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나해 연중 제26주일(9월27일) 전례 성경 공부 [성경공부_전례에따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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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58.38.*]

2009-09-26 ㅣ No.863

 
 
연중 제26주일〔나해〕
 
 
♣참고:이 글 중에 밑줄이 그어진 성경 구절이 나오면, 학습자들이 그 구절을 찾아 읽을 것을 권장한다.
 

제1독서 - 민수기 11,25-29
 
     민수기(the book of Numbers)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이집트를 떠난 후 두 번째 해부터 거의 모세의 삶의 끝부분에 이르기까지인, 광야에서의 총 39년 정도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 형식의 기록(narrative account)이다. 이 책은 그 이름을 히브리 성경에 있는 (‘광야에서’를 뜻하는) bammidbar에서 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 역 성경)은 이것을 ‘민수기(Numbers)’라고 부르며, 그리고 라틴어 본은 이 설정(suit)을 따른다. ‘민수기’라는 제목을 실제로 만족할 만하지 않는데, 이는 이 백성에 대한 셈은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실제로 광야에서의 방황들로 이루어진 주된 사건들에 대한 역사책(a history)이다.
 
     이 책은 이 백성의 수를 조사하라는 모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명백한 명령과 함께 시작한다(따라서, 민수기). 이 조사의 결과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당신의 약속(창세기 22,17)인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를 정말 지켜 오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집트로 들어갔던 야곱(Jacob)의 칠십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이제, 450년 정도 후에, 군 복무를 하기에 적합한 스무살 이상의 장정들의 수만 약 육십만 명 정도(민수기 1,46)에 달하고 있다(numbers).
 
민수기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시나이(Sinai)에서(제1-9장),
     2) 광야를 통과하는 여행(제10-21장), 그리고
     3) 모압 벌판(Plains of Moab)에서(제22-36장).
 
오늘 우리의 제1독서는 광야를 통과하는 여행의 기록으로부터 발췌한 것이다. 그들이 시나이에 도착한 후 약 11개월 후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진영(camp)를 박차고 일어났으며 약속된 땅을 향한 자신들의 여행을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계약의 궤(Ark of the Covenant)와 성막(Tabernacle) 그리고 관련된 제식용(ritual) 용기(vessels)들과 제의(vestments)들을 옮겼다. 평소대로, 일부 여행자들은 음식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중이다. 모세는 좌절하게 되어 이에 관하여 하느님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기 11,11-15).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칠십 명의 원로들을 불러 모으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당신께서는 이들에게 이 백성이라는 짐을 나누어 짊어져 그리하여 모세는 단지 일부분만을 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민수기 11,16-17). 모세는 만남의 천막(the meeting tent) 주위에 이 칠십 명을 불러 모았다(민수기 11,24).
   
25 그때에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그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등의 예언자들이 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황홀한(ecstatic) 혹은 은사적 현상(charismatic phenomenon)으로 이해된다(1사무엘 10,10-13; 19,20-24).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만남의 천막은 진영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여호수아(Joshus)의 반대들을 무릅쓰고 엘닷(Eldad)(그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셨던’을 뜻한다)과 메닷(Medad)(그의 이름은 ‘사랑’을 뜻한다)의 예언자적 은사(prophetic charism)에 대한 인정은 이런 은사를 제도적 통제(institutional control) 아래에 두고자 할 사람들로부터 예언자적 은사의 독립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일흔 두 명(혹은 일흔 명)이, 예수님께서 여행하심에 따라 당신의 도착을 위한 선발대(advance party)로서 활동하도록 위임 받았던, 루카 복음서 10,1 및 그 이후 구절과 이 구절의 유사점(parallel)에 주목하라. 
 

제2독서 - 야고보 5,1-6
 
     이번 주에 우리는 나해 전례력 안에서 총 다섯 주일(즉 나해 연중 제22-26주일)에 걸친 야고보 서간에 대한 우리의 학습을 끝낸다. 사실은, 이번 주 이후로 가해 대림 제3주일 제2독서(야고보 5,7-10) 때까지 주일 독서들은 야고보서를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각주1) 이 서간의 주된 목적은 윤리(morality)와 자기 수양(self-discipline)에 관한 가르침에 있다. 성스러운 저자는, 사람들이 그가 비난하는 종류의 행위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고백과 불일치를 이룸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표현들을 점잔빼며 말하지 않고, 매우 엄격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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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면, 전례력에 있어 야고보서가 주일/축일 독서들에 있어 총 6번에 걸쳐 발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search4Reading_Jam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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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제2독서에서 저자는 다시 부유 계층(the well-to-do)의 죄들을 힐책한다(criticizes). 그는 이들의 자만(pride), 허영(vanity), 탐욕(greed), 그리고 이들의 쾌락 추구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심판이 바로 가까이에 와 있다고 이들에게 경고한다.
 
     부유 계층은 자신들의 자원(resources)들을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에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는, 고용주들이 이윤들의 증대에 앞서 노동자들의 복지를 생각하여야 하는, 정의에 있어 의무(obligation in justice)를 부과합니다.(각주2) 고용주들은 자본을 비생산적으로 유지하지 아니할 의무와 그리고 투자들을 할 때에 우선적으로 공동선(common good)을 먼저 생각하여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자는 실제로 유용한 재화(goods)들의 생산에 있어 일자리(jobs)들을 굳건하게 하거나(consolidate) 혹은 새로운 일자리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앞선 노력을 요구합니다. 사유 재산(private property)에 대한 권한은 이 공동선에 대한 책임들이 없이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이 권한은 재화들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말하는 더 상위의 원칙(a higher principle) 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엮은이 번역) [교황청 신앙교리성(Sacred Congretation for the Doctrine of Faith, 1986년 3월 22일), Libertatis conscientia(자유의 자각), 87].)(각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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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2)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나해 연중 제25주일 제2독서(야고보 3,16-4,3) 해설에서 3,18에 대한 해설의 각주를 참고하라.
 
(각주3) 정의(justice)의 한 종류인 ‘사회 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자료 모음은 다음의 엮은이의 졸글 중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1.htm (교황님의 역할 IV - 사회 정의에 대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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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복음서 6,24).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마태오 복음서 6,19).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고대에는(in antiquity)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부유층(wealth)의 주된 외관(form)이었다. 탐욕은 일곱 개의 죽음에 이르는 죄(deadly sins)들 중의 하나이다.(각주4) 탐욕스런 사람은 정의(justice)와 사랑(charity) 에 반하는 죄를 범하며 그리고 자신의 이웃의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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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4) 가톨릭 교회가 헤아리는 본죄(本罪)의, 즉 우리 자신이 자신의 자유의지(free will)로 짓는 죄의 일곱 개의 죄원[capipal sins, 罪源, 즉 칠죄종(七罪宗)]들은 다음과 같다:
(i) 교만(pride, 驕慢), (ii) 인색(covetousness, 吝嗇), (iii) 음욕(lust, 淫慾), (iv) 분노(anger, 憤怒), (v) 탐욕(gluttony, 貪慾), (vi) 질투(envy, 嫉妬), 그리고 (vii) 나태(sloth, 懶怠).
이들 칠죄종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자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info/capital_sins.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info/capital_sins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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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비록 금은 녹슬지(corrode, rust, tarnish) 않으나, 이 구절은 기본 가치 없음을 나타낸다. “형제나 친구들을 위해 돈을 내주어 그 돈이 돌 밑에서 녹슬지 않게 하여라.”(집회서 29,10).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마도 1코린토 3,12-15, 히브리서 12,29에 있는 심판의 불을 위한 연료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심판의 날(Day of Judgement)에 대한 언급. 이 구절은 또한 NAB에서와 같이 ‘그대들은 마지막 때를 위하여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You have stored up treasure for the last days).’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번역보다는 위의 본문의 번역이, 메시아의 오심이 최후의 시기의 시작을 나타내며 그리고 심판이 바로 가까이에 와 있다는 생각과 모순이 없기에, 더 나은 번역일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기원후 70년에 사실이 되어버렸던 믿음(belief).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일꾼들을 속여 이들의 품삯을 빼앗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단죄되었다(레위기 19,13; 신명기 24,14-15; 말라키 3,5). 이것은 즉각적인, 징계적인(exemplary) 벌을 요구하며 ‘하늘에 울부짖는(cries out to heaven)’ 죄들 중의 하나이며, 이와 꼭 같은 벌이 살인(창세기 4,10), 동성애/수간(獸姦)(sodomy)(창세기 18,20-21), 그리고 과부들과 고아들에 대한 억압(탈출기 22,22-24)에 적용된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만군의 주님(Lord of Hosts)’은 하느님울 위한 통상적인 구약 성경의 이름이다(이사야 5,9).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다시, 심판의 날에 대한 언급(예레미야 12,3).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성 야고보는 집회서 34,26-27을 암시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웃의 밥줄을 끊는 자는 그를 죽이는 자고 일꾼의 품삯을 빼앗는 자는 그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다.(각주5) 이 구절은 또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the godless)들이 의롭고 가난한 사람을 파멸시킬 계략을 꾸미고 있는(특별히 지혜서 3,3-5,16), 지혜서 제2장과 제3장을 암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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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5) 이 두 개의 절들은 NAB의 집회서 34,22 한 개의 절에 해당한다:
Sirach 34,22 He slays his neighbor who deprives him of his living: he sheds blood who denies the laborer his w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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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우리가 우리의 제2독서로서 야고보의 서간을 이제 떠나게 되기에, 몇 개의 끝맺는 말들이 적절하다(in order). 이 편지의 중심 가르침은 믿음(faith)과 실천(works)들 사이의 일치(consistency)에 관한 것이다. 이 가르침은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봉기(Protestant Revolt)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의심할 나위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이 봉기의 시기에 이 본문은 ‘오직 믿음에 의한 의화 이론(theory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unsurmountable obstacle)로 이해되었다. 이 시점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프로테스탄트 집단(Protestant circles)들 안에서, 성 바오로가 로마서 3,20-31과 갈라티아서 2,16; 3,2.5.11에서 말한 바에 대한 하나의 바로잡음(correction)으로서 야고보서가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is made). 로마서 3,28과 야고보서 2,24가 말하는 바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로마서 3,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야고보서 2,24)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비록 사용된 용어[‘믿음(faith)’과 ‘실천(works)’]들은 이들 두 절들에 있어 동일하지만, 그 관점이 다르고, 어떠한 모순도 결코 없으며, 그리고 어떠한 바로잡음도 필요하지 않다. 성 야고보의 경우에 있어, ‘실천(works)들’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처신의 행위들을 말한다. 성 바오로의 경우에 있어, ‘실천(works)들’은 [할례(circumcision), 제식적 씻음(ritual washing), 동물 희생 제물(animal sacrifice) 등의] 옛 법에 기인하는 율법적인 일(legal works)들을 말하는데, 이들 모두는 부담이 되며(burdensome), 그리고/혹은 비용이 많이 들며(costly), 그리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ineffective). 예수님께서 옛 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새 법(계약)[New Law(Covenant)]를 이미 제정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이미 타당성이 전혀 없다. 성 바오로는 갈라티아서 5,6에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즉 새 법을 제정하게 하셨던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을, 즉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티아 5,6)을 실천하여야(live out) 한다고 성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각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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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6)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티아 5,6)을 인용하고 있는 다음의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2005년 첫 회칙(제목: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을 또한 읽어 보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enc_20051225_dce_kr.htm (우리말)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enc_20051225_dce_en.htm (영어)
   
그리고 사랑[(Christian) love, charity, caritas, agape, ahabà]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엮은이의 졸글은 다음에 있다: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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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그리스도인(Catholic Christian)은 그가 ‘선행(good works)들’을 억지로 행하라고 강요되기(is compelled) 때문에 선행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선행들을 행할 것을 재촉받기(is impelled) 때문이다. ‘선행들’을 행하는 것이 천국에 한 자리를 얻지(earn) 않으며, 천국은 그리스도의 삶을 충분하게 산 자들에게만 오로지 열려 있을 뿐이다. 마지못해서(grudgingly) 하는 실천들 혹은 구원을 얻기 위한 의도(the intent of ‘earning’ salvation)를 가지고 행한 실천들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ineffectual).
 

복음-마르코 9,38-43.45.47-48
 
     (2주 전인) 나해 연중 제24주일 복음 말씀 독서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세 개의 가르침들 중의 그 첫 번째를 포함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서 8,34).
 
     지난 주, 즉 나해 연중 제25주일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가르침을 들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복음서 9,35). 즉, “누구든지 지도자가 되려면, 변함없이 겸손하여야 하고(remain humble)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 두 번째 가르침을 계속한다.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이, 지난 주, 즉 나해 연중 제25주일에 예수님께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들었던, 앞의 절에 소급하여 연결한다(ties back to) -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자(emissary)로서 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초기 교회에서 발생하였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사도행전 19,13):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낼 때에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제1독서에서의 엘닷(Eldad) 및 메닷(Medad)과의 유사점(parallel)에 주목하라.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예수님의 관용적인 태도는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였으며, 그리고 당신의 대표자로서 활동하였다면, 그들은 당신에 대하여 좀처럼 나쁘게 말하지 않을(slow to) 것이라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1코린토 12,3).
 
“우리로 하여금 침착하지 못한 자들을 나무라라고 권고하고,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는(마태오 복음서 7,6; 15,26; 마르코 복음서 7,27) 권고를 하며, 교회를 경멸하는 자를 이방인(heathen)으로 생각하라고 권고하고, 이 지체라는, 즉 교회라는, 단일화된 구조로부터 추문을 야기하는 구성원을 잘라내라는(마태오 복음서 5,30; 18,8-9; 마르코 복음서 9,42-48) 권고를 하는, 엄한 규율적 원칙(disciplinary principles)들에 여념이 없는(intent on) 일부 사람들은, 교회의 평화를 교란한다는 이유로, 적당한 시기 이전에 밀을 가라지로부터 분리하고자(마태오 복음서 13,29-30) 노력한다. 이 오류에 눈이 멀어, 이들은 그리스도라는 바로 그 유일성(the unity of Christ)으로부터 그 자신들을 대신에 분리시킨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aint Augustine of Hippo, 413년), Faith and Works, 4,6].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구절은, 격언 형식(proverb form)으로, 앞의 문장에 있는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일반화이다(또한 마태오 복음서 12,30을 보라). 이들 세 개의 절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배타주의에 반하여(against exclusivism),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주의를 주고 계시며(warns), 그리고 이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를 주고 계신다: “내가 바로 그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면 선(good, 善)은 선이 아니다(Good is not good unless I am the one who does it).”라는 관념(또한 필리피 1,15-18을 보라).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전의 절들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거꾸로 됨(reversed)에 주목하라: 이제 어떤 사람이 제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데 이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자(emmissries)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과 지난 주의 복음 말씀(제37절)에서 당신을 위하여 어린이를 환영함과의 유사점(parallel)에 주목하라.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이 구절은 이 독서를 상기하기 위한 표어(catchword)이다. ‘이 작은 이들’은, 마치 제36절의 작은 어린이처럼, 아마도 제자들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이 구절에서 ‘지옥’으로 번역한 표현을 NAB에서 ‘Gehenna’로 표현하였다. 2열왕기 23,10에 의하면, 힌놈 계곡(히브리 단어는, ‘힌놈(Hinnom)의 아들의 계곡’을 뜻하는, ge Hinnom이다)은 몰렉(Molech)에게 바치는 어린이 인신공양(child sacrifice)의 장소로서 오래 전에 사용되었다(예레미야 7,31; 19,5-6을 보라). 비록 지옥(Gehenna)이라는 용어가 애초에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계곡을 말하였으나, 이 계곡의 부정함(defilement) 때문에, 이 지역은 지속적으로 불로 태우는 쓰레기 처리장이 되었으며, 이 이름은 사악한 자(the wicked)들을 위한 고통의 장소와 동의어가 되었다[(RSV의 외경인) 2Esdras 7,36; 에녹 27,2; 90,24-26].(각주7) 이 장소는, 죽은 자들의 장소/아브라함의 품(Abraham's bosom)인, 저승(sheol/hades)/연옥(purgatory)이 아니다.(각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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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7) 본 해설서 시리즈의 가해-II 연중 제12일 복음 말씀(마태오 10,26-33) 중의 10,28에 대한 해설과 각주 및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라:
참고 자료 1:
http://ch.catholic.or.kr/pundang/4/rsv/2esdras.htm (RSV 2Esdras 7,36)
참고 자료 2:
http://ch.catholic.or.kr/pundang/4/apocrypha/enoch27.htm (Enoch 27,2)
참고 자료 3:
http://ch.catholic.or.kr/pundang/4/apocrypha/enoch90.htm (Enoch 90,24-26)
참고 자료 4:
http://ch.catholic.or.kr/pundang/4/enc/hinnom.htm
 
 
(각주8) 다음의 저승, 연옥, 천국에 대한 엮은이의 졸글을 참고하라:
참고 자료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63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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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순종하는(obedient) 자들은 ‘의인(the just)’들, 즉 ‘의로운 자’들로 불린다.(각주9) 의로운 자의 반대말은 사악한 자가 아니라 ‘의롭지 않은 자(the unjust)’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행동들로써 멀리하는 자들은 ‘사악한 자(the wicked, 악인)’들로 불린다.(각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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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9) NAB 시편 125,3의 주석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psalms125.htm   
 
 
(각주10) NAB 시편 1,4의 주석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psalms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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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44절 및 제46절은 New Revised Standard Version(NRSV), Revised Standard Version(RSV), Revised English Bible(REB), New American Bible(NAB), New Jerusalem Bible(NJB), New International Version(NIV) 그리고 Good News Bible(GNB)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절들은 King James Version(KJV)과 New King James Version(NKJV)에는 나타나며 그리고 아래의 제48절과 동일하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번역에 있어 이러한 차이점에 대한 이유는 이들 절들이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 있지 않으며 그리고 대칭의 이유들로 사본 필경자에 의하여 추가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제43절, 제45절, 그리고 제47절에 있어 말씀들의 구조는 같다. 만약에 몸의 한 부분이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면(cause), 그대가 생명/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고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그것을 잘라 버려라(cut it off). 이것은 공동 사회의 은유(communal metaphor, 隱喩)이기에, 죄를 범하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구성원들을 배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손/발/눈이 죄의 원인은 아니므로 글자 그대로의 발언은 아니며, 우리의 자유 의지의 나약함(weakness of will)에 대한 말씀이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이사야서의 제일 마지막 절인) 이사야서 66,24에 근거하고 있는데, 거기서 지옥(Gehenna)은 그들의 구더기(filth) 및 그들을 태워버리는 불(smoldering)과 함께 묘사되고 있다. 힌놈의 아들의 계곡에서의 어린이 인신공양은 남쪽 왕국인 유다 왕국의 아하즈 왕(King Ahaz, 재위기간: 기원전 735-716년)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이 제정은 2역대기 28,1-3에 서술되어 있다.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는 지옥에 있는 자들에 의하여 느껴질 영원한 후회(eternal remorse)로서 자주 설명이 되며, 그리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이들의 육체적 고통으로서 자주 설명이 된다. 하여튼, 문제의 이 벌은 참혹하며 끝이 없다.
 
“우리가 제시하는 이 질문은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은 가장 시급한 것들에 관한 것이며, 그리고 이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묻는, 즉 지옥의 불이 꺼지는가 혹은 그렇지 않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불이 꺼지지 않음을, 당신께서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진실로 선포하셨다. 그렇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듣자마자(on hearing) 어떤 오싹함(a chill)이 그대에게 다가옴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 고유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 말씀의 사목(ministry of the word)에 우리가 이미 서품되어졌기에(ordained), 우리의 청중들이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우리는 이들을 편안하지 않게(discomfort)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임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따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aint John Chyrysostom, 392년), Homilies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9,1].
 
 
 
󰌛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336.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사제 직무는 수행하게 되는지요?
 
 
CCC 1547-1553, 1592
서품을 받은 사제들은, 그들의 성별된 직무(sacred ministry)의 행사에 있어, 자신 고유의 권위에 따라서도 아니고, 심지어 공동체의 명령(mandate) 혹은 위임(delegation)에 의하여서도 아니며, 오로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으로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직무 사제직(ministerial priesthood)’은 열심 신자들 모두에게 공통인 ‘보편 사제직(평신도 사제직)’과는 단지 그 정도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데, 이는 열심 신자들의 봉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직무 사제직을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엮은이 번역).
 
주: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에서 직접 말씀으로 명하였으나(요한 복음서 1,42; 마태오 복음서 16,18-19; 요한 복음서 21,15-17; 마태오 복음서 18,18), 보편사제직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요한 묵시록 1,6; 5,9-10; 1베드로 2,4-10). 따라서 누구든지 보편 사제직을 언급할 경우에는 반드시 직무 사제직을 또한 언급하여야만 할 것이다.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의 이러한 차이점들에 대한 엮은이의 졸글은 다음에 있으니 읽어보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3.htm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ot_26_c1547.htm
 
 
CCCC 308. 어떤 죄들에 대한 사면이 누구에게 유보되어 있는지요?
CCC 1463
[파문(excommunication)에 의하여 처벌을 받은 죄들과 같이] 어떠한 특정한 대죄(grave sins)들의 사면(absolution)은 사도좌(Apostolic See) 혹은 지역 주교(local bishop) 혹은 이들에 의하여 권한이 부여된 사제들에게 유보되어 있습니다(reserved). 그러나 모든 사제는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자를 모든 죄와 파문으로부터 사면할 수가 있습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ot_26_c1463.htm
__________
주: 해설서 본문의 오류수정 및 내용보강 자료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제공될 예정이오니 본문 학습에 앞서 꼭 확인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26.htm
 
 
출처: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해-II(클릭하십시요) (엮은이: 소순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연중 제26주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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