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1주간 토요일 ‘22/03/12 미사의 영성 4 대영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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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2-26 ㅣ No.4957

사순 제1주간 토요일 ‘22/03/12

미사의 영성 4 대영광송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말씀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루카 2,8-20)

2 8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15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16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나눔

이스라엘의 성지 베들레헴에 있는 '목자들의 들판' 성당에는 루카 복음 28절에서부터 20절까지 나오는 예수 탄생의 기쁜소식을 목동들에게 알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를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어린 아들 이렇게 3대의 목동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 벽화는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과 천사의 말대로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의 동굴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찾아 인사하는 장면.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확인한 후 돌아오는 장면. 이렇게 3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 목동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거룩함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 듣습니다. 반면 그 아들은 눈이 부신 듯 한 손으로 빛만 가린 채 무슨 일인가 하며 쳐다보고 있고, 어린 손자는 마치 천사에게 달려라도 나갈 듯이 한 발을 세우고 얼굴 가득히 환희로 반깁니다. 한편 아기 예수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린 마지막 그림에 나오는 각 사람들의 태도도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젊은 아버지 목동은 자신이 지금 본 사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 안에서 자신의 갈 길을 그냥 걸어가는 듯 양들에게 피리를 불며 몰고 갈 뿐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시메온을 연상케라도 하듯이, 현실에서 자신의 꿈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져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홀함에 빠져 눈의 초점마저 잃고 하늘만 바라보고 걷습니다. 한편 그 손자 목동은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의 승전보를 알리려는 페이디피데스처럼, 어서 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춤을 추듯 맨 앞에 서서 활짝 핀 웃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그림은 이름 모를 한 예술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지만, 그 그림들에 나타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둘러 싼 목자들 각자의 얼굴 표정과 자세는 복음을 향한 우리 인간의 한 단면들을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목동들은 기뻐할 수 있었을까? 어린 아기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누일 곳조차 없이 동물들의 동굴 속 말구유에 포대기 하나 걸치고 초라하게 누워 계십니다. 그분의 가난한 탄생.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서 빨리 부자가 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게 태어난 아기 예수님은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와 같이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아니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로 오셔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우리편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공감과 희망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여유 속에서 그저 자기 한 식구 잘 먹고 편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관심사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에 대한 감각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은 물질적인 치장과 소유라는 자기 생명의 담보로부터 해방시켜주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꾸미고 그릴 수 있는 하느님다운(?) 권위와 외적인 힘을 모두 포기하시고,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아기로, 그것도 말구유에 포대기 하나 걸치고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가난해지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가난을 "(그리스도 예수)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또 이러한 가난의 성격을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난하게 되어 버린 이들에게 오히려 풍요와 여유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눈만 뜨면 다가오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인생의 여정에 지치고 지친 이들에게, 그저 주어진 삶을 마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희망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버림받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권력 싸움 속에서 그리고 세태의 변화 속에서, 결국 변절하고 쓰러지고 말 그런 한 세대의 풍운아요 영걸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히브 5,7-10)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노래는 오늘 이 시대에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요,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가졌기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문구가 오늘의 인간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의 인간 군상은 어쩌면 물질적인 욕망의 무한한 늪에 빠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의 희생을 전제하고 요구하며 너무나도 배타적인 이기주의의 먹이사슬 속에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동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 왔던 목동들, 그 목동들의 말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 2천 년 전 자신들의 부족들이 믿고 의지하며 살던 신심과 사상을 뒤로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교 백성들과 이교도에게서 구세주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처럼 참 진리를 향한 제한과 편견 없는 사람들의 행렬을 발견합니다.

 

무엇보다 구세주가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어머니 마리아와 무명의 여인들과 제자들을 발견합니다. 또한 오늘 예수님의 성모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주님의 명을 따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주님의 평화 속에 있는 교회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자신도 발견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그 삶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하늘 높은 곳으로 울려 퍼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어느 마을에 구역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 할머니 한 분이 미사를 봉헌하러 간 저를 반기시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신부님, 구역반 미사를 저희 집에서 지내게 되어 얼마나 큰 영광인 줄 모르겠습니다."

 

영광을 자신의 출세나 입신양명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힘과 지배가 불가능한 저 너머의, 진정으로 거룩한 분과 그분과의 연관관계 안에서 찾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은 오늘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조종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 영광을 빛내는 이들에게서도.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즉 십자가의 길을 강요 받았음에도 거부하지 못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요, 또 한편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성탄 밤 천사와 함께 하늘의 군대가 부른 이 노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난해지도록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가난한 이들이 외치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성찰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어떤 기쁨과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영혼의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대와 목표는 무엇입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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