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이냐시오 영신수련 4주간에 따른 사순 특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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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웅 [mathias] 쪽지 캡슐

2004-03-30 ㅣ No.2955

이냐시오 영신수련 4주간에 따른 사순 특강

제3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정재웅(마티아) 신부

 

 

+ 찬미 예수님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시기를 치열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번 주에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이냐시오 피정 3주째에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수난의 첫 시작을 최후의 만찬으로부터 시작하게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단순히 인간적인 고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13,1의 말씀은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전체는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의 대서사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하느님께서 수난을 당하셨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결국 이냐시오 성인은 이 한달 간의 피정을 통해 매일같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 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것도 착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아닌 그렇게도 당신의 말씀을 안 듣고 그분의 속을 썩혀드리고 심지어 당신을 배반하여 팔아먹기조차 한 우리들의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합니다.

 

그렇기에 이냐시오 성인은 이 수난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왜 그분께서 누구를 위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묻게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까?

 

결국 그 물음의 답은 바로 “나”입니다. 바로 나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바로 나를 위하여 그런 엄청난 고통을 감수인내하신 것입니다. 왜?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그 수난의 장본인인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홀로 외로이 그 수난의 길에 몰지 말고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고통이 아닌 철저한 외로움. 고독이었다.” 예수님의 수난의 장본인인 우리들은 그 수난의 순간에 어디에 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런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님 곁에 있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 고통을 받고 계시는 예수님께 도리어 채찍질하고 돌을 던지고 그분의 손에 그분의 심장에 못을 박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야유하고 있는 그 군중의 모습 안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성서를 묵상하기에 앞서 시작기도로 이런 청원을 하느님께 드릴 것을 당부합니다. “나의 죄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러 가시는만큼 슬픔과 동정과 부끄럼움을 청할 것이다.”(이냐시오 193번)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마태오 26,20-30)을 통하여 당신을 배반할 제자들을 책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께서 수난을 받으시는 동안 의지할 곳이 없게 될 당신의 제자들을 더욱 걱정하십니다. 그리고 진정 자식을 두고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하나 하나 불러 그들의 발을 씻기어 주십니다.(요한 13,1-20)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아이들을 놓고 떠나야만 하는 어머니의 숨도 쉴 수 없는 애절함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의 수난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최종 결정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시게 됩니다.(마태오 26,36-46)

 

인간 예수님의 고뇌. 여기에서 우리들은 참 하느님이시면 참 인간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는 고통. 그 고통이 너무나 커다랗다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이 잔을 치워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청하십니다. 피땀이 흐르는 고뇌의 시간. 아마도 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33년의 생애보다 당신께는 더욱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도망갈 것인가?

 

아마도 바로 이 순간에 악마는 예수님께 가장 진한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포기하라고. 다 헛된 짓이라고.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냐고. 그들이 너의 그 수고를 알아줄 것 같냐고.

 

예수님께서는 그 결정이 얼마나 힘드셨는지 3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성부께 드리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길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잠이 들어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때가 되었다. 일어나 가자.(마태오 26,45-46)”의 그 말씀 안에는 엄청난 비장함이 서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길의 사건을 생생하게 보게 됩니다. 배반하는 유다(마태오 26,47-56)와 예수님을 드디어 자신들의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종교의 지도자들(요한 18,12-24), 베드로의 배반(루가 22,31-38.54-62) 빌라도의 심문(요한 18,28-19.16) 예수님을 마치 광대나 마술사로 생각하는 헤로데(요한 23,6-12) 드디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시는 예수님(루가 23,26-43. 요한 19,17-37) 그리고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요한 19,38-42)을 이냐시오 성인은 생생하게 바로 예수님 곁에서 이 사건을 지켜보게 합니다.

 

그분께서 왜 그런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고 가셨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분께서 그런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지를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님과 함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느끼라 당부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의 피부로 느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존재를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마치 뜬 구름처럼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죄로 인한 그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 혼자 보내드리지 맙시다. 아니 적어도 지금 그 십자가의 길에서 너무도 힘들어하시는 예수님께 계속 채찍질을 돌을 던지고 비난하는 행동은 하지 맙시다. 그것은 바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않는 우리들의 행동들입니다.

 

 

 

 셋째 주 성서묵상

 

첫째 날  마태오 26,20-30 최후의 만찬

둘째 날  요한 13,1-20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셋째 날  마태오 26,36-46 겟세마니의 기도(최후의 결정)

넷째 날  루가 22,31-38. 54-62 베드로의 배반

다섯째 날  요한 18,28-38 빌라도의 심문

여섯째 날  루가 23,13-49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일곱째 날  십자가의 길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묵상한다.

 

유다, 베드로, 백성의 지도자, 헤로데, 빌라도, 경비병, 군중 등 과연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을 배반했으며 현재 나의 모습은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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