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언제 한번 그런 날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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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6-19 ㅣ No.3517

 

해마다 한 번씩 나는 백두산에 갑니다. 그렇다고 등산을 좋아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병원에 다니며 계속 천식 약을 타다 먹기에 등산은 제게 힘든 운동이지만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닙니다.

산이 높기는 하지만 정상 가까이까지 소형차량이 운행되어 차에서 내려 약200미터만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면 천지를 내려다보는 연변 땅 장백산 정상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2년에 옛날 간도 땅 용정에 있는 조선족문화발전촉진회와 저희 문화원이 자매결연을 맺은 바 있습니다. 용정이란 곳은 일제가 조선을 합방하고 간도 땅을 지배하면서 중국 땅에 가장 먼저 영사관을 둔 곳이기도 합니다. 간도로 이주해 간 조선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일본이 그랬다 합니다.

그 당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국을 등진 사람도 있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작심하고 간도로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그 후손들이 약 20만 명 용정시 주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용정시 변두리에 있는 비암산에는 지금도 ‘일송정’(一松亭)이 있는데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그 일송정을 말함입니다. 일송정(一松亭)이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정자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일송정은 정자가 아니고 정자 모양을 닮은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갈려면 반드시 용정을 거쳐야 하므로 근래에 와서 한국인들이 자주 내왕하면서 일송정을 관광하기 위해 용정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암산에 있는 정자를 보고 자꾸만 일송정이라고 혼동한다고 합니다.

조국을 등지고 멀리 떠나온 우국지사들이 멀리서 비암산을 바라보면 마치 고향동네에 있는 정자를 닮은 커다란 소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게 서있어 그 나무에 와서 당제(堂祭) 비슷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그 그늘 아래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곱씹으며 우국충정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거사 직전에 일송정에 들렀고, 헤이그 밀사사건 때 네델란드에 가셨던 분들도 일송정 소나무 아래에서 의지를 불태우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일제는 바로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목으로 기상을 불태우는 일송정 소나무를 죽이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모양입니다. 나무에 구멍을 파서 고춧가루를 부어넣기도 하고 카바이트를 살포해서 물을 붓기도 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끝내는 일송정 나무가 서 있는 비암산 일대를 관동군의 포 사격 연습사격장으로 지정하여 그 나무를 없애버리는 아주 못된 짓을 했습니다.


2000년에 일송정 소나무 대목(代木)을 옛날 그 자리에 다시 심기 위하여 용정의 ‘조선족문화발전촉진회’ 리준일 회장께서 모금활동을 하시기 위해 한국에 오셨다가 아는 분의 소개로 저희 문화원과 연결되어 저희들이 그 사업을 도우면서 차츰 끈끈한 정을 맺은 것이 더욱 발전하여 2002년에는 양단체간에 자매결연을 하고 제가 축하공연단을 이끌고 용정을 처음 갔었고 올해 8월 초에 또 가면 합해서 모두 네 번째가 됩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용정시 노인회관에서 우리동포 500여분을 모셔놓고 그곳 소학교, 중학교, 그리고 청년부 학생들, 일반인, 노인합창단과 합동공연을 한 바가 있는데 그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그간 정치적 지리적 이유로 오래 동안 북한문화만 계속해서 받아 들이다보니 모든 가락이 템포가 빠르고 전투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해서 이래서는 우리 전통문화의 정형이 조선족 동포들에게 바르게 전수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요도 빠르고 설장고는 마치 보는 사람이 어지러울 정도로 빨리 뱅뱅 도는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돼 있었습니다.

해마다 공연단을 데려 간다는 것이 저희 동대문문화원 단독의 힘으로는 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역유지들이 제 뜻을 가상히 여겨 기부금을 내 주시어서 매년 3-4명씩 살풀이춤이나 판소리, 경기민요, 가야금병창 팀을 바꿔가며 모시고 가서 그곳 동포들에게 우리 민족고유의 느긋하고 은근한 정서를 심어주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며 지금껒 다니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동북공정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아예 아무도 오지 말라고 저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었고, 금년부터는 공연이 주정부(연변자치주)의 허가사항이라서 허가가 쉽게 날지 모른다고 하지만 8월 초에 용정시 조선족여성회관 준공식 때문에 다시 용정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저와 가까운 지역유지분이 그 회관 짓는데 드는 경비 일부를 저를 통해 기부하신 까닭에 그분을 모시고 참석키로 하였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하느냐 하면 ‘백두대간을 통해 백두산에 다다르면’ 하는 뜻의 어떤 신부님의 글을 게시판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인이 백두산에 8번을 갔어도 천지구경을 못하였다고 하더군요.

사실이지 산의 날씨라는 것이 여자의 마음 같아서 변덕을 잘 부리잖습니까? 특히 높은 산은 더욱 그러합니다. 

백두산 높이가 2744미터라고 하지요? 올라가다 보면 고산지대에서 나는 식물들을 볼 수 있고 높은 산에서만 자란다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천지에 올라가다 보면 산 아래 입구에서 차를 탈 때는 해가 쨍쨍 했는데 약 30분간 꼬불꼬불 차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눈앞에 안개가 자욱해서(사실은 구름 속에 든 것인데) 앞이 거의 안 보입니다. 안개비 속을 뚫고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정상에 서서 30분을 여름추위에, 비바람에 서 있어도 가망이 없으면 차라리 포기하고 내려오는 게 훨씬 낫다고 합니다.

처음 갔을 때는 천지구경을 못하고 고생만 했는데 다음해에 갔을 때 결국 천지를 보았습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또 천지가 구름 속에 갇혀서 “또 못 보겠네.” 했는데 어느 순간 조금씩 구름이 벗겨지는 것 같더니만 천지 호수의 맑은 물이 차츰차츰 넓어져 보였고 약 5분 후에는 전체의 천지. 건너편 북한쪽 초소까지 또렷하게 시야에 보이는 데 역시 큰 감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잠시 뿐, 마치 사춘기 때 그녀가 내 앞에서 속살을 언뜻 보여주고는 치맛자락으로 살며시 감추어버리듯이 천지가 새침대기 내 첫사랑 같은 짓을 하더라구요.

여덟 번을 백두산에 올라갔어도 천지를 볼 수 없었던 그 시인이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시를 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의 땅을 밟고 찾아온 내가 그리 밉더냐?

여덟 번을 너를 보러 찾아왔는데도 나를 만나주지 않는 구나

내 다음에 너를 찾아올 때 그때는

서울에서 경의선을 타고

개성 평양 신의주....

그래. 

내 반드시 내 땅 밟고 다시 너를 찾아오마

그때는 나를 반갑게 안아다오 내사랑하는 천지야“


언제 그런 날이 올까요? 그때는 나도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우리 땅을 밟고 진짜 백두산을 오를 수 있을 텐데.......과연 그날이 내 살아 있을 때 가능할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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