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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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11-02 ㅣ No.520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2/11/19

 

여러분 살면서 혹시 내가 저 사람의 말이라면 믿고 따르겠다.’라고 여기면서 사는 분이 계십니까? 어떤 분을 믿고 의지하십니까? 혹시 나를 믿고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겠다.’고 할 정도로 나를 믿고 의지하는 이가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기도할 때마다 주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루카 20,37)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시며 지켜주셨던 주 하느님께서 오늘의 나에게도 그렇게 해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그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비록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지만 죽은 이들의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기도하는 나의 살아계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아울러 구약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가 그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 앞에 살게 한다는 전통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어떻게 해 오셨는지, 자라면서 조상들의 주 하느님께 자신이 기도할 때마다 들어주셨던 체험속에서 구약의 인물들은 주 하느님을 조상들의 하느님으로 부르며 다시 자신들의 삶안에 초대하고 그분께서 자신들의 삶 안에 임하시고 활동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 안에 주님을 사시도록 초대하고, 자신들도 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 나에게 전해져 왔는지? 나는 누구를 통해 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내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를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아울러 나는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그 말씀을 내 삶에서 적용함으로써, 단순히 예수님을 머리 속으로만 믿지 않고, 진정 내 삶 안에서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써 주 에수님을 내 삶에 살아계시도록 하고 있는지? 아니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할 때만 예수님을 찾고, 성당을 나서거나 살아갈 때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함으로써, 내 실제 삶 속에서는 죽은 것처럼 만들고 있는지 되새기게 됩니다.

 

일 년이 다 지다도록 주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일 년이 다 지나도록 주 예수님께 감사드릴 거나 용기와 은혜를 받은 것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 역시 주 에수님을 내 삶 속에서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셈이 될지 모릅니다.

 

늘 내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주님 사랑 안에 살아서 생활합시다. 늘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간직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말씀을 실현함으로써 내 삶을 복음화하고 주님과 함께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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