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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적/풍유적/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의 역사/배경 외 [성경해석_비유] [성경해석_풍유] 782_ 107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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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 2/4 [122.128.42.*]

2011-07-11 ㅣ No.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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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4-4. 이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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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대하여" 제목의 글의 제4-4항으로 붙이려고 하였으나, 용량 제한 때문에 별도로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발췌 시작)
 
 
<이 글은 '빛둘레' 제 51호에 실린 본회 김영희 데오필라 수녀님의 글입니다>
 
고대 수도승 사회와 Lectio Divina    
   
          Lectio Divina가, 그리고 성경이 고대 수도승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것은 우리의 상상과 이해를 초월한다. 수도승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고, 성경은 수도승들의 거의 유일한 책이었으며, 성경은 수도승들의 삶 자체였다. 그들은 밤낮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가능하면 성경 전체를 다 외워 마음속에 성경을 지니고 다녔으며 끊임없이 말씀을 되새겼다. 성경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그들 삶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여기에서는 고대 수도승들의 교육적, 경제적 상황이나 그들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을 읽을 정도의 교육 수준은 되었는지, 성경이 아주 귀했던 그 당시에 성경을 소유할 수는 있었는지 알아보면서 그들의  Lectio Divina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빠꼬미오의 공동체에서는 수도원에 입회를 원하는 지원자들에게 성경의 일부를 암기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글을 배우도록 한다. 수도생활을 원하는 이들 중에 글을 모르는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빠꼬미오의 수도승들은 길을 걸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상 성경을 묵상하며, 되새김하며 다녔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경을 암기하고 있어야 했다. 수도승들은 적어도 신약성서와 시편을 암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을 겨우 깨친 이들이 성경을 읽고 암기할 수는 있었겠지만 성경 공부나, 세밀한 독서를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는 말로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빠꼬미오는 일주일에 3번(토요일에 한번, 일요일에 두 번), 그리고 각 공동체의 원장들은 단식일, 즉 수요일과 금요일에 강의를 했다. 그러니까 1주일에 5번의 강의가 있었는데, 그 외에도 아빠스는 유익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강론을 했다. 모든 강의는 성경에 대한 것이었다. 예로니모가 그의 22번째 편지(22,35)에서 빠꼬미오 공동체의 강의를 듣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장상의 성경강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며 몰두해서 들었는지 알 수 있다. : ‘ 아버지가 강의를 하는 동안 모두는 경건한 침묵 속에서 들었다. 다른 형제에게 눈길을 돌리거나, 기침소리를 내는 이 조차 없었다. 들으면서 감동의 눈물이 조용히 얼굴 위로 흘러내렸고, 회한의 고통 소리조차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한편 다른 수도원들의 경우에는 글을 모르는 수도승들이 성경을 배우고 골수에 박아 넣고 그것을 살기 위해서 꼭 글을 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적힌 값비싼 성경을 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말씀을 암기하여 마음 깊이 새겨 넣는 방법으로 성경을 소유했다. 시 전례시 가대에서 또는 공동독서시간에 성경을 듣고 외우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는데, 이것은 글을 아는 이들이건 모르는 이들이건 마찬가지였다. 

        에집트의 은수자들은 주로 에집트 사회의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가난을 피해서 온 농사꾼들 이거나, 군대를 피해 도망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에집트의 단순하고 세련되지 못한 세계로부터 온 이 수도승들의 대부분은 교육정도가 아주 낮아,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이스어를 알았고, 콥트어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은 신학적 고찰 등 지성적 탐구에 대해서 불신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교리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수도승의 신심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조차했다. 책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어떤 은수자들에게는 가난을 거르스는 죄였다. 이들의 신심은 전적으로 실질적이며, 단순하고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삶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사는 것 자체를, 완덕에 대해서 분석하기 보다는 완덕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실천을 강조하는 영성의 자취를 우리는 베네딕도 규칙에서도 만날 수가 있다. 가난하고 무지한  수도승들이 성경을 소유하기도, 읽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며, 성경의 세밀한 독서는 더더욱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성경말씀을 외우고 하루 종일 되새김을 했다.

        그러나 한편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박식하고 저술가들인 수도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지식층 수도승들이라고 부른다. 이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소아시아의 바실리오, 그레고리오 나지안조, 니싸의 그레고리오들이며, 이집트에서는 에바그리오 폰티코, 팔라디오, 카시아노, 그리고 오리게네스주의자들이 이에 속한다.

        에집트의 지식층과 비지식층 수도승들은 자주 일치하지 않았고, 때로는 서로 간에 적대의식을 드러냈다. 비지식층의 수도승들은 지식층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영성에 대해 집착과 우월감을 가지고 지식층 수도승들의 학문과 이론에 대해서 냉소를 보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학문은 허영의 근원으로 간주되었다. 반면에 오리게네스 주의자들로서 성경의 영적 해석을 이해하고 있던 지식층 수도승들은 단순한 비지식층 수도승들이 신인 동형론자들로서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인간모습으로 상상하며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방법에 대해서 염려를 보이며 또한 비웃기도 했다. 

        이 두 계층 수도승들 사이의 갈등은 오리게네스 주의를 중심으로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된다. 교회 지도자들은 1세기 이전에 살던 오리게네스(+253)의 어떤 가설들이 단순하고 순진한 수많은 수도승들에게 미칠 수 있는 나쁜 영향들에 대해서 좀 지나칠 정도로 염려를 하고 있었다. 393년 부활절에 살라미나의 주교 에피파니오가 예루살렘에서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공적으로 오리게네스의 잘못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예루살렘의 주교인 요한은 오리게네스주의자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수도승들 간의 분열이 극대화하게 된다. 이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필로는, 신학적이거나 객관적인 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항하는 수도승 무리들의 거대한 숫자에 겁을 먹고 소수의 지식층들인 오리게네스 주의자들을 유배 보내기로 결정한다. 397년 경 결국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지식층 수도승들이 에집트 사막에서 쫒겨 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수도승들의 세계는 아주 깊은 타격을 받았고, 수도승들 간에는 더 큰 분열이 일어났으며, 평화를 잃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에집트 사막에는 비지식층 수도승들만이 남게 되고, 에집트의 일반 수도승들에게 오리게네스로부터 내려오는 성경 해석법이라든지 성경을 지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없어진다. 그들은 단지 성경을 외우고 되새기는 데에 전념을 다했다. 수도승들은 성경을 각 장마다 가능하면 성경 전체를 외우려고 노력하면서 되새김을 했다. 이 되새김은 수도승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되는데, 이것은 안토니오 마카리오, 카시아노, 빠꼬미오등 많은 수도승들에게서 입증된다. 

        한편 동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예로니모는 그 누구보다도 성경과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 성경은 하늘의 양식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했다. 따라서 수도승들이 성경을 항구히 읽고 심화하고 각 음절, 각 말마디를 검토하고 음미해야 한다고 한다. 예로니모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우리의 의무는 성경을 그 살과 정맥까지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로니모로 인해서 성경 공부는 더 학문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는 그의 제자 에우스토키아에게 밤중에 2-3번 일어나 성경을 되새김하라고 권하는 데, 이것은 성경을 외우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지적수준이 높은 에우스토키아에게 성경을 읽고 관찰하고 탐구하고 묵상하도록 가르친다. 이처럼 예로니모는 수도승들에게 말씀을 외우고 되새기도록 요구할 뿐 만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박식해 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성경 원본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언어를 공부하고, 성서의 문자적 의미신비적 의미를 알아듣기를 원했다. 그는 성경의 문장을 한 마디 한 마디 나누어 읽고 세심하게 분석할 때에 영혼은 교육되고 영적 도움을 받게 되며, 이러한 주의 깊은 독서도 이미 묵상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오리게네스 주의 사건으로 에집트를 떠나게 된 것으로 보이는 카시아노는 콘스탄티노플, 로마를 거쳐서 마르세이유에 수도원을 세우고, 제도서와 담화집을 쓴다. 그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오리게네스의 방법을 받아들여 성경의 역사적, 자구적 의미영적 의미, 그리고 다시 tropologia, allegoria, anagogia- 비유적, 은유적, 신비적 의미의 세 가지 의미를  말하고 있다.(*) 그는 성경에 있는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나무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떤 이는 날 것으로 먹고, 어떤 이는 익혀서 먹으며, 또 동물들을 위한 것으로 읽기도 한다고 말한다. 날것은 문자에서 얻어진 문장들이고, 익은 것은 영적 열쇄 안에서 읽혀진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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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 라틴어 용어들인 tropologia, allegoria 를, 각각 비유적, 은유적으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도덕적/윤리적, 우의적/풍유적 으로 번역하여야만,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119항에 주어진 용어 번역들과 일치되는 우리말 번역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의 직전 글인 다음의 글에 주어진 각주들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 필독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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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대의 이태리 몬떼 까시노에서 쓰여진 베네딕도 규칙 58,20에 보면 서원을 할 때에 글을 모르는 이가 있으면 청원서를 다른 사람에게 써 달라고 부탁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베네딕도 수도원에는 서원을 할 때까지도 글을 쓸 줄 모르는 이들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수련을 받는 동안 내내 성경을 읽을 수 없던지 적어도 잘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련자들은 수련자들의 방에서 묵상하고, 먹고, 자라고 한다. 글을 알던지 모르던지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먹고 자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수도승들의 삶에서 기본적인 일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순절에는 도서실에서 책들을 받아서 읽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은 글을 읽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 48장에서 Lectio를 vacare(여가시간을 갖다, 자유롭다) 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Lectio Divina를 놀이처럼 자유롭게 즐기도록 초대한다. 

        시리아의 수도승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인물들과 실제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깊이 빠져서 읽었고, 성경의 인물들 사이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읽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묘사하고 있는 글을 보면, ‘수도승들은 예언자들에게서 바오로에게, 또 모세로부터 이사야에게로 넘어갈 수 있고, 이사야에서 요한 또는 다른 인물들에게로 넘어간다.’ 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미드라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경을 온전히 암기하고 있는 수도승들에게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 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며 깊은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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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 미드라쉬(midrash)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으니 필히 참고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1.htm <----- 필독을 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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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아서 8장의 내용과 루가 4,16-21, 엠마오의 제자들의 이야기(루가 24,13-25) 는 성경 속의 Lectio divina의 예로서 제시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Lectio divina는 되새김보다는 성경을 함께 읽고 듣고, 이해하고,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이다. 결국 미사전례시의 말씀의 전례, 시전례, 공동 독서등,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모든 시간들은 바로  Lectio divina 시간이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사실 고대 수도승들에게, 특히 글을 모르는 이들, 책이 없는 이들에게 이러한 시간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간들이었다. 이들은 그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암기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 수도승들의  Lectio divina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았다. Lectio Divina는 수도승 생활에 있어서는 먹고 자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거의 본질적인 수행이었다. 수도승들의 책이라고 할 만큼 수도승들에게 성경은 중요했고, 수도원의 하루는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고, 밤낮으로 성경을 외워 묵상했다. 이건 지식층이건 비 지식층이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대 수도승들의 성경과 함께하는 모습들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출신, 교육정도, 문화정도가 다른 그들은 각자의 상황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제자들에게도 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성경을 배우도록 지도했다. 글을 모르는 이들은 공동독서 시간에 말씀을 듣고 할수 있는 한 암기했다. 글을 아는 수도승들은 성경을 끊임없이 소리 내어 읽고, 암기하고, 끊임없이 되새김을 하고, 자신의 피와 살 안에 박아 넣었다. 또한 할 수 있는 이들은 암기하고 되새기는 것 이외에도 성경 속에서 깊은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기를 요구받았다. 글을 읽을 정도의  단순한 수도승들은 명백하게 드러나는 문자적인 의미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이들은 성경의 모든 말, 모든 장면 속에 있는 내면적이고 숨겨져 있는 영적 의미도 열정을 가지고 찾았다. 

        오늘 우리들 사이에는 고대 수도승들 사이에 있었던 지식인과 비지식층들 사이의 구분은 없고, 사실 우리는 모두 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Lectio Divina를 통해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되새김도, 문장 분석도, 세밀한 독서도, 미드라쉬도 다 유익하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고, 더 정통인지는 말할 수 없다. 어떤 것이건 Lectio Divina를 도와주는 방법일 뿐이다. 단지 사람에 따라 세밀한 독서를 하면서 말씀이 더 깊이 와 닿는 사람이 있고, 되새김을 하면서 더 깊이 말씀이 오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성경을 읽던지 중요한 것은 성경에 맛을 들일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자주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알아듣고, 기도하고, 자주, 아니 하루 종일, 밤낮으로 말씀 안에서 머물러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만나며 말씀을 따라서 살수 있어야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삶이 말씀 안에 온전히 젖어서 말씀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되새김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기본적인 수행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밀한 독서나 미드라쉬도 성경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이 자유롭게 활용되고 동반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이 시간을 준비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알아들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정말  Lectio Divina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Lectio Divina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 여럿이듯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수도승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고대 수도승들처럼 말씀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과 함께 하루 종일 말씀에 젖어서, 그것을 즐기면서 말씀 자체가 되어서 사는 것 말이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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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 글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 필독을 권고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대하여" 제목의 글의 제4-5항으로 붙이려고 하였으나, 용량 제한 때문에 별도로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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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예수회 후원회 홈페이지 성경대학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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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성경대학 강의록은 송봉모 신부님의 성경대학 강의 3년분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 본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
 
가나 혼인 잔치에서 벌어진 기적은 물론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 기적 사건이나 담론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문자적 해석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이적 사건은 사실상 사용된 단어나 기술된 내용을 넘어서서 영적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로서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가리켜서 성전이라 말씀하시는데, 만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2,19-22). 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은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는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사용된 이미지나 단어가 실제로 가르치고자 하는 영적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다.
 
알레고리란 말은 그리스말로서,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영적인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체적 이미지나 사건을 갖고서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parable)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따로 해석해 주는데, 그 해석은(마르 4,13-20) 알레고리(allegory) 차원에서 이루어진 해석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린 씨앗은 실상 말씀을 가리킵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진 사람들이란 이렇습니다. 말씀을 듣자마자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돌밭에 뿌려지는 사람들이란 이렇
     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며 받아들이지만 자기 속에 뿌
     리를 내리지 못하고 한때뿐입니다. 이윽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집니다.(마르 4,1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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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 이 부분에 대한 도움글은 아래의 부록에 있으니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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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나 혼인잔치에서 벌어진 기적 사건은 어떠한 알레고리 양식에서 해석될 수 있는가?
 
제일 먼저 우리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혼인잔치가 "사흘째 되던 날"에 시작되었다는 서두(序頭)이다. 요한 공동체 신자들이 "사흘째 되던 날"이란 말을 들을 때 즉시 연상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사흘째 되던 날 당신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 예고했었기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흘째”란 단어 앞에서 주님의 부활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 날은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 죽음을 거쳐 완성된 날이다. 우리들의 연상(聯想)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복음사가는 영광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가나 기적 이야기를 끝낸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가나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2,11). 여기서 얘기하는 영광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이다.
 
또 다른 알레고리적 해석은 물이 포도주로 바뀐 점에서 이루어진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정결 예식에 쓰이던 유대교의 물, 곧 율법의 물이 성찬 전례에서 쓰이는 포도주, 곧 생명의 포도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옛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유대사상에서 물은 은유적으로 율법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다. 집회서 15장을 보면, "율법을 체득한 사람은 지혜를 얻으리라. . . 그는 지혜의 물을 마시며 자랄 것이다"(집회 15,1,3)라 하여 물이 율법과 연결된다. 랍비 요하난은 이사야 32장에 나오는 말씀, "복되어라, 너희는 물길이 닿는 곳마다 씨를 뿌리리라"(이사 32,20) 구절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로 율법에 종사하는 이를 가리킨다고 (Babe Kamma 17a). 이렇게 율법을 상징하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포도주는 성서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쓰인다. 메시아 시대의 기쁨과 행복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그 날이 오면, 산마다 포도즙이 흐르고
     언덕마다 젖이 흥건하리라 (요엘 4,18).
   
     야훼의 말씀이시다.
     산에서는 햇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무르익은 곡식이 물결치리라.
     내 백성 이스라엘의 국운을 이렇게 회복시켜 주면,
     저들은 쑥밭이 된 성읍들을 다시 일으켜 그 안에 살며,
     제 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 마시리라 (아모 9,13-14).
 
혼인 잔치 역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포도주가 가장 필요한 자리는 혼인 잔치인 바, 성서에서 혼인 잔치는 포도주처럼 종말론적 차원에서 쓰인다(이사, 25,6; 예레 31,12; 에녹 10,19; 2바룩 29,5.). 다가올 하느님 나라와 관계해서 자주 언급된다.
 
     만군의 야훼께서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연한 살코기를 볶
     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주시리라(이사 25,6)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 있었다는 것도 알레고리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먼저 혼인이란 말은 구약성서와 유대 사상에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갈림이 없는 계약관계를 가르쳐 주는 보편적인 상징어이다. 구약에서 하느님과 백성 사이가 자주 부부 관계로서 표현된다.
 
     "너의 창조주가 너의 남편이다"(이사 54,5).
 
     "젊은이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듯 너를 지으신 분이 너를 아내로 맞이
      하신다"(이사 62,5).
 
     "나는 너를 영원히 내 아내로 맞이하리라. 너를 아내로 맞이하여 줄 결
      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사랑과 자비이다"(호세 2,21).
  
종말론적 결혼식에서 신랑은 바로 예수이다. 이 점을 세례자 요한이 밝히고 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또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신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과 함께 하는 동안에 단식하지 않는다.” 직접 당신을 신랑으로 지적하지는 않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신랑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것에 비교하였고 (마태 25), 하느님 나라는 왕자의 혼인 잔치에다 비교하였다 (마태 22,1-11).
 
바울로도 예수님을 신랑으로 가리키고 있다. “나는 여러분을 한 남자와 약혼시켰으니, 그것은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입니다”(2고린 11,2). 또 에페소 5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제시하고 있다. 같은 주제가 묵시록에서도 표현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을 것이다(묵시 19,6-9).
 
하느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을 상징하는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서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꺼진다는 것은, 다 유대교가 갖고 있는 부적합성과 율법이 형성해 놓은 질서 세계의 한계점을 드러낸다.
 
이 점은 "누구나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만 못한 것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있었군요."(요한 2,10)란 말에서도 드러난다. 새 포도주가 옛 포도주보다 더 맛있다는 것은, 율법의 시대보다 복음의 시대가, 유대교보다 그리스도교가 더 우월함을 보이고, 그렇기에 대치될 수밖에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또 예수그리스도는 메시아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포도주를 갖고 온 분, 곧 종말론적인 기쁨을 가져오신 분이란 것이다.
 
 
율법의 시대보다 복음의 시대가, 유대교보다 그리스도교가 더 우월하다는 상징적 주장은, 물 항아리가 6개였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얻는다. 이스라엘에서 7은 완전수이지만, 7에서 하나를 뺀 6은 불완전수를 상징한다. 알레고리 차원에서 6개의 항아리는 유대 율법이 가져다주는 빈 효과를 가리킨다. 빈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고 그것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영적 질서인 성찬전례가 시작되고, 구약의 정결 예식이 대치되었음을 의도한다.
 
이번에는 "사흘째 되던 날"과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을 함께 연결해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할 차례다. “사흘째 되던 날”이 예수님께서 영광 입으신 부활을 가리키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상징하고 있다면, 변화된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게 된다.
 
Oscar Cullmann에 따르면, "가나 결혼 잔치의 포도주는 주님의 성찬에서 베풀어지는 포도주, 즉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키고 있다"고.
 
변화된 포도주가 예수 수난을 가리킨다는 말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한 말에서도 입증된다.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2,4).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되는 “예수님의 시간”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시간이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때"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구원이 성취되는 방식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 것임을 암시한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려준 사람은 성서 본문에서 "여인"으로 표기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다. 이 단어 역시 알레고리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여인”이란 단어를 통해서 복음서 저자는 마리아가 구원사에서 갖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참조로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 처음으로 마리아론이란 신학적 사고를 요한복음 2장과 19장(19,25-27)에서 제시하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한 말, "[신혼부부]에게 포도주가 떨어졌구나."는 말은, “하느님 백성에게 영적 음료가 떨어졌구나.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마리아는 떨어진 포도주가 다시금 넘치도록 중개하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일치 안에서 수행하는 중개 역할을 가리킨다.
 
 
가나의 혼인 잔치 표징이 알려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대치”라는 단어를 참 많이 언급하였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유대교 물이 그리스도교의 포도주로, 즉 정결 예식에 쓰였던 율법의 물이 성찬 전례에서 쓰이는 생명의 포도주로 대치되었음을 상징한다. 또 새 포도주가 옛 포도주보다 더 맛있다는 것은, 열등한 율법의 시대보다 우월한 복음의 시대로 대치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말하였다.
 
실상 요한복음 1장부터 4장까지 핵심적인 주제는 대치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된 그리스론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의해 대치되고, 지금 우리가 다루는 본문 2장에서는 유대교의 정결 예식이 그리스도교의 성찬 전례로서 대치된다. 또 2장 후반부에 서술된 성전 정화에서는 유대교의 성전이 예수라는 새로운 성전, 부활의 몸으로 대치되고, 옛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예배가 새로운 성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또 4장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우물에서 나오는 물, 다시 목마르게 만드는 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로 대치된다. 이렇게 요한복음 전반부는 일관되게 대치란 주제 개념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신원을 알려준다.
 
한편 가나 혼인 잔치 기적 이야기가 알려주고 싶은 또 다른 메시지는 대립이 해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해서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대립이 소멸되었음을 알려준다. 결혼식은 대립된 것의 합일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이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은 너와 나라는 대립의 해소를 필두로 해서 우리 내면에서 감지하게 되는 모든 대립의 해소를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극단적인 대립인 하느님과 인간, 하늘과 땅의 대립이 해소되는 것을 상징한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의 결합을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결혼관계로 표현하였다.
 
대립 해소란 주제는 4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다시금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반목해왔던 인종적, 종교적 대립은 물론이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적 대립에도 종지부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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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태 16,21; 17,23; 20,19; 27,64; 루가 9,22; 13,32; 18,33; 24,7.46.
2)Borchert, John, 1:153.
3)Dodd, Interpretation, 300.
4)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sity, 1953) 297; 레온 모리스, 요한복음, 218.
5)복음서에서는 여러 차례 시간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지만 죽이지 못한 것은 "그분의 시간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7,30; 8;20). 최후의 만찬은 다음 문장과 함께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당신이 시간이 온 것을 아셨다" (요 13,1). 그리고 마지막 기도는 다음같이 시작된다, "아버지 시간이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 17,1). 수난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 (요 12,23)라고 말한다.
6)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53) 293-317; Talbert, Reading John, 80-120.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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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1 >>
 
비유(parable)우의/풍유/알레고리(allegory)의 차이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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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
 
출처 1: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나해-II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에제키엘 17,22-24) 입문 및 해설
 
 
제1독서 - 에제키엘 17,22-24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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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예언자 에제키엘과 그의 예언서에 대한 안내는 또한 본 해설서 시리즈의 나해-II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에제키엘 2,2-5)의 입문과 그곳의 각주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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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 기원전 605년, 8년 뒤인 기원전 597년, 그리고 다시 11년 뒤인 기원전 586년, 이렇게 바빌론으로 세 번의 유배가 있었다. 이 세 번의 유배 모두 바빌론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에 의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첫 번째 유배는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 하에서 발생하였으며 그리고 이 유배는 젊은 예언자인 다니엘(Daniel)을 포함하였다. 예루살렘에 대한 다른 포위 공격 동안에, 여호야킨 왕(King Jehoiachin)과 약 만 명의 남자들, 특히 용사(soldiers)들과 대장장이(metal workers)들이 두 번째 유배라고 알려진 때에 유배가 되었으며, 에제키엘(Ezekiel)은 이 포로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에, 그 땅의 가장 가난한 자들과 이웃 나라들로 도망을 갔던 자들을 제외하고는, 유다 왕국의 모든 사람들은 끌려갔다.
 
     그의 이름이 ‘하느님께서 굳세게 하신다(God strengthens)’를 뜻하는 에제키엘은 사제 가문(priestly stock) 출신으로, 아마도 차독 집안(house of Zadoc, house of Sadoc)의 한 구성원이었을 것이며,53) 그리고 그 자신이 사제였다. 그는 결혼을 하였으나,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빌론에서 그는 자신 소유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는 이 시기의 유배자들이 그들의 가족 구성원들과 가구, 가재 등의 동산(movable possessions)들, 즉 그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것들 모두를,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배자들은, 비록 편안하였으나, 그들이 포로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는데(painfully aware), 이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Temple)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주님(Yahweh)의 감정을 해쳤다고(offended) 생각하였으나 그러나 주님의 분노가 조만간 가라 앉혀지고 또 그들이 자신들 고유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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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2역대기 31,10에서, RSV에서는 house of Sadoc이라 표기하였으며 NAB에서는 house of Zadoc 이라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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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제키엘은 (그의 유배 후 4년째인) 기원전 593년에 그의 예언직 소명(prophetic calling)을 받았으며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임무는 그의 동료 유배자들에게 조기 귀환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성전(Temple)이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는(inviolability) 그들의 신념(faith)처럼, 헛된 것임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유다 왕국 백성의 분산(dispersion, diaspora)을 명하셨기 때문이었다. 7년 뒤에 발생하게 된 사실인 예루살렘의 함락은 에제키엘의 예언자적 사목(prophetic mission)의 진위(truth, 眞僞)를 증명하였기에, 이제 에제키엘은 이 백성이 그들의 선조들이 범한 죄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죄 많음(sinfulness)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납득시켜야(drive home) 하였다. 이는 만약에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위치한 성전(Temple)이 파괴됨으로써, 이 백성은 꺾이었고(crushed) 또 굴욕감을 느끼게 되었으며(humiliated), 그리고 그들은 자포자기에 직면하였다. 에제키엘은 위안과 희망의 전언(words)들을 제공하였는데,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희망에 대한 것이며, 이를 위하여 이 성스러운 저자는 A-B-A 샌드위치로 알려져 있는 문학적 수단(literary tool)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해석(interpretation)을 괄호로 묶기 위하여 두 개의 풍유(allegories)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풍유(allegory)는 각 세부 사항(detail)이 어떤 실재(reality)를 의미하는 하나의 문학적 작문법(literary composition)이다]. 이 제1독서의 경우에 있어, 제17장이 전체 샌드위치인데, 이 샌드위치는 이 샌드위치의 한 측면을 형성하는 (두 마리의 독수리들에 대한 풍유인) 제1-10절들, 이 풍유에 대한 해석인 제11-21절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독서(제22-24절들)를 두 번째 풍유로 가지고 있다. 이 독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체 A-B-A 샌드위치를 서로 맞추어 보며 읽을 것이다(read through).  
 
 
첫 번째 풍유
 
17,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말하여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큰 날개와 긴 깃이 달리고 울긋불긋한 깃털로 가득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레바논으로 갔다.
 
여기서 큰 독수리는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이다. 레바논(Lebanon)은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형상(image, 形象)이다(예레미야 22,6;.즈카르야 11,1-3; 이사야 10,34를 보라).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고 4 가장 높은 가지를 꺾어
 
가장 높은 곳의 잔가지(topmost twig)는 유다 왕국의 왕인 여호야킨(Jehoiachin)인데, 그는 에제키엘과 함께 볼모로 잡혔다(2열왕 24,8-15).
 
상인들의 땅으로 가져가서 장사꾼들의 성읍에 심어 놓았다. 
 
여기서 성읍은 바빌론을 말한다.
 
5 그 땅에서 난 씨앗을 가져다가 기름진 밭에 심었다.
 
여기서 씨앗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치드키야(Zedekiah)인데, 그는 여호야킨의 뒤를 이어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하여 유다 왕국의 임금으로 임명되었다(2열왕 24,17-18).
 
큰 물 곁의 냇버들처럼, 버들잎사시나무처럼 심었다. 6 싹이 돋아 포도나무가 되어 낮게 옆으로 퍼졌다. 줄기는 독수리를 향하고 뿌리는 땅에 박혀 있었다. 이렇게 그것은 포도나무가 되어 가지를 뻗고 덩굴손을 내뻗었다. 
 
여기서 버드나무(willow)와 포도나무는 급속히 성장하는 어떤 것에 대한 언급들이다. 칡(kudzu)을 이와 같은 현상과 관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7 그런데 큰 날개가 달리고 깃털이 많은 큰 독수리가 또 하나 있었다.
 
이 큰 독수리는 이집트의 파라오인 파삼메티쿠스 2세(Pasammetichus II, Psamtik II)이며, 54) 치드키야는 기원전 588년에 예루살렘에 대한 바빌론의 포위를 푸는 데에 서로 협조하자는 계약을 이 파라오와 맺었다(예레미야 3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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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이 이집트의 임금 파라오 파삼메티쿠스 2세는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 군대에 의하여 함락될 때에 치드키야 를 도와주지 않았던, 예레미아 44,30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집트의 임금 파라오 호프라(Hophra, Apries)의 아버지이다. 한다.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fiatlux2000/Twenty-sixth_dynasty_of-Egyp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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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포도나무가 뿌리를 그 독수리 쪽으로 돌리고 줄기를 그쪽으로 내뻗었다. 포도나무는 자기가 심긴 밭이 아니라 그 독수리에게서 물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8 그 포도나무는 좋은 밭에, 큰 물 곁에 심어졌다. 햇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 훌륭한 포도나무가 되라는 것이었다.’ 9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 포도나무가 잘되겠느냐? 독수리가 그 뿌리를 뽑고 그 열매를 훑어 말라 버리게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새로 난 잎이 모두 말라 버리지 않겠느냐? 그 포도나무를 뿌리에서 떼어 들어내는 데에는 힘센 팔도 많은 군사도 필요하지 않다. 10 포도나무가 한 번 심어졌다고 잘되겠느냐? 샛바람이 휘몰아치면 바싹 말라 버리지 않느냐? 그것이 자라난 밭에서 말라 버리지 않느냐?’” 1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제10절에서 ‘샛바람’으로 번역한 표현을 NAB에서는 ‘the east wind’로 번역하였다. 이 바람은, 농작물들을 시들게 하는 뜨겁고 건조한, 사막의 열풍(desert sirocco)을 말한다. 이 샛바람은 하느님의 분노(anger)에 대한 은유(metaphor, 隱喩)이다(탈출기 10,13; 14,21; 시편 78,26). 이 진노(wrath)라는 도구는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였다. 치드키야는, 여호야킨이 유배되었을 때에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하여 유다 왕국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힘없는 왕이었다. 치드키야는, 그가 동맹 관계의 계약을 맹세하였던(2역대기 36,13) 바빌론의 왕과 그가 도움을 요청하였던 이집트의 왕 사이에서,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was caught). 예언자 에제키엘과 예언자 예레미야 둘 다는 치드키야가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빚을 지고(owed) 있었던 동맹 관계를 지지하였다(speak of)(예레미야 22,1-7).
 
 
해석
 
12 “이제 저 반항의 집안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느냐?’ 하고 물으며, 이렇게 말하여라. ‘자, 바빌론 임금이 예루살렘에 와서, 임금과 고관들을 잡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3 그는 또 왕실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그와 계약을 맺고 맹세를 시킨 다음, 이 땅의 유력자들을 잡아갔다. 14 그것은 이 왕국이 보잘것없이 되어 독립하지 못하고, 계약을 지켜야만 존속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15 그러나 그는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고 이집트로 사절들을 보내어, 군마와 많은 군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다고 성공할 것 같으냐? 그렇게 하는 자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계약을 깨뜨리고서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16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자기를 왕위에 앉힌 임금이 있는 곳에서 죽을 것이다. 그는 그 임금이 시킨 맹세를 무시하고 그와 맺은 계약을 깨뜨렸다. 그는 그 임금 곁, 바빌론에서 죽을 것이다. 17 적군이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공격 축대를 쌓고 공격 보루를 만들 때, 파라오가 강한 군대와 수많은 병사로 그를 전쟁에서 도와주지 않는다. 18 그는 맹세를 무시하고 계약을 깨뜨렸다. 그가 손을 잡았다가 이런 짓들을 다 하였으니, 그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구절들은 왜 에제키엘이 치드키야의 바빌론에 대한 거부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가 하느님 앞에서 맹세하였던 계약인 네부카드네자르와의 준엄한 계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이었다.
 
19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그가 무시한 나의 맹세와 그가 깨뜨린 나의 계약을 그의 머리 위로 되갚겠다. 20 나는 그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 놓겠다. 내가 친 망에 걸리면, 나는 그를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나에게 저지른 배신을 그곳에서 심판하겠다. 21 그가 거느린 모든 군대의 정병들은 모두 칼에 맞아 쓰러지고, 남은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이 말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비난은, 3인칭적인 설명이 1인칭적인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뀌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계약은 이미 치드키야와 네부카드네자르 사이의 계약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치드키야와 하느님 사이의 계약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이 계약이 맹세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하느님께서 바빌론을 벌을 내리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지만, 이런 판단(the judgement)을 내리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두 번째 풍유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순’으로 번역한 표현을 NAB에서 ‘a tender shoot’로 번역하였다. 이 순은 다윗 가문에서 나올 미래의 왕을 나타낸다(2사무엘 7,12). (순 혹은 가지를 뜻하는, nezer로부터 유래하는) 나자렛(Nazareth) 단어는 이사이(Jesse)의 순을 말한다(이사야 11,1). 이사이는 다윗 왕의 아버지였다.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새들이 노아의 방주(Noah's ark) 이야기(창세기 6,20)에 귀를 기울이는데(harken back),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새들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설명의 일부분이다.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앞 절의 훌륭한 향백나무(cedar)는 유다 왕국의 왕실(royal house)에 대한 상징이다. 만약에 이 훌륭한 향백나무가 유다 왕국의 왕을 나타내면, ‘들의 모든 나무들(all the trees of the field)’은 주변의 왕들을 나타내기에 이 왕들은 하느님께서는 힘센 자(the mighty)들을 아래로 낮추시고(humbles) 새로운 통치자(power)를 무(nothing)로부터 들어 올리신다(raises up)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다 왕국(Judah)이 떨어졌던] 벌(punishment)이라는 비천한 상태로부터 유다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유다인들의 새로운 왕을 키우고 계신다(brings up). 이 향백나무는 다윗이라는 메시아적 나무(messianic tree of David)이다.
 
참고 자료 1 : 비유(parable)이라는 용어 대신에 우의/풍유/알레고리(allego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에제키엘 17,11-21에 대한 NAB의 주석은 다음에 있으니 참고하라:
 
 
참고 자료 2 : 비유(parable)이라는 용어 대신에 우의/풍유/알레고리(allego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에제키엘 17,2에 대한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TOP)의 주석은 다음에 있으니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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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2.
 
출처 2: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나해-II 연중 제11주일 복음 말씀(마르코 복음서 4,26-34) 입문과 각주 
 
     복음사가 마르코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임명하신 바로 직후부터 비유(parables)들로써 가르침을 시작하셨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지혜로운 격언(wise saying) 혹은 짧은 가상의(fictitious) 이야기이다. 비유들은 풍유적 요소(allegorical elements)들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mustard seed)’의 비유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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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들에서는 번역을 하면서 비유(parable) 풍유(allegory)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비유(parable)로 번역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제1독서가 포함된 에제키엘서 제17장은 한 개의 풍유이나, ‘성경’에서 비유라는 소제목을 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예를 들어, 아마도 Good New Bible(GNB)에 그러한 소제목이 있는 것의 영향을 받아서인 듯 싶다. 그러나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한 영어 성경으로서 미사 중 독서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교황청의 인준을 받은 성경인 The New American Bible(NAB)의 본문에서는 이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다음의 검색 결과들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search_results4parable.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search_results4alleg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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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3.
 
출처 3: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다해-I (및 다해-II) 연중 제8일 복음 말씀(루카 복음서 6,39-45) 해설의 각주 
 
 
복음 - 루카 6,39-45
 
     오늘 우리는 2주 전에 시작되었던 가르침인 ‘평지에서의 설교’를 완료한다. 우리는 참 행복들과 저주들로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여야 함을 들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마음의 올바름(uprightness of heart)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다.
 
39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비유(parables)들은 지혜로운 금언 혹은 가상의(fictitious) 짧은 이야기들이다. 비유들은 구약 성경과 라삐 문헌(rabbinic literature)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문학 형식의 진전된 새로운 단계이다. 비유들은 풍유적 요소(allegorical elements)들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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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비유’에 대한 NAB 마태오 복음서 13,3에 주어진 주석이다:

(1) 비유들로: (그리스어로 parabole인) ‘비유(parable)’라는 단어는 칠십인 역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 mashal을 번역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이 단어는 격언(axioms)들, 금언(proverbs)들, 비교(similitudes)들, 그리고 풍유(allegories)들 등과 같은 다양한 문학 형식들을 포함하는 명칭이다. 신약 성경에 있어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한 같은 폭이 발견되나,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들과 일상적 삶의 사건들 사이의 설명에 도움이 되는 비교(illustrative comparisons)들을 주로 의미한다. 때로는 해당 사건은 통상의 경험과는 상당히 다른 이상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서 13,33에서의 누룩의 비유에서 엄청난 양의 빵), 이것은 듣는 이의 호기심을 더욱 예민하게 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이야기의 각 세부 사항에 표상(表象)적 의미(figurative meaning)가 주어지면, 이 이야기는 하나의 풍유(allegory)이다. (신약 성경에 있어) 비유와 풍유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계속하는 자들은 비유는 단지 한 개의 비교의 핵심(point of comparison)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리고 비유들은 예수님 가르침의 특징이었던 반면에, 비유들에 있어 풍유적 세부 사항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비유들의 애초의 의도를 벋어나는 의미들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며 심지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개의 비유로부터 모든 풍유적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버려진(abandoned),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는 해석 방식이다(엮은이 번역).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matthew13.htm

(2) 예수님의 비유들에 포함된 풍유적 요소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NAB 신약 성경 각주들을 참고하라. 특히 마태오 복음서 21,33-46에 대한 각주를 참고하라:

참고 자료 1:

(3)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서도 ‘구약 성경의 풍유들’과 신약 성경에서의 ‘예수님의 비유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NAB 주석자들의 입장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나해-II 연중 제11주일 복음 말씀(마르코 복음서 4,26-34) 해설의 각주 및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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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구약 성경 비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암양(the ewe lamb)(2사무엘 12,1-14)
2) 두 아들과 복수자(two brothers and the avenger)(2사무엘 14,1-11)
3) 도망간 포로(escaped captive)(1열왕 20,35-40)
4) 포도밭(the vineyard)(이사야 5,1-7)
5) 독수리와 포도나무(the eagle and the vine)(에제키엘 17,3-10)
6) 사자가 새끼를 낳다(the lion whelps)(에제키엘 19,2-9)
7) 포도나무(the vine)(에제키엘 19,10-14)
8) 산불(the forest fire)(에제키엘 21,1-5)
9) 끓어오르는 냄비(the boiling pot)(에제키엘 24,3-5)
 
비유의 목적은 듣는 이에게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의(眞意, a point)를 그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게 하는 데에 있다. 더구나 비유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의를 끌기에(whets) 듣는 이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comes out) 듣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 때문에, 붙잡혀 있게 된다(is trapped).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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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의/풍유(allegory)비유(parable)이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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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2 >>
 
A2-1.
다음은 St. Joseph 판 NAB의 부록으로 주어진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parable 단어에 대한 용어 설명입니다:
 
PARABLE. In Hebrew, mashal, which signifies both a significant short story and an enigma. It is a case of a comparision taken from the realities of daily life to express the mystery of the reign of God (Mt. 13, 11). The only thing to be retained is the main idea of a parable, without the nesessity of pausing over all the details. Jesus made extensive use of this mode of speaking (Mt. 13, 34) and more than 30 parables have been recorded in the Gospels.
 
(졸번역)
비유(Parable). 히브리로 마샬(mashal) 인데, 이 단어는 어떤 눈에 띄게 짧은 이야기 및 어떤 수수께끼(an enigma) 둘 다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통치(the reign of God, 즉 하느님 나라)의 신비(마태오 복음서 13,11)를 표현하기 위한, 일상 생활의 실재(realities)들로부터 택하여진 어떤 대비(a comparison)의 경우(a case)를 말한다. 마음에 간직되어야만 하는 유일한 것은, 모든 세부 사항들 여기저기에 머뭇거릴 필요성 없이, (주어진) 비유의 주된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하기 양식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셨으며(마태오 복음서 13,34) 그리고 복음서들에 있서 30개보다 더 많은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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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2.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parable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PARABLE

A short story based on a familiar life experience used to teach a spiritual lesson. It resembles the fable and the allegory. Jesus used the parable many times in his public ministry. "Why do you teach them in parables?" his disciples asked him. "Because," he replied, "the mysteries of the kingdom of heaven are revealed to you, but they are not revealed to them" (Matthew 13:10-11). It was a means of teaching his doctrine especially to those who accepted him as Messiah. (Etym. Greek parabol_, comparison, parable; literally, a throwing beside, juxtaposition.)

NEW TESTAMENT PARABLES. 

In Matthew:

The children who play Matthew 11:16-19
The sower Matthew 13:3-8
The tares Matthew 13:24-30, 36-43
Mustard seed Matthew 13:31, 32
The leaven Matthew 13:33
Hidden treasure Matthew 13:44
Pearl of great price Matthew 13:44, 45
Dragnet Matthew 13:47, 48
The lost sheep Matthew 18:12-14
Unmerciful servant Matthew 18:23-35
Laborers in the vineyard Matthew 20:1-6
Prodigal Son Matthew 21:28-32
The wicked husbandman Matthew 21:33-44
Great Supper Matthew 21:1-14
Marriage feast Matthew 22:1-14
The ten virgins Matthew 25:1-13
The pounds Matthew 25:14-30 

In Mark:

The sower Mark 4:3-8
Seed growing secretly Mark 4:26-29
Mustard seed Mark 4:30-32
The wicked husbandman Mark 12:1-11

In Luke:

The children who play Luke 7:31, 35
The two debtors Luke 7:41-43
The sower Luke 8:5-8
Good Samaritan Luke 10:25-37
Importunate friend Luke 11:5-8
Rich fool Luke 12:16-21
Barren fig tree Luke 13:6-9
Mustard seed Luke 13:18, 19
The leaven Luke 13:20, 21
Great supper Luke 14:16-24
Marriage feast Luke 14:16-24
The last place at banquet Luke 14:7-11
The tower and war Luke 14:28-32
The lost sheep Luke 15:4-7
Lost silver piece Luke 15:8-10
Prodigal Son Luke 15:11-32
The unjust steward Luke 16:1-8
Dives, the rich man, and Lazarus Luke 16:19-31
The unjust judge Luke 18:1-8
Pharisee and publican Luke 18:9-14
The pounds Luke 19:12-27
The wicked husbandman Luke 20:9-18

비유(parable)

어떤 영성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되는, 친숙한 삶의 경험에 근거를 둔, 짧은 이야기를 말한다. 이것은 우화(the fable)와 풍유(the allegory)를 닮았다(resembles).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적 사목에 있어 비유를 여러 번 사용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오 복음서 13,10-11). 비유는 당신의 교리(doctrine)를, 특별히 당신을 메시아로서 받아들인 자들에게, 가르치는 수단이었다. [어원. Greek parabol_, comparison, parable; literally, a throwing beside, juxtaposition.]

 
신약 성경 비유들 

마태오 복음서에 있어: 

The children who play Matthew 11:16-19
The sower Matthew 13:3-8
The tares Matthew 13:24-30, 36-43
Mustard seed Matthew 13:31, 32
The leaven Matthew 13:33
Hidden treasure Matthew 13:44
Pearl of great price Matthew 13:44, 45
Dragnet Matthew 13:47, 48
The lost sheep Matthew 18:12-14
Unmerciful servant Matthew 18:23-35
Laborers in the vineyard Matthew 20:1-6
Prodigal Son Matthew 21:28-32
The wicked husbandman Matthew 21:33-44
Great Supper Matthew 21:1-14
Marriage feast Matthew 22:1-14
The ten virgins Matthew 25:1-13
The pounds Matthew 25:14-30 

마르코 복음서에 있어: 

The sower Mark 4:3-8
Seed growing secretly Mark 4:26-29
Mustard seed Mark 4:30-32
The wicked husbandman Mark 12:1-11

루카 복음서에 있어:

The children who play Luke 7:31, 35
The two debtors Luke 7:41-43
The sower Luke 8:5-8
Good Samaritan Luke 10:25-37
Importunate friend Luke 11:5-8
Rich fool Luke 12:16-21
Barren fig tree Luke 13:6-9
Mustard seed Luke 13:18, 19
The leaven Luke 13:20, 21
Great supper Luke 14:16-24
Marriage feast Luke 14:16-24
The last place at banquet Luke 14:7-11
The tower and war Luke 14:28-32
The lost sheep Luke 15:4-7
Lost silver piece Luke 15:8-10
Prodigal Son Luke 15:11-32
The unjust steward Luke 16:1-8
Dives, the rich man, and Lazarus Luke 16:19-31
The unjust judge Luke 18:1-8
Pharisee and publican Luke 18:9-14
The pounds Luke 19:12-27
The wicked husbandman Luke 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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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3.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헙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용어집에 주어진 parable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괄호 안의 번호는 해당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항목 번호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PARABLES: A characteristic feature of the teaching of Jesus. Parables are simple images or comparisons which confront the hearer or reader with a radical choice about his invitatio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546).

비유(PARABLES)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적 특징. 비유들은 청중 혹은 독자를 하느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오라는 당신의 초대에 관한 근본적인 선택을 마주보게 하는 간단한 묘사(images)들 혹은 대비(comparisons)들을 말한다(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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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 예수님께서 공적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즉시 선포하신, 그리고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 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3.htm <----- 필독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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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46항 및 전후의 항들의 가르침을 읽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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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4.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allegory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ALLEGORY

A long or complicated story with an underlying meaning that differs from the literal or surface meaning. The greatest biblical allegory is the Canticle of Canticles. (Etym. Latin allegoria; from Greek all_goria, a description of one thing under the image of another.)

우의/풍유(allegory)

자구적 혹은 표면적 의미(the literal or surface meaning)와는 다른 밑에 있는 의미(an underlying meaning)를 가진 길거나 혹은 복잡한 이야기를 말한다. 가장 위대한 성경의 우의/풍유는 아가(Canticle of Canticles, 즉 Song of Songs)이다. [어원. Latin allegoria; from Greek all_goria, a description of one thing under the image of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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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4.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allegorical sense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ALLEGORICAL SENSE

Form of biblical interpretation. An actual accomplished fact is understood to be a figure of something else. The literal meaning is expressed in a sustained metaphor. Commonly applied to giving a mystical explanation to any part of the Bible.

우의적/풍유적 어의/의미(allegorical sense)

성경 해석의 한 형식을 말한다. 실제로 성취되는 사실(fact)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어떤 표상(a figure, 表象)인 것으로 이해된다. 자구적 의미(the literal meaning)는 어떤 지속되는 은유(隱喩, metaphor) 안에서 표현된다. 성경의 어느 부분에 대한 어떤 영적인 설명(a mystical explanation)을 제공하기 위하여 통상적으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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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15시간 (자료 조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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