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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아! 동아투위....동아투위의 마지막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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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heeyoung75] 쪽지 캡슐

2008-08-13 ㅣ No.7197

   아! 동아투위...

                        - 동아투위의 마지막 시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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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미디어 오늘>

 

지금 KBS에서는 안팎에서 7순을 바라보는 두 노인이(죄송합니다.) 폭력에 노출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KBS 밖에 계신 분은 성유보 ‘방송장악-네티즌 탄압 저지 범국민 행동’(약칭 범국민행동)의 상임위원장입니다. 안에 계신 분은 KBS의 정연주 사장입니다. 이 두 분은 ‘동아일보 자유언론 수호 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 소속으로 33년 전에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 PD, 아나운서 등 150명 가운데 가장 어린(?) 막내들입니다. 아직도 동아투위가 모이면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분들입니다. 지금도 가끔 평생 막내라고 투덜대곤 하십니다. 성유보 위원장은 올해 65세이시고 정연주 사장은 62세입니다. 고향도 비슷해서 성유보 위원장은 경북 경산, 정연주 사장은 경북 경주입니다.


성유보 위원장은 정연주 사장 해임 건의안 의결을 하루 앞둔 8월 7일, KBS 앞에서 경찰에 연행됐습니다. 이빨도 다 빠지고 살도 다 빠져 근육이라고는 없는 이 분을(이 분은 실제로 심장에 이상이 있어 최근 입원하신 바 있습니다.) 전경들이 양팔을 끼고 공중에 들어 올린 채 빠르게 뛰어서 경찰 버스에 옮겨 실었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서에 하루를 억류했습니다. 다음날 있을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 건의안 의결을 위해서 작전을 한 것입니다.


8월 8일, 정연주 사장은 자신이 지휘하는 KBS 안에서 자신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의결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김금수 이사장을 쫒아 내고 새로 부임한 유재천 이사장은 직접 영등포 경찰 서장을 불러 경찰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KBS 건물 안에 경찰 병력의 투입을 요청하는 권한은 어디까지나 사장의 권한입니다. 유재천 이사장이 월권을 한 것입니다. 정 사장은 자신의 권한을 불법적으로 빼앗기고 또 경찰의 보호 아리 직위를 박탈당하는 일종의 사내 쿠데타를 당했습니다.      

동아일보의 기자, PD, 아나운서들이 동아일보에서 쫒겨 난 것은 75년 3월 17일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 등 국가권력이 동원됐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동아일보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막내 기자였던 성유보 위원장은 32살(기수로 2년 선배), 정연주 사장은 29살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동아일보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취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던 중앙정보부가 취직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언론사의 기자,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습니다. 동아투위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직자라는 사회적 위신의 손상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위험에 노출된 채 평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성유보 위원장님은 지금도 일산의 작은 아파트에 사시는 데 사모님이 자동차 보험으로 가계를 꾸리십니다.(저도 이 분에게 자동차 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정연주 사장은 지금도  전세살이를 하면서 수시로 집을 옮겨 다니십니다.(이것도 헛소문을 내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개인 비리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웃기는 소리입니다.


동아투위는 집단으로 해직된 뒤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으로 편입됐습니다. (취직을 못하게 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도록 박정희 정권이 내몰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78년 11월, 이른바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사건일지’ 사건으로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2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성유보-정연주 두 분도 서대문형무소에서 함께 복역했습니다. 이때 함께 복역했던 안종필 위원은 출옥 후 별세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안종필 자유 언론상이 제정됐습니다. (이글을 쓰는 저도 안종필 자유 언론상 수상자입니다.) 성유보 위원장은 5공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주통일민중운동 연합(약칭 민통련)의 사무처장을 맡았습니다. 성유보 사무처장은 당시에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청 등의 기관원들과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습니다.(당시에 민통련 간부들은 중앙정보부원, 기자들과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거짓 보도를 일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적들에게도 온화하게 대하고 정확한 정보를 숨기지 않고 제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저는 당시에 MBC의 중부 경찰서 출입 기자였는데 민통련이 중부 경찰서 관할인 장충동 분도회관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당시 민통련의 핵심 멤버로는 이재오 전의원 등이 있습니다.) 이 민통련은 87년 6월 항쟁을 이끈 이른바 국본(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으로 이어져 성유보 위원장은 정책기획실장을 맡았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철권통치가 끝났을 때 동아투위는 복직의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동아투위는 다시 직장에 돌아가 일을 하고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복직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수유리로 수련회를 떠났습니다. 그날이 하필이면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그 날, 바로 5월 17일이었습니다. 동아투위는 수련회 장소에서 쿠데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조를 짜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성유보 위원장과 정연주 사장은 한 조가 돼서 함께 도망을 다녔습니다. 20여명이 수배됐습니다. 성유보-정연주, 두 분도 수배됐습니다. 이때 붙잡히거나 자진 출두한 사람은 고문을 받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조작돼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송건호 선생님은 이때 고문을 받아 돌아가실 때까지 10여년을 고생하셨습니다. 당시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당하게 출두하겠다고 하여 경찰에 자진 출두 했던 홍종민 위원은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취직도 못하고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던 정연주 사장은 당시 휴스턴에 있던 형님을 따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객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겨레신문이 생기자 한겨레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을 하게 됩니다. (정 사장이 특파원을 하게 된 것은 한겨레신문이 특파원을 파견할 돈이 없어 휴스턴에 있던 정 사장을 워싱턴으로 보내 특파원을 시키게 된 것이었습니다. 정 사장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당시의 한겨레신문 편집국장이 성유보 위원장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수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사실상 평생을 ‘건달’로 지낸 두 분에게 말년에 자리가 하나씩 주어졌습니다. 성유보 위원장에게는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그리고 정연주 사장에게는 KBS 사장 자리였습니다. (동아투위는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 자리를 맡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분에 대한 후보 단일화 요구가 성사되지 않은 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참여정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동아투위 위원들이 언론에서 직책을 맡게 됩니다. 본인들이 이 자리를 맡게 된 것은 본인들이 나선 것이 아니라 후배들이 나서서 적극적인 추천하고 압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이분들에게 자리 제의가 많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동아투위 사건이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일이므로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아투위가 협조를 해 주면 복직, 취직 등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했습니다. 동아투위는 이를 거절하고 수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 두 자리를 지키면서 두 분은 좌우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차마 이 글에 옮기기 힘들 정도로 민망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두 분이 임기 중간에 자리를 내 놓겠다고 한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금 이 분들에게 마지막 시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시련은 언어폭력과 모욕을 동반한 인격 파괴와 검찰 소환, 경찰의 강제 연행 등 인신에 대한 협박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며칠 전에(7월 30일) 동아투위 홈페이지에는 ‘고인 추모방’이 생겼습니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 추모방을 만들고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약력을 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돌아가신 분은 12분입니다. 병석에 눕는 분들도 꽤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식을 알 수 없는 분들, 외국으로 가신 분들 등등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분들이 모두 113인이십니다.


지금 동아투위 막내 성유보, 정연주 두 분이 겪고 있는 시련도 그나마 동아투위의 마지막 시련이 될 것입니다. 늙고 병들고 지쳐서 그분들에게 더 이상 싸울 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 분들을 평생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 분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두 분 성유보 위원장은 다시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계시고 정연주 사장은 다시 해외 망명을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떠나실 것입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떠나신다고 칩시다. 그 분들의 살을 뜯어 언론자유를 누린 우리는 무엇인가요? 우리 어린 딸들이 쓰는 표현을 잠시 차용해 보겠습니다. 두 분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동아투위 선배님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바쳤는데 우리들은 당신들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PS 1: 이명박 정부에 호소합니다. 두 분에 대한 인격 파괴를 중단해 주십시오. 그 분들은 당신들이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평생 올곧게 살아온 언론인으로서의 명예와 인격을 훼손하는 일을 중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또 나라를 위해 정말 KBS가 필요하다면 정연주 사장에게 진심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진심이 느껴진다면 그 분은 두말없이 그 자리를 내 주실 것입니다.       


PS 2: 동아투위는 매달 한 번씩 만납니다. 만나는 날짜는 33년 전 자신들이 해직된 날짜인 17일입니다. 장소는 동아일보 부근에 있는 부민옥(폭탄 의거가 있었던 부민관에서 딴 이름)이란 오래된 음식점입니다. 국밥 한 그릇씩 그리고 소주 몇 병으로 외로움을 함께 하십니다. 요즈음은 모이는 숫자도 줄어들고 머무르는 시간도 짧아지고 대화의 내용도 언론 탄압에 대한 성토보다는 누가 어디가 아픈가에 대한 얘기들을 더 많이 나누십니다. 이 분들을 보고 있으면 새로 생기지는 않고 조금씩 사라지기만 하는 존재-예를 들어 이빨 같은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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