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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주님의 시험인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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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우(프란치스꼬) [61.103.62.*]

2004-08-17 ㅣ No.2930

먼저 이슬기님의 용기와 솔직함에 찬사를 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만 용기내어 고백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주님의 시험인 듯 싶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요?

 

그 답을 발견하기 전에 안병욱에세이의 ''사랑은''이라는 책을 인용하겠습니다.

 

철학적 사고의 천재였던 고대 희랍인들은 사랑에 관해서 깊은 지혜와 사색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사랑은 그 대상에 따라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내실과 표현이 달라진다.

 

희랍인들은 인간의 사랑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아가페(Agape)라고 했다. 그것은 경건하고 엄숙한 것이요, 자기를 바치고 남을

 

용서해 주는 종교적, 헌신적 사랑이다.

 

이웃 사랑을 필리아(Philia)라고 일컬었다. 그것은 인간 일반에 대한 넓은 배려와 우정의 사랑이다.

 

젊은 남녀간의 사랑을 에로스(Eros)라고 칭했다. 그것은 뜨겁고 정열적인 것이요, 상대방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뜨겁고 정열적인 것에는 동감하는데, 상대방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은 사랑이라는 것은 개운치가 않습니다.

 

사랑은 조건없이 주는 것이며,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어하며, 서로의 육체를 탐욕하려 하는 것은

 

소유욕이기 때문입니다. 스킨쉽이나 포옹, 키스, 성행위는 절제가 가능합니다.

 

성욕이나 소유욕과 사랑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쨌든 에세이의 내용을 더 인용하겠습니다.

 

사랑은 불과 같다. 불은 너무 멀리 하면 추워서 못 견딘다. 너무 가가이 가면 불에 타고 만다. 적당한 자리에서

 

불을 쬐면 따뜻하고 행복하다. 우리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불이 없는 것처럼 춥고 냉랭하다. 그러나 사랑을

 

잘 못 다루면 비극의 씨가 되고 자타를 파멸시키기 쉽다.

 

사랑은 지혜롭게 다루면 인생은 한없이 즐겁고 행복하다.

 

사랑이 불장난이란 말이 있다. 사랑은 불장난과 같다. 불장난을 잘못하다가 크게 다치고 자기 파멸의 비극에

 

빠진다.

 

위에 인용된 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사랑은 마냥 좋은 것입니다. 한없는 것이며, 거짓이 없는 희생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깊지 못하면 성욕이나 소유욕에 빠져, 사랑과 욕구를 분가하지 못하고 심적으로

 

고통받게 됩니다. 사랑은 댓가없이 주는 것이지 무엇을 바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과 성령님이, 성모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사랑을 베푸는 것일까요?

 

제가 볼때는 이슬기님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 주님이 시험대 위에 올린 것이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드는 군요.

 

지금 상황을 슬기롭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일은 자매님을 만나지 않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만나지 않겠다는 것은 하루종일 자매님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자신을 속이고 가족들을 속이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게 생활하며 잊혀지기만 한다면 오죽이야

 

좋겠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형제님께 저는 이러한 선택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지 댓가를 바라거나 상대방을 곤욕스럽게 만들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형제님께서도 상대방과 똑같이 괴롭겠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 마음을 다스린다면

 

상대방의 괴로운 마음과 더불어 형제님의 괴로운 마음도 점차 사라지게 될겁입니다.

 

우리에게는 운명이라는게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업이라고 하고, 천주교에서는 원죄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운명을 개척하려는 강한 의지와

 

좀 더 강한 믿음을 가지려 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매님을 만나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 하고, 불완전한 자신으로서는 그것이 어렵다고 느낄때는

 

단 둘이 아닌 여러사람과 만나는 것이나, 단 둘이 만나더라도 공개된 장소에 만나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같이 해결방안을 찾는 것도 보다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보여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주력하십시오.

 

어떤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를 궁리하십시오.

 

모든 시련은 극복할 수 있으며, 그 시련을 극복했을 때 자신은 흔들림없이 강해집니다.

 

흔들림이 없어진다는 것은 믿음이 깊어지고, 어떤 유혹도 거의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형제님께 필요한 것은 변화일 겁니다. 지금까지 했던, 알고 있던 사랑이 아닌 보다 큰 사랑을 향해

 

변화하라는 기회인 듯 싶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게의치 마십시오. 단지 어떤 선택을 하든간에 신앙을 버리지 마십시오.

 

보채는 자식에게는 손도 많이 가고, 정도 많이 주며, 주여야 할 것도 많은 법입니다.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자신이 모든 죄를 씻지 않는한 형제님께 진정 죄인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설령 그런 말은 한다면 그 사람은 형제님보다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가 떠오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여기서의 바람은 형제님의 고민하고 괴로워 하는 고민이나, 번뇌의 원인을 의미하기도 하답니다.

 

저도 두 분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분명 머지않아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중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답니다. 설사 죄많은 사람이라도.

 

뉘우치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심판은 주님이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란 걸 명심하십시오.

 

저는 형제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건 항상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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