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성당 자유 게시판

비오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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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택 [stwee] 쪽지 캡슐

2002-08-19 ㅣ No.2036

나는 비오는 날 산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번잡스럽지도 않고 안개 구름이 산 중턱에 걸려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속세를 벗어난 꿈속의 세계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늘 보던 산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온다.

산수를 그린 동양화에 보면 산 중턱에는 꼭 안개가 끼어있는데 비오는 날 올라가면 그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어제는 비가 오는데 혼자서 북한산을 올라갔다.

오전에는 호우 때문에 입산을 금지해서였는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혼자서 걸으면서 듣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 놓고 소리를 내어 노래도 불러보고 모처럼 조용한 깊은 산골의 느낌을 음미하였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서 차한잔을 마시는데 산비둘기 한마리가 날아와서 내 주위를 이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전에 산에서 김밥을 먹는데 청설모가 한마리 옆에서 알짱거려 김밥을 한 덩이 던져 줘받더니 냉큼 받아먹고 다른 청설모들 까지 몰려와서 밥을 얻어먹던 기억이 나서 저 비둘기가 혹시 먹을 것을 바라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하고 갖고 있던 비스켓을 부셔서 던져줘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쪼아먹었다.

 

집비둘기는 가까이서 많이 봤는데 사실 그 모습이 지저분해 보여 별로 맘에 들지 않았었다. 반면에 산비둘기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라 자세히 봤더니 깃털이 갈색이 섞여있어서 따뜻해 보이는데 눈도 검은 동자 주위를 갈색이 둘러싸고 있어서 굉장히 순박하고 정겹게 보였었다. 아마도 비가오고 해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해 그동안 사람들에게 얻어 먹은 경험이 있어서 다가온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야생의 산비둘기도 어느 새 사람에게 길이든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에 여러가지 상념들이 스쳐간다. 야생의 동물들에게 모이를 줘도 괜찮은 것인지, 자연과 환경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비스켓은 인스탄트 식품인데 비둘기도 억으면 성인병에 걸리지 않을까 등등...

 

그렇게 빗속에서 한참을 비둘기와 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쳐다보다보니 완전히 속세를 떠나서 하늘에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저 비둘기와 나는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렇게 빗속에서 만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을 거니느라고 온몸이 다 젖었지만 ( 회사에서 나눠준 츄리닝 상의가 방수가 되는 줄 알고 입고 갔는데 가벼운 비에 발수는 되지만 완전방수는 안되는 것이라서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머릿속의 복잡한 일들이 사라지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내려왔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좋은 산이 가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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