-11, 강윤정 번역)
http://samok.cbck.or.kr/content/sub0106.asp?idx=4061&bookNumber=182
 
제목: 회칙「진리의 광채」해설 자연법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위한 윤리지침이다
자넷 스미스(미국 달라스대학교 교수)
(원문: Dr Janet E. Smith, “Natural law is a guide to morality for Christians and non-Christians”, in: L’ Osservatore Romano 1994.1.5, p. 10, 강윤정 번역)
http://samok.cbck.or.kr/content/sub0106.asp?idx=4060&bookNumber=182
 
제목: 회칙 『진리의 광채』 해설 참된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
D. 테타만지(이탈리아 주교회의 사무총장 • 대주교)
(원문: D. Tettamanzi, “Only the Son bringa truc freedom”, in: L’ Osservatore Romano 1993. 10. 27〈Weekly Edition〉, pp. 9 -10)

http://samok.cbck.or.kr/contents/sub0106.asp?idx=2911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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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윤리신학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회칙으므로, 필독을 권고합니다.
 
교회 윤리의 기초에 관한 1993년 8월 6일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 Veritatis Splendor)" 에서, 제54항과, 교회와 교도권이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형성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언급을 하고 있는, 제64항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대단히 자상하게 윤리 신학 전반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시므로, 다소 바쁘신 분들이라도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적어도 이 회칙의 제54-64항을 꼭 필독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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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양심과 진리

인간의 지성소

54.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법 사이에 있는 관계는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곧 그 윤리적 양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고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합니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법입니다. 그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부릅니다. 필요한 곳에서는 마음의 귀에 대고, 이것을 하여라, 저것을 삼가라 하고 타이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속에 새겨 주신 법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며 이 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2,14-16 참조)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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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사목 헌장 1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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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자유와 법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은 윤리적 양심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문화적 성향들 ─ 자유와 법을 서로 반대 입장에 놓거나 따로 떼어 놓으며, 자유를 거의 우상에 가까울 정도로 떠받드는 ─ 은 윤리적 양심에 대한‘창조적’해석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중간 생략)


64.
...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의 형성에서 교회와 그 교도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습니다. 공의회는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기 양심을 기르며 교회의 거룩하고 확실한 교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이며, 그 임무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올바로 가르치며 동시에 인간성에서 나오는 도덕 질서의 원리를 자기 권위로 선언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111) 교회의 권위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선언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결코 침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자유는 진리 ‘로부터의’자유가 아닌, 언제나 진리‘안에서의’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교도권은 결코 그리스도인 양심과는 무관하거나 생소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어야 하는 진리들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교도권은 신앙 행위의 출발점에서부터 진리들을 발전시켜 줍니다. 교회는 언제나 양심에 봉사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인간의 속임수로써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지 않도록” (에페 4,14 참조) , 인간의 선에 대한 진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특히 더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하여 확실하게 진리에 이르고 그 안에 머물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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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종교 자유 선언 1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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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영문 자료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II. Conscience and truth

Man's sanctuary
 
54. The relationship between man's freedom and God's law is most deeply lived out in the "heart" of the person, in his moral conscience. As the Second Vatican Council observed: "In the depths of his conscience man detects a law which he does not impose on himself, but which holds him to obedience. Always summoning him to love good and avoid evil, the voice of conscience can when necessary speak to his heart more specifically: 'do this, shun that'. For man has in his heart a law written by God. To obey it is the very dignity of man; according to it he will be judged (cf. Rom 2:14-16)".101
 
(졸번역)
54. 사람의 자유(freedom)와 하느님의 법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는, 그의 윤리적 양심(moral conscience) 안에서, 즉 이 인격(the person)의 "심장(heart)" 안에서 가장 깊이 실행되고 있습니다(is lived out).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듯이, "자신의 양심의 깊은 곳(the depths)에서 사람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것이 아닌, 그러나 그를 복종으로 구속하는, 어떤 법을 인지합니다(detects). 그에게 항상 선을 사랑하며 악을 피하라고(love good and avoid evil) 요구하는, 양심의 목소리(the voice of conscience)는 필요할 때에 자신의 심장에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피하라(do this, shun that).' 이는 사람이 자신의 심장 안에 하느님에 의하여 쓰여진 어떤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복종하는 것이 사람의 바로 그 존엄성이며, 그리고 이것에 따라 그는 심판받을 것입니다 (로마 2,14-16을 참조하라).
 
The way in which one conceives the relationship between freedom and law is thus intimately bound up with one's understanding of the moral conscience. Here the cultural tendencies referred to above — in which freedom and law are set in opposition to each other and kept apart, and freedom is exalted almost to the point of idolatry — lead to a "creative" understanding of moral conscience, which diverges from the teaching of the Church's tradition and her Magisterium.
 
따라서 어떤 자가 자유와 법 사이의 관계를 잉태하는(conceives) 방식은 윤리적 양심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밀접하게 관려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안에서 자유와 법이 서로에 대하여 대립하여 설정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멀어진 상태에 있으며, 그리고 자유는 거의 우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까지 찬미되는, 위에서 언급된 문화적 성향들은 윤리적 양심에 대한 어떤 "창조적(creative)" 이해로 이끄는데, 이이해는 교회의 전통 및 교회의 교도권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납니다(diverges).
 
(중간 생략)

64. ... Christians have a great help for the formation of conscience in the Church and her Magisterium. As the Council affirms: "In forming their consciences the Christian faithful must give careful attention to the sacred and certain teaching of the Church. For the Catholic Church is by the will of Christ the teacher of truth. Her charge is to announce and teach authentically that truth which is Christ, and at the same time with her authority to declare and confirm the principles of the moral order which derive from human nature itself ".111 It follows that the authority of the Church, when she pronounces on moral questions, in no way undermines the freedom of conscience of Christians. This is so not only because freedom of conscience is never freedom "from" the truth but always and only freedom "in" the truth, but also because the Magisterium does not bring to the Christian conscience truths which are extraneous to it; rather it brings to light the truths which it ought already to possess, developing them from the starting point of the primordial act of faith. The Church puts herself always and only at the service of conscience, helping it to avoid being tossed to and fro by every wind of doctrine proposed by human deceit (cf. Eph 4:14), and helping it not to swerve from the truth about the good of man, but rather, especially in more difficult questions, to attain the truth with certainty and to abide in it.


64.
...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양심의 형성을 위한 어떤 커다란 도움을 가집니다. 이 공의회가 다음과 같이 확언하듯이, "자신들의 양심들을 형성함에 있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의 성스러운 그리고 특정한 가르침에 조심스러운 주의를 하여야만 합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에 의하여 진리의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임무는 그리스도인 바로 그 진리를 진정으로 선포하며 그리고 가르치는 것이며,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권위와 함께 인간의 본성 그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윤리적 순서의 원리들을 선포하며 그리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교회가 윤리적 질문들에 대하여 선언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자유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양심의 자유가 이 진리"로부터" 자유가 결코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항상 그리고 오로지 이 진리 "안에서" 자유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한 교도권이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이것에 관계가 없는 진리들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도권은 그것이 벌써 소유하였여야만 하는 진리들에 빛을 가져다 주어, 그리하여 그들을 최초기에 형성되는 믿음의 행위(the primordial act of faith)의 시작점에서부터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녀 자신을 항상 그리고 오로지 양심에 대한 봉사(the service of conscience)에 임하게 하여, 그리하여 그것이 인간적 기만(human deceit)에 의하여 제안되는 교설의 모든 바람에 의하여 이리저리고 내던져지는 것을 피하도록 도우며(에페소 4,14를 참조하라), 그리고 사람의 선에 관한 진리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특히 더 어려운 질문들에 있어, 확신과 함께 이 진리를 획득하며 그리고 그 안에서 머무르도록 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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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은,
 
 
1997년에 라틴어 정본이 공포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76-1802항들에서 "양심" 에 대하여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약간 길기는 하나, 위의 제1-2항의 간략한 설명들에 대하여, 제3항(진리의 광채)와 마찬가지로, 자세히 가르치고 있으므로, 차분히 학습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글자들을 굵게 하고 또 색칠을 한 것은 제가 한 것입니다:
 
제6절 도덕적 양심
 
1776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법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피하도록 부른다. 필요한 곳에서는 마음의 귀에 대고, ‘이것을 하여라.’ , ‘저것을 삼가라.’하고 타이른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 속에 새겨 주신 법을 지니고 있으므로`…….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49)
 
I. 양심의 판단
 
1777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양심은 50)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적절한 때에 명령한다. 그리고 구체적 선택들을 판단하여 옳은 선택은 승인하고 그릇된 선택은 고발한다. 51) 도덕적 양심은‘최고 선’ 이신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여 진리의 권위를 입증하는데, 인간은 이 최고 선의 매력에 이끌려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 현명한 사람은, 도덕적 양심에 귀를 기울일 때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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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사목 헌장, 16항.
50. 로마 2,14-16 참조.
51. 로마 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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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도덕적 양심은 이성의 판단으로서, 양심을 통해 인간은 자기가 하려는 행위, 하고 있는 행위, 이미 행한 구체적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알 수 있다. 인간은 모든 말과 행동에서 자신이 정당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인간은 양심의 판단으로 하느님의 법이 명하는 것을 알고 깨닫는다.
 
     양심은 우리 정신의 법이지만 정신을 넘어서는 법이고, 명령을 내리는 법이
     며, 책임과 의무, 경외심과 희망을 뜻하는 법이기도 합니다.…… `양심은
     총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도 은밀히 말씀하시며 우리를 가르치
     시고 다스리시는 분의 사자(使者)입니다. 양심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들 가운데
     첫째입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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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위의 인용문에서, "은총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도"로 번역한 표현은, 영어본 가톨릭 교리서에서 "both in nature and in grace"(자연으로 및 은총 둘 다로) 라고 번역하였으므로,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예를 들어,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에서 "the order of grace"에 해당하는 표현을 "은총의 순서"가 아니라 "은총의 세계"로 번역한 것도 또한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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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  각 사람에게 중요한 일은,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기 위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흔히 반성이나 자기 성찰 또는 내면화가 어려운 실정이어서,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이 더 절실히 요구된다.
 
     양심으로 돌아가 물어 보십시오.……`형제들이여, 내면으로 돌아가 그대들이
     하는 모든 일의 증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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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존 헨리 뉴먼, 「노포크 공작에게 보낸 서간」 , 5: 「성공회 신자가 가톨릭 가르침에서 느끼는 어려움」 , 제2권(웨스트민스터 1969), 248면.
53. 성 아우구스티노, 「바르티아 사람들에게 보낸 요한 서간 강해」 ,  8,  9: PL 3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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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  인간의 존엄성은 도덕적 양심의 정직성을 내포하며 이를 요구한다.  도덕적 양심에는 도덕적 원칙(synderesis, 良知良能)들을 인지하는 일, 이성과 선의 구체적 식별을 통해 이 원칙들을 주어진 상황 안에 적용시키는 일, 따라서 구체적으로 행하고자하는 행위나 이미 행한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일이 포함된다. 이성의 법 안에 표명된 윤리적 선에 관한 진리는 도덕적 양심의 현명한 판단을 통해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식별된다. 이러한 판단에 맞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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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1년 8월 21일]
 
번역 오류 한 개: 그런데, 이 제1780항을 다음과 같이 바로 잡아야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synderesis(良知良能)" 라는 용어의 전통적 정의(definition)에 그 문맥에 있어 부합하는 유의미한 문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원칙들을 인지/자각하는 일을 두고서 전통적으로 synderesis(良知良能)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80항 원문에서의, 괄호의 위치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앞쪽으로 이동해버렸는데, 하여튼 이러한 실수/광오도 또한 한 가지 종류의 번역 오류일 것입니다:
 
(바로 잡은 번역문)
1780
  인간의 존엄성은 도덕적 양심의 정직성을 내포하며 이를 요구한다. 도덕적 양심에는 도덕적 원칙들을 인지하는 일(synderesis, 良知良能), 이성과 선의 구체적 식별을 통해 이 원칙들을 주어진 상황 안에 적용시키는 일, 따라서 구체적으로 행하고자하는 행위나 이미 행한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일이 포함된다. 이성의 법 안에 표명된 윤리적 선에 관한 진리는 도덕적 양심의 현명한 판단을 통해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식별된다. 이러한 판단에 맞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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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  양심은 자신이 행한 행위들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게 한다. 만일 인간이 악을 저지르면 양심의 공정한 판단은 그 사람안에 보편적 진리인 선의 증거로 남고, 또한 동시에 그 부당한 선택에 대한 악의 증거로서 그 안에 남는다. 양심이 판단하는 판결은 희망과 자비의 보증으로 남는다. 이러한 판결은 저지른 잘못을 증언함으로써,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것,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하느님 은총으로 끊임없이 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1782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양심과 자유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자기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되며, 특히 종교 문제에서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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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종교 자유 선언, 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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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양심의 형성
 
1783  양심은 형성되어야 하고 도덕적 판단은 계발되어야 한다. 잘 형성된 양심은 바르고 진실하다. 잘 형성된 양심은 이성에 따라, 창조주의 지혜가 원하는 참된 선에 맞는 판단을 내린다. 부정적 영향을 받기 쉽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며 권위있는 가르침을 거부하도록 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 교육이 필요하다.
 
1784  양심 교육은 온 생애에 걸친 일이다. 양심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어린아이에게 도덕적 양심으로 깨닫게 된 내적 법을 인정하고 실천하도록 일깨운다. 현명한 교육은 을 가르치며, 인간의 약함과 잘못에서 생기는 공포, 이기심, 교만, 죄책감과 자기 만족에 대한 충동 등에서 보호하거나 이를 치유해 준다. 양심 교육은 자유를 보장해 주며 마음의 평화를 준다.
 
1785  양심의 형성에서 하느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다. 우리는 신앙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의 도움을 받고, 다른 이들의 증언이나 충고로 힘을 얻으며,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의 인도를 받는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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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종교 자유 선언, 14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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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양심에 따른 선택
 
1786  도덕적 선택 앞에서 양심은 이성과 하느님의 법에 맞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이성과 하느님의 법에서 거리가 먼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1787  인간은 때로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고,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럼에도 늘 정당하고 선한 것을 찾아야 하며 하느님의 법에 담긴 그분의 뜻을 식별해야 한다.
 
1788  이를 위해 인간은 신중함의 덕과, 현명한 사람들의 조언과, 성령의 도움과 선물에 힘입어, 경험의 자료와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1789  아래 몇 가지 규칙은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  선한 결과를 얻으려고 악을 행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 56)
   이것이‘황금률’ 이다.

-  사랑은 항상 이웃과 그의 양심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1고린 8,12) .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 14,21) .
 
IV. 그릇된 판단
 
1790  인간은 언제나 양심의 확실한 판단에 따라야 한다. 고의로 이런 판단을 거슬러 행동한다면 이것은 자신을 단죄하는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양심이, 하고자 하는 행위나 이미 행한 행위에 대해서 알지도 깨닫지도 못할 수 있고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1791  이러한 무지는 많은 경우에 자신의 책임이다. “사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데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흐려져 거의 다 어두워졌을 때에” 57)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 경우에 자신이 저지르는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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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루가 6,31; 토비 4,15 참조.
57. 사목 헌장, 1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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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무지, 다른 이들이 주는 나쁜 표양, 감정에 사로잡힘, 양심의 자율성을 잘못 이해한 주장,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거부, 회개와 사랑의 결핍등은 도덕적 행위에 대한 판단을 빗나가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1793  만일 `─` 이와 반대로 `─` 무지가 극복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릇된 판단에 대해 도덕적 주체의 책임이 없는 경우라면 개인이 저지른 악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악이고, 부족함이며, 무질서이다.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도덕적 양심을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1794  선하고 순수한 양심은 참된 신앙으로 밝아진다. 왜냐하면 사랑은“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1디모 1,5) 58) 동시에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무분별한 방종에서 더
    욱 멀어지고 객관적 도덕 기준에 부합하도록 더욱 노력한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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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1디모 3,9; 2디모 1,3; 1베드 3,21; 사도 24,16 참조.
59. 사목 헌장, 16항.60. 사목 헌장, 1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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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림
 
1795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60)
 
1796  도덕적 양심은 인간이 구체적 행위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이성의 판단이다.
 
1797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의 양심의 판결은 회개와 희망의 보증이 되어 준다.
 
1798   잘 형성된 양심은 바르며 진실하다. 양심은 창조주의 지혜가 바라는 참된 선에 부합하도록 이성에 따라 판단한다. 누구나 자신의 양심을 형성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1799  도덕적 선택에 직면하여 양심은 이성과 하느님의 법에 부합하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반대로 거기서 멀어지는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1800  인간은 언제나 자기 양심의 확실한 판단에 따라야 한다.
 
1801  도덕적 양심이 무지에 머물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이러한 무지와 그릇된 판단이 언제나 죄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1802  하느님 말씀은 우리 길의 빛이다. 신앙과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이를 실천해야 한다. 양심은 이처럼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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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지금까지의 교회의 가르침을 읽어 보면, 우리가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또 키워나가기 위하여서는, 사도 전승에 근거하여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전달하는,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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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고
 
 
다음의 1998년 9월 14일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제98항을 읽을 수 있습니다:
 
98. 이 고찰들은 윤리 신학(theologia moralis)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의 이해가 신앙인의 행위와 연결되는 영역에서 철학의 복원이 시급합니다. 사회, 경제, 정치, 과학 등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현대적 도전들에 직면해서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ethica conscientia)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진리의 광채」에서 현대 세계의 많은 문제들이 진리의 위기로부터 초래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에 대한 보편적 진리의 개념이 상실된 이상, 양심의 개념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심은 더 이상 그 원초적인 상태에서조차 인간 지성의 행위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지성의 기능은 선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고, 나아가 지금 이 곳에서 선택해야 할 올바른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기준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개인의 양심에 허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개인주의 윤리에 아주 가까운 것입니다. 개인주의 윤리에서는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진리와는 다른 자기만의 진리를 갖게 됩니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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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진리의 광채」, 32항: AAS 85(1993), 1159-11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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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회칙 전반에 걸쳐서 윤리 영역에서 진리의 근본적인 역할을 분명하게 강조하였습니다. 매우 절박한 윤리 문제의 대부분에 관련되는 이 진리는, 윤리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근거들을 해명할 줄 아는 정밀한 연구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윤리 신학은, 주관주의적이지도 않고 공리주의적인 것도 아니면서 선(善, the good)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윤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윤리학은 철학적 인간학과 선의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또 함축하고 있습니다. 윤리 신학은 필시 그리스도교적 성덕(聖德)(Christian holiness)(*)과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덕행(virtues)에 연결되는 이런 통합적 전망을 활용하여, 평화, 사회 정의, 가정, 생명 수호, 환경 보호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더욱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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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영어로 "holiness(거룩함, 성덕)"로 번역되는 용어와 영어로 "sacredness(성스러움)"로 번역되는 용어의 차이점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holy_vs_sacred_concept_confusi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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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98. These considerations apply equally to moral theology. It is no less urgent that philosophy be recovered at the point where the understanding of faith is linked to the moral life of believers. Faced with contemporary challenges in the social, economic, political and scientific fields, the ethical conscience of people is disoriented. In the Encyclical Letter Veritatis Splendor, I wrote that many of the problems of the contemporary world stem from a crisis of truth. I noted that “once the idea of a universal truth about the good, knowable by human reason, is lost, inevitably the notion of conscience also changes. Conscience is no longer considered in its prime reality as an act of a person's intelligence, the function of which is to apply the universal knowledge of the good in a specific situation and thus to express a judgment about the right conduct to be chosen here and now. Instead, there is a tendency to grant to the individual conscience the prerogative of independently determining the criteria of good and evil and then acting accordingly. Such an outlook is quite congenial to an individualist ethic, wherein each individual is faced with his own truth different from the truth of others”. (116)


Throughout the Encyclical I underscored clearly the fundamental role of truth in the moral field. In the case of the more pressing ethical problems, this truth demands of moral theology a careful enquiry rooted unambiguously in the word of God. In order to fulfil its mission, moral theology must turn to a philosophical ethics which looks to the truth of the good, to an ethics which is neither subjectivist nor utilitarian. Such an ethics implies and presupposes a philosophical anthropology and a metaphysics of the good. Drawing on this organic vision, linked necessarily to Christian holiness and to the practice of the human and supernatural virtues, moral theology will be able to tackle the various problems in its competence, such as peace, social justice, the family, the defence of life and the natural environment, in a more appropriate and effective way.


영문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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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지금까지의 교회의 가르침을 읽어 보면, 우리가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또 키워나가기 위하여서는, 사도 전승에 근거하여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전달하는,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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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음은, "자신의 양심을 걸고 맹세를 자주 하는 분"들을 향하여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 중에 가르치신, 마태오 복음서 5,33-37 말씀입니다.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가해 연중 제7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복음서 5,17,37)의 일부이기도 한 이 구절들에 대하여, 현재 개정작업이 진행 중인 저의 졸저서의 해설을 또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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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율법의 이 문장은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탈출기 20,7; 레위기 19,12; 민수기 30,3; 신명기 23,22 등에 있는 그러한 구절들의 다시 말하기(paraphras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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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3절에 언급된 모세 율법에 근거한 처신의 기준(a standard of conduct)이 기존의 이 기준에 대한 해석만으로는 이미 미흡하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제34-37절에서 이 기준의 적용을 거부하심과 동시에 애초 이 율법의 제정 정신을 잘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윤리 규범을 제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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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성스럽지 못한 어떤 것에 하느님의 이름(Divine Name)을 대입하는(substitutes) 것과 같은 종류의 핑계(evasion)를 금하신다. 성스러운 대상이 맹세할 때에 언급되면, 그것은 거룩한 이름이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맹세(oath)의 필요성은 사람의 악해지려고 하는 성향(evil condition)의 반향으로서, 이것은 맹세가 보호해 줄(protect) 것이라고 생각되는 맹세자의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성향(tendency), 그리고 맹세자의 동료인 사람(fellow man)에 대한 불신(distrust) 둘 다를 보여준다.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기에 맹세가 전혀 필요 없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알려지는 편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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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 번 별도의 시간을 내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4-9주일 동안 총 여섯 번에 걸쳐 복음 말씀들이 택해지고 있는, 가톨릭 윤리의 대헌장인, 산상 설교(마태오 복음서 제5-7장)의 구조에 대한 글을 작성하여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새로 작성하여 올려드리고자 하는 글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의 가톨릭 교회 안에 설립하셨고 지금까지 점진적으로 자라고 있는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에 우리가 들어가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윤리 강령인 산상 설교를 예수님께서 얼마나 정교하게 제시하셨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제가 직접 확인 한 바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적어도 2030년까지 연중 제9주일까지 재의 수요일 이전에 맞이하게 되는 해는 가해인 올해, 2011년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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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게시자 주:
 
이 글은, 

(i) 평소의 신앙생활 있어 지속적인 성화의 대상일뿐만이 아니라, 또한 
 
(ii) 각자의 고해성사의 필요 조건인 "양심 성찰" 시에 성찰의 대상인,
 
"교회가 가르치는 양심(conscience)"이 무엇인지에 대한 글로서,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양심"의 정의(definition)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의 윤리신학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글입니다.
 
7-1. 여기를 클릭하면, 성 토마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저서명: Elements of Moral Theology [저자:John J. Elmendort(1892)] 책에 부록으로 실린, "양심"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의 요약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 Notre Dame 대학교 The Jacques Maritain Center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신학 가르침 입문서로서 상당히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며, 영어 가능한 분들께 필독을 권유합니다.
 
7-2. 여기를 클릭하면, 지난 가을 이후로 제가 작성하여 올려드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들의 학습을 위한 입문글들의 목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선물들"과 "성령의 열매들"의 차이점을 모르시는 분들의 필독을 권유합니다.
 
좋은 사순시기 보내시기 바랍니다.
 
[추가 일자: 2011년 9월 3일]
 
게시자 주:
 
각자의 양심은 그 형성 과정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기에, "각자의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이다"라는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가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양심이 하느님의 목소리입니까?" 라고 그에게 질문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이 글을 포함하여, 올해 사순 시기 이후로 올려드린 "양심(conscience)" 에 대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글들을 모두를 손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상,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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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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