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9주일(다해) 루가 12,32-48; ’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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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7-16 ㅣ No.5105

연중 제19주일(다해) 루가 12,35-40; ’22/08/07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봉성체를 하다가, 아내가 남편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그야말로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니까 80이 다된 남편이 매일 아내를 씻기고, 때마다 식사를 해 먹이고, 약 먹이면서 자리를 못 비우면서까지 정성껏 돌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유, 젊을 때 부인에게 속 썩인 것 다 갚으시나봐요."했더니,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정작 젊을 때부터 부인은 돌아다니기 바빴고, 병이 나서야 들어왔답니다. 그 인생이 하도 측은해서 남편이 자식도 안 시키고 정작 자신이 돌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할아버지들이 병들고 지친 아내들을 돌보는 일이 마치 황금연못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 보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한국에 독일마을이 생기자, 한국인과 결혼한 독일인 남편이 은퇴하면서, "지금까지 한 평생 나를 위해 희생해온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남은 생애는 아내의 고향인 한국에 돌아가서 살겠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독일인 마을로 들어왔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을 내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여러분이 결혼식 때 주님 앞에서 또 하객들 앞에서 서로를 향해 바친 약속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약속을 잘 지키고 계시죠?

만일,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를 향해, 당신이 돈을 벌어올 때만 내가 당신을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건강하고 제 구실을 할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줄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나에게 도움이 될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할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이런 조건을 내세운다면, 우리 중에 부부로 남아 있을 가정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을 그냥 살아갈 때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커다란 문제가 없고, 먹고사는데 커다란 지장이 없을 때는 우리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 집안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서로 부딪히게 되고, 심지어는 실망하게까지 되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심각한 위협이나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의 부부생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진다면, 각자 정도 차이일 뿐이지, 그런 조건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온전하고 충실하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짐도 되고, 때로는 의지도 되니까, 사는 것이지, 온전한 행복, 완전한 사랑으로만 사는 부부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불완전하고 불안한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오늘까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혼인 성사 때 사제가 "교회 안에서 고백한 이 합의를 주께서 친히 견고케 하시고 풍부히 강복하실 것입니다. 천주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고 선언해 주듯이,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단 하루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40)

 

우리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 정확히 모를 뿐이지. 주님 없이 주님의 백성들이 살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저 우리가 다행히 주님의 도움과 은총을 알아 믿고 감사드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하실 뿐이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주님의 은총만을 시험하면서, 방종하고 흥청망청 제멋대로만 살면서 나쁜 짓을 골라 하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결혼 생활만큼이나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것에 대해 무슨 조건을 단다면, 그리고 누구의 탓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탓을 하는 그 사람의 신앙일 수는 있어도 결코 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어쨌든, 누가 뭐라던, 무슨 일이 생기던, 세상에 무슨 일이 있던, 꾸준하고 진실하게 오늘 주님을 믿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누구 때문에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왜 주님을 믿습니까?

누가 나를 믿게 해 줍니까?

누가 나 대신 믿어줍니까?

믿는 것도 나요, 사는 것도 납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 이렇게 살아있기에,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신혼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부부의 생활에 평화와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신앙생활도 처음 세례 받을 때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주님을 잘 느끼던 그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싫든 좋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가 청하든 청하지 않든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며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오늘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식이 잘되면 기뻐하고, 자식이 잘하면 자식도 부모도 함께 행복하고, 거기다 부모의 짐을 덜어주기라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처럼, 주님도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주님께 회개하여 돌아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주님의 좋은 말씀들을 실천하며, 주님의 구원 사업을 함께 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요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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