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영혼의 죽음(영적 죽음) 이란? - 야고보 1,15 #<짝연중6주화1독> [성경공부_죽음] [교리용어_죽음] [_영혼의죽음] spiritu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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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9 ㅣ No.1406


질문:

야고보서 1,15는 다음과 같은데,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과 "죽음"은 각각 무엇을 말하고, 그리고 이들 사이에 어떠한 인과 관계가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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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우선적으로, 우리말 성경은 전적으로 번역서이므로, 예를 들어, 영어본 성경의 야고보서 1,15 및 이 절에 대한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주석들과 함께 비교/검토/고찰하는 것이, 이 구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들을 파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야고보서 1,15짝수해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야고보 1,12-18)에 포함되므로, 가톨릭 교회 교도권에서 이미 마련해 준 야고보서 1,12-18을 최소 단위로 하여, 즉, 최소한도로 이 전후 문맥 안에서, 주신 질문들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이 더욱 더 유의미할 것입니다.

2,
2-1.
다음은 "주석 성경" 야고보서 1,15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로마 5,12; 6,23; 7,13에서도 "죄"와 "죽음"의 관계가 비슷한 말로 설명된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는 바오로의 서간에서처럼 사람 밖에서 오는 어떤 힘이 아니라, 잘못 그 자체이다(2,9; 4,17; 5,15-16.20). 그리고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죽음을 일컫는다. 이 죽음은, "진리의 말씀" (18절)으로 믿는 이들 안에 이미 시작되었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12절) 생명과 반대되는 것이다.

게시자 주: 그런데 이 절에서 말하는 죄는 "욕망(desire)"이 낳은 죄를 말하는므로, 위의 주석에서 이 죄를 말하면서도 "욕망(desire)"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고 이 글의 이어지는 부분에서의 설명에 의하여서도, 상당히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2-2.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 야고보서 1,13-15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james/james1.htm

(발췌 시작)
[13-15] It is contrary to what we know of God for God to be the author of human temptation (James 1:13). In the commission of a sinful act, one is first beguiled by passion (James 1:14), then consent is given, which in turn causes the sinful act. When sin permeates the entire person, it incurs the ultimate penalty of death (James 1:15).

[13-15] 하느님께서 인간의 유혹의 입안자(the author)이시라는 것은 (야고보 1,13) 하느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상반됩니다. 어떤 죄 있는 행위의 수행에 있어, 당사자는 우선적으로 정(情, passion)에 의하여 속임을 당하며(야고보 1,14), 그런 다음에 동의(consent)가 주어지며, 이 동의는 교환으로(in turn) 해당 죄 있는 행위의 원인이 됩니다(cause). 죄가 전체 인격(the entire person)에 배어들 때에, 죄는 죽음(death)이라는 궁극적인 형벌(penalty)을 초래합니다(incurs) (야고보 1,15).

게시자 주바로 위의 NAB의 주석은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 권고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는, 욕망(desire)의 한 종류인, 정(情, passion)이 죄를 낳는 과정을 더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므로, 위의 "주석 성경"의 주석보다는 독자들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지막 문장에서의 "죽음(death)"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2-3. 이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짝수해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야고보 1,12-1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위의 제2-2항에 제시된 NAB 주석의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죽음(death)""영혼의 죽음(the death of the soul)" 을 말한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6_tue.htm <----- 필독 권유

2-4.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영혼(the soul)"은 불멸(immortal)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영혼의 죽음"은, "영혼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야고보서 1,14-15에 대한 바로 이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이어지는 해설에서도 또한 언급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영적 죽음(the spiritual death)"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에

질문 2: "영혼의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of the soul)"은 무엇입니까?

질문 2에 대한 답변: 이어지는 제3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3.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7월 2일]

3-0. 다음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수록된 "spirit"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특히 왜냐하면 "영혼"(soul)이 영적 교감(交感)(spiritual interactions)들의 한 말단(末端)(a terminal)이기 때문에, "성신"/"성령" 혹은 "악령" 등의 영(spirits)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영(spirits)들의 한 개의 수용체(a receptacle)임을 항상 잊지 마시가 바랍니다:

 

출처: https://www.newadvent.org/cathen/14220b.htm 

(발췌 시작)

In Theology, the uses of the word are various. In the New Testament, it signifies sometimes the soul of man (generally its highest part, e.g., "the spirit is willing"), sometimes the supernatural action of God in man, sometimes the Holy Ghost ("the Spirit of Truth Whom the world cannot receive").


신학에 있어, 영(spirit)이라는 단어의 사용들은 다양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i) 때로는 사람의 영혼(soul)을 나타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즉, 정신], 예를 들어, "영은 간절하다(the spirit is willing)(마태오 복음서 26,41; 마르코 복음서 14,38)", (ii) 때로는 사람 안에 있는(in man)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활동(supernatural action)을 나타내기도 하며, 그리고 (iii) 때로는 [성삼위 하느님의 제3위걱을 말하는] 성신(the Holy Ghost)[즉, 성령(the Holy Spirit)]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요한 복음서 14,17)).


The use of this term to signify the supernatural life of grace is the explanation of St. Paul's language about the spiritual and the carnal man and his enumeration of the three elements, spirit, soul, and body, which gave occasion to the error of the Trichotomists (1 Thessalonians 5:23, Ephesians 4:23).


은총에 기인하는 초자연적 생명(the supernatural life of grace)을 나타내기 위한 바로 이 용어의 사용은 영적 및 육적 사람, 그리고 영(spirit), 영혼(soul), 그리고 몸(body), 세 요소들로 구성된 성 바오로의 헤아림에 관한 성 바오로의 언어에 대한 설명인데, 이 설명은 삼분론자(the Trichotomists)들의 오류를 야기하였습니다(1테살로니카 5,23; 에페소 4.2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애상, 2022년 7월 2일자 내용 추가 끝] 


3-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spiritual death(영적 죽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6594
(발췌 시작)
SPIRITUAL DEATH [of the soul]

[영혼의] 영적 죽음

The state of the soul in mortal sin, based on the analogy with bodily death. Just as a physical body may be not only ill or suffer injury, but cease to retain its principle of life, so the soul can lose sanctifying grace through mortal sin and supernaturally cease to live. It is, therefore, spiritually dead because it is no longer united with God, who gives it supernatural life, even as a body is dead on separation from its animating principle, which is the soul. While still on earth, this union with God is both a possession and a movement. We possess him by grace and in faith, and we are moving toward him in the beatific vision of glory. When persons sin mortally, they are twice dead: once because they lose the gift of divine life they formerly had, and once again because they are no longer moving toward the consummation of that life in heaven.

신체의 죽음(bodily death)과의 유비(類比, analogy)(*)에 근거하는, 대죄(mortal sin) 상태에 있는 영혼의 지위/상태(the state of the soul)를 말합니다. 육체적 몸은 병들거나 혹은 상해(injury)를 겪을 수도 있을뿐만이 아니라, 또한 생명의 원리를 계속 유지함을 중지할(cease) 수도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혼은 대죄(mortal sin)를 통하여 성화은총(sanctifying grace)를 상실하고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을 초자연적으로 중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러한 영혼은 영적으로 죽은 것인데(spiritually dead) 왜냐하면 영혼이, 심지어 몸(body)이 영혼이라는 자신에게 움직임을 주는 원리로부터 분리 즉시 죽는다고 하더라도, 영혼에게 초자연적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더 이상 결합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지상에 있을 동안에, 하느님과의 이러한 결합은 어떤 소유(a possession)이고 그리고 어떤 움직임(a movement) 둘 다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의하여 그리고 믿음(faith, 신덕) 안에서 당신을 소유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영광의 지복직관(beatific vision) 안에 계신 당신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격(persions)들이 죽음에 이르는 죄들을 범하면(sins mortally), 그들은 다음과 같이 두 번 죽는 것(twice dead)입니다: 한 번 죽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형상적으로(formally) 가지고 있었던 신성적 생명(the divine life)이라는 선물(gift)을 그들이 상실하기 때문이고, 다시 한 번 죽는데 왜냐하면 하늘/천당 안에 있는(in heaven) 바로 이 생명의 완성(consummation of that life)을 향하여 더 이상 이동하지(moving)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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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유비(類比, analogy)" 라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8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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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tal sins are no longer remissible by any power within the soul itself, much as the human body, once dead, cannot be brought back to life except by a special intervention of God. In Patristic literature the restoration is compared with the resuscitation of Lazarus. The exercise of almighty power in either case is the same. "Everyone who sins, dies," says St. Augustine. Only the Lord, "by his great grace and great mercy raises souls to life again, that we may not die eternally" (In Joannis Evangelium,49). Only infinite mercy can reconcile the grave sinner.

인간의 몸(human body)이, 일단 죽고 나면,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개입(intervention)에 의함을 제외하고는, 생명(life)으로 되돌려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정도로(as much), 대죄(mortal sins, 죽음에 이른 죄)들은 영혼 자체 안쪽에 있는 어느 힘(power)에 의하여 이미 용서될 수(remissible)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문헌(Patristic literature)에 있어 하느님의 개입에 의한 회복(restoration)은 라자로의 소생(the resuscitation of Lazarus)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둘 다의 경우에 있어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의 행사는 동일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죄를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는다" 라고 말합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도록 당신의 커다란 은총과 커다란 자비에 의하여 영혼들을 다시 생명(life)으로 일으키신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요한 복음서에 대한 논문(Tractate on the Gospel of John), 49,3]. 오로지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mercy)만이 중대한 죄인(the grave sinner)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2. 다른 한편으로, 요한 묵시록 2,11; 20,6.14; 21,8 에서 언급되고 있는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췌 시작)
"두 번째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육적 죽음과 달리, 영적 죽음, 즉 최종적이며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20,6.14; 21,8 참조).
(이상, 발췌 끝)

3-3.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06년 12월 5일자 Angelus 에서도, "영혼의 죽음(the death of the soul)"이 요한 묵시록 2,11; 20,6.14; 21,8 에서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 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True death, on the other hand, which is to be feared, is the death of the soul which the Book of Revelation calls "the second death" (cf. Rv 20: 14-15; 21: 8). In fact, those who die in mortal sin without repentance, locked into their proud rejection of God's love, exclude themselves from the Kingdom of life.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해야만 하는 참된 죽음은, 요한 묵시록이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 이라고 부르는(요한 묵시록 20,14-15;21,8), 영혼의 죽음(the death of the soul)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자신들의 당당한 거절(proud rejection) 안쪽으로 가두어 넣어진, 회개 없이 대죄(mortal sin) 상태로 죽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생명의 나라(the Kingdom of life)로부터 제외시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
4-1.
다음은, 야고보서 1,13-15를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47항 전문입니다. 바로 이 항에서 말하는 "죽음""영혼의 영적 죽음"을 말함을 위의 제1-3항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AC.HTM

(발췌 시작)

CCC 2847 The Holy Spirit makes us discern between trials, which are necessary for the growth of the inner man,
152 and temptation, which leads to sin and death.153 We must also discern between being tempted and consenting to temptation. Finally, discernment unmasks the lie of temptation, whose object appears to be good, a "delight to the eyes" and desirable,154 when in reality its fruit is death.

     God does not want to impose the good, but wants free beings.... 
     There is a certain usefulness to temptation. No one but God knows
     what our soul has received from him, not even we ourselves. But
     temptation reveals it in order to teach us to know ourselves, and
     in this way we discover our evil inclinations and are obliged to
     give thanks for the goods that temptation has revealed to us.
155


CCC 2847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사람(the inner man)의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135) 시험(trials)들과 그리고, 죄와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136) 유혹(temptation)134) 사이에서 식별하게(discern) 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시험을 받음(being tempted)과 유혹에 동의함(consenting to temptation) 사이에서 식별하여야만 합니다. 끝으로, 식별(discernment)은, 실제로 그 열매(fruit)가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눈들에 대한 즐거움(delight)"이며 그리고 바람직한(창세 3,6), 그 대상이 선한 것으로 보이는, 유혹에 기인하는 거짓말의 가면을 벗깁니다(unmasks). 

     하느님께서는 선(the good)을 강요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있음(free beings)들을 원하십니다. ... 유혹에 대하여 어떤 
     확실한 유용성(usefulness)이 있습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자도, 
     심지어 우리 자신들까지도, 우리의 영혼이 당신으로부터 이미 받은 
     바를 모릅니다. 그러나 유혹이, 우리 자신들을 알도록 우리를 
     가르치고자, 그것을 드러내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악한 경향(evil inclinations)들을 발견하며 그리하여 우리에게
     유혹이 이미 드러낸 재화(the goods)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137)

-----
134. 로마 5,3-5 참조.
135. 루카 8,13-15; 사도 14,22; 2티모 3,12 참조.
136. 야고 1,14-15 참조.
137. 오리게네스, 「기도론」 , 29, 15와 17: GCS 3, 390`-391(PG 11, 541-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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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2.
그리고 여기까지 읽은 분들께서는, 또한 예를 들어,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Ia, q50, a6 및 q79, a6 를 읽고서, 그리 큰 어려움 없이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www.newadvent.org/summa/4050.htm#artible6

http://www.newadvent.org/summa/4079.htm#articl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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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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