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7월4일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평화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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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7-03 ㅣ No.1253

 

Isabel of Portugal with St Elizabeth- CHRISTUS, Petrus

1457-60 Oak panel, 59 x 33 cm Groeninge Museum, Bruges

 

축일: 7월 4일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O.F.S.

Sant' Elisabetta di Portogallo Regina
4 luglio - Memoria Facoltativa 
Saragozza, Spagna, 1271 - Estremoz, Portogallo, 4 luglio 1336
Elisabetta = Dio è il mio giuramento, dall'ebraico
Saint Elizabeth of Portugal
Also known as : Elisabet of Portugal, Elizabeth of Aragon, Isabel of Portugal, Isabella of Portugal,The Peacemaker
Born : 1271 at Aragon, Spain
Died : 4 July 1336 at Estremoz, Portugal of fever
buried at Coimbra, Portugal
miracles reported at her tomb
Name Meaning : worshipper of God
Canonized : 25 May 1625 by Pope Urban VIII
Third Order Franciscan  ’화해의 성녀’

 

 

아라곤 왕 베드로와 복녀 콘스탄자의 딸이며, 헝가리의 성 엘리사벳의 조카로 1271년 태어났다.
12살 되던 해인 1282년에 포르투칼 왕 디니스와 결혼하였다.
코임브라(Coimbra)에 성 글라라 수도원을 세워주었고
전쟁 때와 남편과 아이들, 아이들 서로간의 불화를 평화로이 조정하였다.

1325년 미망인으로 코임브라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겸손의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사위인 카스텔라 왕과 자기 아들 알퐁스 왕간의 불화를 조정하러 Extremoz에 가서 중병에 걸렸다.
그 곳 성 글라라 수도원에서 임종 직전 성녀 글라라 회칙에 따라 서원하였다(1335년).
코임브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축일은 7월4일이다.
-프란치스칸 사상과 삶 15호,122쪽에서-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구라파에 널리 알려진 루시타니아의 성녀 엘리사벳(1271-1336년)은

아라곤 3세 국왕의 딸로 태어나 자기의 증조모이신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녀)을 따라 이름지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축일:11월17일.게시판1474번.756번.

 

1271년 그녀가 태어났을 때, 뒷날 아라곤의 왕이 될 아버지 페드로 2세는

그 당시 군주인 자기 아버지 야고보 1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것은 장차 일어날 일의 징조였다.

그녀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빠른 속도로 영적 감식력을 습득해 나갔다.

 

아직 소녀 시절인 12살 때에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지만,

데니스는 강력한 통치자였으나 남편으로서는 칭찬 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기도와 자선사업 등을 운영함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하려고 했으며

또한 성공한 경우에 속한다.

 

그녀는 매일 미사를 포함한 신앙 생활뿐 아니라 자기의 도움을 받으러 찾아 온, 모든 사람들,

즉 순례자, 외국인, 병자,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자선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생활 형태를 스스로 영위할 수 있었다.

 

남편에게도 변함없이 헌신적이었던 그녀에 대한 남편의 배신 행위는 왕국의 수치였다.

왕은 그녀의 평화적 노력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간구했고, 마침내 남편은 죄많은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사생아를 더 총애한다고 생각하는 반항적인 아들 알퐁소와 남편을 화해시켰다.

그녀는 아라곤 왕인 페르디난도와

왕위를 주장하는 그이 사촌 야고보와의 싸움에서도 평화 중재인 역할을 하였다.

 

엘리사벳은 1325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코임브라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이곳은 자신이 세운 글라라회 수녀원이 있었지만, 수녀가 되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펼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사방으로 펴졌던 것이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 자기 아들 알퐁소와 알퐁소의 양자 캐스틸의 왕사이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그 일을 성취하게 되었다.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 결코 조용하고 침착한 노력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극이 너무 지나쳐 서로를 파괴하려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조정하는 것으로 즉 결백하고,

끈기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것은 일찍이 14세기 초반에 있었던 한 여인의 진실된 것 모두이다.

엘리사벳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성실한 사랑과 동정심을 지녔던 것이다.

 

엘리사벳의 건강은, 화해를 위해서 여행에 나설 만큼 좋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더위는 상황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여행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를 막기 위해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성공적으로 평화를 지켜 나가는 동안 그녀의 건강은 죽음이 임박할 정도로 중태에 빠졌다.

 

1336년 성녀는 포르투갈의 에스트레모스에서 운명하였으며  유해는 코임브라 수녀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축일이 원래 7월 4일이었으나,

1965년 인노첸스 12세 교황에 의하여 7월 8일로 옮겨졌었으나 다시 7월 4일로 지내고있다.

엘리사벳은 흔히 한 마리 비둘기,또는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626년에 시성되어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의 황후 엘리사벳은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의 성녀’이다.

 

 

 

포르투칼은 현재는 당당한 공화국이지만, 옛날에는 일개의 왕국이었고,

지금 말하려는 성녀 엘리사벳은 그 왕후 중의 한분이었으며,

그녀는 포르투칼을 위해 대단히 명예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는 1271년 그페인의 아라곤왕 베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왕녀로서

그의 왕비가 된 콘스탄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투란지아(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의 생질에 해당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딸도

그 성녀의 높은 덕을 본받도록 그 이름을 엘리사벳이라 지었다.

 

그 당시 엘리사벳의 조부는 그의 장자인 베드로와 전쟁 중이었으나 엘리사벳으로 인해

서로 화평을 맺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 조부는 어린 왕녀의 교육을 자진해서 맡게 되었다.

조부가 별세한 후 그녀는 불과 8세의 어린 몸이었지만 당시 풍속에 의해 포르투칼의 왕 디오니시오와

약혼을 하게 되어 궁중생활을 배우기 위해 리스본 시로 가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국왕은 그리 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왕후는 그를 잘 섬기고 그의 환심을 얻도록 하는 한편,

영혼에 위험한 궁중의 호화찬란한 생활을 가급적 피해 자신을 위한 엄중한 생활을 요망했고,

그 고조모 성녀 엘리사벳(헝가리)을 본받아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동시에 그 규율을 엄수하며

자진하여 단식과 극기를 했다.

 

 

1288년 그녀에게 왕녀가 생겼다.

그 이름을 콘스탄시아라 하여 후에 카스티야의 왕비가 되었으나 1313년 별세했다.

1301년엔 왕자가 탄생했는데, 이는 후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다.

 

엘리사벳의 남편인 디오니시오 왕은 결코 그녀에게 시종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심중에 심각한 고통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체를 하느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항상 부드러운 온정으로써 남편을 대했다.

그러는 동안 왕도 자기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어 감화한 나머지,

왕비로 하여금 자유로이 신심과 자선에 힘쓰도록 승낙했다.

 

왕비는 기쁜 마음으로 병자와 극빈자를 방문하고 그들을 구호하는 한편,

신심에 열중하고 기도를 많이 하며 사제와 같이 성무 일도를 바치고 매일같이 빵 세 조각과 물로써 연명했다. 이러한 감탄할만한 극기생활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어 가끔 그녀를 통해 기적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어떤 눈먼 아이의 눈에 손을 댔더니 그 눈이 즉시 밝아지고, 어떤 환자에게 십자 성호를 그었을 때 그 환자가 즉시 완쾌되었다는 사실 등이다.

 

엘리사벳은 그녀의 신하인 귀족들에게도 타인애의 표양을 보여 주었다.

즉 그들, 특히 그녀의 친족이 되는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며 심지어는 전쟁도 불사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마다

그녀는 동분서주하며 서로 화해의 길을 터 주었다.

어떤 때는 양군이 대진해 막 전쟁이 벌어지려 할 때 왕비가 홀로 뛰어나가 양편을 조정시키고

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했다는 것이다.

 

1325년 남편인 디오니시오 왕이 서거하자 엘리사벳은 코닌프리첸시스에 있는

클라라 수도회에서 지금까지 국모로써 존경을 받던 그 몸에 수도복을 걸치고,

자신을 하나의 비천한 종으로 생각하며 완덕에 매진했다.

그녀의 본래의 희망은 일생을 수도원에서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수도 생활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권유도 있고, 또 아직까지는 그렇게 엄격한 수도 생활에 익숙치 않고 해서

가끔 궁전에 돌아가 궁전 일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로 인해 극도로 피로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중병으로 병석에 눞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병고를 잘 견디어 조금도 그 아픔을 타인에게 표시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의 며느리가 머리맡에 앉아 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미안하지만 잠깐 일어나 거기 오시는 부인께 자리를 양보해 다오

.” “아무도 안 계신데 누구에게요?” 며느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엘리사벳은 “바로 거기 계시지 않니? 흰옷을 입으신 분이...”라고 대답했으나

그녀에게만 보이던 분은 바로 엘리사벳이 평소에 존경하던 성모 마리아로서,

그녀를 천국에 영접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실제 그로부터 몇분도 지나기 전에 엘리사벳은

“은총의 어머니, 자애 깊으신 어머니 성 마리아여!

원수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임종때에 저를 구하소서”하고

혼잣말로 속삭이고 나서 잠자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625년, 교황 율리노 8세때 시성되었다.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을 따라 같은 이름을 지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디니스 1세는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설립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와 불신앙을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리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들 아폰소 4세(Afonso IV)와 남편 디니스 1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던 그녀는 1324년 남편 디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쿠임브라(Coimbra)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그곳에는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가 있어서 인근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사망하여 쿠임브라의 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쿠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으며,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홈에서)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가 한 것으로 보는 강론에서

(De pace:PL 52,347-348)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덕행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존하는 사람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평화는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귀족의 이름을 줍니다.

평화는 또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지니고 있는 위치를 변모시켜 그를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노예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형제들간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완성이고 정의의 규범입니다.지식의 스승이고 윤리의 수호자이며 만사의 칭송할 만한 질서입니다.

평화는 기도의 목표이고 쉽고 안전한 청원 방법이며 모든 욕망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평화는 또 사랑의 어머니, 화목의 유대, 그리고 원하는 것은 다 청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평화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청하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습니다.

우리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평화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흡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 가운데 너희와 헤어졌다. 내가 다시 올 때 너희가 평화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보고 싶어하신

 그 평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보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준 것은 다시 찾겠다." 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모호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마음속 깊이 평화를 심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은 원수의 짓입니다.

형제적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마귀들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미움을 단죄해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 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평화를 사랑하고 화목을 소중히 여겨야 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와 화목은 사랑을 낳고 또 그것을 자라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사랑은 하느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다." 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생명에 이바지하는 계명들을 지킵시다.

깊은 평화의 유대로써 형제들의 공동체를 한데 묶고,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구원적 유대로써 공동체를 견고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의 온갖 욕망을 지닌 채 사랑을 포옹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은혜와 상급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평화 가운데 계시므로 평화를 다른 모든 덕행에 앞서 간직해야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십시요. 그러면 모든 것이 평온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상급이고 여러분에게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평화의 일치 위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온을 누릴 것입니다.

 

 

 

"세상 만물에는 각자의 자리가 있으며 또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이라면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하였을 것이다.

"세상 만물에는 각자의 시간이 있으며 또한 있어야 할 시간이 있다."

 

아라곤 왕의 딸로 태어난 그는 12살 때 포르투갈 왕과 결혼하였다.

남편은 경건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엘리사벳의 신앙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는 않았다.

엘리사벳은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마친 후 미사에 참례하였고

오후에도 저녁기도를 비롯한 여러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엘리사벳은 자신이 어머니, 주부, 왕비로서 해야 할 의무를 그 사이에 처리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하였다.

 

우리가 어떤 스케줄에 얽매어 있을 때는 쉽게 단조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계획이 없다면 시간을 낭비하기 쉽다.

스케줄에 따라 산다는 것은 틀에 박힌 삶을 산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 일하고 언제 놀고 언제 운동하며

언제 홀로 있고 언제 함께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이정표다.

스케줄을 따라가는 것은 일상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평화의 기도

update 2007.6.12.

 

 

 


Sant' Elisabetta di Portogallo Regina
4 luglio - Memoria Facoltativa 
Saragozza, Spagna, 1271 - Estremoz, Portogallo, 4 luglio 1336

Nacque a Saragozza, in Aragona (Spagna), nel 1271. Figlia del re di Spagna Pietro III, quindi pronipote di Federico II, a soli 12 anni venne data in sposa a Dionigi, re del Portogallo, da cui ebbe due figli. Fu un matrimonio travagliato dalle infedeltà del marito ma in esso Elisabetta seppe dare la testimonianza cristiana che la portò alla santità. Svolse opera pacificatrice in famiglia e, come consigliera del marito, riuscì a smorzare le tensioni tra Aragona, Portogallo e Spagna. Alla morte del marito donò i suoi averi ai poveri e ai monasteri, diventando terziaria francescana. Dopo un pellegrinaggio al santuario di Compostela, in cui depose la propria corona, si ritirò nel convento delle clarisse di Coimbra, da lei stessa fondato. Dopo la morte avvenuta nel 1336 ad Estremoz in Portogallo, il suo corpo fu riportato al monastero di Coimbra. Nel 1612 lo si troverà incorrotto, durante un'esumazione, collegata al processo canonico per proclamarla santa. Fu canonizzata a Roma da Urbano VIII nel 1625. (Avvenire)

Etimologia: Elisabetta = Dio è il mio giuramento,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Santa Elisabetta, che, regina del Portogallo, fu esemplare nell’opera di pacificazione tra i re e nella carità verso i poveri; rimasta vedova del re Dionigi, abbracciò la regola tra le monache del Terz’Ordine di Santa Chiara nel cenobio di Estremoz in Portogallo da lei stessa fondato, nel quale, mentre era intenta a far riconciliare suo figlio con il genero, fece poi ritorno al Signore.

Ascolta da RadioVaticana:
   Ascolta da RadioMaria:

Elisabetta nacque a Saragozza (Spagna) nel 1271 da Pietro III d'Aragona, e da Costanza, figlia di Manfredi, successo al padre, l'imperatore Federico II, nel regno di Sicilia. Al fonte battesimale le fu imposto il nome della santa prozia, regina d'Ungheria. Dopo la sua nascita si riconciliarono tra loro il padre e il nonno, Giacomo I il Conquistatore che, fino alla morte (1276), volle prendersi cura della educazione di lei. A otto anni, Elisabetta aveva già imparato a recitare ogni giorno l'ufficio divino, a soccorrere i poveri e a praticare rigorosi digiuni. La sua infanzia fu di corta durata perché, a dodici anni fu data in sposa a Dionisio il Liberale, re di Portogallo, fondatore dell'università di Coimbra e dell'ordine del Cristo.
Alla corte della casa reale di Portogallo, Elisabetta non tralasciò le buone abitudini prese pur non trascurando i nuovi doveri di regina e di sposa. Continuò a levarsi di buon mattino per andare in cappella ad ascoltare la Messa in ginocchio, fare sovente la comunione, e dire l'ufficio della SS. Vergine e dei morti. Dopo pranzo ritornava in cappella per terminare l'ufficio divino, fare letture spirituali e abbandonarsi a svariate orazioni tra un profluvio di lacrime. Il tempo libero lo impegnava a confezionare suppellettili per le chiese povere, con l'aiuto delle dame di corte. A queste buone opere altre ne aggiunse di mano in mano che veniva a conoscenza delle pubbliche necessità. Non ci furono difatti chiese, ospedali o monasteri alla cui costruzione ella non contribuisse con regale generosità. Alcuni ne fece costruire, ella stessa, a Santarém e a Coimbra.
La sua ultima fondazione fu una cappella in onore della SS. Vergine nel convento della Trinità, a Lisbona. Essa fu il primo santuario in cui si sia venerata l'Immacolata Concezione. Prima di morire volle pure istituire una confraternita intitolata alla SS. Trinità.
Perché il suo spirito fosse sempre pronto alla contemplazione, Elisabetta digiunava abitualmente tre volte alla settimana, tutta la quaresima, tutto l'avvento e dalla festa di S. Giovanni Battista all'Assunta. I venerdì e i sabati che precedevano le feste della SS. Vergine si cibava soltanto di pane e acqua. Nella sua sete di penitenza, ella si sarebbe data ad altre austerità, se il marito glielo avesse permesso. I medici le ordinarono, per un certo tempo almeno, di abbandonare le mortificazione di gola, ma ella continuò a bere dell'acqua. Un giorno però Iddio intervenne a favore dei discepoli di Esculapio, mutando in vino una brocca d'acqua che le era stata portata.
Anche la carità di Elisabetta per i poveri e i nobili decaduti fu incomparabile. Al suo elemosiniere aveva dato ordine di non mandare mai via nessun bisognoso a mani vuote. Ella fece inviare dei viveri a monasteri poveri e a regioni colpite dalle avversità; protesse gli orfani; soccorse le giovani pericolanti; tutti i venerdì di quaresima, dopo aver lavato e baciato i piedi a tredici poveri, li faceva vestire di abiti nuovi; il giovedì santo compiva la medesima opera buona a favore di tredici donne. A contatto delle sue mani e delle sue labbra, una malata guarì da una piaga al piede e uno storpio lebbroso, da entrambe le infermità.
Nel 1290 Elisabetta diede alla luce una figlia, Costanza, che in seguito fu maritata a Ferdinando IV di Castiglia. L'anno dopo partorì l'erede al trono, Alfonso IV il Valoroso. Per la sua famiglia Elisabetta fu un vero angelo tutelare. Ella non si accontentò di dare dei buoni consigli ai figli, ma esortò anche il marito a governare i sudditi con giustizia e mitezza senza dare ascolto ai vani discorsi degli adulatori o ai falsi rapporti degli invidiosi. Tuttavia, dopo qualche anno passato nella concordia e nella più dolce intimità con lui, Dio permise che cominciasse, per Elisabetta, un vero calvario a causa degli illeciti amori ai quali il re, a poco a poco, si abbandonò. Elisabetta se ne afflisse più per l'offesa fatta a Dio che per l'affronto fatto a lei. Con dolcezza cercò di ricondurlo sul retto cammino e, senza uscire in amari lamenti, spinse il suo eroismo fino a curare l'educazione dei figli naturali di lui come se fossero propri. La nobiltà, temendo che i bastardi del re acquistassero troppo ascendente nel paese, eccitarono alla rivolta il figlio ereditario. Alfonso prese difatti le armi contro il padre, con immenso dolore di Elisabetta, la quale si schierò dalla parte del sovrano e cercò ripetutamente di rappacificare i due avversari. Siccome erano sordi alle sue esortazioni, ella moltiplicò le preghiere, i digiuni e anche le lettere di rimprovero al figlio.
Ciononostante cortigiani mal intenzionati giunsero a far credere al re che la sua consorte aiutava segretamente il figlio ribelle. La calunnia fu creduta dal sovrano, il quale privò Elisabetta della signoria di Leiria, che le apparteneva e la confinò nella fortezza di Alemquer. Parecchi grandi del regno andarono ad offrirle i loro servigi, ma la Santa preferì affidarsi alle mani della divina Provvidenza anziché permettere di venire reintegrata nei suoi diritti con le armi. Il re riconobbe al fine il suo torto, richiamò Elisabetta e le diede in appannaggio la città di Torres-Vedras.
La regina continuò ad adoperarsi affinchè nella sua famiglia ritornasse la pace. Al tempo dell'assedio di Coimbra (1319), da parte di suo figlio, la madre si portò a cavallo in mezzo ai soldati delle opposte fazioni, con un crocifisso in mano, e riuscì a riconciliare padre e figlio. La guerra ricominciò più violenta poco tempo dopo a Lisbona. Elisabetta, che preferiva la pace a tutto l'oro del mondo, montò sopra una mula e si slanciò tra i due eserciti per scongiurarli, con le parole e con le lacrime, a scendere a patti. In quelle circostanze la Santa riuscì a pacificare per sempre i due contendenti.
Elisabetta aveva iniziato il suo compito di pacificatrice in occasione delle contese sorte tra suo marito e suo cognato, il turbolento Alfonso di Portalegre, a motivo di qualche possedimento. La santa aveva evitato che venissero alle mani cedendo a Dionisio parte delle sue rendite, per risarcirlo delle terre che era stato costretto a cedere al fratello. Anche presso il rè di Spagna l'intrepida regina svolse opera di pace affinchè potessero fare blocco nella lotta contro i mori. Impedì difatti una guerra tra suo marito e il genero, Ferdinando IV di Castiglia.
Dionisio, alla preghiera della sposa, si convertì e passò accanto a lei gli ultimi anni di vita. Al tempo dei suoi disordini, la regina si serviva di un paggio di fiducia per far giungere le elemosine ai bisognosi. Un paggio del re, geloso di quella preferenza, decise di perderlo, accusandolo al sovrano di illecite relazioni con la regina . Dionisio gli prestò fede, se ne adombrò e decise segretamente di far morire il favorito. Un giorno, uscito a cavallo, s'imbatté in una fornace di calce. Si avvicinò agli operai e diede ad essi l'ordine di gettare subito nel fuoco il paggio che si sarebbe presentato a chiedere loro se fosse già stato eseguito il comando del sovrano. L'indomani vi mandò il paggio della regina, ma costui, passando davanti ad una chiesa, sentì suonare la campanella e vi entrò per ascoltare la Messa.
Dopo un po' di tempo il re, che smaniava di sapere che fine avesse fatto il paggio, chiamò il calunniatore e lo mandò a chiedere ai fochisti della fornace se il comando del re era stato eseguito. Gli operai, credendo che quello fosse il paggio di cui il re aveva parlato loro, lo presero e lo buttarono vivo nel fuoco. Poco dopo si presentò pure il paggio votato alla morte. Appena seppe che l'ordine del re era stato eseguito, ritornò a darne notizia a chi lo aveva mandato. Il re, constatato con stupore che la sua macchinazione, per disposizione divina, aveva avuto un esito diverso da quello che si era proposto, cominciò da allora a rinsavire.
Dopo la morte del marito (1325), Elisabetta rinunciò al mondo, si tagliò i capelli, vestì l'abito del terz'ordine Francescano e andò pellegrina a San Giacomo de Compostela. In suffragio del re defunto, offrì al santuario la corona d'oro che aveva portato il giorno del matrimonio, con altri ricchissimi doni. Il vescovo della città le diede in cambio un bastone di pellegrino e una borsa che la santa volle portare con sé nella tomba. Appena rientrò a corte fece fondere le sue argenterie a favore delle chiese, divise i diademi e le altre insegne regali tra la sovrana Beatrice e le sue nipoti e, a Coimbra, fece terminare la costruzione del monastero di Santa Chiara. In esso intendeva terminare la vita, ma ne fu distolta da savi sacerdoti, per ragioni di stato e per non privare tanti poveretti dei suoi aiuti. Elisabetta si accontentò di portare sempre l'abito della penitenza e di fare costruire presso il monastero un appartamento che le consentisse, con il permesso della Santa Sede, di ritirarvisi sovente a pregare, a conversare e a pranzare con le religiose. Abitualmente ne teneva cinque con sé per la recita corale dell'ufficio e la vita in comune.
Nel pomeriggio Elisabetta dava udienza con una pazienza e una bontà illimitata, ai poveri, ai malati, ai peccatori che ricorrevano a lei. Per tutti aveva una parola di consolazione, un'abbondante elemosina. Nel 1333 gli abitanti di Coimbra furono ridotti, dalla carestia, a cibarsi di sorci. Elisabetta, senza prestare ascolto agli amministratori dei suoi beni che le raccomandavano la parsimonia, fece comperare per loro grandi quantità di cibarie e provvide persino che fossero seppelliti i morti, abbandonati nelle case per la grande desolazione. Quando era libera dalle opere di carità e nella notte, ella si ritirava in una stanzetta segreta. Lontana dagli sguardi indiscreti dava libero sfogo alle sue preghiere e alle sue contemplazioni. Altre volte andava a visitare i degenti nell'ospedale che aveva fatto costruire in onore di S. Elisabetta d'Ungheria e a curarli con le sue stesse mani.
L'ultimo anno di vita Elisabetta pellegrinò, una seconda volta, a San Giacomo de Compostela, con due donne. Volle fare a piedi il lungo viaggio nonostante i suoi 64 anni e mendicare di porta in porta il vitto quotidiano.
Al ritorno le fu annunziato che suo figlio, Alfonso re del Portogallo, e suo nipote Alfonso, re di Castiglia, si erano dichiarati guerra. Elisabetta si portò a Estremoz nella speranza di strappare parole di pace dalla bocca del figlio da portare al nipote in Castiglia, ma una violenta febbre non le lasciò nessuna speranza di vita. Si mise a letto, fece testamento alla presenza del figlio e della nuora, e ricevette il Viatico tra sospiri e lacrime, rivestita del suo abito di penitenza, inginocchiata, nonostante l'estrema debolezza, davanti all'altare eretto nel suo appartamento. Alla regina Bianca, che l'assisteva e che era stata la compagna delle sue visite ai poveri e ai malati, ella chiese che avvicinasse al suo letto una sedia per Maria SS. la quale le era apparsa radiosa, vestita di bianco, in compagnia di S. Chiara e di altre sante. Morì il 4-7-1336 dopo aver recitato il Credo e mormorato: Maria, mater gratiae.
Il corpo di Elisabetta fu trasportato a Coimbra e seppellito nella chiesa delle Clarisse dove si è conservato incorrotto. Urbano VIII la canonizzò il 24-6-1626.

Autore: Guido Pettin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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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11-01-02

 

 

 

 

 

 

 

 

Saint Elizabeth of PortugalJan 022009 
Also known as
Elisabet of Portugal
Elizabeth of Aragon
Isabel of Portugal
Isabella of Portugal
The Peacemaker


Memorial
4 July
formerly 8 July


Profile
Princess. Daughter of King Pedro III of Aragon and Constantia; great-granddaughter of Emperor Frederick II. Great-niece of Saint Elizabeth of Hungary, for whom she was named. She had a pious upbringing with daily liturgy and praying of the hours, regular religious instruction and education. Married at age twelve to King Diniz of Portugal, and thus Queen of Portugal before she was a teenager.

The king was known for his hard work, his poetic nature, and his lack of morals. Elizabeth suffered through years of abuse and adultery, praying all the while for his conversion, and working with the poor and sick. Mother of two, Princess Constantia and Prince Affonso. She sometimes convinced the ladies of the court to help with her charity work, but most of the time she just incurred their jealousy and ill will. The king appears to have reformed late in life, though whether from Elizabeth’s faith or his imminent death is unknown.

Prince Affonso rebelled against the favours that King Diniz bestowed on his illegitimate sons, and in 1323 forces of the king and prince clashed in open civil war. Though she had been unjustly accused of siding with her son against the crown, Elizabeth rode onto the battlefield between them, and was able to reconcile father and son, and prevent bloodshed. This led to her patronage as a peacemaker, and as one invoked in time of war and conflict.

After the death of the king in 1325, she distributed her property to the poor, became a Franciscan tertiary, and retired to a monastery of Poor Clares she had founded at Coimbra.

In 1336 her son, now King Affonso IV, marched against his son-in-law, the King of Castile to punish him for being a negligent and abusive husband. Despite her age and ill health, Elizabeth hurried to the battlefield at Estremoz, Portugal, and again managed to make peace in her family, and thus maintain peace in her land.


Born
1271 at Aragon, Spain


Died
4 July 1336 at Estremoz, Portugal of fever
buried at Coimbra, Portugal
miracles reported at her tomb


Name Meaning
worshipper of God


Canonized
25 May 1625 by Pope Urban VIII


Patronage
against jealousy
brides
charitable societies
charitable workers
charity workers
charities
Coimbra, Portugal
difficult marriages
falsely accused people
invoked in time of war
peace
queens
tertiaries
victims of adultery
victims of jealousy
victims of unfaithfulness
widows


Representation
Franciscan nun rose in her hand
Franciscan nun with a beggar nearby
Franciscan nun with a jug in her hand
Franciscan tertiary nun
woman carrying roses in her lap in winter
woman crowned with roses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Encyclopedia
Catholic Online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New Catholic Dictionary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Wanderer, by Maria J Cirurgiao and Michael D. Hull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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